야곱의 열두 아들 축복.
1. 49장은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자신의 열두 아들을 향해 축복하면서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언급한 것을 볼 때, 이스라엘 역사를 궁극적인 시각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언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이 운명론적으로 조상의 어떤 행위가 후손에게 저주로 흘러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야곱은 여기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미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내다볼 뿐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2. 열두 아들은 순서대로 언급되는 것은 아니고, 레아의 여섯 아들이 먼저 나오고, 라헬의 하녀(빌하)의 아들(단), 레아의 하녀(실바)의 두 아들(갓, 아셀), 라헬의 하녀가 낳은 다른 아들 납달리, 마지막으로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 나옵니다. 여기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그리고 요셉에 대한 예언은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나머지는 매우 단순합니다.
3. 르우벤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의 상속(장자의 몫)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힘으로써 장자의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창 35:22).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의 잔인한 복수극으로 인하여 마찬가지로 장자의 권리를 넘겨주게 됩니다(창 34).
4. 지도자의 자리는 유다가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그의 이름은 레아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뜻으로 지었지만, 야곱은 여기서 그의 이름이 형제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확장하고 있습니다(8). 그리고 유다의 모습은 강한 사자와 같은 모습입니다(9). 홀은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고 유다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며 그것은 실로(메시아를 가리킬 것이다)가 오시기까지 그럴 것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종말론적인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장차 메시아의 시대는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치는 여유로움이 있을 것입니다(11~12).
5. 스불론은 해상 무역을 통해서 부자가 될 것이라고 야곱은 예언합니다. 잇사갈은 풍요로움과 사치를 좋아해서 자신의 자유를 삶에 필요한 물질적인 것과 기꺼이 바꿀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래서 이 부족은 전쟁 포로 같이 강제 노역에 붙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잇사갈이 자기의 능력을 자기를 위해서 쓰지 않고 가나안 족속을 위해 일하고 음식과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6. 단은 비록 제일 작은 지파가 되겠지만,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정의를 베풀 줄 아는 지파가 될 것입니다. 18절은 단 지파에 대한 예언에 속할 수도 있지만, 야곱이 자손 지파들에 대한 예언을 하다가 하나님께 감동되어서 나온 구원에 대한 외침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 지파에 대한 예언이라면 그들이 거두게 될 큰 승리를 의미할 것입니다. 갓은 약탈자들로부터 습격을 받지만 용감하게 싸워 물리칠 것입니다. 국경을 둘러싼 전쟁이 갓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습니다.
7. 아셀은 비옥하고 많은 것을 생산하여 왕에게 기쁨이 되는 진상품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납달리는 자유로운 산악 백성이 될 텐데,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사자가 되리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놓인 암사슴’은 특별히 전쟁터에서 신속함과 민첩함을 의미합니다(21).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는 것은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8. 설명이 긴 요셉보다 베냐민을 먼저 다룬다면, 베냐민은 큰 성공을 거두어 자기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가 사자 새끼에 비유되었다면, 베냐민은 이리(늑대)에 비유되는데(27), 이것은 사자만큼이나 탐욕스러운 동물이지만, 보통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동물을 죽입니다. 베냐민은 이렇게 풍족하게 땅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9.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독특하고 깁니다. 요셉은 샘(우물) 곁에 심긴 포도나무에 비유되는데 그 가지가 번성해서 담을 넘어갈 만큼 되었습니다. 그의 번성은 대적들로부터의 공격의 빌미가 될 것이지만(23), 요셉은 전능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자요,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견딜 것입니다(24).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온다’라는 표현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반석이고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이 나온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
10. 25~26절에서는 축복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땅보다 더 좋을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미움과 적대를 이겨냈듯이 그의 후손들도 그럴 것입니다. 사실상 야곱은 앞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적함으로써 요셉에게 두 몫을 주게 되는데 이것은 비록 유다가 지도자의 명분을 얻었으나 요셉이 실질적으로 르우벤이 빼앗긴 장자의 상속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11.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자손은 결국 아브라함의 언약을 추진해야 할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이 복을 땅의 모든 족속에게로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예언을 마친 야곱은 이제 다시 자기의 자식들에게 자신을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 또 자신의 아내인 레아가 묻힌 약속의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명하고 임종을 맞습니다. 49장도 역시 야곱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아들들과 그 후손들을 향한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하실 일과 언약을 성취하실 신실함에 대한 그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완숙함에 이르게 되어 마지막을 맞게 되는 성도는 참으로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임종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
야곱이 열 두 아들들을 불러 모아 유언을 말하고 침상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유언에 대해 말하는데요. 이 유언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언’이고(1절),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그 분량대로 한 ‘축복’이기도 합니다(28절).
야곱의 유언의 이 두 가지 측면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이 유언의 시작부터 우리는 당황스러운 내용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자 르우벤, 2-3번째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하는 유언은 도저히 축복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주와 책망에 가깝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먼저 이 유언이 ‘예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언이란 기본적으로 설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권면하고 책망합니다. 야곱은 지금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있을 일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죄를 책망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본문과 유사한 경우가 창세기 9장에서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하고 셈과 야벳을 축복한 경우입니다. 두 경우에서 노아와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의 선지자로서 공적인 예언(설교)을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 유언이 ‘축복’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각자의 ‘분량’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각 사람에게 합당한 복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이란 무조건 좋은 것을 많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미성숙한 자에게 많은 돈을 준다면 그 사람에게 복이 될까요? 그 많은 돈이 그 사람을 망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절제력이 약한 사람에게 큰 권력을 주면 복이 될까요? 오히려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이런 것들이 고려된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의 유언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유언이 각자에게는 축복과 저주가 되겠지만, 이스라엘 전체에게 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주였던 예언이 복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학살한 일로 인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7절). 그런데 레위지파는 나중에 제사장과 성막에서 섬기는 일로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죄가 그대로 후손들에게 이어졌다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야곱의 유언의 전체 분량 중 약 40%의 비율을 차지하는 내용이 유다와 요셉에 관한 유언입니다. 두 사람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지요. 유다는 나라를 다스릴 왕권을 약속받고, 요셉은 풍성한 번영과 형제들 중 뛰어난 자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후의 역사를 아는 우리에게는 유다를 더 주목하게 됩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나오고,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유언을 마친 후 자시이 열조에게 돌아가니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우리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침상에서 누운채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복되게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전망하며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이루게 될 열 두 아의 미래를 예언하고 그들의 분량에 맞게 축복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은 이제 이스라엘 전체로 이어지게 됩니다.
야곱의 예언과 축복은 오늘 우리에게는 성취된 축복으로 다가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유다와 요셉에게 약속된 복을 온 이스라엘이 함께 받아 누렸다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언약의 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져 누립니다. 이제 우리의 소망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계 5:5),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주실 것에 있습니다.
♡♡♡♡♡♡♡♡♡♡♡♡♡♡♡♡
1절에 야곱은 아들들을 다 불러 모으고 그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이르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행한 축복과 저주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면, 축복과 저주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대로 보응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장래 운명에 대해 알기를 소원하고 거기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듯이, 사람의 운명은 우연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주술적인 방법에 의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역사 속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행한 대로 그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장래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바로 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오늘의 행위가 미래를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장래에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만일 그러하시다면 여러분의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축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여러분의 앞길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
3,4절에 야곱은 장자인 르우벤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르우벤이 장자라는 특권이 있었으나 서모인 빌하와 동침한 연고로(35:22) 그 권리를 빼앗기고 탁월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족장 시대에, 특히 언약 가문에 있어서 장자의 권리는 생명보다도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권리를 얻기 위하여 형과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했고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어리석게도 한 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악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가는지를 교훈받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낙원과 영원한 생명을 빼앗겼듯 이 죄악은 우리에게서 모든 축복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죄의 해악성을 바로 알고 죄에 대하여 언제나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한 순간의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감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릴 모든 축복들을 상실한다면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야곱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르우벤 지파에서는 특출한 사사나 선지자나 왕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적으로 항상 깨어 경성함으로 죄를 멀리하고 경계하여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잘 지켜 누리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
시므온과 레위는 사고방식과 행동도 비슷해서 둘은 아주 가까운 형제였습니다.
이들은 세겜 주민들에게 디나를 강간한 일에 대하여 과도하게 분별없이 복수하여 세겜 주민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처럼 무서운 범죄를 한 그들에 대한 벌로써 이들은 이스라엘 중에서 나누어지고 흩어져야 했으며 독립적으로 지파를 형성할 만큼 번성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 후에 시므온 지파는 모든 지파 가운데서 가장 약한 지파로 나타납니다(민 26:14).
또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축복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시므온 지파는 인구가 계속 감소되어 유다 지파로 흡수되고 말았습니다(대상 4:27).
.
레위 지파도 역시 구별된 기업을 얻지 못하고 다만 거주할 몇 개의 성읍 만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소유물 가운데 흩어져 살았습니다(수 21:1-40).
그러나 레위 지파는 후에 제사장 직분에 선택 됩니다.
.
8절에서 12절까지는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그 어떤 아들들보다도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이처럼 큰 축복을 받았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이와 같이 크고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은 가족에 대한 그의 자기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습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태도로 가족들을 위기에서 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우선 그는 요셉을 죽이려는 형제들을 설득하여 요셉을 살림으로써 훗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37:26).
또한 형제들의 제 2차 애굽 방문 때에는 기근으로 가족들이 굶어 죽게 되었는데도 야곱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자신의 생명을 베냐민의 담보로 내어놓고 야곱의 허락을 얻어냄으로써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했습니다.
또한 요셉의 은잔 시험으로 베냐민이 평생 애굽의 노예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는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애굽의 종이 되기를 자청하면서까지 베냐민을 놓아줄 것을 간곡히 요청함으로 요셉과 형제간의 화해를 이루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44:33).
바로 이런 태도가 유다를 다른 모든 형제들보다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풍성한 축복을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보다는 타인을, 개인의 유익보다는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여 항상 자기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시간이 부족하므로 나머지 아들까지 다 언급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 삶이 선했는지 악했는지에 따라 공평하게 축복과 저주의 예언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교훈삼아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1, 2절)
야곱은 먼저 아들들을 모두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축복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의 생애를 관통해서 하나의 기술이나 노하우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축복의 말씀들 중에는 상당히 민망한 내용이 있습니다. 즉 야곱이 어떤 이들에게 하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말이고, 이런 내용이라면 사람들이 없는데서 조용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모든 아들들이 모인 곳에서 이런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는 이유는, 사실은 다른 아들들에게도 이런 성향이 어느 정도는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책망의 말씀을 듣는 아들이나 그 후손만이 아니라 다른 아들들도 모두 이런 점만 조심하면 앞으로 축복을 잃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이나 저주를 받은 아들이나 지파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인정하고 잘 받아들일 때 저주가 축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루우벤의 물 끓 듯한 성격
야곱은 가장 먼저 큰아들 르우벤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의 축복은 사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웠고, 아주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3, 4절)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장자권을 상실했으며, 동생들에게도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원래 아주 총기 있고 유능한 아들이었습니다. 출발은 아주 훌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축복을 날려 버렸습니다.
야곱은 르우벤에 대하여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어렸을 때 야곱의 맏아들답게 야곱이 한창 고생을 할 때 힘이 되었고, 그의 기력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이 맏아들 르우벤에 대해서 얼마나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르우벤은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했습니다. 즉 르우벤은 머리가 아주 뛰어났고 재능도 넘쳐났던 것입니다. 원래 야곱 자신이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이었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르우벤도 야곱의 그런 기질을 물려받아서 머리가 아주 뛰어났고, 어떤 일을 해내는 기술이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의 이런 좋은 머리나 기술은 신앙적인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즉 르우벤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믿음이 좋다거나 혹은 성령이 충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르우벤은 단지 인간적으로 머리가 좋고 기술이 훌륭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뛰어나서 성적이 우수하고 기술이나 재능도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에게는 이런 재능이나 기질을 제어할 수 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르우벤을 축복하는 대신에 저주를 했습니다.
4절에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물의 끓음’은 르우벤의 기질을 말합니다. 르우벤의 이런 재능이 신앙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신앙이 없이 머리나 재능만 뛰어나니까 그 성질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냄비에 물을 끓일 때 불이 조금만 세도 물이 넘쳐 버립니다. 그래서 르우벤 같은 사람은 한 번 정욕이 넘쳐흐르면 자기 자신도 통제가 안 되고 다른 사람도 그를 통제할 수 없으므로 결국은 냄비의 물이 다 넘쳐서 물은 물대로 버리고 불은 불대로 꺼뜨리는 것입니다.
르우벤의 약점은 자기 기질이나 성격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이 좋은 재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다 쏟아 버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르우벤이 이스라엘의 장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즉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가서 아버지의 여자와 성적인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고, 두 명의 여종 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첩이었던 여지들은 나이도 어리고 자존감도 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좀 큰 편이었습니다. 르우벤은 머리는 좋고 조숙한데 집안의 분위기가 신앙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어렸지만 이성 문제에 빨리 눈이 떴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인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리더십이 있고 장래가 유망했던 르우벤온 딱 한 번 도덕적으로 죄를 짓고 난 후에는 그 모든 아름다움과 능력과 존경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야곱이 르우벤에게 이런 저주스러운 축복을 하는 이유는, 르우벤의 후손에게는 모두 이런 강한 기질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제부터 르우벤 지파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르우벤이 스스로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 재능을 믿고 자기 머리를 믿고 잘난 체하려고 하면 이번에는 더 무서운 죄에 빠져서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 하나님의 백성이나 세상에서 유능한 사람들 중에서 이런 성적인 죄에 빠지는 사람들은 아주 능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평범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위험한 것은 아예 가까이하지 않고, 또 위험한 짓을 할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능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죄의 경계선의 그 아슬아슬한 맛을 즐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위험한 곳 가까이에 가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조금씩 죄에 끌려 들어가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어느 날 죄에 조금 깊이 들어갔다가 그만 미끼에 걸려서 꼼짝 못하고 죄를 짓고 마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런 무서운 말씀으로 르우벤을 축복하는 이유는 르우벤이나 그의 자손들이 얼마든지 다시 죄를 지을 기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머리나 피 속에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기 싫어하는 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이나 그의 자손들이 이 부분을 아주 조심하면서 앞으로 지극히 평범하게 살지 않으면 이제는 구원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왜 영원한 지옥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까? 사탄은 다른 천사들에 비하여 너무나도 뛰어났는데 교만과 끼를 주체하지 못해서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다가 결국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될 수 있는 지는 자기 안에 있는 넘치는 끼나 열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이고 평범하게 된 사람입니다. 르우벤 같이 능력이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이 한번 잘못되면 자기도 망하지만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대개 목회하는 분들 중에는 세상의 평범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목회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 중에는 자신의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분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 뛰어난 머리로 교회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또 예배나 다른 모임들도 정말 멋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래도 만족이 되지 않으니까 자신의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자기도 망하고 다른 사람들도 큰 시험에 빠뜨리는 것 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말도 잘하고 남을 시험에 빠뜨리기도 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결박해서 스스로도 죄를 짓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죄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르우벤과 그의 후손에게 앞으로 절대로 잘난 체하지 말고 죽었다고 생각하고 평범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시므온과 레위의 혈기
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르우벤 다음으로 야곱의 장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은 야곱의 장자권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기질이 너무 공격적이고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특이하게 이스라엘의 다른 아들들에 대해서는 모두 따로 복을 주었는데 시므온과 레위는 함께 복을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시므온과 레위가 서로 죽이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는 좋은 일에 그렇게 잘 맞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하는데 있어서 뜻이 잘 맞고 협력이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축복할 때 따로 축복하지 않고 한꺼번에 저주 같은 축복을 내립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두 죄수가 너무나도 죄짓는 데 뜻이 잘 맞아서 잡혀갈 때에도 함께 수갑을 차고 사이좋게 잡혀가는 것과 같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5절)
여기서 시므온과 레위가 ‘형제’라는 것은,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데 남을 해치거나 못된 짓을 할 때에는 짝짜꿍이 아주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라고 했습니다. 즉 시므온과 레위는 그 성격이 너무 공격적이고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잔해하는 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돼야지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레위는 혼자서는 얌전한 것 같은데 둘이 붙어 있기만 하면 언제나 다른 사람을 말로 공격하고, 또 행동으로도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마치 끓어오르는 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노를 전혀 여과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다 쏟아 부어 버리면 상대방은 끓는 물을 뒤집어쓰고 중화상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사람의 말은 ‘지옥에서 나오는 불’ 이라고 했습니다(약 3:6).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분노를 가라앉혀서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레위는 이런 분노의 불을 부채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므온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 레위는 이미 칼을 들고 문을 나서고 있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즉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이 세겜의 추장 아들에게 강간당했을 때 세겜 사람 전체를 살육해 버렸습니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6절)
야곱은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을 대표해서 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누군가를 해치려고 하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반역하려고 하는 모임이나 대화에는 아예 상관하지 말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분위기 자체가 공격적이고 선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무엇인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 더 똑똑한 것 같고 더 정의로운 것 같아서 그런 모임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그런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성향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 모임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남을 해치고 교회를 욕하기 위해 모여서 먹고 마시고 떠드는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죄한 자를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잘 모르면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비판할 때에도 아예 대꾸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쁜 쪽으로 대화가 발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보면 시므온과 레위가 혈기대로 ‘소의 힘줄을 끊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원래 전쟁할 때 상대방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말의 힘줄을 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말의 뒷다리 힘줄을 끊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말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의 힘줄은 끊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소는 전력과는 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소의 힘줄까지 끊는 것은 불필요하게 철저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 경건하기 위해서 죄가 아닌 것까지 전부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분노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나 결점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완벽한 사람들은 불필요 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대개 아이들이 자랄 때 아버지가 지나치게 권위적이면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 대하여 너무 권위적인 이유는 자식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결코 그 부모의 요구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모든 권위에 대하여 반항하게 되고, 결국 이런 자녀들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윗사람에게 반항하고 대어드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딸들도 남편에게 너무 완전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자녀들이 자라면서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평생에 걸쳐서 큰 가시가 되는 것 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다투는 두 엄마 사이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시므온과 레위는 자라면서 엄마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시므온과 레위는 이 분노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니까 지나치게 거룩하고 완벽하게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의 힘줄을 자르라고 했는데 이들은 소의 힘줄까지 다 잘라 버렸던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나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이 만나면 금방 하나가 됩니다. 그들은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치면 사고를 칠 기능성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분노가 분노를 불러일으켜서 분별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분노가 결코 하나님의 거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기질입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7절)
겉으로 보기에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저주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시므온과 레위는 서로 결탁하지 않고 흩어지는 것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의기투합하는 사람들끼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떼어놓아야 서로가 살 수 있습니다. 분노가 있는 사람들끼리 한자리에 모아 두면 그 분노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다 다치게 됩니다. 이럴 때는 떼어 놓아야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만일 마음속에 분노가 있고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단짝이 된다면 그들은 좋지 않은 일을 위해서 한 통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뭉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므온 지파를 나누어지게 하셨습니다. 즉 시므온 지파는 작아짐으로써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할 때 시므온 지파는 다른 지파와 비슷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는 이상하게 아주 작아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속해서 항상 유다를 따라다니면서 서로 협력해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시므온 지파는 작아야 남을 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작아야 남도 해치지 않고 자기 자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사람이 커지면 자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힘이 없고 골골한 것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레위 같고 시므온 같은 목회자들이 자꾸 교회를 크게 하려고 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주위에 있는 교회들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자기 교회를 엄청나게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작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작은 회사로 만족하고, 어떤 분은 작은 가족으로 만족하고, 어떤 분은 작은 키로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작은 것이 살아남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너무 외형만 키우다가 부실해져서 결국 경제 위기 때 많이 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므온 같은 생각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은 정말로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단독으로 모이지 못하고 이스라엘 중에 흩어져서 제사장으로 봉사했습니다. 레위 지파는 자기 지파끼리 모이지 못했고, 자기 자신의 기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레위를 흩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기 위하여 흩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의 살길이요, 이것이 레위의 축복이었습니다.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교회 안에서 밖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안에 고여 있으면 교회는 썩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가 스스로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들을 흩어 버리십니다. 대표적인 것이 초대 교회 때 예루살렘에 있었던 핍박입니다. 갑자기 예루살렘 당국이 교회를 핍박하는 바람에 기독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고 흩어지면서 모든 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3. 유다의 축복
놀랍게도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허락한 자는 유다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중에서 장자의 복과 가장 거리가 있는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아예 이스라엘의 축복을 포기하고 가나안 여자와 결혼했고, 자식들도 가나안 여자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유다는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고 했고, 타락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신을 차리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집이 가장 어려웠을 때 자기 자신을 던져서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가 이스라엘의 장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착실하고 모범적인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때때로 옆길로 가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돌아설 때에는 확실하게 돌아서는 사람을 더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서 좀 방황하기도 하고 좀 삐딱하게 믿었던 분들은 모두 장자의 복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대로는 안 되고 돌아설 때 확실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8, 9절)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면서 두 가지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자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자는 힘을 나타내고, 포도는 기쁨과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유다 지파의 문양을 만든다면 그 이미지는 사자와 포도일 것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유다를 축복하는데 무려 세 종류의 사자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새끼 사자요, 두 번째는 수사자요, 세 번째는 암사자입니다. 여기서 새끼 사자는 지금은 비록 경험이 부족하고 어리지만 앞으로는 어른 사자가 되어서 정글을 지배할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수사자는 지금 한창 절정에 도달해 있어서 정글이나 초원에서 이 사자를 이길 짐승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암사자는 살림꾼입니다. 암사자는 직접 사냥에 나가서 많은 짐승을 사냥해서 가족을 먹여 살릴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유다를 특히 사자로 표현한 것은 다른 짐승들을 정복하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자는 사냥한 먹잇감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 근성과 힘이 있습니다. 짐승들 중에는 기껏 사냥을 하더라도 더 힘이 센 짐승이 나타나면 먹이를 빼앗겨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짐승들은 수고만 실컷 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자는 먹이를 한번 움켜쥐면 절대로 빼앗기지 않습니다. 9절 말씀이 바로 그런 메시지입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9절)
야곱이 유다 지파에게 준 축복은 영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즉 유다에게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돌아다니는 많은 짐승을 사로잡는 은혜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겉으로 보기에는 시시해 보일지 몰라도 사자처럼 사람을 붙잡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는 겉으로 보기에는 약할지라도 사자 같은 정복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은혜로 붙잡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복음의 정복력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번 움켜쥐면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사자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하나님의 강력한 손에 붙들린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한번 움켜쥐면 그 뒤에는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난 후에도 세상으로 가고 싶어서 예수님께 자기를 좀 놓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를 놓아서 세상으로 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내 욕심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세련되게 살려고 해도 일단 예수님의 손에 붙들리면 믿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자가 되려면 자신이 사자의 손에 붙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11, 12절)
야곱이 유다에게 준 두 번째 이미지는 포도입니다. 이것은 사자의 손에 걸려든 자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서 꼼짝 못하고 믿게 되었을 때 우리는 사자의 이빨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엄청난 능력과 축복을 의미합니다.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왜 하필이면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겠습니까? 혹시라도 나귀가 설치면 포도나무가 상하든지, 아니면 포도가 떨어질 텐데 왜 나귀를 포도나무에 맬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과거에는 다 나귀같이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였는데 이제는 온순하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어디에 매놓아도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을 수 있는 일꾼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 실 나귀를 맬 수 있는 나무가 포도나무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포도나무 외에는 다른 나무가 없고,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는 귀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우리의 삶 전체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눈이 포도주로 인하여 붉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포도주가 너무 많아서 옷을 포도주에 빨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언제나 눈이 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오늘부터 포도주에 취해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포도주는 성령의 포도주인 것입니다. 즉 성령에 취하는 것이지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옷에서도 술 냄새가 나서는 안 되고 성령의 향기가 나야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포도가 생활의 기본입니다. 포도주는 생활을 기쁘게 하고 위로하며 새 힘을 주는 음료입니다. 포도주는 일종의 기쁨의 상징입니다. 이런 포도가 무한정으로 있다는 것은 그들이 무한정으로 기뻐하며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 사자의 발톱에 걸려든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잡을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소망이 다 사라지고 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이 붙잡은 자를 풍성하게 만들기 시작하십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고 부요하게 하십니다. 야곱은 이 놀라운 축복이 유다 지파를 통하여 약속한 여자의 후손이 올 때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
여기서 규(圭)와 통치자의 지팡이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나라가 될 것이며, 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는 바로 유다 지파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다는 한때 방황했지만 확실하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려운 것은 ‘실로’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로’가 무슨 뜻입니까? 이것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대답은 어느 누구도 실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실로’를 성막이 있던 장소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실로에 성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로에 성막을 칠 때가 가나안 정복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에 성막을 칠 때까지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을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문법적으로 보아서 ‘그것이 속한 분’, 즉 ‘그 규를 가지기에 합당하신 분’ 혹은 ‘앞으로 오실 분’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라고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앞으로 오실 어떤 분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내 뒤에 오시는 분’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과 비슷하게 ‘앞으로 오실 분’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세 번째 해석은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평화의 사람’ 혹은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번역은 그냥 ‘실로’라고 했는데, 이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두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를 통하여 오신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에서 왕의 자격을 가지고 오셔서 그 백성들을 강한 힘으로 붙잡으시며 그들에게 풍성한 포도주와 우유를 주실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야곱의 축복의 절정입니다.
야곱이 유다 지파에 약속하신 구원자가 온다고 축복한 것은 그들에 대한 축복이기도 하고, 또한 부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약속하신 그분이 오시기까지 결혼의 순결을 지키고 그분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다 지파는 이 실로에 대한 소망 때문에 죄에 덜 빠지게 됩니다.
유다 지파가 그토록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아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지파에게는 미래를 기다리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반드시 실로가 와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실로가 오실 때까지 살아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13절)
스불론은 그 지역에 해변이 있는데 그곳은 배를 매는 해변이고 시돈까지 연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중에서 만일 땅을 차지하게 된다면 중심부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게 되는 지파가 스불론 지파일 것입니다. 따라서 스불론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변두리에 위치하고 중심부에서 가장 먼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불론은 자신들의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바다의 항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스불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이며, 중심부에서는 가장 멀고, 오히려 이방에 가까운 지역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실제로 시돈과 연결된 바다 쪽을 할당받은 지파는 스불론이 아니고 아셀 지파 였습니다. 그 대신 스불론은 갈릴리 지역을 할당받았는데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이었고, 어두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어두운 지역을 사랑하셔서 주로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 15-16절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혹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지들 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할 수만 있으면 중심부로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성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로 소외된 지들을 먼저 찾아가셔서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마도 스불론 지파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지치고 난파당한 자들을 건져서 쉬게 하고 또 한 번 하나님의 나리를 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우직하면서도 겸손히 사명을 다하는 지파가 잇사갈 지파입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14, 15절)
우리가 잇사갈로부터 느끼는 이미지는 약간 미련하면서도 우직한 느낌입니다. 잇사갈은 양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나귀라고 했습니다. 즉 양들은 모두 자그마한데 그 양 사이에 덩치가 큰 나귀가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보통 나귀라고 하면 자기 우리에 있어야 하는데 양의 우리에 들어가 있는 것도 이상하고, 또 나귀는 어떤 경우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뻣뻣하게 서 있어야 하는데 무릎을 꿇고 있는 것도 이상합니다.
즉 이 나귀는 나귀 중에서도 좀 모자라는 나귀이고, 많은 연단을 받아서 양처럼 순하게 변한 나귀인 것입니다. 즉 이 나귀는 겉으로만 나귀이지 양처럼 변해서 다른 양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원래 나귀는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여서 양과는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압제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잇사갈은 하나님의 연단을 받아서 약한 자들과도 기꺼이 어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압제받는 것도 잘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에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바늘을 꽂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했을 것입니다. 또 나보다 못한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받거나 통제받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받을수록 겸손해져서 기꺼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 남들이 나를 지시하고 부려 먹어도 화를 내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이런 무던하면서도 성질아 좋은 잇사갈 지파 같은 사람들이 있어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이 아무리 화를 내고 성질을 부려도 눈만 껌뻑거리다가 다 잊어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정욕과 야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 때문에 바보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굉장히 지혜로운 자들이고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 처음에는 대단히 훌륭하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주님을 배신하는 비참한 지파도 있습니다. 바로 단 지파입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16, 17절)
여기에 보면 단 지파는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면 지파지 ‘지파 같이’라고 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단이 겉으로는 이스라엘같이 보이지만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단은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 같지만 실제로는 신앙을 배반한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단 지파의 비극입니다.
단 지파는 처음에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었습니다. 단 지파는 그냥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그 백성을 심판하는 위 치에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그 백성을 심판한다’는 것은 단 지파가 너무 똑똑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른 지파의 일을 일일이 간섭해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지파는 너무나도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자기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가 많은데 단 지파는 너무 총명하고 능력이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능히 지도하고 훈계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단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타락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단은 끝까지 믿음으로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앙의 길에는 인간의 머리로는 절대로 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이 타락하면 더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물어서 죽게 합니다. 그들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였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숲이나 풀숲에는 독사나 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큰길이나 첩경에는 독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길만 믿고 가다가 결국 독사에게 물리고 마는 것입니다.
첩경은 지름길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단 지파는 똑똑했고 모든 것이 속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단을 따라갔는데 거기에 독사가 있어서 사람들은 물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단 지파를 향해서 탄식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이것은 야곱이 장차 단 지파가 얼마나 무섭게 타락하며 그를 믿었던 자들을 영적으로 해롭게 할 것인지 미리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단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똑똑하기는 했지만 우직하게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 단 지파는 없어졌습니다. 결국 단 지파는 마치 신약의 가롯 유다처럼 영원히 멸망을 받는 자리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때는 열심히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타락해서 열심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보잘것없지만 나중에는 상당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지파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지파가 갓 지파입니다.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19절)
갓은 처음에는 힘이 없어서 다른 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게 됩니다. 어쩌면 갓은 같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도 힘이 없어서 무시당하거나 박해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갓은 나중에는 힘이 세어져서 도리어 그들을 추격하는 지파가 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처음보다는 나중에 훨씬 강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너무나도 미약하게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아주 강해지는 교회나 회사가 있습니다. 아마도 세계적인 안목으로 보면 우리나라 한국 교회는 갓 지파와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13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 지파는 식물을 공급하는 아셀 지파입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20절)
아셀 지파는 다른 어느 지파보다 농사에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셀 지파는 좋은 농산물을 많이 생산해서 왕의 진미를 공급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 때 부흥이 일어나니까 성도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도들 앞에 내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들이 더 가난하게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진 것으로 많은 성도들을 먹일 수 있었고, 또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셀 지파는 부자 지파이지만 부자다운 지파였던 것입니다. 요즘 외국에서는 부자들이 자기의 재산을 서로 다투듯이 내어 놓아서 어려운 자들을 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부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셀 지파에 더욱 기름진 것을 주셔서 왕의 진수를 공급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은사가 있으면 공동체는 더 힘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 안에서도 식당 봉사를 참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런데 조금도 인색하거나 아까워하지 않고 얼마나 풍성하게 음식을 공급하시는지 모든 사람이 힘을 내는 것입니다. 납달리 지파는 암사슴같이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내는 복을 받습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21절)
아마도 암사슴이 내는 소리 중에서 가장 듣기 좋고 아름다운 소리가 사랑하는 수컷을 찾는 소리일 것입니다. 납달리가 ‘암사슴’ 이라는 것은 그들이 사슴처럼 빠른 발로 뛰어다니면서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마음속에 열정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더 빨리 다니면서 소식을 전합니다. 납달리는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입만 벌리면 자기 자랑을 하거나 남을 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하거나 만난다는 것은 큰 재앙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어린 베냐민은 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피해를 주지만 성숙하게 되어서는 큰 도움을 주는 지파가 됩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27절)
‘베냐민을 물어뜯는 이리’라고 말한 것은, 처음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꾸러기라 는 뜻입니다. ‘물어뜯는 이리’는 결코 남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베냐민은 자기밖에 모르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보면 얄밉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는 수고하지 않으면서 놀러갈 때나 먹을 때는 빠짐없이 나타납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일단 실컷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때는 남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나 형제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베냐민은 저녁에는 자기가 움킨 것을 남에게 줍니다. 즉 베냐민은 신앙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능히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챙겨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거나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경쟁적으로 하거나 공격적으로 해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직 그들의 신앙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람들이 영적으로 철이 들게 되면 자기가 붙들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지 조금만 참으면 매우 훌륭한 일꾼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처음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중에 성령을 받은 후에는 목숨을 바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마가 같은 경우에는 선교 여행을 따라나섰다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선교 여행에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마가는 아주 충성된 사람이 되어서 베드로의 통역이 되었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 요셉이 받은 복의 근원
요셉은 야곱으로부터 가장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죽도록 그 말씀에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자손 천대까지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복을 받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머리가 좋고 돈을 잘 벌어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지켜주십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2절)
야곱은 요셉이 받을 축복의 특징을 샘 곁의 가지가 무성한 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가뭄이 심하기 때문에 웬만한 웅덩이는 가뭄에 다 말라 버립니다. 팔레스타인에는 물이 없는 강이 많습니다. 그런데 깊은 샘은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샘물가에서 자라는 나무는 계속 무성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축복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셉의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축복은 모두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비가 올 때는 온 세상이 물바다인 것 같지만 비가 그치고 가뭄이 시작되면 모두 말라 죽고 맙니다. 결국 살아남는 것은 샘 곁에 심긴 나무입니다. 요셉의 나무는 그 뿌리가 하나님께 닿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나무는 언제든지 무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면 가뭄 때 반드시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23, 24절)
여기서 ‘활을 쏘는 자’는 팔 힘이 아주 강한 자를 말합니다. 활을 쏘려면 팔 힘이 강해야 합니다. 요셉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세상에서 강한 자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는 세상 방법도 쓸 수 없고 하나님의 복도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바보가 되고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똑똑하기는 하지만 실제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요셉은 힘이 센 형들에게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 버렸고, 요셉은 애굽에서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 같은 강한 자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는 아무도 요셉을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복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도 오지 않아서 철저하게 무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고생을 하는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비결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 사람을 실력이 있게 하시는 데 그것도 아주 뛰어나게 하십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도록 실력이나 재능을 탁월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성공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게 되며, 결국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야곱의 전능자의 손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목자의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하게 되는 것은, 왜 이런 식으로 성장한 사람이나 사업들 이 쉽게 넘어지지 않고 오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는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처세의 비결을 배우는 동안에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을 배우고, 세상을 이기는 통찰력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교만하지 않고 죄에 빠지지 않는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공한 후에 넘어지는 것은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 연단을 받으면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정신을 차리고 항상 겸손합니다. 이렇게 이 사람들은 무리하지 않게 되고 모든 일을 조심해서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걸려드는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젊어서 고생을 해서라도 하나님의 복을 얻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복들은 모두 한철 장사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그대로 살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적인 능력이 되는지를 배우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능력을 공급받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요셉의 삶 속에서 참으로 귀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가 실권을 잡고 난 후에 복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연단하시는 과정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요셉은 자기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고 하나님은 더 큰 복을 내려 주십니다.
3.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요셉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은 일시적인 복이 아니라 영원한 복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하나님 자신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25절)
야곱은 요셉의 복이 ‘네 아버지의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나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야곱을 연단하셔서 보석 같은 신앙이 되게 하신 후에 한없는 복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괜히 힘센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쫓겨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무것도 없는 맨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후 야곱의 생애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누군가가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많이 속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몫을 다 찾아 주셨고, 몇 배나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쳤을 때 하나님은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두 부대나 자기를 위하여 행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곱에게는 항상 그와 함께하시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너무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고 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생이 참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가장 재수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어려움에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연단하셔서 보석 같은 신앙이 되게 하신 후에 복이란 복은 다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신기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거나 이기적이라고 해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를 만드시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일단 만들어지고 난 후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십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을 줍니다. 하늘의 복은 비가 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깊은 샘의 복은 샘이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장 복 받은 사람이 샘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샘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샘이 있어야 가축들에게 물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상 우리의 영혼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면 이 세상에서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영혼은 만족이 없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적으로 축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더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끝까지 지속됩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26절)
야곱은 자기가 받은 복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받은 복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조상들보다 물질적으로도 더 복을 받았고, 특히 열두 아들의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런 믿음의 복을 요셉에게 물려주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의 ‘영원한 산’이 다른 성경에는 ‘오래된 산’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마 ‘큰 산’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큰 산은 봉우리도 높지만 골짜기도 깊어서 그 안에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영원한 산이 한이 없다고 했는데 다른 번역에는 ‘수많은 봉우리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봉우리가 있는 아주 오래된 큰 산은 많은 식물이나 새나 야생 동물이 살 수 있습니다. 큰 산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도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합니다. 큰 산에는 옹달샘이 있고, 시내도 흐르며, 폭포도 있습니다. 그리고 큰 산에는 많은 나무가 자라며, 식물들도 풍성해서 수많은 새나 야생 동물이 살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런 넉넉함과 풍성함이 요셉과 그의 후손에게 있을 것이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붙들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성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내 머리나 내 재주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고갈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축복과 성공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그것은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교만한 자들로부터 받는 구박과 고통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년 동안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유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샘물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만 하면 우리와 우리 자손들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 지파의 후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교만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분열시켰고, 결국 우상을 따라가다가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더 기도해야 하고, 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제일 고귀한 축복을 받은 아들은 네 번째 아들 유다입니다. 유다에 대한 축복을 살펴보면, 8절에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또 10절에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실로는 ‘화평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유다 지파에서 규가 떠나지 아니할 것이고, 통치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유다지파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가장 고귀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축복 가운데 유다보다도 가장 많은 분량으로 가장 축복을 받은 사람은 단연코 요셉일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은 요셉에 관해서만 다섯 절(22-26절)을 할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 관한 축복의 말씀에 보면 복, 혹은 축복이라 하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예언적인 축복은 열두 아들들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 가정의 부모의 축복도 또한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 된 우리가 자녀를 축복할 때 어떤 원리를 가지고 축복해야 할까요? 이것은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을 통해서 네 가지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녀들이 인생을 보는 눈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 조감도를 먼저 만드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볼 때에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다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근시안적으로 보면 고난 같지만 멀리 보면 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축복하려면 아버지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이 되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흠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온전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생애 중에 두드러진 것은 위기 중에 언제나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한다면 자녀 교육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야 자녀들이 부모를 따르며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의 축복이 자녀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셋째, 자녀의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교육에는 당근도 필요하지만 더러는 채찍도 필요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적할 것은 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는 것이 은혜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장단점을 잘 알아서 그에 맞는 축복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 영적인 축복을 우선해야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축복하되 현세의 일시적인 축복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축복을 더 앞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산의 한없음 같다’(the eternity of the ancient mountains)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큰 산들의 영원성의 축복이 너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축복, 하나님의 언약적인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기를 때에 현세의 축복만을 강조하지 말고 신앙의 사람 되기를 강조해야 합니다.
♡♡♡♡♡♡♡♡♡♡♡♡♡♡♡♡♡
애굽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낸 야곱은 생을 마칠 즈음에 열두 명의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유언합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유언이자 그의 아들들에게 내린 축복의 말입니다. 이 축복은 야곱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희망사항이 아니었으며, 앞으로 아들들의 후손을 통해 형성될 지파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태어난 순서에 따라 축복하지 않고, 그들의 어머니의 순서에 따라 축복합니다. 그는 제일 먼저 레아를 통해 얻은 아들들을, 다음에 두 첩인 빌하와 실바를 통해 얻은 아들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헬을 통해 얻은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특이한 것은 첩 빌하를 통해 얻은 두 아들 단과 납달리를 나누어 실바를 통해 얻은 아들인 갓과 아셀을 감싸게 하여 축복한다는 점입니다.
레아의 아들이 받는 복(1-15)
1절에서 15절까지는 레아의 아들들에게 한 축복입니다.
(1-2)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방식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아들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던 방식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삭은 사적인 장소에서 비밀리에 에서를 축복하려 했었고,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리브가와 야곱이 공모하여 그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반면 야곱은 모든 아들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복을 빌어줍니다. 평상시에 요셉과 베냐민을 편애하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하는 축복은 그들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으라고 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서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포는 아들들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야곱이 빌어 주는 복은 그의 아들들이 살아 있는 동안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야곱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지금부터 선포하는 내용이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임을 전제합니다. 만일 자신이 마음대로 선포할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좋은 것들로 그의 유언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언은 앞으로 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였기 때문에 그는 받은 대로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말씀은 당장 우리 눈앞에서 성취되지 않고, 그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말씀은 우리 눈에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합니다.
(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야곱은 가장 먼저 레아의 첫째 아들이자 자신의 장자인 르우벤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야곱의 장자로서 르우벤은 아버지의 능력과 기력의 시작이었습니다. 능력은 일반적인 힘을, 기력은 정력을 뜻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이 ‘시작’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첫 열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첫 열매로써 아버지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르우벤은 형제 중에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습니다. 장자로서 그는 형제들 사이에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었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풍당당함을 지녔습니다.
이처럼 르우벤이 가진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로 인해 이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그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르우벤이 ‘물의 끓음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거친 파도’라고 번역합니다. 르우벤의 무모함은 거친 파도와 같아서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첩이자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였던 빌하를 범함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야곱은 르우벤에게 장자권을 주기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르우벤이 더는 형제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지 못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르우벤이 장자로서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존귀한 위치를 죄로 인해 빼앗긴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르우벤에게 빌어준 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습니다. 르우벤은 가인, 이스마엘, 에서처럼 죄로 인해 장자권을 잃어버렸습니다.
르우벤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다가 스스로 밀쳐져 진창 속에 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침상을 범한 죄로 인해 그는 너무 큰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죄는 순간적인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결과적으로 삶 전체에 비극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죄에 관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애초에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5-7)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묶어서 복을 빌어줍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레아의 둘째와 셋째 아들이자 야곱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데도 잔혹성 때문에 장자권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이 공모하여 세겜 족속을 살육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들을 ‘형제’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연합이나 동맹에 대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두 사람이 한통속이 되어 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새번역 성경은 ‘단짝 형제’라고 번역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연합하여 좋은 일을 했으면 괜찮았는데, 잔인한 일을 공모하고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연합하면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 변하였습니다.
우리의 연합은 좋은 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진창에 밀쳐 떨어뜨리기 위해 다른 이와 연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 세속적인 가치관의 물결에 함께 빠져 사는 단짝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야곱은 자신은 절대 이들의 일에 동조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야곱은 그 이유로 그들의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성을 들었습니다. 6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6, 새번역) 나는 그들의 비밀 회담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들의 회의에 끼여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시므온과 레위는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습니다. 소의 발목 힘줄을 끊으면 소가 움직이지 못하여 소의 노동력을 중요시했던 당시 사회에서 그 소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야곱이 이들을 질타하는 것은 상습적으로 필요 이상의 폭력을 자행하는 그들의 잔인함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사람이나 동물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절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쳐 떨어뜨리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에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붙들어주심이 은혜입니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의 자손들이 이러한 잔인함으로 인해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야곱의 예언은 훗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땅을 분배받지 못하였고(수 14:4),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기업 중에서 몇몇 성읍을 받았지만(수 19:9),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다 지파로 흡수되어 역사 속에서 슬며시 사라지게 됩니다.
(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야곱이 레아의 넷째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아들이기도 한 유다에게 빌어 준 복은 요셉 다음으로 깁니다. 야곱은 유다에게 영원한 왕권, 주권, 번영 등을 빌어줍니다. 유다는 모든 형제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그를 찬송할 것이고, 원수들은 그에게 짓밟힐 것입니다. ‘사자 새끼’, ‘규’, ‘통치자의 지팡이’ 등 통치권에 관한 표현들이 이러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야곱은 열방이 유다에게 순종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유다는 형제들에게는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적들에게는 두려움을 자아내는 공포의 존재가 될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한 통치권과 열방이 그에게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는 메시아 사상과 연결됩니다.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 속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유는 다윗 언약 때문인데(삼하 7:16), 이 다윗 언약의 첫 번째 성경적 근거가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유다에게 부여된 예언적 축복은 다윗과 그의 집을 통해 성취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권이 유다의 세 형들을 지나 그에게 임한다는 점에서 장자권이 그에게 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두 지파의 몫을 받는 실질적인 장자권은 요셉이 두 아들을 통해 받았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하나님의 선택은 유다 지파에게 있었습니다. 시편 78편 67-68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시 78:67-68)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렇다면 유다 지파는 형제들을 통치하는 권능을 언제까지 누리게 될까요? 야곱은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말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이라고 번역합니다. 즉 유다 지파는 보좌의 참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의 형제들을 통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한 우리의 그릇된 삶을 참회하는 절기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 보좌에 앉으시고, 우리의 참 주인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 주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3-15)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스불론은 레아의 여섯째 아들이자 야곱의 열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본문과 모세의 축복(신 33:18)에서 스불론은 그의 형이자 레아의 다섯째 아들인 잇사갈 앞에 등장합니다. 또한 이 두 곳에서 스불론은 형 잇사갈보다 더 긍정적인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땅 분배를 위한 제비뽑기에서도 스불론에게 우선권을 주십니다(수 19:16-17).
잇사갈은 레아의 다섯째 아들이자 야곱의 아홉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그에게 특별한 복을 빌어주지 않으며, 다른 형제들에게 얹혀살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잇사갈은 사사기에서 가장 경시되는 지파입니다. 그들은 사사기 1장의 지파들의 목록과 가나안과 미디안의 전쟁에 관한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사시대 동안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빌하와 실바의 아들이 받는 복(16-21)
16절에서 21절까지는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에게 한 축복입니다.
(16-18)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은 빌하의 첫째 아들이자 야곱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그는 야곱이 첩을 통해 얻은 아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이 목록에서 일곱 번째로 등장하여 형제들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합시다.
야곱은 단에게 두 가지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첫째, ‘심판하다’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그의 이름 ‘단’이 뜻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정의로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지파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며, 지파들 사이에 빚어지는 소송들을 판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둘째, 그는 결코 원수들에게 당하고 있지 않고, 대항하고 공격할 능력을 지닐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길섶의 뱀, 샛길의 독사는 위치가 노출되어 위기에 처한 뱀을 뜻하는데, 이처럼 단의 자손이 숫자가 적을 것임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맹독을 품은 뱀처럼 원수들에게 위협을 가할 것입니다.
야곱은 이곳에서 잠시 호흡을 고르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중간에 갑작스레 기도가 등장하기에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야곱이 아들들에게 빌어준 복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주님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가 이곳에 등장하는 것이 적절하게 느껴집니다. 야곱은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임하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의 삶이 눈물 골짜기를 걷는 것 같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통과하는 것 같을지라도, 야곱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며 기도하십시다. 그러면 시간이 지난 후에 다윗처럼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주셨음을 깨닫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시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19-20)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갓은 실바의 첫째 아들이자 야곱의 일곱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갓이 결코 순탄한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의 후손들은 군대의 추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갓은 쫓기기만 하는 군대가 아니라 역습하는 군대가 되리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즉, 남에게 지지 않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훗날 요단강 동편 북쪽에 정착한 갓 지파는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아람 사람들과 시리아 사람들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습니다. 이처럼 많은 전쟁을 통해 갓 지파는 용감무쌍한 용사들로 유명해집니다(대상 12:8).
아셀은 실바의 둘째 아들이자 야곱의 여덟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아셀 지파가 이스라엘의 가장 기름진 땅을 차지하고, 땅의 소산물을 마음껏 즐기게 될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훗날 아셀 지파는 갈릴리 호수 서쪽에 위치한 옥토를 차지했습니다. 갈멜산에서 시작된 이 기름진 땅은 북쪽으로는 시돈까지 이르렀습니다.
(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납달리는 빌하의 둘째 아들이자 야곱의 여섯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그에게 암사슴의 복을 빌어 주는데, 암사슴은 아름다움과 함께 떼지어 다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납달리는 암사슴처럼 자유와 민첩성을 누릴 것입니다(합 3:19). 만족하고 배부른 짐승들이 뛰논다는 점을 생각할 때 납달리는 풍요를 누릴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아들들에게 복을 빌어줄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지파들의 미래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비록 어떤 아들에게 한 축복은 저주같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야곱의 축복은 야곱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축복은 상당 부분 그들의 인격과 삶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심은 대로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결과는 자신의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떤 이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어떤 이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22-26)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모든 아들들에게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는지 말하며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장면입니다. 야곱의 축복이 의미가 있는 지점은 그 축복의 말씀이 아들들의 삶의 현장과 무관한 상태의, 진공 상태에서 나오는 축복이 아니라 아들들이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서 보여준 성품과 삶에 기반한 축복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야곱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아온 삶에 기반하여 축복하게 하셨고, 그 말씀에 부합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이 단순히 아버지이기 때문에 좋은 말들로만 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들이 그동안 아버지와 하나님 앞에서 보여온 삶을 기반으로 축복의 말씀을 남기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축복 예언이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어쩌면 나만의 것이 아니라 후손들의 삶의 수준까지도 결정지을 수 있는 공적인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라헬의 아들들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축복의 말씀과 이후 야곱이 자신의 장례에 대해 유언하고 별세하는 장면까지 나타나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파들은 기껏해야 한 절 혹은 두 절에 불과한데 요셉은 22절부터 26절까지 다섯 절에 이릅니다. 야곱이 이 많은 말들을 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낸 게 아닙니다.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축복의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올 만큼 요셉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음을 뜻합니다. 이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기원이 하나님이시며,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임을 기억한다면 요셉은 하나님과 아버지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았던 아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야곱은 지금 야곱은 하나님을 모신 가장이자 아브라함과 이삭을 잇는 언약 백성을 이끄는 족장으로서 다음 장자 역할을 했던 요셉에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야곱은 요셉을 무성한 가지, 샘 곁의 포도나무,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에 비유합니다. 하나같이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물이 풍요로운 곳에 없으면 나뭇가지가 무성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무성한지 그 가지가 얼마나 무성한지 담을 넘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번성하는 가지는 문자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은 아들을 의미하며, 다산과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요셉도 둘째를 낳고 번성이라는 뜻의 에브라임으로 짓기도 했습니다. 22절은 요셉이 사시사철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는 샘 곁에 있어, 그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나 담장 너머로 뻗을 만큼 건강하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언입니다. 마치 시편 1편에 나오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많이 맺는 것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풍요로움, 특히 물로 인한 풍요로움은 항상 하나님과 연관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말씀 붙들고 살았기 때문에 받았던 복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번성은 대적으로부터 공격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23절에,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요셉이 감내해야 했던 지난날의 어려움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요셉을 공격하는 사람으로부터 학대를 받을 만큼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학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다, 맛이 쓰다, 매우 괴롭게 만들다는 뜻의 마라입니다. 단순히 두 당사자의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요셉을 괴롭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이 겪었던 어려움은 요셉 개인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실을 나쁘게 하는 형들과 한 마음으로 뒤섞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것으로 샀던 미움이었습니다. 행실을 나쁘게 했던 형들이 받았던 복들이 바로 앞 49장 전반부에 나오지 않습니까? 누가 더 하나님 앞에서 신앙인다운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보면 압니다. 요셉은 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어려움 당했습니다. 대적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24절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대적의 공격에도 요셉은 넘어지지 않고,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활은 더 굳세며 팔에 힘이 있습니다. 요셉이 매사에 기민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며 했던 말, 창세기 39장 9절,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에서 알 수 있듯이 매순간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얕은 수를 쓰지 않고, 부화뇌동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모색하여 그 길로 행하는 것만이 우리의 활을 굳세게 하며, 팔에 힘이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눈을 들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말씀 따라 행할 때, 그를 모른 척하시지 않습니다. 24절 마지막 말씀대로 “야곱의 전능자, 목자와 이스라엘의 반석의 목자의 손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요셉과 함께하여 그를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살면, 세상이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요셉처럼 어려움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말씀 붙들고 사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25-26)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먼저 위로 하늘의 복, 아래로 깊은 샘의 복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농사가 하늘에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하늘의 복은 적절한 일조량과 더불어 비가 필요할 때 생명의 단비가 내리는 복입니다. 신명기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른 비와 늦은 비의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래로 깊은 샘의 복은 물이 끊이지 않는 복입니다. 사람과 가축이 먹을 물이 풍족한 복입니다.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은 자손의 번성과 관련된 복입니다. 요셉의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대단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근원은 아버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아 요셉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켜보고 계시며, 인도하시며, 아버지 야곱을 통해 복을 내려주셨듯이, 오늘 우리도 지켜보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재료로 우리 삶에 복을 주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차가운 감옥에서 서러운 눈물을 삼켜야만 했던 요셉의 지난날은 외면합니다. 형들의 잘못에 동조하기보다 그 잘못을 폭로하면서까지 미움 당했던 요셉의 용기를 나와 상관 없는 것이라 여깁니다. 오랜 기간 악과 타협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 따르려고 했던 요셉의 지난날의 삶은 간과하고,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결과로 주어진 요셉의 현재와 그가 받았던 복은 매우 부러워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동일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오히려 외면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요셉처럼 붙드시려고 했었어도 우리가 그 도우심을 오히려 밀쳐낸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양심을 두드리시는 음성을 외면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애써 고개 돌리려고 했던 적은 없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자기 욕망 따라 살다가 진창 속에 떨어져 살지 말고, 오히려 우리 눈을 들어 하나님 바라보고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손 잡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각 사람의 분량대로(27-33)
요셉 다음으로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축복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야곱의 축복을 마무리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고 말합니다. 축복은 자의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했던 축복을 생각해보십시오. 야곱이 많은 복을 받고난 이후에 에서에게 해주었던 축복이 야곱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장자로 축복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각 사람의 분량대로 주어집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과 내가 받은 축복을 비교하면서 시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받았던 축복이 그들의 평소 행실과 이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하루가 그저 나만의 삶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이 자손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식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부터 변화해야 합니다.
야곱은 이후에 아들들에게 예전에 요셉에게 했던 자신의 장례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합니다.
(29-32)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이 자신을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말, 곧 유언입니다.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달라는 말입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지금 애굽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더라도, 자신을 헤브론에게 장사지내라고 말하는 것은, 이곳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이 땅에서 계속 머물 것이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유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렸습니다. 애굽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바라보며 사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남긴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으로 살았을 때보다 더 큰 믿음의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남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헤브론에서 죽었던 사라, 그 사라를 위해 약속의 땅에 매장지를 마련했던 아브라함, 약속의 땅의 범주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이삭과 리브가에 이어 애굽에 살면서도 그 땅 바라보고 살기를 요청하는 야곱까지, 참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 같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더 하나님과 가까워져 하나님께 접속된 인생, 그 말씀을 이루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메시지를 남길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지향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오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야곱은 죽은 줄로 알았던 자신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흉년에 곡식을 사러 애굽에 갔던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130세의 야곱은 거의 20년 만에 아들 요셉과 재회의 기쁨을 누린 이후부터 애굽의 고센 땅에서 살았습니다(창47:28, 창37:2;창42:46;창45:6;창41:53-54). 애굽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낸 야곱은 이 세상에서 생을 마칠 즈음에 12명의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유언이자 그의 아들들에게 내린 축복의 말입니다. 야곱이 유언은 단순한 유언이 아닌 예언이었습니다. 야곱은 1절에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말했습니다. 후일에 당할 일에 관한 예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10절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무 가지, 지파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가지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에 막대기나 지팡이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통치자에게 어울리는 막대기라면 왕의 손에 들고 있는 금홀을 연상하게 합니다. 10절은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내린 축복입니다. 실제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나왔으며 예수님 역시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는 바로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르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하셨는데 이를 통해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의 말씀 가운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 시대를 맞이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훗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단계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야곱이 죽기 전 그의 축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축복을 통해 장차 유다 지파로부터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유언은 축복이자 예언으로써 결코 무의식중에 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유언은 야곱의 아들들의 삶을 반영한 미래에 있을 축복이었습니다. 28절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이 아들들에게 축복을 하되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 누리는 인간의 복은 나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달렸음을 보여줍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자는 의의 결실을 보게 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악행에 따른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도 이렇듯이 죽은 후에도 우리는 각자의 행위에 따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셈하시는 하나님,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야곱의 유언에는 축복만 있지 않습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부터 셋째 아들에게 했던 야곱의 예언의 내용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입니다. 아무리 그가 능력이 있고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패륜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3절). 4절에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란 아버지 야곱의 아내 라헬이 죽자, 라헬의 여종으로서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동침한 것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35장 22절 이후를 보면, 르우벤의 패륜범죄를 야곱이 들었지만 성경에는 야곱의 어떤 반응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율법이 제정된 이후였다면 르우벤은 반드시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레18:18,29;레20:11;신21:18-21).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르우벤에게 탁월하지 못할 것이라며 축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처럼 야곱 생전에 야곱을 매우 힘들게 했던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에게도 야곱은 축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2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아버지를 괴롭게 했던 사건은 창세기 34장 그들의 누이 디나가 강간당한 일에 대한 세겜 성읍 사람들에게 잔인한 피의 보복입니다. 이것은 그 이전 야곱의 형 에서로부터 받았던 위협이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겪었던 고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가족과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시므온와 레위가 주축이 되어 벌어진 피의 사건이었기에 야곱은 유언에서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6절)라고 했으며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 것과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 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야곱의 이 예언대로 시므온은 민수기 26장 14절을 보면 지파 인구조사에서 가장 적은 22,200명으로 집계 되었는데 이는 12지파 합계 약 60만 명에 각 지파 평균의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이후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 몇 성읍밖에 할당받지 못했으며 훗날에 그마저도 유다지파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레위 지파는 가나안 정복이후 아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으며 여러 지파의 땅에서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각자가 현재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의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 아버지 야곱에게 큰 누를 끼쳤기에 자연스럽게 넷째 아들 유다가 장자의 권리를 계승한 것입니다.
13절 스불론부터 21절 납달리까지 야곱의 축복의 특징은 아들들의 출생 순서가 아니며, 레아로부터 태어난 아들들 2명, 레아와 라헬의 여종으로서 각각 야곱의 첩이 된 실바와 빌하로부터 태어난 아들들로 축복이 이어집니다. 나귀, 뱀, 암사슴처럼 동물들을 비유한 야곱의 축복이 있으며 섬김, 통치(심판), 우위(추격), 명예(왕의 수라사 담당) 등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말대로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한 것입니다.
22절부터 27절까지는 야곱이 라헬로부터 얻었던 아들 두 명에 대한 축복입니다. 막내 베냐민에게는 다른 아들들처럼 분량대로 짧게 축복한 반면에 요셉에게는 유다처럼 다섯 절의 분량으로 많은 축복을 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에는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으로 번성의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샘 곁에 있는 무성한 가지로써 비가 오지 않더라도 안정적으로 수분을 공급받아 담을 넘어갈 정도로 번성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많은 역경을 겪었지만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 뿐더러 형들조차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자신을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은 현실의 어려움만을 보지 않았고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짧지 않은 손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전능자의 손을 입음이라고 축복합니다. 24절에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손’ 명사가 전능자 옆에 배열이 되어 전능자의 수식을 받고 있습니다. 전능자의 손은 곧 하나님의 손이며 그 손은 짧지 않은 손임을 요셉이 몸소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25절에서 요셉 지파는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받을 것이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이 짧지 않음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한없는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복이라는 단어를 5번이나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이라고 야곱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야곱이 아들들에게 했던 축복처럼 누구로부터 축복을 받든지 우리 각자 분량대로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분량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복을 받는다면 현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현재에 소외된 이웃과 고통 속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아끼고 살피면, 미래에 주님께서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가정에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 것처럼 나의 가정에 방문하셔서 내가 어려울 때 그 문제를 기적처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셈하시는 하나님, 상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현재에 제쳐둘 것들을 제쳐두는 절제의 삶,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야곱이 육체적 죽음을 앞두고 했던 마지막 고백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라"(29절)처럼 이 땅에서 평안하게 육체적 죽음을 맞지 않겠습니까?
♡♡♡♡♡♡♡♡♡♡♡♡♡♡♡♡♡♡
막내 요셉에 대한 잘못된 편애로 말미암아 야곱가족은 분열되어 흔들렸고, 상당 기간 동안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야했습니다.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다 모아놓고 남긴 이 유언 중에는 후손들에 대한 축복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저주와 같은 말도 있기에 의아합니다.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야곱이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은 야곱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곱이 남긴 유언의 내용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재산 상속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물려주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야곱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자식들을 일컬어 “야곱의 아들들아”라고 불렀지만, 바로 다음에 “너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라고 하면서, 비열한 모략가인 야곱 자신을 이스라엘로 세워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켰습니다. 아들들을 다 모이게 한 야곱은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단순한 유언이 아닌 예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 야곱이 하는 예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후손들을 향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적으로는 후손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잘못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 애절한 심정을 잘 묘사한 구절이 바로 18절입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8)
“이제 눈을 감지만, 죽어서도 후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바로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입니다. 자식을 키워보아야 부모님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또한 부모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나를 향하신 사랑을 깨닫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이라면 하나님께서 야곱의 열 두 자녀들에게 하신 말씀 하나 하나가 사랑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르우벤, 시므온, 레위 그리고 잇사갈에게 남긴 말은 그들을 향한 악담이나 저주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 보고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르우벤, 장남답게 늠름하고 믿음직했지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고, 결국은 충동적인 감정 때문에 가족 간의 성적인 죄를 저질렀고, 이에 자신이 행한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장남의 분깃을 이어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너무 폭력적이었습니다. 문화사역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음악의 장르에 따라 좋지 않는 음악이라고, 기독교인이라면 절대 해서도 들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Rock 그룹 중에는 사타니즘에 빠진 그룹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Rock이라는 음악 장르가 다 나쁘다고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양지가 있기도 하지만 반면에 음지도 반드시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Rock 음악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악이나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칼은 당시 전쟁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병기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자기감정이나 혈기로 칼로 사람이나 동물들을 해한다면, 칼은 더 이상 정의의 병기가 될 수 없습니다.
건장한 나귀로 묘사된 잇사갈은 건강한 체격의 소유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이 심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편안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그냥 안주해버리곤 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오전 업무시간 전에 한강둔치를 걸으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걷는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버스 정류장 몇 정거장 걸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전거 타는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걸어가기에 좀 먼 거리다 싶으면 자전거를 타곤 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언제부터인가 바로 앞의 슈퍼마켓 갈 때도 자동차를 타고 가도, 마치 자동차가 저의 다리인양 여기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걸으면서 자책하는 것이 바로 편안함 속에 안주해버린 저의 게으름입니다. 새벽이나 밤에 한강둔치에 나가보면 다른 세상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걷고 뛰고 운동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 게으름과 안주함입니다. 성경 한 장 읽는데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린다고, 하루 종일 성경 한 장은 커녕 한 구절도 안보고 지나다가, 주일에 와서야 설교시간에 부랴부랴 성경책 펼쳐보곤 합니다. 주일 설교말씀 듣는 것으로 신앙생활 다 한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편한 것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만, 우리를 위해서는 약간 불편한 것이 오히려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잇사갈에게 좋은 체격조건을 주셨으나, 그는 자신의 건장한 신체 조건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장롱 면허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롱 면허를 가진 사람은 자동차를 몰지 못합니다. 왜 실전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달란트를 어떻게 쓰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도 편안함과 게으름에 맛이 들어 그 귀한 달란트를 장롱속 깊숙이 감추어 놓고 있지 않은지요? 꺼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유다와 요셉에 대한 말씀은 그야말로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다지파에서는 실제로 다윗왕가를 배출했고, 나아가 예수님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유다의 삶을 살펴볼 때,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하자 피를 흘리지 말고 파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총리 요셉 앞에서 진실하고 신솔하게 변호하는 등 그 이름에 걸맞게 형제들로부터 찬송을 받을 만 했습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던 요셉이었지만 그는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였고, 그 하나님과 함께하며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보호 아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태동되게 되었습니다. 스블론, 단, 갓, 아셀, 납달리, 베냐민 역시 한 지파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28)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에게 전부를 다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이나 일을 원치 않는다. 나는 ‘너’를 원한다. 너의 자연적 자아 전부를, 네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욕망이나 죄 없는 욕망을 가리지 말고 전부 내게 넘겨다오. 그러면 그 대신 새 자아을 주마. 내 자아를 주마”(순전한 기독교, 298쪽, 홍성사)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르우벤이나 시므온과 레위에게 야곱의 유언으로 들려준 말씀은 바로 루이스의 지적처럼 너의 잘못된 그 모습을 숨기려 하거나 부인하지 말고,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을 구할 때 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 말씀을 주십니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내 분량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나요? 내 분량은 내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분량과 동일합니다. 내가 나를 부인하면 할수록, 나를 비우면 비울수록 커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결국은 내 분량인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말씀인지요!
자식들에게 유언을 마친 야곱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직접 돈을 주고 구입한 가나안 땅 헤브론, 마므레에 장사해줄 것을 어떻게 했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까!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33)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자신을 마므레에 장사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장사하라고 명령함으로서 자신의 확고한 의지, 즉 마므레야 말로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임을 후손들에게 분명히 해 두었습니다. 즉 이곳 애굽에서 후손들이 살아갈지라도 이스라엘이 있어야 할 곳은 애굽이 아니라 바로 가나안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유언을 더 확실하게 못 박은 인물은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요셉은 자신의 시체를 약속의 땅, 마므레가 아닌 애굽에 장사하게 했습니다. 단 조건을 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 이스라엘을 약속하신 땅으로 데리고 가실 때, 자신의 해골을 꼭 가지고 가라고 말입니다. 즉 그는 애굽에 남아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이정표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믿음의 아들답습니다.
야곱과 요셉은 마지막 순간에도 미래에 대한 희망, 즉 하나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삶을 마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육적 후손 뿐만 아니라 영적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얼마 전에 삼십대 초반의 자매 한분이 몇 년간의 암투병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자매의 인생의 길이는 짧을지 몰라도,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랑했던 가족과 친구동료들에게 남겨두고 간 그녀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크기는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랬기에 그 자매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녀를 그리워하되 아름답게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이 귀한 오늘, 우리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복된 하루로 만들어 가시길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