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䕹學의 인생살이
김성훈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명예회장/전농림부장관)
지인들로부터 종종 나의 전공이 무엇이냐는 생뚱한 질문을 받곤 한다. 지체없이 사람(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 즉
“잡학(雜學)”이라고 답한다. 나야 말로 천성적으로 안 끼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끼어 들어 의견을 말하고 글 쓰며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밥벌이 전공분야인 농업 농촌
농민 문제연구는 한시도 내려놓지 아니했다. 아무튼 이 같은 잡학의 인생살이가 선천적인 것이었는지 또는 후천
적인 것이었는지 모르고 살아오다가 이 참에 <녹색평론>으로부터 “내 인생의 책” 시리즈의 원고 청탁을 받고 서
야 새삼 내 인생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명백해졌다. 나의 잡학 인생은 소싯적부터의 아무것이나 뒤죽박
죽 독서하면서 자생했던 것 같다. 나는 어렸을 적 아버님의 주문대로 책을 읽으면 꼭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거나
실천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6.25 피난시 야외독서로 시신경을 해치다
아마도 그 시작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생 무렵부터이다. 반장 겸 도서반장으로 학부형들로부터 구해 모은 40여권의 책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었다. 그런데 6.25 동란이 터졌다. 이 책들을 부반장과 나누어 각자의 집에 가져가 보관하기로 했다.
집에 가져와 미처 정리도 못했는데 아버님께서 우리 4형제를 불러 모아 맏형과 막내는 부모님과 함께 집에 남고, 둘째인
나와 바로 아래의 셋째는 시골의 이모님 댁으로 피난 가라고 하셨다. 40여리 떨어진 산골동네까지 책들을 이고지고 피난
가야 했다. 한약방을 하시는 이모부댁에 안착하여서는 매일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책을 아무렇
게나 뽑아 들고 언덕 위 저수지로 올라가 멱(목욕)도 하면서 무작정 읽어댔다. 무슨 영웅전 시리즈부터 성인용 책들에 이
르기까지 피난기간 거의 다 읽어 치웠다. 그냥 책 읽는 것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뜻도 의미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서 말이다. 두 달째 이던가, 눈곱이 끼고 충혈이 되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데 어쩌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뙤약볕 아래서의 독서로 인해 시신경이 크게 상한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초고도 근시 판정을 받았고 고등학교에서는 고난도 난시 판정까지 덧붙었다. 그리하여 5.16이 났을 때 논산훈련
소에 입대하게 됐는데 정식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계급장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중학생인 나를 울린 이무영(李無影)의 <농민>
글 읽는 습관은 나에게 있어서 거의 맹목적이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추어주어서도 아니다. 책이건 신문쪽지건 심지어
길거리의 간판이건 무조건 읽어야 했다. 한자(漢子) 투성이면 어떤가. 누구에게든 물어 읽으면 되지. 그러다 보니 중2 꼬마
였을 때 벌써 안경을 맞춰 쓰고 다녀야 했다.
그때 내 손에 들어 온 소설 한권이 있었다. 그림자가 없는 소설가 李無影의 <農民(농민)>이었다. 그 무렵 나의 독서력은
제법 문맥을 짚을 줄 알고 의미도 조금씩 곱씹을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유년기를 제하고는 농촌지역이다
보니, 보고 듣고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농사짓는 일과 관련돼 있었다. 얼마나 그들의 삶이 열악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
위가 비통한지는 일상처럼 목격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가난은 구조적인 것이지, 개인적인 잘잘못과는 관련이 멀다는 것
도 잘 알게 되었을 때다.
미륵동 “장쇠가 들어왔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부패하고 포악한 양반인 김승지와 박의관의 인면수심적인 악행에 대
하여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원장쇠라는 순박한 농민을 필두로 농투성이들의 통한을 풀어내는 일종의 반사회적 계층 갈
등의 내용이다. 형식과 형태만 다를 뿐, 내가 살던 6.25 전후의 농촌 농민의 실상과 너무 닮아 데자뷰(기시감, 旣視感)인
듯 읽고 또 읽으며 눈물지었다. 참고로 장편소설 <농민>은 5부작 중 제1부에 해당한다. 2부 <農軍(농군)>, 3부 <勞農
(노농)> 까지 출간되고 제4부와 5부는 미완인 채, 이무영 선생은 해방 후 친일파로 낙인찍혀 울분에 젖어 살다가 내가
대학 3년생일 때 돌아가셨다.
아무튼 이무영의 <농민>은 어린 나에게 일찍이 내 주변의 농촌 농민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비판적인 인식을
갖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다음 해결점을 찾아 나서는 길은 더 외롭고 고단하였다.
농대/농업으로 이끈 류달영(柳達永) 선생의 <새 역사를 위하여>
내가 중3 일 때 일제 강점기 부터 협동조합 운동을 하셨던 아버님으로부터 당시 챨스 앤더슨 대령이 한국에 전파한 4-H
구락부(클럽) 운동을 소개 받았다. 우리 동네도 4-H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 해서 전국에서는 꽤 일찍 <산정 4-H 구락부>
가 조직되었다. 미국서 시작된 미래 농업인과 민주시민을 육성하자는 운동으로서 일종의 보이스카웃 같은 농촌 청소년
클럽 운동이다. 4-H는 Head, Heart, Hands, Health, 즉 지・덕・노・체(智德勞體) 네잎클로버를 뜻한다. 내가 초대회장이
되어 고2 까지 산정 4-H를 이끌었다.
“어둡고 답답한 우리 농촌을, 밝고 환하게 새로 세우려, 묵은 것을 샅샅이 털어 버리고, 새 빛과 새 얼로 가꿔나가세
(황인호 작사).”라고 노래하며 우리 농촌을 우리 손으로 흙의 문화를 일으키자는 4-H 깃발을 높이 들었다. 1인 1과제를
택해 배우고 실천하였다. 문자 그대로 배우면서 실천하였다. Learning is by Doing(知行合一)이었다. 우리 4-H 클럽 지
도자는 아는 것이 참 많고 실천력이 뛰어나신 한창수(韓昌洙) 선생님이셨다. 내 과제는 우리 동네 논과 밭을 일일이
리트머스 시험지로 산성도(酸性度)를 간이 측정하여 해당 농부님들께 알카리성 석회를 얼마만큼씩 시비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소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서 칭찬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미국 잉여농산물이 과잉 도입되어 농산물
값이 똥값으로 떨어지고 농민의 가난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에 나의 대학진로가 고민이었다. 당초엔 법대에 가서 변호사가 돼 농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려던 계획에 갑작스런
학내 스트라이크 사태로 내 심경에 차질이 생겼다. 세속적인 출세지향의 진로설정이 너무 속물스러워졌다. 이 때 나를 일깨
워 준 책이 성천(星泉) 류달영 선생의 <새 역사를 위하여>이었다. 불세출의 지도자 그룬드비히의 영도 아래 불모의 사막지
대를 낙원으로 일으켜 세운 덴마크의 농촌부흥사는 뭇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나도 그러했다. 그래서 막판에 농대를
지망키로 결심을 바꾸고 부랴부랴 시험과목을 단기 집중으로 독파하였다. 그리고 농대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의 스승
이신 류달영 교수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새 역사는 수원농대의 입학 때부터 새로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으로부터 농업의 본류가 유기농업이라는 진리를 배웠고 선생이 창립한 우리나라 유기농 운동의 본부격이었던 한국
유기농협회의 창립을 보좌하였다. 순환농법을 통해 흙을 살리는 것이 바로 유기농업의 기초라는 원리를 터득하는 데는 시
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역동 유기농법의 원조격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슈타이너의 명저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을 읽고 역동유기농법의 본거지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을 로마의 FAO(유엔 국제식량농업기구)에서 개최된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방문하여 "데메트르"표 유기농산물이 얼마나 유럽인들로부터 사랑과 애호를 받는지 확인
하였고 그 정반대 선상에 있는 GMO(유전자조작식품)가 왜 유럽국가들에 한 발짝도 들여 놓지 못하는 사실까지 확인하였다.
한국 유기농 운동의 쌍벽인 풀무원의 창시자 원경선 선생님과 정농회가 일본 가네꼬 요시노리 여사의 <21세기의모델
쿠바의 유기농업>을 번역 출판하였다. 크게 감명 받아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지 못해 그 머나먼 쿠바를
지금까지 세차례나 방문 하였다. 그리고 인류의 오래된 미래가 바로 그곳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지금 나는 우리 아파트
옥상에서 11년째 쿠바식 상자화분 31개에서 1년 3모작 100% 유기농사를 짓고 있다. 아파트 주민이면 누구나 솎아 먹도록
허용하는 의엿한 '도시농부'임을 자부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 사람이지!”
이 동요조 경구는 필자가 고2 때 열 명의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한 얼」이라는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어 내적 충실과 선행
을 모토로 과외활동을 하면서 찾아 뵌 목포 문예인협회 회장이셨던 고 차재석(극작가 차범석의 동생) 선생님으로부터 전수
받았다. 당시 모임이 있을 때는 물론, 그 후 노춘(老春)이 된 지금까지도 즐겨 암송하면서 그 뜻을 헤아려 그때마다 행동지침
으로 삼아왔다. 대학생이 되고 교수가 되어 학장 총장이 되었어도 심지어 장관이 되어서도, 위 노랫말에 일곱 번 반복되는
“사람”이라는 단어 대신에 그때그때 달라진 직책 명칭이었던 교수, 총장, 장관이란 단어로 대입해 혼자 읊조리곤 하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다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가,’ 노상 이 의문과 다짐을 홀로 몸부림치며 고민했고
동호인들끼리의 모임에서 토론도 해봤다. 차선생님은 <맹자(孟子)>의 공손추상(公孫丑上)을 인용하시며 가라사대 사람의
본성에는 네 가지 마음씨(四端之心)가 있는데 이는 조선조 5백년을 관통해온 우리 사회의 중심사상이며 기본 수신(修身)
철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첫째, 남의 불행과 고통을 차마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마음, 또는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대하지 못하는 마음, 즉 측은
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둘째, 자기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옳지 않음을 미워하는 마음, 즉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셋째, 남에게 양보하고 사양하는 마음, 즉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끝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시비의 마음, 즉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이는
차례로 仁(어짐), 義(의로움), 禮(예를 지킴), 智(지혜로움)의 단서(싹)가 된다. 이 네 가지 마음씨는 거울처럼 계속 닦아야 사람
과 사람 사이에 원만한 관계가 형성되고 사람답게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가르침이었고 조선조 사대부들의 지침서
이었다.
지난 가을부터 나라를 온통 뒤흔들고 풀뿌리 민생들을 잠 못 이루게 하던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로 국회 청문회와
사법당국에 불려 나온 한다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고 모두들 딱 한 마디, “사람이 아니구나.”였다. 그들의 본성이 위 네 가지
마음씨를 제대로 갖추고 닦았는지 의문스러웠다. 더욱이 지위가 높을수록, 학력이 화려할수록 이같은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갔다. 기본이 덜 된 인간들이다. 돈과 권력의 유착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천민자본주의가 그동안 너무 많은 ‘좀비’들을 우리
사회 곳곳에 배출한 것이다. 심장에서 뜨거운 피를 더 이상 생산해 내지 못하는 사람 모양의 사람을 흔히 ‘좀비’라고 부른다.
잡학의 동반자, 깨복쟁이 친구 원동석 교수
훗날 (사)민족예술인총연합 대표직을 역임한 원동석(본명 甲喜) 교수는 나의 중, 고등학교 동기이자 우리 옆 동네에 살았던
깨복쟁이 동무이다. 그 아버지가 수산업에 종사하여 농업에 생업을 건 우리 집보다 가세가 넉넉했다. 1년 4계절 학교에 갈
때는 따로따로, 방과 후 귀가할 때는 언제나 함께 하였다.
귀가 시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다시피 둘이서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었다. 학교 옆 헌 책방이다. 보통 집 1층 거실을 삥 둘러
헌책들이 꽂혀 있는데 각자 매일 한 권씩 골라 집에 가서 읽은 다음, 다음 날 아침 학교에서 서로 교환해 8시간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두 번쩨 책을 읽어 치워야 했다. 그리고 다시 헌책방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또 새로 2권을 빌렸다. 이같은 ‘1일
2권’의 독서 습관은 졸업할 때까지 계속 되다시피했다. 졸업 무렵 그 책방의 책들은 거의 다 우리의 손때가 묻었고 더 이상
빌려 볼 책이 별로 남지 않았던 것 같다. 급할 땐 수업시간을 빼먹고 책방에 처박힌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책 빌린 값은 언
제나 갑희의 몫이었다. 귀가 길에 간혹 붕어빵집에 들러 단팥죽을 사먹던 추억도 물론 갑희의 덕이었다.
그러다보니 독서 범위가 아주 다양하고 광범위하였다. 상당부분의 책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읽어 치웠다. 나중엔 우리의
지적 수준을 휠씬 뛰어 넘는 책들도 빌려보아야 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라든지 니체의<짜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등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책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명구(名句)들
을 꽤 건져냈던 것은 다독 덕분인 듯싶다. 예컨대, 5대째 목사 집안인 니체의 그 유명한 명제, “Got ist tot(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담긴 <즐거운 학문>이라든지, 내가 고교시절부터 자주 인용하는 괴테의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든지, “국민 위에 국가가 있지만, 그 국가 위에는 인간(사람)이 있다.”라는 명구는 그 때 그 책방의 헌책들을
통해 배웠다.
원교수는 최근 영면하기 전 <우리 예술의 미학 –서방을 넘어 자본을 넘어>라는 저서를 냈다. 그 책을 읽으며 처음엔 중고등
학생 때부터 거의 같은 책을 읽고 자랐으면서 헤어져 있는 동안 천착하는 바가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자탄을 금치 못했다.
같은 샘의 물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사람이 마시면 피와 살이 된다더니, 그러나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찬찬히 원교수의
예술미학론을 음미해 보니,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 그리고 예술과 미학분야에 전염병처럼 번지는 서방화의 물결과 자본의
횡포에 대한 원교수의 분노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잡학도 보기 나름이고 깨닫기 나름이 아닌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학문의 길을 바로잡아 준 김준보 선생님
농대의 여러 학과 중에서 농업경제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은 그놈의 시력(視力) 때문이었다. 시력에 대한 제약이 없는 유일한
학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결정이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었던 이유는 평생에 한 분 만나뵐까말까 한 김준보(金俊輔)
선생님이 그 학과 주임으로 계시었다. 우리나라 초기 경제학계의 거목의 한 분으로 농업경제학 말고도 수리, 물리, 과학, 경제
이론, 경제사 분야에 통달하신 선생님이셨다. 그리고 과묵하시지만 인정과 애정이 넘치고 비젼과 정열을 갖추신 어른이셨다.
대학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일반경제학>을 배울 때 현대경제학의 원조인 아담 스미스와 알프레드 마샬을 익혔고 농업경제학
을 수강할 때는 “현장에 문제가 있고, 현장에 해답이 있다.”는 소박한 진리를 깨칠 수 있었다. 매 학기마다 선생은 우리 제자들
을 이끌고 농촌현장에 나가 실태조사를 실시하였다. 농가부채 현황, 농산물 유통시장, 농정현장을 사전에 준비한 조사표에 따
라 기록하게 하였고 그것을 분석하여 논문을 쓰도록 독려하셨다. 언제나 무엇이나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면 직접 현장에 가
서 조사해 보라는 소박한 주문이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이점에 있어 선생의 역저 <농업경제학 서설>은 더 심오하다. 아시아적 소농경제 하에서의 농업 농촌 농민의 3농 문제는 농
업 고유의 자연적 기술적 제약성과는 별도로 자본주의의 지배조건과 피지배조건, 즉 한국적 소농관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
지 않으면 문제의 본질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갈파하였다.
이때 연구자의 문제해결을 지향하는 정열(passion)과 공감(compassion) 능력이 비판적인 문제인식과 동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마치 알프레드 마샬의 명구, “Warm Heart, Cool Head (따뜻한 가슴에 냉철한 두뇌)”를 상기시킨다.
윤리와 도덕, 신뢰와 협동을 강조한 아담 스미스
우리나라 농업/식량 사정은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면서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고 정부와 언론 등
일반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나락(奈落)의 길을 헤매고 있다. 24%의 식량자급률 수준에 대부분의 부족분을 수입산 유전자
조작식품(GMO)과 제초제 살충제투성이의 유해식품들이 국민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 국민들은 원인을 모르는 각종 질병들
에 시달리고 있다.
이와같은 현상은 그간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농업과 식량문제를 맡긴 채 관련정책들이 대기업자본의 로비와 영향력에 좌우
되는 정치구조에 그 주된 책임이 있다. 이른바 말만 자유시장경제이지 실제론 대기업자본에 의한 시장왜곡, 이른바 “코포라
토크라시(Corporatocracy, 즉 대기업자본주의)” 현상이 이를 묵인 내지 방조하고 언론과 학계도 그 책임을 다하지 않거나 오
히려 대기업 자본편을 든 때문이다. 그동안 지나치게 생산성과 효율성(능률) 및 가격경쟁력 등만을 부각하여 부분적인 자료
와 불완전한 가정에 입각한 계량경제학적 분석모델로 헛되이 해답을 구하고 처방해 왔다. 농업의 다원적인 공익가치라든지,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 그리고 피도 있고 살도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은 빼놓은 채 가상의 합리적 경제인(Homo Economicus)
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온 데 문제가 있다. 소농과 가족농의 중요성 그리고 품질경쟁력과 안전성경쟁력 문제는 분석의 대
상 밖으로 내팽겨져 왔다.
주지하듯, 시장경제학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현대경제학의 원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스미
스는 국부론 보다 먼저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을 저술하였고 심혈을 더 쏟은 것으로 알려
져 있다. 그의 말년에 다시 보완한 <도덕감정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윤리와 도덕이
수반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또 ”일반 사회발전과의 상호관계에 관한 인문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며, 경제주체간’
신뢰‘와 ’협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학계, 교과서와 연구서에서는 <도덕감정론>의 요소들, 신뢰, 협동, 인문학적 지식에 관해서는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기반한 <국부론>만 가르치고 있다. 미국서 학위를 받은 학자나 정치가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도덕감정론>의 우리말 번역도 초판이 출간된 지 237년인 지난 1996년에야 그것도 법경제학자인 박세일・
민경국 교수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해상왕 장보고 대사와의 인연
1960년대 중반 필자가 미국무성 장학생으로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WC)에서 공부를 할 때이다. 「국제무역론」 과목을 선택
했는데 기말시험을 각자 자기나라의 주된 수출상품 사례연구로 대신하겠다는 것이 담당교수의 주문이었다. 부랴부랴 주 호
놀룰루 총영사관을 찾아 우리나라의 주종 수출품 자료를 물었으나 대답은 황당하였다. 텅스텐 원석과 가발 그리고 모제약
사의 콘돔이 주된 수출품이라는 것이다. 정제된 텅스텐도 아니고 원석(중석)이라는게 부끄러웠고 나머지 두 제품은 차마
리포트로 제출하기 민망한 품목들이었다.
고민고민 하던 중 대학도서관을 뒤지다가 당시 우리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하바드대학 E.O. 라이샤워 교수의 일본 승려 엔닌
의 중국 당나라 여행기)>에 손이 갔다. 책의 제8장 “중국에서의 한국인” 제하의 페이지를 펼치다가 한 대목에서 내 눈이 번
쩍 띄었다. “9세기 경의 한국은 오늘날의 한국과 지리적으로, 언어면에서 그리고 문화적으로 똑같은 나라이다. 이는 현대 세
계에서 한국이 가장 오래된 나라의 하나임을 말해준다. 실제 동일한 언어 인종 그리고 국경이 더 오래 계속된 나라는 중국
뿐이다. 일본은 국가정체성면에서 한국에 버금할 만한 몇 개 안 되는 나라에 불과하다. 분명히 말해,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오늘날의 서방국가들 중 한국에 비견될만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계속되는 중국 당나라에서의 신라인들의 활약상, 경제활동, 정치적으로 자치권의 확보, 중요 교통 요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인들의 신라인 자치소, 신라인촌, 신라방 등의 상호 연락망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차라리 신기하였다. 그 중심
에는 불세출의 영웅 장보고(張保皐) 대사가 있었다. 라이샤워 교수는 장보고 대사를 영어로 ‘총독’이란 뜻의 Commissioner
Chang Pogo 라고 부르며 “해양상업제국의 무역왕 (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이라 호칭하고
있었다. 영문책자의 원본에 해당하는 일본승 엔닌(圓仁)이 직접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장보고와 고구려 백제 유망민을 포함한 신라인들의 해상무역 활동은 중국 신라 일본 샴 페르샤에 걸쳐 눈부셨다. 오늘날 한
국의 조선업과 해운업의 시조이었으며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무역 역군들의 표상이었다.
담당교수로부터 9세기 장보고와 신라인들의 무역 활약상을 리포트로 요약 제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그 과목에 A학점
까지 받았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서는 당연히 장보고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 중국 일본의 유적 유물을 찾아 여덟 차례나
해외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장보고의 활약상에 관한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저서도 두 권 출간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 정부
문화관광부는 장보고 대사 사후 1,150년만에 그동안 역적 또는 반역자로 인식됐던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신원을 복권
하고 1993년 3월을 <장보고의 달>로 선포, 각종 문화행사를 거행하였다.
동대문 고서점에서 대어를 낚다
태초에 인류가 집단사회를 이루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부터 가장 먼저 시작한 경제행위가 다름아닌 시장교환 활동
이다. 서로가 남고 모자라는 필요(needs)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의 교환행위는 현대적 통신관
계와 상활동(商活動)이 제대로 발전되지 않았거나 수요공급 거래 규모가 크지 않고 교통조건이 불편한 시기에는 어느 일
정한 계절이나 기간, 기일을 정해 교환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른바 2일장, 5일장, 10일장 등 정기시장(定期市場,
periodic market)의 생성 발전의 계기가 그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중국에 이어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정기시장 활동의 역사와 변천이 자주 경제사연구 측면에서
인용된다. 그 중요성과 역사적 가치 때문이다. 주목할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자마자 정부 차원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 1913-17년 기간의 시장조사 사업이었다. 곧이어 토지조사사업이 1918년에 완성되었다.
시장과 토지는 침략자본의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간된 최초의 전국적 시장조사 보고서가 善生永助라는 촉탁에 의한 <조선의 시장경제, 1929>
이었다. 필자는 1972년 12월 어느 날 동대문 고서점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뛸 듯 기뻐했다. 조사 수록범위
가 방대하고 정교하며 역사 문화까지 파악할 수 있어 당시의 한국경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좌측의 사진은 복
각본이다)
그후에 출간된 것은 일제의 조선침탈사를 비롯 조선 상고사(上古史) 연구에 평생을 바친 영원한 재야 사학자 문정창(文定昌)
선생으로부터 필자에게 서명한 그의 역저 <조선의 시장> 1941년판이었다. 그후 유사한 저서나 자료를 찾지 못하여 해방
(광복) 이후의 우리나라 시장경제 변화를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국립농업경제연구소(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계약직 연구위원을 자원해 1975년부터 2년간 정열을 바쳐 전
국의 정기시장을 망라한 실증적인 조사보고서 <한국의 정기시장, 1977>을 문정창 이후 35년만에 완성하였다. 지금의
서울대 농생대 김완배(金完培) 교수를 수석연구원으로 삼아 둘이서 함께 또는 각각 전국의 1.047개소 대부분을 직접 찾아
가 심층 조사하였으며 객관적인 센서스 조사는 농촌진흥청(김문헌 청장) 조직의 도움을 받아 실시하였다. 조사 및 연구항
목도 조선총독부의 것들보다 더 넓고 더 깊게 파고 들었다. 공판으로 친 이 보고서는 2006년 12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최정섭 원장)에 의해 4.6배판 저서로 재출간되어 전국의 도서관에 배포되었다.
에피소드: 외교적 분쟁으로 번질뻔한 주한 미국대사관의 실수
필자가 국민의 정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스티븐 워렌 보즈워쓰였다.
미국은 자국산 쇠고기 수입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조야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완강히 버티는 농림부에 미 연방정부
무역대표부(USTR) 관리들과 미 대사관 직원들이 뻔질나게 찾아와 압박을 가했다.
하루는 미 무역대표부 대표라는 분(핏셔)이 보즈워쓰 미국대사를 앞세우고 장관과의 면담을 신청하였다. 이론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정통 농업경제학자인 장관에게는 먹혀들지 않자 벌떡 일어서더니 “당신이 미국의 통상정책을 사기(詐欺) 행위라고
규탄한 책을 쓴 사람인가?”라고 핏대를 올려 물어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5년전 내가 비봉출판사에서 미국의 저명한 저널
리스트 제임스 보봐드의 <미국통상정책의 기만성(The Fair Trade Fraud)>이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번역 출간한 적이 있
었는데 이를 지적한 것 같았다. 그 책에서 저자는 피해자 약소국의 외국인 보다 더 신랄하게 미국의 소위 “공정(公正)무역
행위”를 비판하고 풍부한 기만행위 사례를 폭로하였다.
마침 장관 접견실의 서가에 그 번역서가 보이길래 그 책을 뽑아 내보이며 “저널리스트 제임스 보봐드의 이 책을 말하는가?”
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한국인 교수가 미국인 책을 번역한 것이 나쁜 짓인가”라고 힐책조의 답을 하였다. 얼굴이 새빨개지
는가 싶더니 손에 들고 있던 노란 갈피의 파일을 보즈워쓰 대사 앞의 테이블에 힘껏 내던지며, “당신, 제대로 파일을 만들어!”
라고 고함을 지르고서 작별인사도 없이 접견실을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참으로 경망스럽고 무례한 비외교적 언행이었다.
그날 하루 이 해프닝을 언론에 알리고 외교적으로 문제를 삼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보즈워쓰 대사로부터 다음날 점심을
대사관저에서 함께 하자는 전화가 왔다.
그 자리에서 미합중국 주한 대사가 대한민국 국무위원 겸 농림부장관에게 공식으로 사과하였음은 물론이다. 그후 미국 정부
로부터 적어도 내 재임기간 동안에는 더 이상의 통상압력이 없었다.
“미련이 남아 다 버리지 못했네”
나는 참 책도 많이 사 모았고 머리말과 목차만 읽고 덮어 둔 책이 더 많았다. 책과 사랑 도둑질은 용서 받는다는 옛말에 따라
남의 것을 빌렸다가 돌려보내지 않은 책도 부지기수이다. 언제부터서인가, 많은 사람들과 귀한 책들을 나눠 읽을수록 가치가
더 오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에게 빌려주기도 많이 했고 필요함직한 곳에 기증도 많이 했다. 시골학교에, 지방도서관에,
외국 연구기관과 국내 신생 역사연구소에 그럭저럭 3천여권을 기증했으나. 아직도 내 서재의 사방 서가와 집 사람의 작업실
한 면에는 즐비하게 책들이 쌓여 있다. 내년이면 8순, 이제 다 버릴 때도 됐는데 무슨 미련이 남았나, 요즘은 종종 내 귀에
“책 좀 내다버려, 이사 좀 편히 가게.” 하는 환청이 진실처럼 들리곤 한다.
* 위의 글은 "녹색평론 2017. 9-10월호, 내 인생의 책(3)"에 실렸습니다.
첫댓글 <내년이면 8순, 이제 다 버릴 때도 됐는데 무슨 미련이 남았나, 요즘은 종종 내 귀에 “책 좀 내다버려, 이사 좀 편히 가게.” 하는 환청이 진실처럼 들리곤 한다. >
배움에는 끝이 없고 인생을 다하는 날까지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배움도 그 배움을 도와준 책도 인생이 다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