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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신학자료 스크랩 이스라엘 왕조 형성의 배경 연구
에셀나무 추천 0 조회 16 14.05.09 11: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스라엘 왕조 형성의 배경 연구

 

류재린  

 

목   차


Ⅰ. 서  론…………………………………………………………………………………………………1

1)연구동기 및 목적 ……………………………………………………………………………………1

2)연구 방법………………………………………………………………………………………………3

Ⅱ. 왕국시대 태동의 역사적 배경…………………………………………………………………… 4

1)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결성과 명칭……………………………………………………4

2)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특성……………………………………………………………5

3)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결속력…………………………………………………………5

4)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신앙 내용의 3대주제……………………………………… 6

5)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쇠퇴……………………………………………………………6

   (1) 정치적 압력증대와 동맹체의 취약점…………………………………………………………7

   (2) 지파간의 갈등……………………………………………………………………………………7

   (3) 지도자의 빈곤……………………………………………………………………………………7

   (4) 제사장 계급(종교지도자)의 타락…………………………………………………………… 7

   (5) 블레셋의 빈번한 침략………………………………………………………………………… 7

. 왕정제도의 형성과정……………………………………………………………………………… 8

1) 왕정제도(王政制度)의 시도……………………………………………………………………… 8

2) 선지자 사무엘의 역할………………………………………………………………………………8

3) 왕정제도(王政制度)에 대한견해………………………………………………………………… 9

Ⅳ. 통일왕국의 시작……………………………………………………………………………………13

1) 초대 왕 사울의 진통과 종말…………………………………………………………………… 13

2) 사울 시대의 다윗의 행보…………………………………………………………………………13

3) 다윗 왕국의 완성………………………………………………………………………………… 15

4) 새로운 수도 예루살렘…………………………………………………………………………… 16

5) 다윗의 정복 전쟁………………………………………………………………………………… 17

6) 다윗 제국 실현…………………………………………………………………………………… 18

7) 다윗 생애 말년의 시련……………………………………………………………………………18

Ⅴ. 결  론……………………………………………………………………………………………… 21

※ 참고 문헌………………………………………………………………………………………… 23





Ⅰ.서  론


1) 연구동기 및 목적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조 형성 과정과 왕조형태의 연구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가운데 다윗왕조는 메시아 왕권과 연결되며, 그의 왕조는 전성기를 누린다. 뿐만 아니라 다윗 왕조는 메시아 왕국의 구속사적 성취에 있어서 구약 전체와 연결된다. 야웨께서 언약하신 것은 창세기 3장15절에서 부터 나타나는데, 이는 메시아 왕국이 출현하면 반드시 이룩될 언약의 성취로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형벌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 졌던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이 구원으로 이루어진다는 약속인데, 마침내 이러한 야웨의 구속사적 계약의 이행의 흐름 속에서 살펴 볼때에 장차 도래될 메시야 왕국의 모형인 이스라엘 왕조를 연구함에 있어서 특히 다윗왕조를 정점으로 한 이스라엘 왕조 형성의 과정을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다. 구약 전체의 흐름속에서 살펴보면 첫째로 다윗 계약 전승(다윗 선택)을 살펴 볼수 있는데, 이는 다윗왕을 선택한 이후 다윗왕의 궁전에서 형성된 삼하 7장의 나단의 신탁은 다윗 왕조를 정당화 시킨다. 이것이 후대에 와서 다윗 왕조의 정당성을 세운다. 다윗 왕조는 영원해야 하므로, 솔로몬이 죽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움 받았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비정통 왕국이 된다. 그래서 남북 분열의 근본적인 근거는 야웨의 계약 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1) 둘째로, 시온 전승(예루살렘 선택)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야웨께서 시온산을 택하시어 지상 통치의 장소로 삼고 백성 가운데 영원히 거하신다는 약속이다. 다윗이 성소를 이곳에 세우고 법궤를 옮김으로 이 약속이 더 확실해 졌다. 이 두 가지가 종말론적 메시아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윗 왕조가 망해도 이것은 종말론적 메시아 사상으로 바뀐다. 다윗 왕조의 붕괴라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예언자들은 메시아 사상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절박할 때 예수님이 오셨는데, 유대인들은 영광스러운 재림의 예수만 생각하고 초림의 예수는 모르고, 그분을 부인했다.

이스라엘의 왕권 사상은 다윗에 대한 선택과 예루살렘에 대한 선택을 주제로 삼고 있다. 다윗은 많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예루살렘 왕이 된다. 그는 여부스 족을 쳐부수고 예루살렘 성을 다윗 성이라 하였다. 사울이 죽자, 그는 7년간 유다의 왕이 된다. 그후 이스라엘의 이 된다. 이것이 다윗이 왕권을 장악하는 과정이다. 사울 왕권이 단명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의 왕이 유다 지파의 다윗인데,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씨 흐름은 유다로 통한다. 그러므로 이 지파가 아니면 구속사에 끼어들 수 없다. 그러나 다윗 왕조 형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울을 일으키신 것이다.

  창15에 아브라함 계약(씨, 땅, 천하만민 가운데 복, 이것이 다윗과 솔로몬 왕 때에 이루어진다.)에 나타난 영토에 대해 묘사(유프라테스, 홍해, 지중해=대해)는 그 당시 다윗 왕국은 제국 이었음을 보여준다. 다윗 왕국 때에 구약의 거의 모든 것이 성취된다. 그러므로 그의 왕국은 메시아 왕국이다.2) 그러나 그 이후 다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언약의 성취는 다시 메시아 왕국이 임할 때, 성취될 것이다. 사울과는 달리, 다윗은 처음부터 정치적 힘을 가지고 역사상 가장 강한 제국을 형성하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을 한 이후, 예루살렘 성(다윗 성)에 통치권을 형성하자(삼하),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은 것을 말하며 그는 늘 성전 건축의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법궤를 가져온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의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정치와 종교, 사회의 중앙 집권화를 만든 것이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이것은 종교의 중앙집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은 정치, 사회, 종교, 경제의 중앙집권을 이루게 된다. 다윗은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장악했다. 그래서 벱궤를 옮긴 것이다. 그의 왕조는 기반을 세우고 이 제국을 강력하게 형성하여 두고두고 최고의 성군으로 기억되며 그의 왕권은 메시아 왕권까지 연결되고 있다.3)

왕국 시대의 종교는 예언자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 종교에서 지켜온 제의 규레를 더욱 확대하여 복잡하게 지켰던 시대 이기도 하다. 성막 성소가 예루살렘에 고정된 성전(Temple)으로 대치되고 축제일, 혹은 절기도 기본적인 것에 몇 가지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하여 첨가된 절기들을 지켰다. 제사는 율법에 규정된 의식을 가지고 더욱 전문화 되고 거대해진 제사장 계급에 의해 준행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왕이 어떠한 야웨 신앙을 가졌느냐에 따라 이스라엘 종교는 상당한 영향을 받아 운명이 좌우되었다.4) 이에 본 소 논문은 다윗왕조 까지 이르는 이스라엘 왕조형성 과정에 나타난 제반 상황과 그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서 구속사적 ‘씨’ 흐름의 맥락을 연구함에 있다. 

2) 연구 방법


  이스라엘 왕조 형성의 배경 연구를 함에 있어서, 왕조형성 이전의 시기의 상황 변동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선, 왕국시대의 태동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선 살펴 보아야 할 과제는, 여호수아 장군을 필두로한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다스리고 지배하고 이끌어 갔던 이스라엘의 12 지파 동맹체의 태동의 역사적 배경과 그들이 갖고 있는 특성, 그리고 결속력, 아울러 그들이 행동의 필요주체 사상과 변천의 과정을 연구하고 흐름을 파악하여 이스라엘 왕국이 태동 되어야하는 이유를 지파 동맹체의 쇠퇴 이유로서 살펴보고, 이러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무엘의 역할을 

검토한 다음, 왕정제도(王政制度)에 대한견해, 통일왕국의 시작의 과정을 살표본 다음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Ⅱ. 왕국 시대 태동의 역사적 배경


1) 이스라엘 12 지파 동맹 체제의 결성과 명칭


  이스라엘에 있어서 12지파 동맹체의 생활과 신앙의 실제 내용을 전달 할 수 있는 자료로서는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상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이스라엘의 12지파 동맹체의 신앙들에 한 섬광을 제시하고 보존하고 있는 것이 신명기 6:20-25; 26:5-10과 여호수아 24:2-13이다.5)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받은 백성, 한 백성, 곧 야웨의 백성(a people, the people of Yahwe) 이라 불렀다. 이는 국가(Nation)라는 말과는 다르다. 백성이란 반드시 국가가 가지는 영토와 국가, 그리고 정체(正體)로 칭해지는 정치적 실체를 꼭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백성(people)을 종교의식, 심판이행, 그리고 전쟁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는 ‘남자들의 총회’(the assembly of men)로 건장한 남자들로 구성된 모임 이었다.6)

야웨의 백성은 이스라엘이란 명칭으로 불려졌다.7)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가나안에 살았고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각 지파는 그들의 독립된 존재로 계속 유지 하면서, 지파 동맹체의 훈령에 직접 위배되지 않는 영역에서 자신들의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이 이스라엘의 지파 동맹체에 고대 희랍의 역사에 나오는 ‘Amphictyony'8)란 말을 기술적인 용어로서 적용시킨 사람은 마틴 노트(Martin Noth)였다.9)

마틴 노트가 본 이 Amphictyony의 삶의 양식을 보면;

① 중앙신전이 그 핵심적 요소이고,

② 전 회원국 간의 윤번제로 정기적인 의무가 주어지는데, 신전을 부양하는 것이며,

③ 지파나 회원국간의 발생하는 문제 해결을 위해 지파(회원국) 대표자 회의가 있었고,

④ 정기적인 축제 모임이 있었다.10)

여기서 상호 결속의 의무가 어긋날 때 성전(聖戰)이 선포 되었다. 노트는 “이런 고대 희랍이나 이태리의 앰픽티오니11)가 국가 형성 이전 상태의 산물이며 이는 연대기적 차원이 아닌 실질적인 차원에서 전 국가적 산물 (前 國家的 産物)이다 라고 규정한다.12)

또한, 노트는 이스라엘의 지파 조직 역시 전 국가적 산물로써 희랍과 이태리의 앰팩티오니와 유사하다고 봐서, 구약의 다양한 12지파 조직 목록은 전국가 시대에 형성된 고대 이스라엘의 앰팩티오니(Amphictyony) 제도에서 유래한 것이라 판정하여, 그는 이스라엘의 12지파 동맹체를 Amphictyony라 명명했다. 하여튼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 즉 군주국가가 건설되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상호 결속시키며, 동일성과 입체감을 갖게 했던 지파 연합체 조직 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 해야한다.13)


2)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특성 


① 한 조상을 통한 혈연적 통일성을 강조한 면이 없지 않으며, 기원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하나님의 명령에 두고 있다.14)

② 이스라엘은 한곳에 고정된 성소가 아니라, 원래는 광야에서는 움직이는 성소였고, 가나안에서도 세겜, 벧엘, 길갈, 실로, 등으로 법궤가 옮겨 졌는데, 법궤가 있는곳에는 야웨 하나님이 현존(現存) 하신다고 보기 때문이다. 

③ 이스라엘의 성소 중심의 제의(祭儀)는 정치적 성격 보다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계약 관계 체결에 의한 종교적, 도덕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15)

④ 성소에서 이스라엘의 예배 목적은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 다짐하는 종교적인 것으로, 신앙이 지파 동맹체의 구성 요소 였다.

⑤ 헬라와 이태리의 앰팩티오니 에서는 정치적 목적에서 각 동맹체의 신을 인정 하기도 하나, 이스라엘 지파 동맹체는 어떠한 경우이건 타신(他神)을 인정 하거나 용납할 수 없고, 오직 유일신 야웨 신앙만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앰팩티오니는 이런 유일신 신앙에 기반한 거룩한 기구였다.16) 하나님의 법에 그들 자신을 예속 시켰다는 17)점니 일반적인 앰팩티오니와 다른 점이다. 


3)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결속력(結束力)


이스라엘 12지파가 한 하나님을 중심으로 단합되는 데에 무엇이 작용했는가? 그것은 ‘족장전승’, ‘출애굽 전승’, ‘광야 방랑 전승’, ‘가나안 정복 전승’의 내용을 함축 하고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 고백이다.(신6:20-24; 26:5-9 등),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고 행하고 계시고 행하실 것 이라는 신앙 고백이 바로 이스라엘 지파들을 결속케 했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지배했던 ‘케류그마’(Kerygma)였다.18) 예를들어, 여호수아서 24장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을 결속시키는 3가지 요소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① 한 장소-한 성소-공동 성소:잇라엘 사람들이 한 장소, 한 자리에 모였다.

② 한 제도(기구)-한 의식-공동 제의(祭儀):하나의 의식, 혹은 하나의 행사에 참예 하였었다. 

③ 한 케류그마-한 하나님-공동신앙:온 회중을 한 하나님께로 충성을 다짐 시키는 설교가 있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의 조상-공동조상과 특별 관게에 있는 것을 선언하여 이스라엘의 연대성을 강조한다.19)


4)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신앙내용의 3대 주제20)


① 야웨의 계시(The Revelation of Yahweh)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자신과 그 이름을 이스라엘에게 계시 하셨다고 확고히 믿었다. 야웨의 자기 계시의 구체적 사실은 구약에 계속적으로 나타나는데, ㉠ 야웨의 이름과 속성 ㉡ 야웨의 행위 ㉢ 야웨의 뜻이 계시된다고 본다.

② 야웨의 백성인 이스라엘(Israel as the Peole of Yahweh)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선택 했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백성, 즉 하나님이 노예로 압박받던 이집트인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신 백성이다. 그리고,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계약백성(a covernant people) dlek. 이스라엘은 계약에 의해 야웨 백성의 신분과 특권을 알게 된다.

③ 이스라엘에 허락된 야웨의 땅, 가나안(Canaan as Yahweh's Land assigned to Israel)

    이스라엘은,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소유하도록 특권을 허락받은 소유지라고 고백한다. 즉, ㉠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야웨의 소유지이며, ㉡ 족장들에게 맺은 약속들의 성취로서 주어진 것이다.

가나안은 계속해서 야웨의 주목과 관심을 받아왔고(신11:12), 하나님의 섭리적 배려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불려진다.

이스라엘은 야웨의 구원 행위라는 구심력(求心力)에 의한 공동 계약을 중심으로 뭉쳤으나, 이런 구심력을 약화 시키는 원심력의 힘도 대단했다. 즉, 지파 사이의 경쟁, 지도권 쟁탈, 기아와 갈증, 신뢰의 결여 등 인간적인 요인들 이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계약 신앙을 바탕으로 광야의 경험을 회고하고, 야웨께서 이런 시련을 통해 자기들 앞에 놓인 역사적 과업을 가르치고, 또 일치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21)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계약으로 맺어진 동맹체로써 “하나님 통치 하소서” 라는 말로도 번역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명칭에서 암시 하듯이 신정적인 공동체(Theocratic community:神政的 共同體)였다.22)

 

5) 이스라엘 12지파 동맹 체제의 쇠퇴


이스라엘의 지파 동맹으로 종말을 고하게 한 위기는 11세기(B.C)후반기에 닥쳤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전면적 개혁과 더불어 당시 세계의 강국중에 하나로 부상 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에 걸쳐 가장 뜻있는 시대중의 하나가 되었다.23) 이스라엘 지파동맹체는 약200년24) 간 존속하여 오다가, 다음과 같은 이유와 상황에 따라 쇠퇴하고 왕정으로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1) 정치적 압력증대와 동맹체의 취약점

국제적 외교 관계와 국내적 상호 관계에 여러 가지 문제가 변수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압력이 증대되었고, 이러한 압력이 점증될수록 지파 동맹체의 취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군대를 이끌고 대거 침입하려는 위기에 처하여드보라의 소집 요구에 응한 부족은 반절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외세의 침략압에 전체적 결 속의 취약점이 노출되었다.25) 입다가 암몬 사람을 대적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 사람들은 힘을 합하지 않았다.결국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신정제도의 한계상이 드러났다. 각 지파는 그 성격상 독립성이 강했다.


(2) 지파간의 갈등

절대 권위의 사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정이 있는 듯 했으나, 지속적 평화가 보장되지 못했다. 사사들의 지도력도 부분적인 것에 그치는 수가 많았다. 지파간의 갈 등의 이유는 지리적 차이에서 오는 것도 있었다. 요단 동편의 문제와 팔레스틴 안의 문제의 관심사가 다를수 있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의 여행이 높은 산맥에 의해 제한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지방적인 방언이 나타나고, 풍습과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가장 큰 지파간의 불화는, 베냐민이 레위인의 첩을 살해한 사건이 확대되어 그 외의 지파들이 베냐민 남자들을 거의 몰살 하다시피 햇던 사건이다.26)


(3) 지도자의 빈곤

사무엘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뒤 따르는 정치, 종교적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 조차 사무엘의 길을 따르지 않아서 대중들에게 실망을 주었다.27) 오히려 다른 나라의 왕이 더 좋을 것 같이 보일 정도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빈곤이 심각했다.(삼상8:4-5)


(4) 제사장 계급(종교지도자)의 타락 

사사 시대의 말기 시대상이 사무엘 상 2,3장에 기록되고 있다. 제사장 엘리는 늙고 눈이 어둡고, 그의 아들들은 불량자로 언급이 된다.(삼상2:12). 그때에는 야웨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삼상3:1) 결국 불레셋과의 전투 때에 법궤를 실로로부터 정장(戰場)에 모셔 왔다가 할레 받지 못한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엘 리가 목이 부러져 죽음으로 중앙 성소인 실로가 망하고 만다. 이 때부터 실로에 대한 언급이 사라져 버린다.28)


(5) 블레셋의 빈번한 침략

블레셋은 팔레스틴 남부 해안 평야에 정착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계속 위협했다. 철무기로 무장했고, 그들의 주신(主神)은 다곤(Dagon)이었다. 블레셋은 실로를 대파(大破)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 인도한다는 상징이던 계약의 궤인 법궤를 탈취 당했다. 블레셋은 가나안에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는데 더욱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이 블레셋의 위협이 이스라엘의 왕정 요구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29)

Ⅲ. 왕정제도의 형성과정


1. 왕정제도(王政制度)의 시도


사사 시대에 이미 왕정 제도에 대한 시도가 있었다. 카리스마적 영도력을 발휘하여 유목민의 침입과 미디안 족을 격퇴한 기드온은 사사 중에서도 영웅적 인기가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기드온은 왕권을 수락하라는 부탁을 받는다. “당신과 당신의 자자손손이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 (삿8:22)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을 왕으로 세우려고, 세습적인 군주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한다. 이에 대하여, 기드온은 군주 제도를 거절하고, 이스라엘의 신정제도(Theocracy)를 천명했다.30)

   “내가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야웨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두 번째는, 기드온의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 사건이다. 기드온이 죽자 아비멜렉이 세겜의 외가로 가서 세겜의 혈족임을 상기 시키며, 외가의 도움으로 왕이 되려고 한다. 그는 세겜 성 안에 있던 바알브릿(계약의 주님) 신전의 사제31)들로부터 자금을 얻어 건달패들을 사들인다. 아비멜렉은 그들로 더불어 자기의 적수라 생각되는 그의 형제 70명을 모두 죽였다. 그때 막내 동생인 요담만이 겨우 살아 남았다.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한 후, 세겜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자 3년동안 세겜을 중심으로한 지역을 통치한다. 요담은 나무 우화를 가지고 공격하여 지파 동맹체의 내부의 보수파들의 왕정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강하게 나타낸다. 방종한 아비멜렉의 행동에 세겜인들은 등을 돌리고, 유랑 무리의 지도자 가알(Gaal)  에게 지도가 되기를 요청하여 아비멜렉과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아비멜렉이 승리 했으나,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내려뜨린 멧돌에 의해서 살해된다. 여기서 혁명의 불길이 다른 지방에도 번져가게 된다.

당시의 이런 여러 여건과 더불어 지파동맹의 막이 내리고, 강력한 중앙 집권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2. 선지자 사무엘의 역할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 위기 때마다 인물이 나타난다. 사무엘 출생 때, 이스라엘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민족 지도자가 없는 상태였다. 그는 레위지파(에브라임 지파 라고 나오는 경우 있는데, 이는 레위 지파가 각 지파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이다-사무엘이 이 에브라임지파 가운데 있었다.)

  사무엘은 나실인으로 성별 되어지면서 성장한다. 나실인은 어느 기간 동안 헌신하는 수도 있고, 평생 바쳐지기도 한다. 그는 성소에서 자라고 엘리의 문하생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당시 중심지인 실로 성막에서 부패한 민족의 현실을 경험 하였으며, 여기서 신앙의 어머니의 독실한 영향을 많이 받았고, 박식한 엘리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종교와 사회의 중심지 실로라는 곳이 부패하고 실의에 처한 민족의 현실 앞에 사명을 느낀다. 32)

사무엘의 소명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33) 처음에는 엘리의 음성으로 착각하고 그에게 간다. 하나님께 물어야 할 궁극적 문제는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여러번 있었지만, 그는 몰랐는데, 여기에는 잘못된 엘리의 가르침이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 후 하나님의 현현 하심과, 부르심34)에 응답을 하고 사명을 하달 받는다.

이스라엘 종교와 역사에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맞먹는 위치를 점하는 인물이 바로 사무엘이다. 사무엘(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뜻)은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아버지 엘가나와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35)로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이면서, 왕국 건설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왕국 시대의 예언자, 종교의 효시를 이루는 인물이기도 했다.36)

신정국가 체계에서 왕정국가 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무엘은, 다음과 같은 직능을 가지고 과도기적 기간을 이끌어 갔다.

① 군사 지도자적 직능 (Military Function)

② 제판적, 사법적 직능(Judisial Function)

③ 제의적 직능(Ritual Function) 

이상의 직능을 종합하여(Combined Function) 가졌던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과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이끌어 갔다.이 직능들은 나중에 군주국가(君主國家)가 형성되자, 재능과 직분에 따라 다음의 3가지 역할로 가각 나누어 진다.37)

① 군사 지도자의 정치 분야 → 왕(다윗 계약 : 영원한 왕조 계약으로 발전) 

② 사법적 재판의 기능의 분야 에서는 예언자 직능(아브라함, 모세, 계약으로 복귀시도)

③ 제의적 기능은 전적으로 제사장(레위 지파 계약 : 레8장-10장) 기능의 활성화로 분산되었다. 그러다가 예언자의 기능은 구체적이고 독특한 운동으로 발전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점에서 예언자요 제사장이며, 사사였던 사무엘은 모세 이후, 이스라엘의 최고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이 역할로보아 예언자적 영역에 더욱 강조가 주어 지면서,이 때부터 예언자가 이스라엘인들의 셍활에 막중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치적 지도자로서는 왕이 세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되었다.38)


3. 왕정제도(王政制度)에 대한견해


사무엘의 영도력에 관한 기사가 사무엘상 1-14장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왕정제도 형성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전승이 나타난다.

가) 긍정적 견해 : 사울전승39)(삼상 9:1-10; 11:1-11; 13:2-14:46)

  여기에는 군주정치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묘사되고 있다. 즉, 사무엘은 블레셋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베냐민 지파의 사울에게 기름 붓도록 야웨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신명기 17;1-20에 의하면,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 게획 밖의 일이 아니였다.


     “네가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야웨의 택하시;ㄴ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17:14)


  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께 반역이라든가, 하나님이 못 마땅해 하는 일이 아니라, 허락된 일로 암시가 된다. 여기에 의하면, 다만 왕을 세울 적당한 시기가 언제냐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 시기까지 이스라엘의 통치는 요셉프스가 말한 소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께 속한 신정(神政) 이었다.40) 사울 전승에 의하면, 왕을 옹립하는데 하나님이 싫어 했다는 암시가 없고, 사무엘도 솔선하여 사울을 왕으로 선택했다.

나) 부정적 견해 : 사무엘 전승41)(신정문서:삼상 7:3-8:22; 10:17-27; 12:1-25)

  여기에는 백성이 왕을 요청하는 것이 야웨의 왕권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  국내적, 국제적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자, 주위 여러 나라를 모방하여 안정된 정치적 정부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것은, 사사직이 세습적인 제도로 바꾸어져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의 후계자로 세워지자, 사사들의 권위와 능력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생긴 반응이다. 영웅적 사사들은 성소를 순회하며, 법적 분쟁을 조정하기도 하고(삼상7:15-17), 군사적 힘은 아니지만 기도와 제의로 블레셋을 무찌르기도 하였다.42)(삼상7:5-14). 그러나 사사들의 역할에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신앙적 해결에서가 아닌, 다른 나라처럼 문제 해결을 하려고 한다.43)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러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44) 하소서.”(삼상8:4,5)

여기에 대한 야웨 하나님과 사무엘의 견해는 못 마땅한 것으로 해설 되어 있다.


  “야웨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행위는 야웨 하나님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으로 된다. 사무엘은, 왕이 다스리면 중앙 집권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고, 폭벙에 시달리게 될 것을 경고하여 단념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계속해서 고집을 부려 마지못해 응한 것으로 되었다.45)

  원래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신정제도(神政制度)였을 것이다. 그래서, 왕정제도(王政制度)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왜냐하면, 기드온도 야웨만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며 왕위를 거부했다.(사사기 8:22,23.) 요담의 나무 애기를 보아도 이스라엘 지파동맹은 중앙집권에 대해 굉장히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성들의 왕정에 대한 경향성을 하나님은 아시고 허락하는 섭리를 이미 나타 내셨다.(신17:14-20) 그리고, 왕정 제도의 하나님의 법규와 기준을 제시하여 인도하신다. 그래서, 사무엘을 통해서 왕의 통치하에 가져야 할 이스라엘의 이해와 책임을 일깨워주고 응한다.(삼상 8:10-)

지파 동맹을 붕괴 시키고, 이스라엘 왕정 국가를 출범시킨 사건에도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보겠다. 즉, 야웨의 계시는 시대적 역사 진전에 따라 성취를 향한 점진적 발전이 있음을 볼 수 있다.46) 야웨의 계시는 인간생활의 경제, 정치, 사회, 인간의 활동 등 전체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의 여러 국가에 그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이스라엘 자체도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있다. 그리고, 국가 제일 주의라는 우상적 세력을 막기 위해, 먼저 국가로서의 체험을 하도록 하는 섭리가 있을 수 있다.47) 여기에서 이스라엘의왕은 고대 근동의 왕권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틀린 개념을 성서는 설정하고 있음을 주지 해야한다.48)

사무엘은 왕정제도를 수락하여 사울을 왕으로 세운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 왕권에 대한 지침(Guide-Lines)을 계약 관계의 맥락에서 선포했다.(삼상12:6-18) 그것을 요약하면: ① 하나님이 구원자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최고 주권자임을 항상 인식할 것. ② 하나님의 도움을 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 위험한 것을 인식할 것. ③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왕의 선택은 하나님께 있다.) ④ 왕도 백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해야 한다. 글지 않으면, 하나님은 왕도 백성도 징벌 하신다. ⑤ 왕은, 백성과 똑같이 계약의 통제 아래 백성을 다스려야 하고, 계약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⑥ 이스라엘의 왕은, 절대로 “신- 왕”(a god-king) 이라는 고대근동의 다른 나라의 개념이 용납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왕은,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와 지배 및에 백성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한 왕정 제도에서는 독재 정권은 용납될 수 없다. ⑦ 왕정 요구는 하나님께 최상의 것은 되지 못하나, 수정된 통치 방법으로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왕정제도의 위험성을 예시하며, 이스라엘을 견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49)

이스라엘 왕정은, 당시 주위 국가들간의 일반적인 제도였으나, 한편 독특한 것 이었다.  처음 시작될 때는 되도록 옛 질서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울이, 왕이 될 때에도 사사들과 같이 카리스마적 영웅으로 등장되고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백서이 추종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50) 그러면서  사무엘은 기름부은 사울을 왕으로 세워 특색있는 지침을 새로이 첨가 시킨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종진 교수의 말처럼 이 하나님의 왕정 허락의 깊은 동기에는, 메시야 왕권을 향한 다윗의 영원한 왕조 계약에 대한 구속사적 “씨” 신학의 섭리가 뿌리박고 있다고 하겠다. 다가올 메시야 왕권의 성취와 모형을 왕정제도 안에서 그림자처럼 보여주고 있다.51)


 

Ⅳ. 통일왕국의 시작

하나님의 지시로 사무엘은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어 세웠다. “...... 야웨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는 것이요, 그대는 야웨의 백성을 지배 하시오, 그대는 사방에 있는 적의 세력으로부터 이 백성을 구해 내어야 하오 야웨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몫인 이 백성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는 뜻은 이것이요”(삼상10:1) 그러나, 그는 비극적 종말52) 을 고하고 만다.


1) 초대 왕 사울의 진통과 종말


초대 왕 사울의 진통과 종말을 보면 사무엘과의 결별에서부터 시작이 된다.53) 사무엘이 사울 왕에 대하여 슬퍼하게 된 것은 믹마스에서 일어난 블레셋과의 전쟁 때와 아말렉과의 전쟁 때의 일이다. 이로 말미암아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겨 드디어 결별 하기 까지에  이르렀다.54)

그 이유는 첫째로, 믹마스 전쟁때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서 당한 심한 패배 후 잠잠 했으나 사울이 즉위한지 2년만에 다시 이스라엘에 침입하여 수도 기브아의 동북쪽 7km, 믹마스에서 진을 폈다. 사울은 길갈 진영에서 그들에게 대항할 군대를 긴급히 소집하고 임박한 전쟁에 임하기 직전에  희생제를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그의 도착이 늦어지므로 사울은 자기가 제사장직을 대신 행하였다.(삼상13:9-10) 이 전쟁에서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격파하고 크게 승리했다.

둘째는, 아말렉과 싸울 때인데, 사무엘은 사울에게 “모든 사람과 가축을 전멸하라”(삼상15:1-3)고 명령 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의 아각 왕과 좋은 양과 소를 남겨두고 좋지 못한 것만 멸하였다. 아마 병력을 강화 하는데 필요한 조치 였는지도 모르나, 사무엘은 사울이 불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울로부터 왕권을 철회한다”(삼상15:11)고 선언했다.55) 이에 따라 사울은 배신한 사실을 시인하고 용서 하기를 원했으나 사무엘은 이에 불응 했으며(삼상15:24-27), 그 이후 사무엘은 죽는 날 까지 사울을 만나지 않았다.(삼상15:35)


2) 사울 시대의 다윗의 행보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의 유다 지파 이새의 일곱째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삼상16:13) 이렇게 하여 참된 왕권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다윗에게로 옮겨졌다.56)

다윗은 주전 1085년 베들레헴의 농촌에서 출생한 양치기였다.그는 용병 이었으며, 사울의 사병(私兵)으로 일하기 위해 무사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부대의 지휘자가 되었다. 다윗은 전공(戰功)들로 인해  일약 유명하게 되었으며, 민심을 얻는다. 그리고 돋 왕의 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왕가는 곧 다윗에게 정치적인 장래를 약속한다.57) 그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몇해 동안 사울은 블레셋 사람과 싸웠다. 그러나 나중에 사울은 악령이 들어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이것은 요즈음 말하는 일종의 우울증인 것 같다. 그는 생애 후반에 젊은 양치기로 평판이 높은 수금 악사인 다윗이 마음에 들어 그를 기브아의 왕궁에 불러들였다. 그 매력적인 젊은 이는 왕궁에서 사울의 장자 요나단과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영원한 우정을 맺었다. 또 사울의 차녀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여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고 다윗은 사울 왕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블레셋 사람이 내습하여 세벧라 구릉지의 엘라 골짜기와소고 부근의 에베스 담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다윗이 단신으로 블레셋의 장수, 신장 6규빗(2m 70cm)의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로 그의 이마를 쳐 땅에 쓰러 뜨리고 골리앗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베었다. 이로 인해 블레셋 군은 모두 흩어지고 싸움은 이스라엘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그러던 중 40년전 입다에게 패배했던 암몬 사람 나하스가 이스라엘 고을 길리앗 야베스를 공격해 왔을 때 주민들은 사자를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의 용사 33만을 소집하여 요단 강을 건너 길르앗 야베스 전투에서 암몬 군을 패주케 하여 전쟁을 크게 승리로 이끌었다(삼상 11:8-11). 다윗의 인기가 상승하자 사울은 이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투를 한다.

사울의 끊임없는 질투로 다윗은 놉을 탈출하여 블레셋의 성읍 가드로 길을 옮겼다. 그곳에서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에게 사울의 적이란 것이 탄로되자 다윗은 미친 사람으로 위장하여 겨우 유다로  되돌아가 예루살렘의 서남쪽 아둘람 굴로 도망하여 숨었다. 모압의 미스바로 모시고 가서 그곳에 거하게 하였다. 그 후 선지자  갓의 충고에 의해 일행은 유다로 돌아가 헤렛 숲에 본거지를 두었는데 그 숲은 아둘람굴의  서남쪽에  있었다. 다음은 세벧라 구릉지의 그일라에 거하였다.

  블레셋 인이 습격해 왔을 때 그들을 쳐서 그일라 사람을 구출했으나,그일라 사람들이 자기를사울에게 넘기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돌로 있어 다윗은 급히 헤브론의 동남 6KM 지점인 십 광야에 가서 숨었다. 거기서 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작별하여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을 추종하던 자들이 난국에 처하게 되매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 십 사람들은 사울의 환심을 사려고 다윗이 숨은 장소를 알려 주었다. 다윗은 사울이 쫓아왔을 때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살려 주었다. 다윗은 그곳을 도망하여, 헤브론의 남족 사막지대의 마온으로 갔다. 다윗은 재차 사울에게 생명이 위험 해 졌다. 그러나  블레셋인의 습격 정보가 들어와, 사울과 그 군대가 그곳으로 출격 해야만 했다. 이런 찰나에 다윗은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사해의 서쪽 엔게디 성읍 부근의 한 굴에 숨었을 때 다윗은  600인의 용사를 부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마침 그 굴에 사울이 들어와서 용변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를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이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왕이므로 죽이지않고 자신이 가까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그의 옷자락을 베어서 멀리서 보여주었다. 그때 사울은 자기의 목숨을 살려 준 것을 깨닫고 큰 소리로  통곡하여 울면서 다윗에게 계속적인 자비를 요청했다. 다윗은 재차 블레셋으로 도망갔다.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을 봉신으로 삼고  동남쪽 40KM 유다 남부의 시글락 성읍을 주고 유목민의 침입을  변경에서  막을 임무를 지웠다. 시글락의 위치는 미불명이나 네겝  지방에 있었다. 그릭 아기스는 만약 유다 6지파가 침입할 때 사울가 대립되고 있는 다윗이 중립을 지키고 그가 블레셋 사람의 충실한 봉신이  될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아기스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이스라엘과 싸울때 다윗을 완전히 신용하고 이에 참전케 하였으나, 블레셋 인들과 그가이스라엘 측으로 도망할 것을 겁내어 시글락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다윗과 그 부하가 근거지 시글락에 돌아와 본즉 급변이 있었다. 다윗이 출정한 동안에 아말렉이 시글락을 급습하여 성읍을 불살라 버리고 여인들과 아이를 사로 잡아가고 양 떼와 소 떼를 탈취해 갔다. 그때 다윗의 두 아내도 사로잡혀 갔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에 힘입어 용기를 내어 그들을 공격하여 자기와 부하의 모든 처와 가족과 재산을 찾아오고,뿐만아니라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사울은 마침내 길보아 산에서 전사한다. 블레셋이 사론 평야의 아백에 군대를  집결하여 사울과 싸우려고 에스드라엘론 평야를 통하여 진군하여 수넴으로 향하였다. 한편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 때문에 정신이 돌아 사고력이똑똑치 않고 기진 맥진하여 블레셋 인과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또 한편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완전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만반의 준비 태세가 갖추어져 그 위험이 점점 증대 될 뿐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블레셋 군에 대항하려고 북으로 향하여 길보아 산록에 진을 쳤다. 길보아 산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이스라엘 군은 크게 패하여 요나단을 포함한 사울의 세 아들이 살해되고, 사울 자신도 적의 화살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그는 포로로 잡히는 것을 원치 않아 자기 칼 위에 엎어져 자결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왕가의 네 시체를 찾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벧산 성벽에 못박아 걸어 놓았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 비극의  소식을듣고 사울이 생전에 그들의 성읍을 암몬 사람의 손에서 구해 주었던 은혜를 기억하고 밤새도록 행군하여 그 시체를 몰래 취하여 길르앗  야베스에 돌아와서 장사했다(삼상 31: 1-13).

  몇년후 다윗이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취해 사울의 고향 베냐민 땅 셀라로 옮겨 장사했다. (삼하 21:12-14)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은 이와 같이 최후를 끝냈다. 실로 그는 구약성서에 있어 최대의 비극적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저가 성실과 열심으로 통합한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는 다음에 세워질 다윗 왕조에  의하여 더욱 공고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블레셋 인은 길보아 산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동시에 이스라엘은 그 강적에게 완전 굴복했던  것이다.

다윗은 아말렉을 치고 시글락에 돌아온 셋째 날 아말렉의 한 소년으로 부터 사울과 그 아들이 전사 했다는 그 비참한 정보를 들었다. 그의 죽음을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 다윗은 종일 통곡하며 울었다. 다윗은 비운의 사울과 요나단 부자에게 올리는 비통한 애도의 ‘활 노래’를 지었다. 이 노래는 다윗의 우정과 충절을 표현한 것으로 절절한 애조를 띠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애도가 이다. 그는 이 이노래를 온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그 당시의 무기 로서는 활이 주종이었기 때문에 전장의 노래로서 적합한  제목이라고 일러왔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오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 것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됨이라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삼하 1:19-27).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은 아브라함, 모세와 비견되는 거성이며 그의 이미지는 선지자를 웃돌 정도이고, 그는 조상의 야웨께 충실하며 선지자 앞에서 겸허하였다. 그는 지용이 뛰어난군인이며, 발군의 지도력과 정의 공정의 감각을 가진 대 정치가로 또위대한 시인이며 음악가이며 로맨틱한 영웅이었다. 왕으로서는 그는 여호수아가 약 2세기 전에 시작한 가나안 정복을 완전히 성취하여 조상이 꿈꾼 약속의 땅은 드디어 현실이 되게 되었다.


3) 다윗 왕국의 완성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추앙받아 세력을 받은후, 블레셋을 정복하여 그들의 도시국가들을 그의 봉신으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옛 날 애굽의 영토였던 팔레스틴의 영토들을 공격하여 장악하고,동부 여르단을 그의 영토에 귀속 시켰다. 어떤 면에서는, 다윗이 당시의 한 개의 제국을 건설한 것이나 갔았다.그러나, 매우 복잡하게 얽힌 구조와 다양한 종족들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사울 통치에서는 민족왕국이 문제 였다면, 다윗 치하에서는 총괄적인 팔레스틴 영토국가의 성격으로 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58)

사무엘은 다윗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우나,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전 7년동안은 왕으로 일개 제후(諸侯)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윽고, 사울의 왕권은 다윗 왕조로 완전히 넘어간다. 사울 왕조는 다윗왕국의 서론적 존재에 불과한 과도기적 통치였다. “씨” 신학의 흐름에 의하면,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타나야 했다.59)(창49:10)

다윗은 피난지 시글락에 있었을 때 사울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가족과 부하 전원을 이끌고 유다의 헤브론으로 갔다(주전 1013년) 다윗은 유다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나이 30 세때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할 팔레스틴 남부 지파 연합의 [유다왕] 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 죽은 후 곧 이스라엘 전 지파를 통일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없었으며, 유다왕으로 즉위한지 7년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고 난 뒤에야 이루어 졌다. 그것을 북방과 남방의 부족이 전면적으로 화합 하여야만 이루어지게  되기때문이었다.

그런데 블레셋을 국외로 축출하기 위해서 새 왕 다윗은 남부와 북부 그리고 트란스 요르단의 각 지파를 통합하지 않으면 그 실현이 어려웠다. 그런데 남부와 북부의 지파 사이에는 이미 심각한 불화가 있었다.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며, 요단강 동편에 있는 마하나임으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의 왕이라 선언하고, 이곳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러나 왕은 유명무실한 존재이고, 그 실권은 아브넬이 장악하고 있었다. 아브넬의 군대가 예루살렘의 북방 9km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경계선에 위치한 기브온에서 남쪽의 헤브론에서 북상하는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군대와 충돌하여 이에 기브온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기브온 전쟁이 발발 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브넬은 요압의 아우이며 다윗의 생질인 아사헬을 살해하였다. 그 뒤에 아브넬은 유약한 이스보셋 왕을 떠나 다윗에게 귀순했다. 그 때 요압은 아브넬을 유인하여 살해함으로써 아사헬의 원수를 갚았다. 이스보셋도 파란의 붕진을 지낸 후 심복으로 살해되었다. 아브넬이 살해되자 다윗은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 칭찬하고, 그의 무덤에서 큰 소리로 높이 울었다. 다윗 왕은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 (삼하 3:34) 를 지어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울면서 불렀다고 한다. 이때 북부 이스라엘 장로들은 [유다의 왕]을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다윗에게 전 이스라엘을 다스려 주도록 요청하여 드디어 다윗은 [전 이스라엘 왕]으로 정식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대등하게 합병하는 유다-이스라엘 연합 왕국의 형태였다. 이때가 바로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를 통치한지 7년 6개월이 경과한 때였다. 다윗의 인격의 힘과 매력으로 1세대간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이의 불화는 완전히 해소되었다.


4) 새로운 수도 예루살렘


다윗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포함한 연합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자 그의 비범한 정치 감각으로 남북 연합 정권하에 수도로서 헤브론은 남쪽에 너무 치우쳐 있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지파들이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세겜이나 실로와 같은 북쪽으로 수도를 옮기면  자기의 향당들이 즐거워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다윗은 자기의 개인 군사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그곳의 여부스 족속을 멸망시키고, 그 여부스 성을 “다윗 성”(삼하5:9), 또는 “예루살렘 성”이라 불렀다. 다윗의 개인 소유가 된 다윗성(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중심으로 적합한 곳 이었다.60) 다윗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돌려 받았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서, 예루살렘을 계약의 법궤를 위한 새 집으로 만들어 이스라엘인들의 중심점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남쪽도 아니고 북쪽도 아닌 [왕의 직할도시]가 필요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왕국이 영구히 존속할 수 없게 된다. 이 목적에 부합된 이상적인 성읍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상의 중립지인 [여부스 족의 산성] (현 예루살렘)이었다. 그 입지적 조건을 보면 ① 중앙적 위치로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제 선상으로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은 구릉지이고, ② 동쪽에좋은 수원의 기혼 샘이 있고, ③ 해발 800m 의 고원상에, 주위가 구릉으로 둘러싸여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천연적 요새지이다. 여호수아나 기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이 끝내 이곳을 정복하지 못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다윗 군대는 성외의 기혼 샘의 물을 성내로 운반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터널(지하도)을 통해 잠입 공격하여 여부스인을 멸망시키고 이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996년, 애굽 형의 요새를 건설하고 헤브론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그 이후 33년 동안이곳에서 전 이스라엘을 통치 하였다. 예루살렘 천도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 일대 전기를 가져왔던 것이다. 천도하자 다윗은 중앙집권의 조직을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통일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유다지파와 북부 제 지파간에는 아직 은연한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12지파가 서서히 통일의 필요성을 공감할 때까지는 각 지파자치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한동안 실제적인 통치력은 남부 지방에만 미쳤으며, 무리한 통합은 반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에 밝은 눈을 가진 다윗은  새수도 예루살렘을 통치하려고 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는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면 전국을 통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 통일을 이루기 전에 종교적 통일을 시도했다. 블레셋 격파로 남북에 다 같이 일체감이 고양되었을 무렵에 예루살렘에서 15km 떨어진 [기럇여아림]에 있는 여호와의 궤를 수레로 예루살렘에 옮겨오다가 재앙이 돌발하여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동안 안치한 일이 있었다. 이곳에서 여호와의 궤를 이미 여부스인으로 부터 매입한 그의 타작장 즉 오늘날 성암 이라고 하는 평평한 큰 바위에 성막을 치고 그 안에 안치하고, 번제와 수은제를 올렸다. 사울이 여호와의 궤를 무시하고, 또 제사장을 자기 곁에서 추방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것은 다윗의 뛰어난 수완이었다.


5) 다윗의 정복 전쟁


  ①블레셋 과의 전쟁

    과거에 아기스의 보호를 받은 바 있는 다윗은 봉신의 위치를 벗어나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이스라엘의 남북을 통일 하여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전연 예기치 못한 일로 블레셋을 크게 놀라게 했다. 그의 지위가 급전되어 이제는 블레셋이 다윗의 공격을 받게 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블레셋은 다윗을 쳐서 없애려고 두 차례나 공격하여 왔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다윗의 결전 이었다. 처음에는 아세가에서 엘라 골짜기를 통하여 격전 끝에 베들레헴을 탈취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으나, 예루살렘의 서남쪽 40km 의 르바임 골짜기에서 다윗에게 격파 되었다. 두번째는 직접 르바임 골짜기의 뽕나무 숲에 진을 치고 공격해 왔다. 다윗은 헤브론의 동북쪽에 있는 아둘람 굴에 본부를 두고 그들에 대항하였다. 이번에 하나님께서는 공격의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뽕나무 근처에서 소리를 내실 때 뒤에서 엄습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공격은 또다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했고, 다윗은 멀리 세벧라  구릉지의 게셀까지 블레셋 인을 추격하였다. 이스라엘은 다윗이 이전에 망명한 가드와 시글락을 빼앗고 블레셋을 굴복 시켰다. 이후 왕국이 분열될  때까지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존재가 되지 못 하였다. 다윗의 위대한 통솔력과 인간적인 매력은 그에게 패배한 적까지도 자기쪽에 받아들였다. 그의 군대에는 블레셋 인가까지도 합세하였고, 특히 그레데 섬 출신이라고 생각되는 게렛 인과 베렛 인, 가드에서 온 가드  인등이  있었다. 다윗의 치세는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의 황금시대였다.


②암몬, 소바와의 전쟁

   다윗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암몬과의 전쟁] 이었다. 이 싸움은 다윗의 사절들에 대한 암몬 왕의 모욕적인 처사가 다윗을 자극하여 일어났다 (삼하 10:1-5) 다윗은 몹시 격분하여 암몬 족의 수도 랍비를 공격하려고 요압이 지휘하는 군대를보냈다. 그동안 암몬 사람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무모한 처사를 깨닫고그들이 북쪽에 있는 아람 족 (수리아) 여러 나라들의 원병을 청하여 다윗을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 그 중 소바는 아람 족의 맹주였다. 아람인의 원병은 적시에 도착하여 그때 랍비를 포위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군대를 모아서 암몬 족을 구하려고 재차 침공하였으나, 또 다시 참패를 당했다. 요압은 랍바의 포위 공격을 다시 시도했다. 이 장기간에 걸친 치열한 전쟁중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다윗은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수치스러운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부하인 우리아를 전사케 하고 밧세바를 자기 손에 넣었다. (삼하 11:25) 이 일에 대해 선지자  나단은 그를 신랄히 비판했다. 전쟁은 [물의 성읍] 이라고 하는 랍바의 함락이 가까워 결정적인 승리로 끝이 날 무렵에, 요압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어 왕이  최후의 전쟁을 지휘할 것을 진언하였다.


6) 다윗 제국 실현


다윗 전쟁의 중요한 결과로는, ①이웃 나라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국경을 강화하고, ②왕궁의 보고를 가득 채워 다윗은 자기의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③북쪽 지파가 남쪽 지파를 한하지 않게 되고 ④외국에 대해 왕이 위신을 높일것들을 들 수 있다. 다윗 제국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별로 크지않지만, 고대 세계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그 국토의 면적이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즉, 팔레스틴의 동부와 서부 전역, 말하자면 사막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를 합병하고, 남부 국경은 아카바 만 으로부터 애굽 강 하구의 지중해에  미치었다. 블레셋 인들은 남부 해안  평야의 좁고 길다란 지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견제되었다. 북부의 국경선은 레바논 산맥의 배면을 따라 오론데스 강의 게데스 부근가지  뻗었고, 거기서 동족으로 구부러져 하맛의 국경선과 접하였다.


7) 다윗 생애 말년의 시련


(1) 우리아를 전사케 함 

  이상적인 왕이라 일컬어지는 다윗의 생애 말년은 순탄하지만 않았다. 이때부터 고뇌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정이 어렵게 된 것은 그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었다. 다윗의 생애에서 오점이 되는 사건이 둘이 있다.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범죄이고 (삼하 11:2-27) 또 하나는 백성에 대해행한 인구 조사이다. (삼상 24:1-25) 첫째, 그가 자기의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격전지로 보내 전사케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일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불의를 노하여 선지자 나단을 보내 엄중히 질책하였다. 이 범죄에 대한 징계를 보면 ①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②다른 사람이 백주에 네 처를 범하리라.(이것도 그대로 되었다. 삼하 16:21-22) ③밧세바가 낳은 아들은 죽을 것 이라는 등이다. 삼하 12:10-14) 이것들 중에서 특히 [칼이 네 집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한 말씀대로 그의 왕국내에서는 반역과 반란이 계속되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통회의 기도를 올렸다.(시편 51편) 거기에서 다윗의 깊은 종교심을 찾아 볼 수 있다. 둘째로, 다윗의 또 하나의 과실은 9개월 20일동안 국토 전수를 등록하게 한 사실이다. 인구조사 자체는 약한 것이 아니나 그 동기가 악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자신의 소유로 알고 권력과 무력으로 쓰려고 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할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는 지상 나라의 권세를 추구하는 교만에 빠졌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실시한 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그를 통하여 다윗에게  말하기를 다음 세가지 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곧 7년간의 기근,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는 일, 국중에 3일간 온역 (전염병)이 있을 것 등을 들었는데, 그 중에서 다윗은 세 번째것을 택하였다.(삼사 24:11-15) 이에 온역이 온 이스라엘에  백성중 죽은 자가 7만인에 달했다. 또한, 그의 말년은 가족 내의 연속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가 후계자를 빨리 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권력 투쟁이 나타났다.61)


(2) 압살롬의 반역 

  “네 집에 칼이 떠나지 않으라”는 하나님의 경고대로 다윗 왕궁을 둘러싼 골육 상쟁의 비극이 그의 말년을 어둡게 했다.그것은 주로 이복의 왕자간에 연로한 다윗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다윗 왕에게는 8인의 처와 열 사람이 넘는 첩이 있어(삼하 3:2-5) 그 아들 수는 성서에 기록된 것만도 17인에 달한다. 압살롬의 반역도 궁중의 문란에서 오는 왕자들의 반목과 갈등에서 싹튼 것이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부친에 대한 반역의 선두에 섰다. 즉, 다윗의 장자 암놈이 이복누이 다말을 능욕 했으므로 다말의 친 오빠 압살롬은누이의 복수로 암놈을 살해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아람의 그늘로 도망했다. 이것은 단순한 복수일 뿐만 아니라 장자인 그를 제거하여 왕위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3년후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해 주었으나 그는 부친을 반역할 계획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3년후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해 주었으나 그는 부친을  반역할 게획을 마음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압살롬은 특히 북부 지파 중의 베냐민 지파에서 다수의 젊은 자를 모으고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강한 젊은자들로 편성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아무 준비도 없는 다윗은 급히 이스보셋의 전 수도였던 마하나임으로 물러갔다. 여기서 다윗의 군대장 요압은 병사를 모아 압살롬의 군대와 에브라임 숲에서 마주하여 부자 대결의 비극적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다윗은 가신들에게 자식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패전을 하게  된압살롬은 나귀를 타고 도망하다가 큰 나무 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요압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다윗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3) 세바의 반역 

다윗의 마하나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오기 전에 새로운 반란이 베냐민 지파의 세바에 의해 또 일어났다. 이스라엘 최초로 왕이 베냐민 지파의 사람 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세바는 왕위가 베냐민 지파 사울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 같다. 그는 북부 10지파를 선동하여 자기가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졌다. 다윗은 급한 마음으로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세바를 추격할 것을 명령 하였다. 아비새는 요압과 함께 다윗에게 공헌한 자이다. 요압과 아비새는 세바와 그 일파를 북부 단 성읍 서쪽의 아벧까지 추격하였다. 그 성이 포위되자 그 성이 파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성의 한 지혜로운 여인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주었다. 이로써 그 반란은 종결 되었다.


(4) 아도니아의 반역과 솔로몬의 즉위

노왕 다윗이 죽을 때가 목전에 다가왔다. 사람들이 누구를 다음 왕으로 할 것인가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했으며, 이 문제를 급히 서둘러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왕자 암놈과 압살롬은 이미 죽었으므로 다음 차례는 단연 3남인 아도니야이며, 요압과 아비아달이 이를 지지했다. 아도니야의 지지자들은 비밀리에 예루살렘 정남쪽에 있는 에느로겔 성에서 아도니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는다.

다윗이 이뤄놓은 팔레스틴 지경을 망라한 국가는 ①이스라엘들과 긴장관계, ②유다 지파중부-북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의 긴장 관계의 고통을 겪었다. 다윗은 이런 상황의 이스라엘을 국법에 의하여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국가 분열의 씨앗이 내포된 채로 였고,62) 마침내 솔로몬이후 남 북으로 갈리는 현상이 대두된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이스라엘 왕조 형성의 배경 연구를 함에 있어서 그 맥락을 살펴 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그 첫 단계로 왕조가 탄생 되기 까지의 이스라엘 12지파 동맹체의 태동의 원인과 과정과 그 지파 동맹체들의 활동 사항 그리고 그들의 성격, 그리고 왜 지파 동맹체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검토 하여보았고, 왕조가 형성 될 수밖에 없는 과정을 알아 보았으며, 이윽고 다윗왕 때 와서 이스라엘 왕조는 찬란한 꽃을 피워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이 전면으로 부상하여 이스라엘을 번영케 된 이유가 무엇 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본 논문의 서론 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이는 야웨께서 설정하시고 계획하신 구속사적 “시” 흐름의 맥락하에 이끌어 가심을 였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최종진 교수는 다윗의 선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로, 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는 다윗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주권적 선택(삼상16:1-13)이 된것이다. 사무엘은 야웨의 명령을 받들고 이새의 가정을 찾아서 이새의 아들들 중에 용모와 신장을 보고 장남 엘리압이 그라고 생각 하였었지만 그러나 야웨 하나님은 달랐다. 하나님의 마음은 다윗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선택에 있었다. 둘째로, 인간적인 측면인데 사울 왕국은 이스라엘의 공동적 국가 체제 효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하나의 출연자이며, 왕조번영의 다리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기에, 유다 지파의 다윗왕조 향한 구원사적 씨 흐름이 사울 왕조의 몰락과 함께 다윗 왕국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유다의 편집자들에 의해 편찬된 사무엘, 열왕기 상하에 보면 다윗에게 많은 장수를 할애 하였고, 역대 상하 에서도 다윗에서 시작 하면서 그를 이상적 영웅으로 묘사하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하고 있다. 전승에서는 시편과 연관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13편의 시가 그의 할동 기간 중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예컨데 시편51편과, 룻기인데, 룻기는 룻이 다윗의 외조모임을 밝히는 족보의 책이다. 그의 자료에 의하면 이새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는 베들레헴의 유명한 가문의 우두머리로 지방의 족장이었을 가능성있다. 에브랏은 그 지방의 유력한 씨족의 명칭이었을 것이다. 그가 사울 궁정에 들어가게 됨으로 왕이 되는 계기 마련했는데, 삼상16:1-이하에서, 목동 다윗이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궁정으로 들어가게 된 경위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 소년을 말한다.

다윗은 출신 으로는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유다지파 출신으로 베들레헴에서 출생(예수님의 고향도 이곳)했고, 그의 특성은, 목동이었으며, 재능 있는 하프 연주자였고, 시인임과 동시에, 유능한 군인이기도 했다. 그가 사울 가문과 관계를 맺고나자 사울은 다윗의 장래성 때문에 측근에 두고 군대 지휘관을 삼아 딸 미갈과 결혼시키게 된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과 과 권력 투쟁을 벌인다. 사울은 다윗의 인기가 상승하자 그를 죽이려 공격을 수차례 감행하기도 하지만 야웨 하나님의 섭리는 다윗에게 기울어진다. 사울이 죽고나서도 사울의 잔존 세력과 싸움을 벌이게되고. 그러나 이스보셋의 군사령관 아브넬이 모든 백성 데리고 다윗에게 투항하게 됨으로서 통일왕국의 2대왕으로 다윗이 등극하였고, 이렇게 되자, 블레셋은 다윗을 대항하여 공격을 감행 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다윗이 승리하므로서 그들은 다윗의 통치하에 있게되어 순조로운 왕조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왕이 된 후 예루살렘 성을 장악하여 다윗성이라 하고 정치의 중앙 집권화 성립 하였으며, 예루살렘 성 수도를 다윗성이라 하고 그는 성소를 중심으로 종교의 중앙 집권화 성립하였다. 블레셋에 있던 법궤를 가져오게 됨으로서 다윗 왕국 정통성의 시금석이 된다. 그후 다윗은 북쪽 지파의 환심 사기 위해, 사울의 자손을 환대하여 므비보셋을 데려오고 재산 돌려주고, 제사장 계급에서 아비아달(북왕국출신)과 사독(남왕국출신)을 세우지만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부친의 뒤를 이어 왕이 되지만 이것을 못해 나라를 망친다.

다윗은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는 정책을 펴게된다. 예언자도 갓(북출신)과 나단(남출신)을 세우는 등, 지역감정을 해소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며 또, 북쪽 지파의 환심사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의 왕조 때 북쪽 지파의 불평없었다. 그리고 블레셋 공격해서 영토를 모압, 에돔, 암몬까지 점령. 유프라테스에서 홍해까지 확장을 한다. 오늘날도도 정통파 유대인들 바로 다윗이 전성게에 이루워논 이 땅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 다윗은 두 제사장 밑에 제사장과 레위인을 정립하게 된다. 이들이 너무 맣아지자, 24반열로 나누어 1주씩 돌아가며 일하게 함으로서, 그는 예루살렘 성소를 확고히 세운다.. 성전 예배 재건하였고, 특히 성전 건축을 준비한다. 또 성전 예배 위해 음악인들 세웠으며, 성전의 설계도를 만들어 솔로몬에게 넘겨준다. 자재를 준비한 것을 보면, 오늘날로 환산하여 보면 27억8천만 달러나 들었다. 다윗이 모든 준비를 다하고 그의 명성이 퍼졌으며, 그에게 주어진 영원한 왕조 계약(삼하7)-“그의 왕위가 영원하리라.” 이는 구약의 언약 중 세 번째 언약인데, 이것은 씨흐름을 더 구체화 하는 것이다.63)

다윗에게 찾아온 중년 이후에 도전은 성경의 위대성은 어떤 인물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데에 있다. 성경은 그대로 인물을 공개한다. 밧세바와의 범죄-사단은 인간의 약점(물욕, 성욕, 명예욕)을 이용한다. 다윗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고 노역을 하게 하려고 인구조사를 2회 실시하였다. 다윗 시대의 인구는 400만 명이었는데, 이것을 과시하려고 범죄한여 야웨의 진노로 말미암아 온역으로 7만이 죽는다. 그의 말년은 가족 내의 연속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가 후계자를 빨리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로 인하여 권력 투쟁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윽고 솔로몬은 정책을 잘 못 펴므로 그의 사후에 나라가 남왕조와 북왕조로 갈리는 비극을 낳게된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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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 타

? 최종진 교수. 다윗왕조의 일어남 . 리젼트 신학대학원 강의 노트 (1997.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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