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맷길 700리 3-2구간(부산진시장~남항대교)
갈맷길 3-2구간은 부산진시장에서 남항대교까지 15.8km이며, 5시간이 소요되는 난이도는 “중”이다. 이번 구간은 4번의 오르막길과 4번의 내리막길을 트레킹하여야 한다. 처음 1.5km는 오르막길이고, 마지막 5km정도는 고도가 없는 평평한 길이다.
부산진시장에서 오르막길 1.5km 진행하면 증산공원을 볼 수 있다. 증산공원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에 있는 공원으로 도심 속 근린공원으로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증산 공원(甑山公園)은 1982년에 개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증산 공원의 면적은 약 2만㎡이다. 공원은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운동장과 농구장, 족구장, 베드민턴장, 게이트볼장 및 간단한 체육 시설을 갖추고 있고 중앙 광장이 있다.
증산공원을 뒤로하고 4.5km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진행하면 초량성당에 도착한다. 증산공원과 초량성당 사이에는 유치환우체통 전망대를 만나 볼 수 있는데, 유치환우체통 전망대는 부산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에 있는 전망대로 청마 유치환 시인의 예술과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우체통을 설치하였다. 경남여고 교장을 2차례 지내고 동구에서 생을 마감한 청마 유치환을 기리며 부산항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초량성당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성당으로 6·25 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부산에 모여 들어 신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동구 지역의 신자들을 사목하고, 지역 주민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초량성당을 설립하였다.
초량성당에서 0.8km 내리막길을 진행하면 부산역에 도착한다. 부산역은 임시정거장으로 초량역과 부산역 사이 선로의 연장선상에서 1908년 4월 1일에 보통역으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공사비 97만 4천원을 들여서 부산역 본관과 부대설비 공사에 착수하여 1910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정거장 구내 면적은 8만 8,340㎡로 본관은 총 건평 1,183㎡이며, 건축면적 358평, 연면적 689평(2,238㎡), 건물 최고 높이가 22m로 벽돌조의 2층 건물이었다.
부산역에서 2.3km 진행하면 백산기념관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고도가 없는 평평한 길 나중에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부산역과 백산기념관 사이에는 상해거리와 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를 볼 수 있는데, 상해거리는 부산역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상해문으로 들어가면 색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약 120년 전 중국 영사관이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인들이 모여들었고 중국인들은 이곳에 집을 짓고 가게를 마련했다. 지금은 상해 거리로 불리지만 한때는 청관 거리, 차이나타운, 또는 화교촌으로 불리는 등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이 거쳐 갔다. 상해 거리에는 지금도 화교 학교가 있으며 화교 2세와 3세들이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문화관과 팔성관광까지 약 450m가량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한국 전쟁 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유서깊은 40계단 주변을 50~60년대 분위기에 맞도록 재현하여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관광명소로 육성하고자 조성하였다. 그리고 백산기념관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에 있는 백산 안희제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일제 강점기에 백산상회(1914년~1919년)와 백산무역주식회사(1919년~1928년)가 있었던 자리에 백산기념관(白山記念館)을 건립하였다. 백산기념관은 오랫동안 백산 안희제(安熙濟)(1885~1943)의 항일 정신을 계승하는 데 앞장섰던 백산기념사업회의 노력과 당시 문민정부의 지원으로 1995년 3월 27일부터 8월 7일까지 총 24억 원을 투자하여 1995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다.
백산기념관에서 부산근대역사관까지 1.0km는 고도가 거의없는 평평한 길이다. 백산기념관과 부산근대역사관 사이에는 용두산공원을 볼 수 있는데, 용두산공원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용두산 일대에 있는 공원으로 용두산 주변은 조선 시대에 초량 왜관이 있었는데, 1876년에 개항하면서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되었다. 1899년 용두산 공원(龍頭山公園) 부지 내에 신사가 설치되었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인들을 위한 휴식 공간의 필요로 인해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처음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 지점으로, 해방 후인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 공보처 부산문화원이었다. 이후 부산 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 요구로 미문화원이 철수하고, 1999년 6월 부산시가 인수하여 2003년 7월 3일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이 건물이 침략의 상징이었던 만큼 시민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부산근대역사관에서 고도가 거의없는 0.4km 진행하면 국제시장에 도착한다. 국제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대청동, 창선동 일대에 걸쳐있는 상설시장. 해방 이후 모여든 귀환동포들의 노점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시장으로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6·25전쟁과 함께 밀려온 피난민들의 생계 터전이기도 했으며, 각종 군용물자가 유통되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체 6 공구로 된 지금에 이르렀고, 2008년에는 인근 시장과 연합하여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국제시장에서 3.2km 고도가 없는 평평한 길을 진행하면 자갈치시장을 볼 수 있다. 자갈치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4가에 있는 어패류 종합 시장으로 부산어업협동조합(현 부산광역시 수산업협동조합)이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지역에 건물을 짓고 위탁 판매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시장이 형성되었다. 남항에서 출어하는 영세 어선들의 어획물들이 부산 어협 위탁 판매장 주변에서 거래되면서 전통 재래시장을 이루었다. 부산 지역 보수천 하구의 자갈이 많은 장소에 시장이 서서 자갈치 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2년 부산어업협동조합 위탁 판매장이 개장하고 시장을 이루었다. 1970년에 자갈치 시장이 개설된 후, 1972년 2월에 시장으로 등록되었다.
자갈치시장에서 고도없는 길 1.0km 진행하면 영도대교에 도착한다. 자갈치시장과 영도대교 사이에는 깡깡이 예술마을이 있는데 깡깡이 예술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가 세워졌던 근대 조선산업의 발상지이다. 깡깡이예술마을 조성사업은 문화예술을 통해 쇠퇴한 깡깡이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도시재생 역할을 했다. 영도도선복원, 공공예술프로젝트, 마을박물관 프로젝트, 문화사랑방 등 마을 커뮤니티 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또한 영도대교(影島大橋, Yeongdo bridge)는 부산광역시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1934년 11월 23일에 길이 약 214.63m, 너비 약 18m로 준공되었다. 개통 당시는 다리 이름이 부산대교였다. 1966년 9월 영도구의 인구증가에 따른 교통량의 증가로 도개를 중단하고 전차궤도도 철거되었다. 1980년 1월 30일 부산대교가 개통되어 영도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기존의 영도대교가 노후화되면서 안정성이 문제가 되어 기존 다리를 철거하고 도개식 교량으로 복원하였다.
영도대교에서 이번 구간의 날머리인 남항대교까지는 1.0km이며, 고도가 없는 평평한 길이다. 남항대교는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서 영도구 영선동까지 연결된 해상다리로 부산 남항에서 영도로 연결되는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항 대교는 길이 1,941m에 강상형교 1,015m, 강합성교 832m, 램프 94m로 구성되어 있다. 폭은 18.5~38.6m이며 왕복 4차로이고, 교량 높이는 30m이다. 상부 구조는 강상판 상형교이며, 하부 구조는 강관 파일 직접 기초이며 교량 등급은 1등교이다. 설계파 파고는 8.3m에 설계 하중은 DB-24 총 하중 43.2톤이며, 내진 1등급(리히터 규모 5)으로 건설되었다. 남항대교 인근에는 흰여울 문화마을이 위치해 있는데, 이 마을의 흰여울길은 예전에 봉래산 기슭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바다로 굽이쳐 내림으로써 마치 흰눈이 내리는 듯 빠른 물살의 모습과 같다하여 흰여울길이라 한다. 흰여울길 주변일대를 제2송도라 불린다. 바다 건너편 암남동의 송도를 제1송도라 하고 마주 보고 있는 이곳을 제2송도라 한다. 영화 ‘변호인’‘범죄와의 전쟁’‘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등 수많은 작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2011년 12월 공·폐가를 리모델링하여 지역 예술가의 창작의욕을 북돋우고, 영도 구민들로 하여금 생활 속 문화를 만나게 하는 독창적인 문화·예술 마을로 거듭났다. 남항대교에서 이번 구간을 마무리한다.
증산 공원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에 있는 공원.
도심 속 근린공원으로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증산 공원(甑山公園)은 1982년에 개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증산 공원의 면적은 약 2만㎡이다. 공원은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운동장과 농구장, 족구장, 베드민턴장, 게이트볼장 및 간단한 체육 시설을 갖추고 있고 중앙 광장이 있다. 화장실과 주차장이 있으며, 공원 일대에는 조선 초기에 축성된 부산진성이 있다. 산책로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 최근 증산 둘레 길이 조성되었다.
증산 공원은 부산광역시 동구 성북로 36번길 46번에 있다. 증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가마솥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산’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공원은 24시간 사용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자성대 공원, 만리산 체육공원, 전포 돌산 공원, 부산 중앙 부두 등이 있다.
유치환우체통전망대
부산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에 있는 전망대로 청마 유치환 시인의 예술과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우체통을 설치하였다. 경남여고 교장을 2차례 지내고 동구에서 생을 마감한 청마 유치환을 기리며 부산항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전망대는 1층과 2층, 옥상으로 나뉜다. 1층은 계단식 야외공연장, 사방이 통유리로 설계된 2층은 89.54㎡ 규모로 미술전시용으로 사용된다.
* 개관일 : 2013년 05월 15일
* 규모 : 부지면적 180㎡ / 건축연면적 132.77㎡
초량성당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성당.
6·25 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부산에 모여 들어 신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동구 지역의 신자들을 사목하고, 지역 주민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초량성당을 설립하였다. 1951년 미국인 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인 카놀 요셉(Josep-W. Connors)[한국명 권약슬(權若瑟)] 신부가 초량에 정착한 후, 대구교구에 본당 설립을 신청하였다. 대구교구에서는 카놀 신부의 요청을 수락하고 1951년 5월 1일자로 본당 설립을 인가하며 초대 본당 주임 신부로 카놀 요셉 신부를 임명하였다. 요셉 카놀 신부는 적산 가옥 두 채를 구입하여 초량공교회로 사용하였다.
1956년 11월 천주교 부산교구에서는 처음으로 임마꿀라타 꾸리아[쁘레시디움의 상급 기관]를 창단하여 동구 지역 외교인 선교에 앞장섰다. 1957년 5월 30일 초량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62년 2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설립하여 부산 지역 노동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성당 건립 필요에 따라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여 모금을 하고 전 신자들의 노력으로 성당 건립이 완공되었다. 이에 1962년 8월 30일 신축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1964년 1월 본당의 소식지인 『겨자씨』를 발간하여 현 천주교 부산교구의 주보인 『가톨릭 부산』의 모태가 되었다. 초량성당에서 1962년 7월에 수정성당이, 1967년 10월에는 구봉성당이, 1969년에는 화교성당과 영주성당이 분리해 나갔다. 1985년 12월 부산 지역 본당에서는 처음으로 ‘지속적인 성체조배회’를 발족하여 다른 본당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신자들의 성체 신심 함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사는 일요일에는 오전 6시 30분, 10시 30분, 오후 7시 30분 세 차례 있다. 평일에는 월요일 오전 6시 30분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는 오후 7시 30분, 수요일에는 오전 10시에 있다. 토요일에는 초등부를 위한 오후 4시, 중고등부와 특전 미사를 겸해 오후 7시에 있다. 본당 지역의 인구 감소로 세례식은 연 1회 거행하며 10여 명의 신자가 세례를 받는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지역의 낙후와 인구의 감소, 그리고 신자들의 노령화로 인해 본당의 복음화 사업이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갖고, 그들에 맞는 사목 계획을 잡고 있다. 2013년 현재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중심으로 사도히, 반석회, 빈첸시오회, 연도회 등의 단체들이 있다. 교역자로는 주임 신부 1명, 수녀 2명, 사무장 1명 등이 있다. 교우 수는 3,151명이며, 수호성인은 예수 성심이다. 성당은 대지 1,060㎡ 정도이며, 주요 건물로는 성당을 비롯하여 사제관, 수녀원 등 건평이 2,034㎡ 정도이다.
초량성당은 설립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동구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훌륭히 완수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천주교 부산교구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특히 천주교 부산교구 최초로 꾸리아, 가톨릭노동청년회,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등을 발족하여 신자들의 신심과 사회 교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부산역
임시정거장으로 초량역과 부산역 사이 선로의 연장선상에서 1908년 4월 1일에 보통역으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공사비 97만 4천원을 들여서 부산역 본관과 부대설비 공사에 착수하여 1910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정거장 구내 면적은 8만 8,340㎡로 본관은 총 건평 1,183㎡이며, 건축면적 358평, 연면적 689평(2,238㎡), 건물 최고 높이가 22m로 벽돌조의 2층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에 흰색 화강석을 섞어 전체의 구성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한 철충 양식으로 공사는 하야가와 하지매가 수행하였다. 그 후 1943년 12월 10일부산부두역으로 개칭하였으며 1945년 6월 10일부산역으로 개칭함에 동시에 화물구와 구내구(構內區)로 분리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일 화물구와 구내구의 2개구를 통합하였다.
1953년 11월 27일부산역 대화재로 역사가 전소하여 중앙동에 임시가건물을 역사로 사용하다가 1965년 11월 1일부산진역과 통합하여 부산진역에서 영업을 하였다. 그 후 1968년 지금의 위치에 역사를 신축하여 1969년 6월 10일 역사를 준공하여 역무를 이전하였으며, 현재의 부산역사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었다.
1910년에 준공한 부산역은 1층에 각 대합실과 매표실, 전신실, 역원실, 화물취급실, 식당, 욕실, 화장실을 두었고, 2층 이상은 호텔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승강장 상옥의 철골조는 한국철도의 효시이다.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어 대지면적은 21만 1,536㎡, 건축면적 3만 8,946㎡, 연면적 6만 1,880㎡로 지상 5층, 지하 1층에 철골 및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건축되었으며, 중앙집중식 냉난방 및 공조시설과 에스컬레이터 14대, 엘리베이터 12대가 설치되어 있다. 1만 6,457㎡의 선상주차장에는 승용차 기준으로 총 245대가 동시에 주차할 수 있으며, 역 광장 주차장에는 25면의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다.
일반열차와 KTX 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5개 승강장이 운영되고 있으며, 3층 맞이방에는 매표창구 및 현금자동발매기, 종합관광안내소, 유아방, 트레인 솦, 종합식당가, 편의점, 패스트 푸드점, 제과점 등 편의시설이 분포하고 있다. 1층 맞이방에는 각종 편의시설로 코레일 멤버십 회원을 위한 아늑한 휴식처 KTX 라운지, 빠른 배송을 하는 KTX 특송, 미용실, 편의점, 의류매장, 패스트푸드점, 서점 등이 입지하고 있다.
부산진역 다음에 입지한 경부선의 종착역으로 2018년 현재 수서발 부산행 KTX 열차 1일 운행회수는 상·하행선 각각 40회이다. 『철도통계연보』를 보면 2016년 현재 KTX의 경우 부산역 하행은 연간 승차 인원이 9,860명, 하차 인원이 9,288,700명으로 총 9,298,560명이다. 부산역 상행은 연간 승차 인원이 9,376,925명, 하차 인원이 9,658명으로 총 9,386,583명이다.
상해거리
부산역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상해문으로 들어가면 색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약 120년 전 중국 영사관이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이들이 모여들었고 중국인들은 이곳에 집을 짓고 가게를 마련했다. 지금은 상해 거리로 불리지만 한때는 청관 거리, 차이나타운, 또는 화교촌으로 불리는 등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이 거쳐 갔다. 상해 거리에는 지금도 화교 학교가 있으며 화교 2세와 3세들이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상해 거리는 200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최민식이 강혜정과 함께 자신이 먹었던 만두와 같은 맛의 만두를 찾아다니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영화 속 중국 음식점인 장성향을 찾아서 만두를 맛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중앙 상징물
비천상이 새겨진 상징물
상해 거리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조형물이다. 정 방향 기둥 상부에 꽃비를 뿌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천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중국의 둔황 막고굴에 있는 당나라의 비천상에서 따온 것이다.
패왕별희 동상
중국 희극 예술의 대표적 장르
중앙 상징물 옆을 살펴보면 패왕별희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패왕별희〉는 유명한 고전 경극인데, 경극은 북경에서 발전한 중국 희극 예술의 대표적 장르를 가르킨다. 〈패왕별희〉의 줄거리는 한나라 군에게 포위당한 초나라 왕 항우가 초나라의 패망을 슬퍼하자, 애첩 우희는 이별의 시간이 왔음을 알고 지진을 하고, 혼자 탈줄한 항우도 결국 자결하고 만다는 비극적 결말을 다루고 있다.
부산 화교 중고등학교
화교 자녀들이 공부하는 곳
상해 거리에는 화교 중고등학교가 있다. 화교 학교는 교문부터 시작해 운동장도 한국의 학교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겨 눈길을 사로잡는데, 특히 담장이 삼국지 벽화로 되어 있어 기념사진을 찍기에 좋다. 화교 중고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화교 소학교도 있는데, 1994년 중국이 영사관을 설치했던 자리에 들어서 있다.
동화문
중국 청나라의 건축 양식
상해문의 보조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현판에는 '래래강녕(來來康寧)'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마다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치문
번성을 기원하는 문
권위와 영화를 상징하는 용 문양이 들어간 아치문으로, 상해 거리를 수호하고 번성을 기원하는 뜻에서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도로의 양쪽 끝에 하나씩 설치하였다.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
부산광역시 중구 40계단길 일대 (중앙동4가)
부산시 최우수거리,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문화관과 팔성관광까지 약 450m가량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한국 전쟁 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유서깊은 40계단 주변을 50~60년대 분위기에 맞도록 재현하여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관광명소로 육성하고자 조성하였다.
2002년 1월 31일 테마거리 조성사업 기본 계획을 수립한 후 2003년 6월 5일 공사 착공하여 2004년 4월 20일 토목공사를 완공하였으며 차도·보판정비, 상징게이트 ·조형물 설치, 가로수 식재, 전력 · 통신시설물 지중화 사업 등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는 2004년 6월 부산시 종합평가최우수거리로 선정되어 사업비 3억원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한국전쟁 피난시절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특색있는 테마거리 조성으로, 새로운 체험관광 명소화로의 문화관광중심지의 위상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 즐기기
40계단은 1950년 6·25 피난시절 교통·행정의 중심지였던 부산중구에 위치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그 주위에 판잣 집을 짓고 밀집해서 살았었고 바로 앞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로, 그리고 피난 중 헤어진 가족들의 상봉 장소로 유명했던, 피난살이의 애환을 상징하던 곳으로 1951년 박재홍이 부른 “경상도아가씨” 라는 곡의 소재로도 사용되는 등 당시 영주동 뒷산, 동광동, 보수동 일대에 흩어져 살았던 10만이 넘는 피난민들에게는 가장 친근한 장소였다.
부산역전 대화재 전의 옛 부산역 (현 중앙동 무역회관자리)을 상징하기 위해 기찻길이라는 주제로 40계단 앞쪽으로 40계단 광장과 건널목 광장을 설치하고 거리를 조성하였으며 총길이는 140m이다. 부산항을 상징하기 위해 바닷길이라는 주제로 소라계단 앞쪽으로 소라계단광장과 선착장 광장을 설치하고 거리를 조성하였으며 총길이는 120m이다.
“평화의 문” 은 기찻길 입구에 위치하며, 피난시절 주로 사용하던 작은 등불이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평화의 등불이 되어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를 밝게 비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용두산공원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용두산 일대에 있는 공원.
용두산 주변은 조선 시대에 초량 왜관이 있었는데, 1876년에 개항하면서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되었다. 1899년 용두산 공원(龍頭山公園) 부지 내에 신사가 설치되었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인들을 위한 휴식 공간의 필요로 인해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1944년 1월 8일 용두산 공원으로 고시되었다.
1948년 11월 17일 화재가 발생하여 용두산 공원 내에 있던 신사가 소실되어 철거하였으며 1954년 12월 10일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공원에 있던 판자촌이 전소하였다. 1957년 12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 공원이라고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1960년 4월 용두산 공원으로 명칭을 환원하였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 부산 타워가 건립되었다. 1993년 5월 22일 부산광역시 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용두산 공원은 국유지 6만 781㎡, 시유지 4,480.8㎡, 사유지 3,857.2㎡로 총 6만 9119㎡로 이루어져 있다. 용두산 공원은 부산 근대 역사관 쪽에서 들어오는 길과 광복로를 통해 에스컬레이터로 들어오는 길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용두산 미술의 거리가 있고, 그 동쪽에는 체육 시설이 있다. 미술의 거리를 지나 북서쪽으로 가면 계단이 나오는데, 계단의 동쪽에는 초량 왜관비가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비가 있고 공원의 가운데 광장이 있으며, 중앙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높이 12m·폭 3.8m·길이 3.8m]이 있다.
광장의 남쪽에는 꽃시계[직경 5m]와 종각[높이 11.3m·부지 321㎡·면적 60.84㎡], 교육 헌장비가 있고, 동서쪽에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상[높이 4m·너비 2.45m], 구 충혼탑[높이 7m·넓이 10m·폭 3m], 부산 시민 헌장비가 있다. 북쪽으로는 용탑[높이 4.2m·폭 1.45m]과 전시관, 부산 타워[높이 120m], 팔각정이 있다. 이외에도 문학비 9개로 이루어진 시의 거리, 파고라, 정수사, 주차장 등이 있다.
용두산 공원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1-2번지에 있다. 용두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모양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건너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매해 5월에 연등 축제, 12월에 제야 시민의 타종식 행사 등이 열린다. 부산시설공단 용두산공원사업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공원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보수동 책방 골목, BIFF 광장, 남포동, 자갈치 시장 등이 있다.
백산기념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에 있는 백산 안희제를 기리는 기념관.
일제 강점기에 백산상회[1914년~1919년]와 백산무역주식회사[1919년~1928년]가 있었던 자리에 백산 기념관(白山記念館)을 건립하였다. 백산 기념관은 오랫동안 백산 안희제(安熙濟)[1885~1943]의 항일 정신을 계승하는 데 앞장섰던 백산기념사업회의 노력과 당시 문민정부의 지원으로 1995년 3월 27일부터 8월 7일까지 총 24억 원을 투자하여 1995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다. 백산 기념관 건립에 앞장섰던 백산기념사업회는 광복 51주년이던 1996년에 백산안희제선생독립정신계승사업회로 계승되어, 현재 유물 전시 위주에서 벗어나 극장과 갤러리, 세미나실 등을 갖춘 기념관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백산 기념관의 대지 면적은 324㎡, 연면적은 430.52㎡이며, 1층에 상설 전시실인 제1전시실이 있고, 2층에 특별 전시실인 제2전시실이 있다. 제1전시실은 백산 안희제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고, 제2전시실은 독립운동가 및 독립 단체들의 국내외 항일 운동 활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백산 기념관은 80여 종의 문헌 자료와 유품, 관련 영상 자료들을 통해 일반 시민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가, 민족 교육가, 민족 자본가, 민족 언론의 선구자로서 삶을 살았던 백산 안희제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2012년에 백산 기념관에서는 광복 67주년을 기념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한 민족 지도자들의 휘호와 간찰, 유품, 관련 문헌 등을 전시한 ‘기(氣)와 예(藝)로 맞선 그들’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월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이다. 단 삼일절, 현충일, 광복절은 개관한다. 평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토요일과 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고 있다.
부산근대역사관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처음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 지점으로, 해방 후인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 공보처 부산문화원이었다. 이후 부산 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 요구로 미문화원이 철수하고, 1999년 6월부산시가 인수하여 2003년 7월 3일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이 건물이 침략의 상징이었던 만큼 시민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부산 중구 대청동 일대가 조선후기 이후 줄곧 왜관지역이었으며, 옛 미문화원 자리에 들어선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일본의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건립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10년에 마산출장소를 설치하여 1919년에 마산지점으로 승격시켰다가, 1921년부산 대청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29년 지금의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던 것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 24사단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으로 수십 년 동안 미국문화를 소개하는 기관으로 활용되는 등 외세 지배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역사적인 건물이다.
대지 1,465.5㎡(608평), 연면적 2,196㎡(664평, 지상 3층)의 규모에 전시실, 수장고, 사무실, 부대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관 1층은 근대자료실, 영상실, 정보검색코너, 휴게공간이 배치되어 있으며, 2층에는 부산의 개항, 일제의 부산수탈, 근대도시 부산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3층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한미관계, 부산의 비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기획전시실도 배치되었다.
1층에는 근현대의 도서를 열람할 수 있는 자료실을 설치하여 도서관 기능을 갖추었다. 많은 인구에 비하여 도서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부산시의 현실에서 유동인구가 많은 근대역사관에 도서관 기능을 갖춘 자료실에는 2012년 현재 근․ 현대 관련 전문도서가 4,000여 권에 달하여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어 많은 시민들이 활용하고 있다.
상설전시실과 자료실 운영, 특별전 뿐 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근대 역사이야기’ 등 각종 교육프로그램도 실시하고 있다.
침략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건물을 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한 만큼 관람객들에게 주는 교육적 효과가 크다.
BIFF 광장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6가에 있는 부산 국제 영화제 출범과 함께 생성된 영화 거리.
중구 남포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영화의 거리였다. 1914년에 영화 상설관 ‘욱관(旭館)’이 상설관 경영을 개시한 이후에 보래관(寶來館), 초량좌(草梁座), 행좌(幸座), 부산 극장 등이 들어섰다. 특히 이곳은 1924년에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사였던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는 등 한국 영화의 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이곳에는 극장들이 자리를 잡아 1960년대에는 20여 개소의 극장이 밀집되었다. 1996년부터 부산 국제 영화제[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개최되면서 극장가를 새롭게 단장하고 그 일대를 자연스럽게 PIFF 광장[1996년 8월 14일]으로 부르게 되었다.
1998년 9월 부산광역시 중구청에서 PIFF 광장을 본격적으로 조성하였다. 2010년에 부산의 영어 표기가 ‘Pusan’에서 ‘Busan’으로 바뀜에 따라 PIFF 광장의 명칭도 BIFF 광장으로 변경되었다. 처음에는 조형물 등이 많지 않았으나 중구청이 22억 원의 예산을 들여 BIFF 광장을 재포장하는 등 재정비하여 상징 조형물, 핸드 프린팅, 원형 스타 문양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2006년에 영화제 기간 중 야외무대가 해운대로 이전하였고, 2011년부터는 해운대 센텀 시티에 전용 극장인 ‘두레라움’이 건립됨으로써 중구 남포동에서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 중구 남포동에서는 BIFF 전야제 행사만 개최하고 있다.
BIFF 광장은 중구 남포동에 소재하는 부산 극장과 대영 시네마가 있는 중심가에 위치한다. 구간은 구 충무동 육교에서 원형 광장을 지나 대영 시네마 쪽까지 428m에 이르고 있다. 보통 이 구간을 ‘비프 광장로’라고 부르는데, 특히 대영 시네마 앞쪽 도로를 ‘BIFF 거리’라고도 한다. BIFF 광장과 영화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거리에 느티나무, 물결 모양의 가로등, BIFF 상징탑, 원형 스타 문양의 보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세계 유명 영화인의 손도장인 ‘핸드 프린팅’이 있는데, 메가박스 부산 극장과 대영 시네마 앞 도로에 위치해 있다. 1998년부터 핸드 프린팅이 시작되었는데 이 해에는 씨에진[중국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영국 배우], 웨인왕[미국 감독], 키타노 다케시[일본 감독 겸 배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감독], 김기영[한국 감독] 등 6명이 등록하였다.
그 이후에도 2001년에 빔 벤더스[독일 감독], 2002년에 허우 샤오시엔[대만 감독], 2008년에 다리우스 메흐르지[이란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영국 감독], 2011년에 윌렘 데포[미국 남배우], 줄리엣 비노쉬[프랑스 여배우]등 총 44명의 핸드 프린팅이 등록되었다[2011년 기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김기영[감독], 유영길[촬영 감독], 유현목[감독], 황정순[배우], 신상옥[감독], 최은희[배우], 김수용[감독], 정창화[감독], 이만희[감독], 김승호[배우], 김지미[배우] 등이 있다. 2010년 이전에 BIFF 광장에는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 공연이나 영화제 관객들을 위한 거리 상점들의 할인 서비스, 영화제 게스트 및 관객들을 위한 휴식 공간이 있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대부분의 행사가 부산 해운대로 옮겨져 BIFF 광장은 근래 그 명성이 예전 같지 않다. BIFF 광장 주변에는 BIFF란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가판대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모습과 할리우드 영화 테마로 장식한 상가 간판들이 이곳이 영화제의 거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BIFF 광장 주변에는 각종 쇼핑몰과 먹거리들이 있으며, BIFF 광장 앞 큰 도로를 건너면 자갈치 시장이 있어서 관광객들에게 여흥과 오락을 제공한다. 최근에는 BIFF 광장에서 TV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의 배경이 되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가 일대에 밀집한 서점들로 이루어진 골목.
중구 보수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밀집 거주지였으며,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서적이 많았고, 주민들이 그러한 서적들을 모아 팔기 시작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 온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가 구덕산과 보수동 일대에 임시 피난 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보수동 일대는 이러한 학교의 등·하교를 위한 이동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보수동 일대에 고물상 등을 통하여 수집한 중고 잡지, 만화책, 헌책 등을 가지고 노점상 수가 점차 증가하였고 피난민 손정린 부부의 보문 서점을 시작으로 서점들이 밀집하여 책방 골목을 이루게 되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1950년대 이전에는 노점, 가판대 등이 주를 이루었으나 1960년대 이후 지어진 가건물들로 인해 서점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70여 개의 서점이 밀집하게 되었고, 이후 경제 발전에 따른 새 책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기존의 중고 서적 판매에 더하여 새 책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서점도 들어서게 되었다. 2005년부터 매년 9월 문화 행사 ‘책은 살아야 한다’를 시행하고 있으며, 2012년 4월 4일에는 부산 슬로 시티 관광 명소로 지정되었다.
부산 시민들은 이곳을 ‘헌책방 골목’이라는 별칭으로 불러 중고 서적만을 판매하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제로는 신간 서적 및 학원 교재 등의 도매 판매처를 비롯하여, 정기 간행물, 해외 서적, 사전 및 전집류, 만화책, 소설책 등을 판매하는 점포가 개별적으로 나뉘어 있다.
서쪽 흑교로 46번길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대청로와 만나는 책방골목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점들이 늘어서 있다. 보수동 책방 골목길은 북쪽으로 법수길과 만나는 곳까지 이어져 있는데, 과거에는 이곳 일대가 모두 서점이었고, 중간 중간에 책을 사러 오는 학생들을 위한 분식집 등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2012년 현재 45개의 서점이 보수동 책방 골목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용자들의 수요에 의하여 서점에 카페 등의 요식업을 겸하는 점포도 생겼다. 서점의 상인들은 보수동 책방 골목 문화관,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 보수동 책방 골목 쇼핑몰 등도 운영하고 있다. 주차 공간은 따로 없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
국제시장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대청동, 창선동 일대에 걸쳐있는 상설시장. 해방 이후 모여든 귀환동포들의 노점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시장으로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6·25전쟁과 함께 밀려온 피난민들의 생계 터전이기도 했으며, 각종 군용물자가 유통되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체 6 공구로 된 지금에 이르렀고, 2008년에는 인근 시장과 연합하여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48년에 단층 목조건물 12개동을 건립하여 '자유시장'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6·25전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모여들고, 미국의 구호품과 군용품이 유통되면서 국제시장은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상업기능의 중추 역할을 했다.
속칭 '케네디 시장'이라고도 부르는 창선동1·2 가의 의류도매 및 덤핑 시장은 6·25전쟁 당시 구호물자로 들어온 옷가지들이 많이 거래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보세 의류품 등이 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한편,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대규모 화재와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으로 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부산권의 도·소매시장으로 그 세력이 축소되고 있다.
1968년 1월에 목조건물 3개동을 제외한 나머지 9개동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되었고, 상가대지 0.007㎢(2,177평)가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에게 등기되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었고, 1977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를 받았다. 2002년 시장 현대화 사업을 실시하면서 이후 2005년까지 공구를 나누어 아케이드를 설치했으며, 2008년에는 인근 부평시장, 만물의 거리, 창선상가 등과 함께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2층 상가 형태로 건축되어 있으며 대지 면적은 7,197m2, 매장 면적은 9,497m2이고, 총 580개 점포가 들어서 있다. 주력 품목은 기계공구, 주방기구, 의류이며,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 각종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도·소매 시장이며, 가방·문구·공예품을 판매하는 1공구, 주방기기·칠기·안경 등을 판매하고 있는 2공구, 침구류·양품을 판매하는 3공구, 포목점·주단점·양단점 등이 있는 4공구, 가전제품·기계·공구 등을 판매하는 5·6공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함께 근처에 구제시장 골목, 팥빙수 골목, 화장품 골목, 먹자골목, 소품골목, 깡통 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2016년 기준 약 1,500명 정도가 국제시장과 인근 일대를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2014년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6.25를 전후한 한국 근대사에서 부산과 국제시장이 차지하던 역할을 알지 못하던 세대에게 당대의 풍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면서 부산지역 관광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자갈치 시장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4가에 있는 어패류 종합 시장.
부산어업협동조합[현 부산광역시 수산업협동조합]이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지역에 건물을 짓고 위탁 판매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시장이 형성되었다. 남항에서 출어하는 영세 어선들의 어획물들이 부산 어협 위탁 판매장 주변에서 거래되면서 전통 재래시장을 이루었다. 부산 지역 보수천 하구의 자갈이 많은 장소에 시장이 서서 자갈치 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2년 부산어업협동조합 위탁 판매장이 개장하고 시장을 이루었다. 1970년에 자갈치 시장이 개설된 후, 1972년 2월에 시장으로 등록되었다.
1985년 전기 누전으로 인한 대형 화재 발생으로 인해, 1986년 1월에 건물을 신축하여 재개장을 하였다. 2003년에 자갈치 시장 현대화 사업 추진 계획이 수립되고, 2006년 8월 30일에 자갈치 시장 현대화 사업 공사가 완료되었다. 준공된 자갈치 시장 건물에서 2006년 12월에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 입점하여 운영을 개시하였고, 2007년 11월에 일반 상가가 영업을 개시하였다.
자갈치 시장은 지하 2층·지상 7층의 상가 건물로 이루어졌으며, 대지 면적은 4,841㎡, 건물 연면적은 2만 5910㎡이다. 1층은 수산물 시장으로 각종 어패류를 취급하는 상점이 입점해 있고, 2층은 회 센터, 3층은 노래방과 전시실, 4층은 다도해 한식당 및 골프 클럽, 5층은 씨푸드 뷔페, 6층은 컨벤션 센터, 7층은 게스트 하우스 및 하늘 공원이 있다. 고객 편의 시설은 주차장[129대], 화장실 외에도 3층에 쉼터, 5층과 6층에는 테라스가 있고, 7층에는 하늘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자갈치 앞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4대 운영 중이며, 에스컬레이터가 1층~3층에 4대, 3층~6층에 6대 설치되어 있다.
2012년 12월 현재 약 280개소의 점포가 입점해 있고, 총 상인 수는 480명으로 점포소유 상인이 280명, 종업원이 200명이다. 2007년부터 현대식 자갈치 시장에서 상점들이 영업을 하게 되어 고객들의 편의와 만족도가 한층 높아졌다. 매년 10월이면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라는 슬로건으로 부산 자갈치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먹거리, 살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2년 10월 11일부터 10월 14일까지 제21회 부산 자갈치 축제가 개최되었다.
깡통시장
해방 이후 지금의 국제시장 공터(신창동 일대)에 ‘도떼기시장’이라는 노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제가 철수하면서 이른바 전시 통제 물자가 쏟아져 나왔고, 일본인에게 압수한 짐 보따리가 경매를 통해 무더기로 거래되기도 했다.
도떼기시장의 어원이 일본어 돗따(경매, 낙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물건을 도거리(따로따로 나누지 않고 한꺼번에)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도떼기시장이 왔다는 얘기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미군의 군수물자와 온갖 밀수입 상품을 도거리로 떼어 팔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국제시장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밀수품은 물론 유엔군 군수물자까지 흔히 거래되었고, 부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만물 시장으로 성장했다.
본래 국제시장은 중구로 일대, 신창동4가의 2층 건물, 총 6개 공구로 된 A․B동을 지칭하지만, 일반적으로 부산 시민들은 신창시장, 창선시장, 깡통시장(초창기 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 등 깡통 제품을 많이 판매한 데서 붙은 이름, 최근에는 부평시장으로 불림)을 통틀어 국제시장이라 부른다.
흔단 국제시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자골목이다. 국제시장이 생기면서 아리랑거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먹자골목은 과거 노점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도 비빔당면 골목(충무김밥을 함께 판다)과 팥빙수 골목, 떡볶이 골목 등에서는 좌판을 놓고 길거리 음식을 판다.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서도 소개한 이곳의 비빔당면과 충무김밥, BIFF 거리의 씨앗호떡은 가장 인기 있는 메뉴로 손꼽힌다. 비빔당면은 삶은 당면에 양념장과 김치, 시금치 등을 넣어 비벼 먹는데, 양념장과 어울린 맛이 일품이다. 매콤한 오징어무침과 무김치를 곁들여 먹는 충무김밥도 연신 손이 간다.
남포동의 명물로 떠오른 씨앗호떡은 노릇노릇한 찹쌀호떡을 가위로 잘라 그 안에 해바라기 씨와 땅콩 부스러기 등 견과류를 넣어 씹는 맛을 더했다. 이밖에도 고추장이 듬뿍 들어간 떡볶이와 시원한 국물 맛을 자랑하는 부산어묵, 가래떡을 뜨끈한 어묵 국물에 푹 담갔다 먹는 물떡꼬치가 입맛을 당긴다.
부산에 가야 만날 수 있는 밀면과 완당도 이곳의 별미다. 광복로 뒷골목인 쌈지골목에 있는 ‘할매가야밀면’은 40년 전통의 맛을 자랑한다. 밀면은 한국전쟁 이후 메밀을 구할 수 없어 밀가루로 메밀국수를 대신한 데서 비롯된 음식이다.
가야밀면은 옥수수 녹말을 넣어 꼬들꼬들하면서도 부드러운 면발이 새콤하고 매콤한 육수와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밀면집에서 만난 어떤 손님은 밀면을 ‘타지로 떠난 부산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맛’이라고 했다.
완당은 부산 사람이 아니면 생소한 음식이다. 쇠고기를 갈아 만든 소를 얇은 만두피에 손톱만큼 감싸고, 나머지 만두피를 올챙이 꼬리처럼 남긴 채 닭 뼈와 돼지 뼈로 우려낸 국물과 함께 끓인 일종의 만둣국이다. 소가 적고 만두피가 매끄러워 숟가락이 고생할 때가 많지만, 입안에 넣은 완당은 그야말로 사르르 녹는다. BIFF광장 부산극장 앞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18번 완당집’이 가장 유명하다.
부평동 족발 골목도 그냥 지나치면 섭섭하다. 이 골목의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냉채족발. 푸짐한 족발을 당근과 오이, 해파리와 함께 코가 뻥 뚫릴 정도로 매콤한 겨자 소스에 버무려 먹는 냉채족발은 별미 중 별미다. 점심 무렵 냉채족발로 유명한 ‘원조부산족발’에 가면 줄 서는 건 각오해야 한다.
먹자골목과 깡통시장에서 두루 파는 유부전골도 부산이 자랑하는 맛이다. 식도락가에게는 깡통시장 ‘할매유부전골’이 유명하지만, 어느 집을 가나 맛은 큰 차이가 없다. 유부주머니에 당면을 넣고 쪽파로 감싼 뒤, 어묵 국물에 끓이는 유부전골은 시원하고 개운한 뒷맛이 오래 남는다.
깡통시장 죽집 골목에서 파는 녹두죽과 인근의 명태지짐도 다른 지역에서는 쉬 만날 수 없는 음식이다. 팥죽과 팥빙수, 식혜(단술)는 흔한 먹거리지만, 집집마다 맛이 다른 게 특징이다. 그만큼 오랜 전통과 손맛이 있다는 거다. 먹자골목이 대부분 사람들로 붐비는 반면, 광복로 뒷골목에 자리한 고갈비 골목은 한적하다. 과거에는 고갈비집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남마담집과 할매집만 추억의 맛을 팔고 있다.
사실 국제시장 인근은 먹으려고 하면 먹거리가 천지삐까리(‘아주 많다’는 경상도 사투리)지만, 보려고 하면 볼거리 또한 수두룩하다. 보수동책방골목은 국제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꼭 한번 들르는 곳이다.
국제시장이 생겨날 무렵 일본인이 남기고 간 책을 난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이 점차 책방 골목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렀다. 광복로 쇼핑거리에 인접한 용두산공원은 남포동 주민은 물론, 국제시장을 찾는 시민들의 휴식처다. 이곳의 명물인 부산타워는 높이 120m로 맑은 날이면 전망대에서 대마도까지 보인다.
영도의 조선소와 대평동 깡깡이 아지매들의 인생
깡깡이 아지매란?
‘깡깡이 아지매’는 철로 만들어진 배의 노후를 방지하기 위해 2년여에 한 번씩 배 밑창이나 측면에 붙은 조개껍데기나 녹을 떨어내는 잡역부의 일을 하는 아낙들을 일컫는 말이다. “부산에 가서 깡깡이 질이나 하여 보세”란 노랫말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부산 영도에 나타난 것은 일제 강점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직업군을 이룬 것은 제3 공화국의 조선(造船) 장려 정책으로 신조된 철강선이 늘어난 1960년대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존재가 생활사 아카이브에 저장될 만한 가치를 갖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기능적 역할보다 단순 잡역부로 일하면서 가난을 이겨 낸 그들의 억척스런 삶이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 대다수는 피난민의 후예이거나 도시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거나 농어촌을 떠나온 실향민들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배의 녹을 떨어내는 단순한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노역의 대가로 받은 1960년대의 일당 1천 원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돈으로 가장을 대신해 간신히 가족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는 있었으나 살림을 일구거나 자식을 번듯하게 교육시키기에는 힘이 부족하였다. 결국 가난은 대물림되고 ‘깡깡이 아지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빈곤 2세대를 이루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해도 40여년 가까이 젊음을 바쳐 뱃전의 철판을 두드리는 일을 하다 청각마저 잃은 이가 적지 않은 깡깡이 아지매의 삶의 의지는 후대의 귀감이 되고 남을 것이다.
영도조선소의 유래
부산의 절영도는 일본의 조차지로 전락한 곳으로, 러시아가 이곳을 해군 기지로 설정한 1895년(고종 32) 이후부터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결국 일본에 의해 조선은 합방을 맞이하게 되면서 절영도는 점차 일본인의 주된 소유지로 변하게 되며, 일제의 정책에 의해 절영도는 동래부에서 부산부로 편입된다.
한일 합방이 된 이후인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한국의 전통적 조선소와 새로 침입한 일본인 조선업자의 조선소가 서로 병립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선박 건조의 실적 면에서는 한국의 업체들이 일본인을 압도했지만 전통적 조선 방식을 묵수하는 한국의 전근대적인 업체와 명치유신 이래로 새로운 기술을 체득한 일본의 근대적 업체는 그 역량차가 점차 커져 간다. 특히 1887년(고종 24) 다나카 조선소가 영도에 들어선 것을 비롯해 일본형선(日本型船)의 보급과 발동기선(發動機船)의 등장으로 머잖아 일본인 업체들이 조선업을 독점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이전, 영도 쪽의 영선동 2가와 그 대안(對岸)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남포동 4가[영선동 2가에서 약 1.5㎞ 떨어진 곳]인데 그 사이의 바다에는 좁다란 대풍포(待風浦)가 있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 남항동 1가, 2가, 3가와 대교동 1가에 해당되는 넓은 지역은 대부분 바다였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육지 사이에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설립되었던 조선소들은 거의가 영도의 영선동에 집중해 있었는데, 이곳이 소형 조선소의 단지로서 적합했던 것은 육지 깊숙이 파고 들어온 바다와 갯벌 지역으로 인해 풍랑의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지금의 남항동 1~3가와 대교동 1가 일대는 당시 영선동에 속했음]. 이러한 지형적 요인뿐 아니라도 일본인 조선 업체들이 조선 반도 각지로 진출하기 전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산에 먼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하였다.
1920년대 이래 부산 시내 각처에서 대규모 매립 공사가 성행(盛行)하여 영도에서도 북부 봉래동 5가와 청학동 일부에 걸쳐 산지 개간과 임해 호안 공사(臨海護岸工事)가 시공됐다. 그리고 이는 석유 저장 기지와 뒷날 명실상부 한국 조선 근대화의 산실로서 큰 역할을 한 조선중공업[지금의 한진중공업의 전신]의 터전이 되었다. 이렇듯 영도는 조선소가 입지하기 좋은 자연 지형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형 어선의 보급이 더욱 고조되고 동력 어선도 일반화되었던 1930년대의 상황은 ‘한국 조선 업계의 1차 부흥기’였다. 선박 엔진 같은 핵심 부품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지만 주요 조선(造船) 시장의 품목인 어선은 동력선, 무동력선 모두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소는 이전보다 선박 건조의 기회가 많아지고 주요 조선소에는 동력선 건조, 나아가서는 소형 엔진의 자체 제작이 가능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게다가 화물선의 수적 증가와 대형화로 한국에서도 ‘강선(鋼船) 조선소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부문은 대형선 수리 능력의 확충이었다. 소형선의 경우 육지로 인양하여 선가(船架)[배를 땅 위로 끌어올리거나 끌어올려서 싣는 데 쓰는 설비]에서 수리하지만 대형선의 대수리나 배의 밑바닥 수리를 위한 선거(船渠)[선박 건조, 개조, 수리 및 검사 등을 위하여 선박을 도크 안에 넣고, 물을 빼거나 넣어서 선박을 바닥에 앉히거나 띄울 수 있도록 만든 설비] 시설이 필요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부산 영도 소재의 ‘니시죠우(西條)철공소’가 유일하게 1,500톤급 선박의 입거 수리(入渠修理)가 가능한 선거를 보유한 곳이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대륙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정 및 군수 물자 수송선의 수리 공장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1937년 강선 전문의 본격적인 근대 조선소가 나타난 것은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조선중공업’이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강선 건조 전문 업체로 1950년대까지도 1,000톤급 이상의 대형 강선을 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소였다.
해방 후 ‘조선중공업’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형 강선 건조 시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까지 단 한 척의 강선도 건조하지 못한 채 주로 수리 위주로 공장을 운영하였고, 그나마 자금난 등으로 휴업을 반복하였다. 정부는 1950년 「대한조선공사법」을 발효하여 ‘조선중공업’을 국책 회사로서 의욕적으로 운영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950년대 말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와 임금 체불로 인한 노사 분규 등으로 인해 가장 부실한 국영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거듭하여 1950년 1월에 일제 치하의 ‘조선중공업’이 보유하고 있던 시설을 기반으로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였으며, 1955년에는 ICA 자금 200만 달러와 대출 자금 3억 6,800만 환으로 각종 시설[20톤 기중기 7대 등] 등을 확장해 근대화된 조선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근의 부품 상점도 성시를 이루었다. 대평동 ‘항남마린’의 경우 1965년도에 문을 열고 1976년도부터 현재의 자리에서 선박용 디젤 엔진 부품 공업 기기들을 납품해 온 상점이다. 가게 명칭도 1997년 항남디젤에서 항남마린으로 바뀌었다. 현재 선박 용품점이 전반적으로 분산되어 장사가 되지 않으며, 취급 물품은 처음에는 일제를 사용하다 국산화가 진척되어 요즘은 스페인, 가나, 필리핀 등지에 수출도 한다.
1972년 1만 8,000톤급 ‘판코리아호’를 건립하면서 조선 국가로서의 서막을 알린 한국의 조선업은 다른 분야에 못지않은 비약을 거듭하였다. 1960년대 초반까지도 4천여 톤에 불과했던 연간 조선 실적이 1984년에는 약 230만 톤으로 발전하여 이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제1위의 조선국이 되었다.
깡깡이 아지매의 등장과 일과
영도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게 눌려 살던 원주민 외에 해방 후 돌아온 귀환 동포, 특히 6·25 피난 시절 피난민이 몰려 살기 시작한 지역이다. 지금도 당시의 피난민 주택이 남아 있는 영선동과 남항동, 대평동 일대에서는 13.2㎡에서 16.5㎡밖에 안 되는 집의 한 지붕 아래 여러 개의 방이 붙어 있는 주택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방마다 별도의 가구가 살아가는 상황이고, 거주민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는데 최근에야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집이 워낙 작은 터라 부엌이 없어 도로 건너 부엌에서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집을 보수하려면 한 지붕에 살고 있는 다른 가구에서 반대를 하기에 집을 보수하지 못하고 살다가 집을 떠나는 경우마저 있다.
특히 STX조선 사무실 동네[이북 동네]의 경우도 많은 가구가 이사를 갔으며, 지금은 주민[부모]들이 많이 죽고 빈집이 많다. 이렇듯 대평동은 우리나라의 6·25 전쟁과 맞물린 역사의 아픔을 설명해 주는 가옥 형태가 남아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영도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조선소와 철공소들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자연히 주민들의 자랑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선박 수리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라는 자부심이었고, 지금도 많은 선박들이 수리를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1980년대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소련 배들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입항 허가를 받고 들어와 수리를 받고 떠나곤 하였다.
일반적으로 선박은 5월 전후로 수리를 하는데, 이때 고친 배를 가지고 일 년 동안 계속 운항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5월이면 항상 선박들이 배를 고치기 위해서 북새통을 이루곤 하였다. 특히 원양 어선처럼 먼 곳으로 바다를 나가는 배들은 이 기회에 최선을 다해 배를 고쳐 놔야 탈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였다. 선박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남항동에서 선박 수리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남항동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전국 어디를 가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은 그런 자부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간판도 없는 작은 슈퍼 앞에서 만난 한 노인과의 대화에도 그런 자부가 묻어난다. 80세가 넘었다는 그는 6·25 전쟁기 영도로 피난을 와서 정착한 사람으로 예전 조선소에서 근무하였다. ‘대양조선, 구일조선, 남양조선…….’ 등 그가 옮긴 조선소 이름이 모두 다나카 조선소에서 시작하여 이름만 바뀐 곳이며, 요즘 명함을 내미는 ‘에스엔케이라인’도 결국 그 갈래라 본다. 그들이 이렇게 내력을 꿰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였다.
“여기서 배 수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좀 더 대우받고, 사회의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받은 대우와 자신들의 뒤를 잇는 후배들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만은 아닌 듯하다. 조선업은 실제로 영도의 정체성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조선소 수리 중에서도 수리를 위해 배가 들어오면 배에 들러붙은 녹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기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찾기 쉬운 일자리였다. 예전에는 요즘처럼 그라인더가 없었기 때문에 녹 부분을 직접 망치로 내려쳐서 없애는 수작업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였다.
무작정 도시로 나와 벌이를 하거나 6·25 전쟁으로 과수댁이 된 젊은 여성들로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마다하기 어려웠다. 영도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배와 관련된 일밖에 달리 일거리가 없었다. 특히 여성의 몸으로는 힘든 작업을 시켜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권이란 없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보통 남자라면 절대 응하지 않을 저임금에 중노동을 하는 이른바 ‘깡깡이 아지매’가 탄생하였다.
조선 수리업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 중반에는 영도에 배를 대는 독이 12개였다. 한 독마다 15명이 일했으니, 어림잡아 180여 명의 깡깡이 아지매가 영도에서 일을 했던 셈이다. 몇 년 가지는 못했지만 1965년 무렵에는 ‘깡깡이 아지매 조합’이란 것도 생겼다. 당시 조합 부위원장을 했던 이가 늦게까지 부산 구평의 ‘대평조선소’에서 반장으로 근무하던 서형자 할머니[75세]이다. 조합이 있을 때는 단체로 신체검사도 받고 직장이 보장을 받았으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데모도 하였다.
하지만 망치로 녹을 떨어내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굉장한 소음을 일으키게 되고, 이는 청각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깡깡이 아지매로 오랫동안 일해 온 여성들 중에는 대부분 청각을 잃었거나 난청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선박 수리소가 20여 군데 남아 있는 지금도 이 분들은 활동을 하고는 있으나 작업이 배당됐을 때만 직장에 나오고, 일이 끝나면 바로 귀가하기 때문에 사실상 직접 대면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이곳의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민원까지 넣고 있는 사정이라서 깡깡이 아지매가 “내가 그 일을 합니다.”라고 나서기는 어렵다.
영도대교
영도대교(影島大橋, Yeongdo bridge)는 부산광역시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1934년 11월 23일에 길이 약 214.63m, 너비 약 18m로 준공되었다. 개통 당시는 다리 이름이 부산대교였다. 1966년 9월 영도구의 인구증가에 따른 교통량의 증가로 도개를 중단하고 전차궤도도 철거되었다. 1980년 1월 30일 부산대교가 개통되어 영도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기존의 영도대교가 노후화되면서 안정성이 문제가 되어 기존 다리를 철거하고 도개식 교량으로 복원하였다.
복원된 영도대교는 매일 낮 12시부터 15분 동안 교량 상판이 들어 올려지는데 이 드는 다리의 길이는 31.3m, 무게는 590톤으로, 2분여 만에 75도 각도로 세워진다. 원래 도개시간은 12시였으나, 2015년 9월 현재 도개시간이 14시로 변경되었다.
영도대교는 부산 최초로 건설된 연륙교이며 한국 최초의 '일엽식 도개교' 형식의 다리이다. 그리고 일제시대와 전쟁의 수탈과 애환 그리고 이산과 실향의 역사가 담겨있는 다리이다. 개통 당시에는 다리가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모습을 보기 위하여 부산을 비롯, 인근 김해·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했다.
다리가 개통될 당시 육지쪽(중앙동) 다리 31.30m를 하루 2~7차례 들어 올렸으며, 도개속도는 고속(1분 30초), 저속(4분) 2가지가 있었다.
1935년 6월 25일부터는 다리를 들고 닫는 시간을 15분으로 줄였으며, 개통 이후 교통량의 급증으로 도개 횟수를 점차 축소하다가 1966년 도개 중단 직전에는 오전·오후 각 1회씩 여닫았다. 공사비는 착공 당시 360만원이 소요되었다.
1935년 2월부터 영도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교량 위로 전차가 다니기도 했으나, 교량이 고정된 이듬해 1967년 5월 2일 폐쇄되었다.
영도대교 부근에는 당시 부산 제일의 명물이었던 도개식 영도대교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한 ‘도개식 영도대교 기념비’와 한국 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가수 현인의 대중 가요인 ‘굳세어라 금순아’의 시대적 배경을 담아 건립된 ‘현인 노래비’ 등이 있어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2] 2013년 11월 27일 영도 대교가 재개통되면서 도개 시간이 바뀌었다. 하루 한번으로 여는시간 14:00, 닫는시간 14:15분이다.
영도대교(影島大橋)는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영도와 부산을 잇는 연육교인 영도대교는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된 길이 214.7m, 폭 18.3m의 우리나라 최초의 연육교이다. 하루 총 6회씩 도개하여 부산의 명물로 자리하였지만 1966년 9월 증가하는 차량 통행으로 인하여 도개 기능이 멈추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부산시민과 애환을 함께 해온 영도대교는 8.15해방과 6.25전쟁 이후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애환과 망향의 슬픔을 달랬었던 장소였다. 전쟁 당시 영도대교에 가면 친인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영도대교 인근은 피난민으로 가득 메웠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상담하는 점집들이 성업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사와 함께 해온 구조물인 동시에 근대 부산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다리이다.
영도대교의 건설은 부산항 물류장 확충과 간선도로의 개설과 함께 근대 부산의 도시발달에서 중요한 사업이었다. 특히 영도는 영도대교의 건설로 인하여 부산 도심과 육로로 연결되고 전차가 개통되는 등 도시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영도구의 도시발달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영도대교는 교량 뿐 아리날 영도대교를 구성하는 건축물들도 건축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교대의 경우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바른 층쌓기를 하여 교대를 형성하고 모서리돌은 직사각형 화강석으로 모접기 등을 하는 등 정교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아울러 교대 좌우측의 화강석 계단, 교량 입구의 교문주와 난간 등은 영도대교의 구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교량 입구 광장인 다리목 광장은 영도대교의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근대 교량의 형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영도대교는 현재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유일한 단어빅 도개교(bascule bridge)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교량이다. 일반적인 도개교와는 달리 안벽부에 도개 장치를 설치하고 있는 등 도개 교량의 형식에서도 특이성이 인정되는 등 한국 교량사(토목)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어 근대 교량사를 연구하는데에 대단히 중요한 교량으로 그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남항대교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서 영도구 영선동까지 연결된 해상다리.
부산 남항에서 영도로 연결되는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항 대교는 길이 1,941m에 강상형교 1,015m, 강합성교 832m, 램프 94m로 구성되어 있다. 폭은 18.5~38.6m이며 왕복 4차로이고, 교량 높이는 30m이다. 상부 구조는 강상판 상형교이며, 하부 구조는 강관 파일 직접 기초이며 교량 등급은 1등교이다. 설계파 파고는 8.3m에 설계 하중은 DB-24 총 하중 43.2톤이며, 내진 1등급[리히터 규모 5]으로 건설되었다. 총 공사비는 3,550억 원이 들었다.
남항 대교는 남항에서 도심으로의 접근성을 향상과 부산항 물동량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경부고속도로∼광안대교(2003)∼부산항대교(2014)∼교남항 대2008)∼을숙도대교(2009)∼신호대교(1997)∼가덕도대교(2010)∼거가대교(2010)로 이어지는 7개 교량의 해안순환도로망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남항 대교는 는 1997년 10월 6일 착공하였으나, 당시 IMF 금융위기를 맞아 국비 확보 차질 등으로 공사비를 마련하지 못해 1999년 11월부터 2002년 5월까지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재개하여 착공 10년 9개월만인 2008년 7월 9일 개통되었다.
남항 대교의 건설로 서구 암남동에서 영도로의 이동 거리는 8㎞, 이동 시간은 30분가량 단축되었다. 자동차 전용 도로로 설계되어 제한 속도는 70㎞/h이며, 다리에 너비 3m의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고, 진·출입 구간에는 3~5m, 교각에는 1m 간격으로 1,628개의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CCTV 11대, 방송 시설 4개소, 전광판 2개소, 승강기 2대, 친수 공간인 수변공원 2개와 준공 기념 조형물 등이 설치되어 있다.
남항 대교는 거가 대교~가덕 대교~을숙 대교~북항 대교~광안 대교~경부 고속 도로로 이어지는 부산 해안 순환 도로의 한 축으로 건설되었다. 연결 도로로 현재 천마 터널 공사가 2018년 12월 개통예정으로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남항 대교의 개통으로 서구 암남동에서 영도까지 이동시간이 30분이나 단축되었다. 남항 대교는 자동차전용도로이나, 산책로를 이용하는 보행자나 자전거가 통행할 수 있다. 이륜자동차(모터사이클 혹은 오토바이)는 긴급자동차(싸이카)에 한해 통행이 가능하며, 그 밖의 이륜자동차는 통행할 수 없다.
남항 대교는 최첨단 최첨단 조명 시스템을 구축한 LED 조명등 2,504등을 전 구간에 설치하였다. 경관 조명의 컨셉으로 ‘신세기를 열어가는 관문’을 주제로 한 경관 조명 연출로 남항의 밤바다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남항 앞바다를 비추는 빨강 등 무지개 색깔의 LED 조명등의 발광 다이오드의 빛이 교각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색상이 변하는 연출과 교각 한 쪽 가장자리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이 색상이 바뀌는 연출, 중심교각 전체가 색상이 순간적으로 바뀌는 모습 등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하고 있다.
남항 대교에서는 용두산공원, 자갈치시장, 도개교인 영도대교, 태종대, 송도해수욕장 해안 절경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교량의 내항 쪽에 폭 3m의 산책로가 설치돼 시민들이 자유롭게 왕복하면서 남항 일원의 풍광과 부산 해안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흰여울문화마을
흰여울길은 예전에 봉래산 기슭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바다로 굽이쳐 내림으로써 마치 흰눈이 내리는 듯 빠른 물살의 모습과 같다하여 흰여울길이라 한다. 흰여울길 주변일대를 제2송도라 불린다. 바다 건너편 암남동의 송도를 제1송도라 하고 마주 보고 있는 이곳을 제2송도라 한다. 영화 ‘변호인’, ‘범죄와의 전쟁’,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등 수많은 작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2011년 12월 공·폐가를 리모델링하여 지역 예술가의 창작의욕을 북돋우고, 영도 구민들로 하여금 생활 속 문화를 만나게 하는 독창적인 문화·예술 마을로 거듭났다.
흰여울길은 마을의 앞마당이자 버스가 다니는 절영로가 생기기 전까지 영도다리 쪽에서 태종대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절영로에서 흰여울길 사이에는 세로로 14개의 골목이 나있다. 전체로 보면 여러갈래의 샛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미로와 샛길이 많다는 것은 피란민들이 지내는 삶의 공간이 그만큼 힘들고 험난했음을 말해준다.
부산 전역에 조성된 갈맷길(총길이 263km)의 3-3구간으로 영도지역 구간입니다. 남항 외항을 끼고 태종대까지 해안길과 산길로 이어져있습니다. 흰여울길과 절영해안산책로 사이에는 모두 5개의 층층계단이 형성되어 있다.
흰여울마을의 들머리에 있는 200m 높이의 계단이다. 계단 중간쯤에 주민들이 이용하던 맏머리샘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의 준간쯤에 위치한 폭이 좁은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을 오르면 생전에 금술이 좋았던 키 작은 할매할배의 꼬막집을 만날 수 있다. 마을의 중앙 부문에 위치하고 있는 무지개 계단은 희여울마을에 무지개가 피어나기를 소망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 크레파스같은 계단을 오르면 영화 변호인 촬영지가 나온다. 1990년대 말 절영해안산책로 개설 때 만들어진 피아노계단은 이송도 전망대와 맞닿아있다. 도돌이계단은 이송도 전망대에서 피아노계단 반대편 중리 해변 쪽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다.
흰여울문화마을 앞바다에는 중·대형 선박들이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 바로 부산 남항의 묘박지이다. 부산항에 들어오는 화물선이나 원양어선, 선박 수리나 급유를 위해 찾아오는 선박들이 닿을 내리고 잠시 머무는 곳이다. 하루 평균 70~80척이 머물고 있으며, 일거리가 없어 장기 대기 중인 빈배들도 있다. 조류의 흐름에 따라 닿을 내린 탓에 뱃머리가 일정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절영해안산책로에서 흰여울문화마을을 떠받치고 있는 축대들은 원래 집과 텃밭, 돼지 축사 등이 있던 경사진 언덕이었다. 태풍과 강한 바닷바람으로 인해 이전의 축대가 무너지면서 1988~1989년 방제 보강사업을 통해 지금의 축대가 조성되었다.
흰여울문화마을에는 꼬막을 닮은 작은 집들이 많다. 피란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지어올린 하꼬방이 집이 된 까닭이다. 집 앞 골목에는 작은 텃밭들이 있다. 고무대야와 플라스틱 다라이 속에 푸성귀가 자란다. 씨 뿌릴 땅 하나 없이 모두 집터가 되어버린 흰여울길의 이색적인 모습이다.
1. 일시 : 2019. 6. 22(토)
2. 코스 : 부산진시장←<1.5km>→증산공원←<4.5km>→초량성당←<0.8km>→부산역←<2.3km>→백산기념관←<1.0km>→부산근대역사관←<0.4km>→국제시장←<3.2km>→자갈치시장←<1.0km>→영도대교←<1.0km>→남항대교
3. 실거리 : 15.8km
4. 소요시간 : 5시간 내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