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얼하게 매달린 하나, 둘, 세 마리……, 달 켜자 기우뚱 기울어지는 요사채 나무 기운다 덩달아 숲 기울고 산 기운다. 나무와 나무 사이 수심 가득하던 고요 한순간 깨진다 달빛 구워낸 둥근 쟁반 위로 털 빠진 오리새끼 서너 마리 왔다가고 끙끙 연못이 체온을 올리고 있다
산란을 꿈꾸는 건 물고기가 아니다
물이다
고기는 잠들었다
물과 고기 사이를 머뭇대던 窓 하나 꺼졌다 별 하나 꺼졌다 뿔뿔이 흩어졌던 식구들 둥글게 모여 앉아 밥상이다 보름달이다 고기반찬 없이도 푸짐했던 두레밥상이다 수없이 갈라 터졌던 발꿈치 사이 자냐? 자냐? 먼 길 달려오시는 버선발 어머니, 수제비 뜨시고 덜컹덜컹 아버지 고물자전거 온다 바람 온다 물결 온다
달 하나 깬다
고향집에 숨겨둔 야한 비디오가 있다
마을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외딴 마을 그 옛날 양반이 살았다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 부엌문 옆구리에 매달려 덜거덕거리는 집 서넛 밤마다 말없이 울다가 풍각쟁이 우리 아버지 늙은 과부 치마 밑으로 손 집어넣듯 길과 길이 만나 헐떡이는 둔덕 밑으로 굴 하나 파 외지사람들 불러들이는 다리 밑에 가면 삼십 촉 알전구 하나 매달리지 않은 굴다리 밑에 가면 소젖 출렁거리며 돼지불알 덜렁거리며 구름 가는 거 바람 가는 거 몇 안 되는 영감들 정자나무 밑에 앉아 밤꽃냄새 풍기는 거 염소처럼 살다 죽은 영감 찾아 살금살금 발소리 죽인 할멈 마른 꽃무더기처럼 떠내려가는 거 밑도 끝도 없이 다 보이고 서울로 돈 벌러 간 사촌누이 어린 송아지 같은 사내 하나 양복 입혀 끌고 온 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 한 방에 모아놓고 돼지머리 눌리는 앞산 달덩이가 내 살을 다 만져본 하숙집 아줌마 궁둥짝 같은 밤이면 반짝, 머리를 열고 가로등을 켠다 미래는 아직도 불통이고 추억이란 명함 들고 먼별에서 찾아온 영혼마저 반기지 못하는 누추한 꿈이 그 옛날 어머니, 핏덩이 막내 주워왔다고 농弄치던 굴다리 밑으로 몸 굴려 나는 가만히 멀어진 첫사랑을 쑥, 꽃 한 송이로 낳는 야한 비디오 속의 눈물이 된다
김 륭(본명 김영건)
경남 진주 출생. 1988년『불교문학』신인상. 2005년 김달진문학제 제1회 월하지역문학상.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문예진흥기금(개인창작기금) 수혜
갯지렁이
김혜경
뻘 속을 다니는
힘으로 일생을 살아간다
이방인의 무심한 호미질에 허리가 끊어져도
제 집으로 돌아가 다시 마디를 키운다
눅눅하고 축축한 뻘은
갯지렁이에게 유일한 약
무상임대아파트
배 한 척 없이 살아도
맨몸으로 버티는 칠천도*
― 문디 자슥들, 객지 가모 별 수 있나
뭍으로 가고 싶은 욕망 누른
아버지 주름의 이력서가
물 빠진 뻘 가득 거친 파도를 쥐고 있다
*칠천도 : 거제도 안에 있는 작은 섬의 이름.
SK 아파트 가을
SK 아파트 화단이 경비원을 손질하고 있다
가이즈까향나무 이파리들
아스스 떨어진다
늙은 경비원은 안간힘으로
정리해야 할 나무들 잡고 있다
그때! 가을 수혈 받은 빨간 베르나 한 대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온다
누렇게 떨어진 정리해고 이파리 위로
하루가 쌩, 지나간다
툭, 하늘소자연유치원에서
아이들 까까중처럼 쏟아져 나온다
김혜경
경남 거제 출생. 2005년『시와시학』으로 데뷔. 현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시와창작 2007년 5.6월호 수록
들길 풍경
신대철
아직도 뒷문으로
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서울 끝자락으로 이사 왔다.
은빛 물살 넘치는 논 사이로
물꼬 트는 농부 곁으로
백로가 날아와 앉고
대기에 불려나온 이들이
몸속을 열며 거닐던 들길,
돼지풀만 무성할 뿐
농부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런닝머신에서 걷고
둔치에서 공원에서 걷고
길은 온종일 비어 있다.
건너 마을 덜렁수캐 하나
길에서 오락가락하다 되돌아간다.
샤먼의 집
바이칼 샤먼 발렌친의 집*
눈높이 차오르는 담장
시베리안 허스키, 흰 돼지, 검은 고양이
꽂혀 있는 삽자루에 기대어
빨갛게 익어가는 방울토마토
손수 딴 농익은 산딸기 한 접시
한참 쉬었다 찰랑이는 물결나비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길목인 옐란치 마을 삼거리에 있다.
신대철(申大澈)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와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등을 냈다.
시와창작 2007년 5.6월호 수록
청호동 아바이
정정하
아무도 살지 않던 모래 벌에
바람 숭숭 구멍 뚫린 헌 문짝 달아 놓고
바닷물처럼 간간히 밀리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목젖 늘이며 살아가는 청호동 사람들
수평선 한 쪽으로 가슴 한 쪽이 기우는 그리움에
기우는 몸 싣고 가는 갈매기 떼들에게
고시내 몇 번 하고 돌아오는 길
어느 새 바다 노을이 가슴에 번지면
마디진 한 생을 이어가듯 그물을 깁고 또 깁는다
꿈속에서도 누군가를 찾는 소리
겨울 바다보다 자식들의 가난이 더 무서워
빼꼼한 하늘 한 쪽을 지붕삼아
저녁밥 잣는 냄새에 위안을 얻었던
늙수그레한 청호동 아바이
뚫리다만 원산 행 철로 같은 이마의 깊은 골
얼마나 많은 세월을 갈아엎었을까
걸쭉한 사투리가
어릴 적 뱃길을 만들고 지우며
허공에 길을 낸다
바닷길을 연다
용접공
「e편한 세상」아파트 공사장 해는 일찍 찾아온다
임당동 인력시장에서 인부들 실려와 부려진다
말씨가 어눌한 조선족 사내,
구멍 난 철판 허방을 딛고
용접 똥 발라내는 망치질이 바쁘다
(여기는 옌벤이 아닌 내 조국)
허방을 딛고 위태로운 곳에 밥은 있었다
일당의 품팔이로 부려지는 아파트 공사장
사내는 잠 못 이루던 쪽방에서도 늘 집을 짓고
까슬한 용접자리 매끄럽게 다듬어 각을 맞추고
은화처럼 빛날 창을 만든다
(창을 내는 일은 세상과 소통하는 일)
헤어진 인연들 눈 시리게 용접하며
가슴속에 집하나 품고 있다
감색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그를 둘러싼 축포가 활활 터진다.
정정하
2001년『문학세계』로 등단
시와창작 2007년 5.6월호 수록
피오나 공주*
주선화
생리 혈을 얼굴에 문질렀더니
붉은 아이가 태어났어
바다에 던지니
불구덩이가 솟아오르고
오줌을 누니 폭우가 쏟아졌지
갑자기 쏟아진 비로 우왕좌왕
쥐새끼처럼 쥐구멍을 찾고
신이 나
손뼉을 쳤지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지
나무가 갈라지고 배가 뒤집혔어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어
세상은 암흑이었어
별과 달과 해와 구름까지 사라져버렸어
피오나 공주처럼
미녀였다 괴물이었어
그때부터 전쟁이었어
해도 달도 없는
너도 나도 없는
생리가 온 그날부터
*피오나 공주 : 애니메이션 <슈렉>의 피오나 공주. 낮엔 미녀 밤엔 괴물
오 ! 즐거운 인생
1
사람 먹은 돼지는 돼지가 사람이고 사람이 돼지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나 돼지로만 보이나
한 마리만 더 잡으면 오십이라 했다. 경찰이 밝혀낸 바로는 스물아홉,
원통했다, 한 마리만, 한 마리만, 더 더 더 부르짖었다
돼지는 꿀꿀꿀 울지 않는다
엉엉엉 울지 않는다
희벌떡 실실실 자꾸만 실실실
돼지가게는 사람들로 꿀꿀꿀 꿀꿀꿀
도끼든 백설 공주가 그립고 망치든 신데렐라가 그립고
팥쥐 머리를 쿵쿵쿵 내려치는 콩쥐가 그립다
동서병원 길목마다 도끼자루 망치자루 톱날까지 날아다니고
겅중겅중 돼지가 뛰어다니고 사람이 날아다닌다
돼지도 날아가며 사람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크윽~
신트림 길게 하며
입술을 스윽~
2
TV 보지 마 엄마의 잔소리 오늘도 시작이다
방문 꽁꽁 걸어 잠그고 손목도 그어보고 발목도 그어본다
나는야 슈퍼우먼
예쁜 얼굴이 미워 고통 없이 죽고 싶어 수면제 사 모으고
병원 응급실 내 방처럼,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그만 살고 싶다
나는야 슈퍼우먼
애면글면 너 하나 보고 산다. 엄마의 잔소리 오늘도 시작이다
자가용 타고 학교 가고 자가용으로 하교 하는 24시 보디가드 울 엄마
나는야 슈퍼우먼
주선화
경주 감포 출생. 마산대 시창작 수료. 띠앗문학회 회원.『시와창작』시부문 신인상 수상
시와창작 2007년 5.6월호 수록
퇴고를 하다가
유안진
제 스스로를 불태워줄 한 마디를 만나면
사람이 될 구미호처럼
글줄 속에 매복한 말꼬투리를 노린다
붙잡히는 그 자리에서 악센트로 둔갑시키려고
읽어 가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나라는 글자 하나를 지우니 한결 깔끔해진 듯
사진에서 나를 가리우니 군더더기 없어졌듯이
나를 빼버리니 흐름이 조금 매끄러운 듯하다
세상에 나 있어 무슨 악세사리가 되던가
보리밭의 깜부기처럼 조화로워지던가
밥숟가락의 늬처럼
문장 가운데 오자(誤字)처럼
지당하신 말씀에 딴지를 걸고넘어지는 듯
짜임새 좋은 정원에도 끼여 크는 찔레처럼.
백년손님이 기다리는 백년손님은
소설 <손님>을 읽고 오늘 시집 <손님>을 읽으니, 손님들이 생각난다
첫 숟가락을 뜨기도 전에 동냥그릇에 엎어주던 어머니 밥은 늘 손님밥이었
지, 내 집을 찾아오는 누구나 손님이던 그때
내 며느리 애 낳기는 오두백(烏頭白)에 마생각(馬生角)이라고 탄식하던 친척할매에겐 여자의 생리는 몸손님이었지
마마손님으로 아들 둘을 잃은 어머니에게, 다들 대역 소역(大疫小疫) 다 치러야 내 자식이라고 아리송하게 위로들 했지
조선시대 끝 편이었지, “이러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내외벽(內外壁) 뒤에 숨은 어머니는 “아바임께오선 출타중이신데 어디서 오신 뉘시냐고 여쭤라”라고 했으니, 쥐뿔도 없던 가난에도 손님 비는 날 없었고
가끔씩 과객도 여러 날 머물곤 했지, 문전축객(門前逐客)을 못하던 그때는 과객의 친기상(親忌床)도 차려 귀신손님까지 꼽배기로 치렀는데, 공비(共匪) 덕분에 없어졌으나, 어물과 손님은 사흘 지나면 냄새난다는 말도 생길 정도로, 하루가 멀게 드는 손님 모두에게 행재로 주는 작은 여비를 꾸러 심부름도 여러 번 다녔지만
뭐니뭐니해도 사돈보다 어려운 손님은 없다고들 했지, 사돈댁에서 오면 누구나 귀객(貴客)이어서, 별식에다 들러리로 친척들까지 대접했으니 온 문중이 초긴장했었지
밤손님도 몇 번 든 적 있었지, 개도 안 짖었는데 쌀가마니 고추자루, 제수곶감까지 없어졌으니, 쥐도 서생원(鼠生員)이라던 그때는 도둑은 밤손님이나 양상군자라고도 불렀지
누구나 이 세상의 백년손님으로 왔다 가지만, 백년지객은 역시 서랑(壻郞)이라, 버선발로 달려가 반긴 사위라도 대접하느라 허리가 휜 장모들은 “백년손님도 앞꼭지보다 뒷꼭지가 더 반갑다”고들 했지만
허리가 휠 땐 휘더라도 백년손님을 고대한다, 앞꼭지 뒷꼭지를 보며 입이 귀밑에 걸리도록 웃어대고 싶다.
유안진
65, 66, 67년 3회 추천으로『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첫 시집 <달하>를 비롯하여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다보탑을 줍다> 등 12권의 신작시집과 미래사 시인선으로 <빈 가슴을 채울 한마디>를 비롯하여 12권의 시선집을 상재
시와창작 2007년 5.6월호 수록
오디 /이소리
분이가 나랑 *반쭈깨미 하면서
징검다리 건너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그 가시나의 마음은 뽕잎빛이었다
분이가 하얀 칼라 빛나는 교복을 입고
*북채밭 지나 중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그 가시나의 얼굴은 누에빛이었다
분이의 앞가슴과 엉덩이가 제법 튀어나오고
미니버스를 타고 여고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그 가시나의 볼우물은 설익은 산딸기처럼 연붉은빛이었다
분이가 여고를 힘겹게 졸업하고
대학 대신 바깥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 가시나의 입술이 흑장미처럼 검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분이가 나이 열아홉에 이웃마을 총각과
첫 선을 보던 그해 유월 햇살 따가운 날
그 가시나가 보따리 하나 달랑 손에 들고 집을 나갔다
분이가 살던 오두막집 장독대에선
오늘도 그 가시나의 까아만 눈동자를 빼다 박은
오디가 자줏빛 눈빛을 또로록 또로록 굴리고 있는데
*반주깨미 : 소꿉장난의 경상도 말 *북채밭 : 북쪽에 있는 채소밭
단 소리 쓴 소리
옛 사람들은
좀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면
천하의 양반이라 했다
얼마 전 사람들은
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뺄갱이라 했다
요즈음 사람들은
좀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면
국회로 나가라 한다
시를 쓴다고 하면
술이 잔뜩 취했다거나
얼빠진 놈이라 한다
이소리
1959년 창원 상남에서 태어나 1980년『씨알의소리』에 시 <개마고원>, <13월의 바다>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노동의 불꽃으로>, <홀로 빛나는 눈동자>,<어머니 누가 저 흔들리는 강물을 잠재웁니까>, <바람과 깃발>이 있다.
시와창작 2007년 5.6월호 수록
감시카메라 아래에서의 생
이승하
너의 일과가 낱낱이 감시받고 있어
기상 시간부터 취침 시간까지?
아니, 요람에서 무덤까지
옷을 입을 때 옷을 벗을 때
하품을 할 때 재채기를 할 때
밥을 먹을 때 배설을 할 때
너를 보는 눈, 눈들이 있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너의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어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전송이 되지
네 약점을 아는 자들이
네 치부를 들여다본 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너는
그런 적이 없다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너는 이미 네가 아냐
이 병원을 나가고 싶으면
우리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관 계
시간은 늘 통제 불능이다 제멋대로 날뛰는
광견 같은 시간 투우장의 투우 같은 시간
― 약 먹을 시간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아기들이 얼마
나 많을까
지금 이 순간
자살을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음독 투신 발사
지금 이 순간
발작을 시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자살 직전에 말하리라 “죽고 싶진 않아.”
자살 직후에 말하리라 “죽어도 행복해지진 않아.”
너와 나와의 관계가
하루를 길게 할 수도 있고 짧게 할 수도 있으리
너와 나와의 관계가
비밀에 부쳐지길 바라지만 폭로되고
개선되기를 바라지만 악화된다
― 약 먹을 시간입니다
엿 먹을!
창문 곁에 서서 하늘을 보고 싶다
무한천공을 나는 새들을 보면
공중 부양하는 기분이 들 텐데
여기는 벽 안
나는 격리되어 있고 언제나
진단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
이승하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김천에서 성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등. 시론집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 <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 등
시와창작 2007년 5.6월호 수록
시간의 힘
― 다시 운주사
임동확
오랜만에 다시 찾은 화순 운주사 한 구석
바위너설 아래로 흘러내리는 석간수 따라
돋아난 푸른 이끼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이 나란히 기념사진 찍듯이 도열해 있는
돌부처들의 허름한 대좌를 감추고 있다
겨우 흉내 내다만 눈과 입, 그리고 급하게 쪼아 내린
코와 기다란 두 귀가 전부인 석불들의 처진 어깨와
떨어져 나간 보관(寶冠)의 민머리 위로
밤새 들이닥친 눈송이들이 내려앉아 있다
그날에도, 그 이후에도 여전히 미완성일 뿐일
천불천탑의 조성은 애당초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는 듯
영영 일어날 줄 모르는 와불 위로 철새들이
더러 흰 새똥을 떨어Em리며 날아가고
무너지고 또 쌓기를 반복하는 동안 사라지거나
짝이 뒤틀린 석탑들 사이 거센 바람과
흰 구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가며 흘러간
역사의 모든 과오와 미숙을 쓰다듬고 있다
오직 시간만이 끝내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오래 연장하며 완성할 뿐이라는 듯 얼굴 형체마저
희미한 탑신마다 바위솔이 검버섯처럼 피어 있다
지상에 남은 최후의 석공은 단지 세월뿐이라는 듯
마애불 위로 담쟁이덩굴이 찰싹 엉겨 붙어 있다
단소 부는 사내
공자가 신자유주의 공화국 연간의 한국을 방문해 인사동 지나다가 학고재 앞에서 단소 부는 댕기머리 청년 앞에 멈춰 서서 말하길, “아름답구나. 그러나 지금 어느 누가 이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단 말이냐. 봉황이 짝지어 춤추기는커녕 참새 한 마리 모여들지 않으니, 언제부터 이 나라의 인심이 이토록 각박해졌다는 말이냐.”
안내자가 실망한 눈빛의 그를 위해 ‘산조’를 한 곡 청하니 공자가 홀로 탄식하길, “저 음악이 마치 창자를 끊고 나오는 듯하는도다. 필시 이는 분란 끊이질 않은 나라의 놀라고 눌린 자들의 삭고 삭은 가슴들이 토해내는 한숨 소리 같구나.”
오랜만에 옹기종기 모여든 구경꾼들에 신이 난 단소 행상 청년이 자청하여 한 곡을 더 들려주니, “때로 소리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여유가 없으니, 온 백성들이 눈만 뜨면 온통 경제타령, 돈벌이 미쳐 있으니 백성들이 한가한 날이 없겠더라.”
공자가 이어 크게 장탄식하며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더니, “눈치 빠르지 못한 자는 도태당하고 협잡꾼들만 미국자리공처럼 악착같이 살아남는 실용주의 만능 시대구나. 다행히 동해안가의 천년 묵은 호죽뿌리로 만든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어 분다면, 만국의 병마와 창칼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버림받지 않는 태평성대가 돌아오리라.” 이르더라.
임동확
광주 출생. 서강대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 시작. 이후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 등 여러 시집과 시화집, 산문집, 시론집이 있다 .현재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겸임)로 재직중
시와창작 2007년 5.6월호 수록
배고픈 다리는 날개를 먹고 산다
홍일표
장위동 드림랜드 앞을 지날 때
비둘기 서너 마리 도로 위를 무단 횡단한다
빨간 불 앞에 얌전히 발 묶여 서 있을 때
눈앞에서 나 보란 듯 날아간다
똑같은 목숨인데
행려의 방식이 다르다
태양의 붉은 심장을 겨누는 나무처럼
굶주린 다리는 하늘을 더듬어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지상의 길을 버리고
허공의 창을 두드리는 눈부신 날개와
길에 박힌 다리의 경계,
불안, 불안 장위동 고개를 넘어 간다
아침저녁마다 나는 이 고개를 넘고
미아리 고개까지 꾸역꾸역 삼킨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산 같지 않다
산은 수풀 무성한 고전(古典),
고전과 벌거숭이 오늘 사이에서 나는 자주 고전(苦戰)한다
그때마다 꽉 막힌 울화통 밖으로 날아가는 비둘기가
한 점 희망일 때
나는 신호등처럼 깜박이며
길 건너 풍경을 팽팽히 잡아당긴다
칸나꽃으로 걸어가는 어름산이
한 발 한 발 허공의 지뢰밭을 건너는
줄타기는
불륜이다
요염하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매 순간 스스로를 칼날 위에 세우는
시퍼런 정신이다
낮고 탄탄한 길,
가장 확실한 눈앞의 푯대를 버리고
버리고,
가슴 떨며 첫 새벽에 만나는
달콤한 혀
은밀한 속삼임
진저리치며 걸어온 길을 내던지고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을 들녘 어느 외진 구석에서
황홀하게 피 흘리며 죽어갈
위험한 짐승
홍일표
1988년『심상』신인상.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안개, 그 사랑법>,<순환선>, <혼자 가는 길>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