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등 선거출마의 변
1. 머리말
정치판에 뛰어 든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돈도, 용기도, 담력도, 학벌이나 경력 등의 스펙도, 조직과 그동안의 활동 등 인기도도. 생긴 모양도 그럴 듯 해야 되고 ............ 전과도......
어쩌다가 가난한 목사가 이러한 정치판에 뛰어들어서 한 주자가되어서 마음껏 혼자서나마 뛰어볼 수 있었는가?
특히 죽음의 연단과 함께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고는 <내 가는 길이 아니다>고 하면서 가족의 반대에도 15년의 대학전임교수를 사직한 내가 어쩌다 왜? 흙탕물이고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에 한 주자가 되어야했는가를 변명하고 싶다.
결과는 <낙선> 뿐 이지만 어쩌다보니 기초의원, 국회의원, 광역의원 골고루 뛰어봄 이 되었다. 공통점은 홀로의 최선 이였고, 욕심도 없었고, 보이지 않는 심령의 감동은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2. 기초의원 출마의 변(2002년,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1동)
2002년의 구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1동의 구 의원 선거였다.
출마자체를 너무나 자제하고 고민해본 선거였다.
15여년의 대학전임교수직을 사임하고 황금기도원에서의 찬양인도와 박철수의 영성훈련과 경주의 모자원인 애가원의 가족들에게 1주일에 한번 씩 설교하는 일상에서 2여년 만에 1999년 11월 20일경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동에 경남타운 주변 2층 상가 60평을 전세와, 월세로 얻어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용감하게 2000년. 1월3일부터 대전 열린문 교회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등, 목회에 전념하면서 틈틈이 영성훈련시의 감화 받은 영적인 목사님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기도하고, 경로잔치를 열어서 수성구청장과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도 참석 하여 격려하는 등 열심히 목회에 전념하는 중에 부흥회에 참석했던 이웃교회에 다니는 <대구광역시 장애인협회> 사무국장의 권유로 <장애인 협회>에 [자문위원]을 맡아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2002년의 지자제선거를 앞두고 사무국장이 장애인의 권익에 도움이 된다는 의도로 선거에 출마를 강력하게 권했다. 출마자체만으로도 개척교회 부흥에 도움도 크다는 것이다. 법학박사, 대학교수역임 등의 경력을 두고 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심히 고뇌하기 시작했다. 지옥 같은 <죽음의 연단>을 겪고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는 <대학전임교수>도 던져버렸는데 흙탕물이라는 정치판에 내가 뛰어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납 하실까?]하는 것이었다.
한사람의 성도도 더 절실한 개척교회 담임으로서 출마한다고 교회부흥에 도움이 될까? 우리성도들은 허락할까? 물론 가족은 전혀 반대였다. 새벽 재단에서 무릎 꿇고 깊은 고뇌로 홀로 고민과 갈등을 하다가 출마의 방향으로 <도전하되 제일 낮은 기초의원>을 택하였다.
주소가 있는 <황금1동 구의원>이다. 이웃교회 교인이기도한 장애인 협회 사무국장이 반기며 많이 도와주고 인도해주었다.
억지로 무소속의 추천서를 받아서 서류를 준비하고 수성구선거관리위원회에 접수하는데 사무국장이 보더니만 직원보고 “도와주라”고 친절했다. 기독교인이었고, 이 후로 친하게 되었다. 번호 추천이 있었다. 1번이 유리하기에 1번을 추첨 하려고 후보들은소원했다.
나는 현직 판사인 선거관리위원장을 찾았다. “목사신분으로 출마했으니 우리구역은 번호를 추첨하지 말고 상대에게 양보 하겠다”고 간청하니 웃으시며 법대로 해야 한다고 하여 추첨에서 1번을 얻었다.
상대는 현 구의원에 황금동 토백이로 지난번엔 홀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요번에 나와의 대결로 매우 긴장하며, 온통 난리법석이다. 아파트의 문 앞마다 명함뿌리는 등의 선거법위반도 잘하며, 열심히 사무실과 운동원들과 동리유지들과 야단법석이다.
나는 당선되어도 고민, 그렇다고....선거운동은 안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추잡하게 목사가 욕심으로 보일 수 는 없고, 아무 것도 없이 깨끗하게 <주님의 영광만> 바라보며 정직하게 하자......사무실도, 사무원도, 운동원도, 아무 것 도 없이 홀로 아침에 어깨띠를 하고 아파트정문 입구에서만 출근하는 차량과 주민을 향해서 정성스럽게 절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반대하던 아내도 나중엔 동참했다. 조정호 지도교수님도 방문하셔서 금일봉을 주시면서 “기초의원을 왜, 택했노?, 그래, 나중엔 더 큰 것도 해야지!” 하시며 격려하셨다. 처가에 6남매가 돈을 거두어 주시기도하며........
선거결과는 43% 득표의 패배였다. 작게 받은 표는 아니었지만, 또 흙탕물이라는 정치판에 뛰어 덤이 두려웠기에 고뇌도 했지만, 그러나 당선이야 되겠지! 하는 기대가 폐배 되므로 그래도 순간은 섭섭함도 없지 않았으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선관위 사무장이 공무원 선배인 구청장님이 대단히 서운해 하시더라고 했다.
상대방 사무실로 축하화분을 준비하여 방문, 축하해주었다, 선거의 득은 그 후에 황금동의 유지가 되어 산악회나 망년회 등에는 초대받는 인사가 되었고 상대 당선자에겐 두려움의 경쟁자가 되었다.
선거경비는 오히려 흑자로서 등록비 200만원의 청운신협의 대출금을 정리 하고도 교회 월세 등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3. 제 17대 국회의원 총선 출마의 변(2004년, 대구광역시 수성갑구)
1) 출마동기
2002년의 첫 도전인 기초의원선거에서 사무실, 사무원, 운동원, 등 아무준비도 갖추지 않고 홀로 깨끗하게 치룬 기초의원선거로 정직하고 깨끗한 이미지는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 43%의 득표는 적은 표가 아니라고 했다. 소문은 깨끗한 이미지는 얻은 것 같았다.
새로 창당하는 <기독당>의 서울 창당대회에 대구교계 마당발인 친한 이동수기독신문지사장의 권유로 대구에서 유명인사인 신진욱 협성재단 설립이사장님 등 여러분과 동행하여 참석한바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통한 기독교계의 정치계의 참신한 참여의 필요성 설파 등에 공감했고, 마음의 동요가 참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총선출마로는 엄두도 못 내고 있을 때, 어느 날 우리 낙원교회에 교계 정치적 유명장로들과 함께 <박철언전장관>이 찾아오셔서 17대 총선의 협조를 구하기에 <대선공약건의서> 등 기초의원 출마 때의 자료 등을 드리고 관내 목사내외 가정들을 초대하여 특별히 식사접대와 기념촬영 등과 그리고 박철언 전 장관 산하 산악회의 버스 여러대를 대절하여 울진의 명산에 등행함에도 박 전장관과 동행하여 사모님과 그 가족들과 점심을 나누기도하고,
찬양 인도하는 경산황금기도원에 박의원을 초대하였는데 가족들과 함께 오셨지만 원장님이 소개나 인사를 만류하시기에 그냥 도중에 돌아가셔서 지금까지도 죄송한 마음이다. 몇 번의 만남 이였지만, 참 훌륭한 인격과 인간성, 실력이 있는 다재 다능한 따뜻한 분이였다.
기독당에서 대구에 3사람의 공천을 예정했는데, 협성재단 이사장인 젊은 신모씨와 4성 장군을 하시고 전국구 국회의원이신 박모 장로와 부족한 나도 포함되었다.
당시 대구는 2003년12월의 대선에서 야당의 노무현대통령당선으로 초상집 같은 어두운 분위기로 오직 한나라당 이였다. 그 분위기에 두 분은 아예 포기하시고 마침 낙원교회를 접고 성전건축을 욕심하며 관리하는 땅에 설계 등으로 욕심하면서 전세금을 수천만원이 있는터에 <내라도> <주님 영광을 위하여><기독교계를 위하여> 기독당 으로의 출마를 결심했다. 물론 아내는 반대였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 가 없었고, 아내는 홀로 주암산에 기도하러 가곤했다.
이동수가 사무장을 맡고 합동측 D교회 모장로가 회계를 맡아 도왔다.
선거자금은 교회전세금, 기타 4천여만원을 아내에게 받아서 회개 맡은 장로에게 맡겼는데 기독당에서 5백만원의 보조비가 적립 되였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회계맡은 장로는 통장을 돌려주지도 잔액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는 부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2). 선거운동과정
사무실도, 사무원도, 운동원도, 유세차도 아무것도 없다. 어깨띠에 명함과 교회 차에 벽보사진을 코팅하여 열심히 수성갑구인 범어동, 황금동, 만촌동, 고산지역, 수성지역등을 열심히 홀로 명함을 돌리며 뛰여 다녔다. 당선여부는 고사하고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 뿐 이였다. 월성국교 은사인 강성수 선생님에게서 격려의 편지가 왔다. 관내에 계시며 (교직생활에 가장 자랑스런 제자)라고 하시며 최선의 홍보를 하겠다고 격려하셨다. 영남대학 동창회에서 금일봉을 주고 관내 영남대 동문 연락처 2만여명의 자료를 얻었다. 잘 아는 여자 대학생 두 명을 알바로 일당을 주고 집에서 영남대 동문들에게 전화 홍보하도록 며칠 부탁하였다. 선거운동 내내 아내는 매일 주암산에 기도하러 올라가 버렸다.
기초의원 출마할 때는 처갓집 등 여러분들이 관심도 가지고 금일봉도 줬지만 총선출마로 <기독당과 나의 스팩으로는> 택부족 함을 아는지라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선거관리사무소 어느 젊은 공무원도 무시하는 발언을 쉽게 하기도하여 씁쓸하였다.
영남호텔 4거리에서 지나가는 차를 향해 열심히 절을 하고 명함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TBC방송 후보자 토론회에서 내 옆에 앉은 조순형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성원하고 질문도 주고받으며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한나라당을 믿지 마세요, 한나라당은 귀족당이고, 부자당입니다.” “검찰, 경찰의 횡포가 너무 심합니다”라고 공격하고 조순형후보를 가리키며 지역주의을 초월하여 살신성인으로 대구 우리 구역에 출마하신 쓴소리 조순형 후보님을 성원해달라고 마음에 든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내가 당선이 된다면 십자가를 지고 헌신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첨언하였다. 토론회를 마치고 이한구씨는 “석홍씨 그럴 수 있나? 섭섭하다”고 하셨고, 조순형씨는 내 손을 잡으면서 “고맙다, T.V토론회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고 하시며 나중에 선거운동 중에 만나서 사모님과 가족들을 소개하시며 음료수를 대접해 주시기도 했다.
4). 선거결과
2004. 4월에 투표하는 날 투표를 마치고 고향 경주 불국사 구정동 성애원이 가까이있는 경주여상 앞 저수지에 낚시하러갔다. 그래도 총선에 나와서 홀로 최선을 다해서 뛰어본 선거 전이였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이 피곤한 몸 이였기에 포도주 한 병으로 피로회복제로 홀로 낚시터에서 탠트를 치고 지냈다. 그 이튿날의 이동수 사무장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는 참혹한 참패였다.
그저 위로로 삼을 것은 6명중 5등으로 꼴찌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당 에서도 1천만명의 기독교인들의 (기독당)에 성원을 바랐으나 전국구 단 한 석도 나오지 못한 참패였다.
수성구선관위의 비아냥거리던 젊은 직원이 “꼴찌는 아니데요” 했다.
4. 광역의원 출마의 변(2014년, 경기도의원, 오산 제1선거구)
1). 출마 동기
2008년 10월경 대구 남노회 재판국장으로 있다가 노회가 갈라지면서 서남노회로 택하였다 비록 교회 간판도 십자가도 없지만 10여명의 성도들과 창고를 얻어서 개척하는 임시교회 위치가 현풍 이였기에 구역상 서남노회였다. 그러나 가까운 이웃의 차모교회의 김모 목사는 <이단><삼단>하면서 비난하고 핍박하기 시작하고, 이웃의 친한 동역자들이 거들고 노회 때마다 공개석상에서 질타를 하고, 보스처럼 노회장 출신 최모 목사는 <노회원 자격 없다>는 주장으로 같이 거들고, 1여년의 이러한 분쟁과 핍박은 결국 <왕 따>로 인한 <우울증>으로 떠났던 오산의 (모 선교단체)에 연락 하게 되고 허락하심에 다시 찾게 되었고, 정신을 못 차리는 중에 <장 폐쇄증>과 <대장암수술> 그리고 <항암치료>중에 본부에서의 월 보수지급 정지 등으로 (알바)로 노가다도 나가보고, 원룸청소에 이어서 외국 양식당의 심야청소 등...........젊은 청소용역업자의 잔소리와 머리 굴리는 (갑 질)의 횡포에 시달림에도 “돈보다 <영적훈련>이다” 라며 인내하다가
마음의 감동은 출마로의 욕구,갈망이 점차 높아졌다.
20014년 6.4지방선거에 경기도의원 출마를 결심하면서 특히 제1야당보다 부상하는 깨끗한 안철수 공동회장단의 (새정치 연합)에 관심을 갖게 되고 믿을만한 가까운 몇분과 상의 후에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다.
2). 공천심사
새누리 당을 탈당하고 안철수와 윤여준 등의 공동대표의 <새정치 연합>에서 개최하는 선거 출마자를 위한 [아카데미 3기]에 수십만원의 수업비를 내고 수련과정도 참여하고 안철수 등과 선거용으로 같이 사진도 찍고, 명함도 준비하고, 오산시선관위에 예비후보등록을 하고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안철수가 일방적으로 김한길이 당대표로 있는 [민주당]과의 합당하면서 공동대표를 맡고 50;50이라는 공천지분 약속을 선포하였다.
오산시에는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안철수의 새정치로 옮겨서 선거를 준비하는 시의장출신 최모씨와 시부의장출신 시장후보 여성인 최모 국제관계학박사, 전 경기도의원 이모씨와 권모 여성시의원후보, 본인을 포함하여 공천심사비 본인 경우에 250만원을 내고 [경기도당 새정치연합]에서 서류심사와 면접을 본바 나에게만 <돈 없다는 걸로 부정적인 집중 질문>하더니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후보자 전원이 현 당협 위원장인 현역 안민석 의원의 비서진, 보좌관출신 및 추천자들로 전원공천이 되었다. 음주, 폭력 등등의 전과들이 있고 학력이나 경력 등 스팩도 형편없는데도 그들의 복안대로 공천되고 안철수계는 전원 공천비만 날리고 탈락이었다.
3). 무소속출마 및 선거운동과정
공천에 탈락된 최인혜 오산시장후보(전 부의장, 국제관계학박사), 제2지구의 이순영경기도의원후보(전 경기도의원), 제1지구 권미영 시의원후보(국악협회사무국장), 제2지구 최웅수 시의원후보(전 오산시의회의장), 본인(제1지구 경기도의원후보) 5명이 안철수를 믿고 일부는 민주당을 탈당하여 안철수에게 갔다가 안철수가 약속과는 달리 김한길의 민주당과 합당하여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당 명칭을 변경하여 재창당하므로 배신자에게 공천을 줄 리가 없었다. 본래의 민주당 지역 국회의원의 입맛되로 공천되고 모두 탈락되니 억울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기호가 5명이 같이 4번이었다. 매일 이순영도의원 후보사무실에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며 함께 합동유세도하고, 사무실 개소식에 함께 축하하고, 기자회견도하고,.......야구 4번을 연상케 한다고 흰 야구복과 4번 달린 야구모자도 함께 맞추었다.
나는 사무실도 유세차도, 운동원도, 회계 등, 사무원도 전혀 없었다.
내가 만든 벽보와 가가호호에 배부하는 홍보책자의 내용이 잘됐다며 “왜 사전에 의논도 하지 않고 했느냐“는 약간의 불평도 없지 않았다.
나는 아파트 단지별로 되어있는 신장동, 세마동, 중앙동의 아파트에 1단지부터 매일 새벽 6시면 입구에서 어깨띠에 명함을 들고 출근하는 차량과 주민들께 정중히 일일이 인사드리면서 명함을 주기도하고 악수를 청하기도하고......유치원생부터 초교생, 중, 고교생, 대학생들과 다정하게 사진도 함께 찍어 홍보책자에 넣기도 하였다.
선거관리위원회서의 수시로 회계 및 사무원들 회의와 서류인수는 내가 홀로 참석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홀로 어깨띠를 하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할 때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 아들이 후보자를 꼭 찍어라 하드라“고하여 물으니 고교생이라 하였고, 또 한 아주머니는 같은 이야길 하기에 물으니 ”초등학교 딸“이라고 하시기에 눈시울이 뜨거웠던 경우도 있었고,
신장동 대우아파트 근처에서 초교생 5학년 여러 여학생들이 따라다니면서 “4번 석홍”을 외치고, 같이 기념촬영도하고 부모님께 꼭 홍보하겠다고 하여 “내가 당선되면 우리집에 초대해서 떡 뽁이 맛있게 해줄게”했던 일도 있다.
6.4마지막 선거일 바로 전날 비가 많이 왔다. 우의를 입고 세마 국도4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출근하는 차를 향해서 인사하고 명함을 건네 주고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4). 선거결과
사전 투표를 하고 6.4선거 당일은 오산 모교회 최모 담임목사님의 청으로 성도 중에 30대 젊은 부부가 동업자가 채무를 제대로 이행치 않아 야간에 책방가게에 시정장치를 임의로 풀고 책들을 집으로 옮긴 것이 (특수절도죄)로 고소되어서 1년6개월의 검찰구형이 떨어진 상태로 법원 최종심을 앞두고 구속 등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부를 만나서 바쁘게 사실확인서, 탄원서, 녹취록 등등의 조치로 (징역6개월에 1년 집행유예, 사회봉사 80일)이라는 선처의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
선거개표결과는 낙선 이였다 무소속 연대 5명이 전원 낙선이었고, 새정치의 승리였다.
나는 개표결과는 6.53%로 2.461명의 득표였다. 비록 낙선 이였지만 불모지 타향에서 선거자금 한 푼 없이 이리저리 빌려서 홀로 치룬 선거전에서 서울, 경기에서의 무소속으로는 적지 않는 득표요, 성원 이라고 했다. 내가 사는 신장동 에서만 2.000표 이상이 성원하여 고마운 마음 이였다.
선관위에서는 [공천만 받았으면 당선 될 수 있었다]며 [선거비용신고 1.490만원이 전국 후보자 중에 가장 적은 액수]라고 했다. 인쇄비800만원, 등록비300만원, 공천심사비250만원, 기타 사진, 명함, 어깨띠 등 잡비였다.
5. 맺는말
어두운 정치현실에 혐오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고, “누가되나 마찬가지”, “정치인은 똑같다”, “나는 무조건 여당, 아니면 무조건 야당”, 또는 학연, 혈연, 지연, 등등으로의 선택. 또는 한 푼이라도 받았으니 선택“, 정치인을 선택함에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선택기준을 볼 수 있다.
내 한표의 부실한 투표가 부실한 정치인을 배출케 되고 그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국민의 대표로서가 아닌 <탐심><권력야욕><뇌물과 부정><종북><철세, 기회주의><성추행 등><교만><갑질><막말><무능력> 등의 추잡한 정치꾼의 배출로 정국을 어지럽히고,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며 대통령 등 집행기관인 행정부가 재대로 정책을 수행 할 수 없도록 방해하고 거침돌이 되어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볼 수가 있다.
나는 정치에 관심도, 조예도 없었고, 정치판 자체도 혐오했다. 15여년을 전임교수로 재임 중에 고향 경주에서 고모할머니 모신다고 내려가서는 죽음의 연단과 함께 <영의 세계>를 실제로 체험하고, 가족의 만류에도 사표내고, 황금기도원, 영성훈련 등을 통하여 대구시 범어동에 [낙원교회]라는 개척교회를 하며, 40일 금식 등 목회에 전념하다가, 어쩌다가 본의 아니게 2002년 기초의원, 2004년에 국회의원, 즉 총선. 2014년에 오산에서의 광역의원 출마를 체험하였다, 공히 선거자금도 없었고, 사무실, 사무원, 운동원, 유세차 등도 없이 홀로의 최선의 경주였다, 오직 (내라도)와(하나님께 오직 영광)만 생각하고 소신과 깨끗한 경주였다.
스펙 등, 자격이나 선거자금이나 당선여부가 문제가 아닌 전혀 하나님의 뜻에 맡긴 홀로의 최선을 다해본 경주였음을 자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