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기다리며.
1. 창세기의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에 이어 요셉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야곱의 죽음에는 바로의 신하들과 군대가 함께 가나안까지 올라가는 대규모의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애굽에서 70일간 애도를 한 것은 바로의 애도 기간에 이틀 모자라는 숫자입니다. 이 무리의 곡하는 소리를 보고 가나안 사람들이 아벨미스라임(애굽 사람들의 통곡이라는 의미)이라는 지명을 만들 정도였습니다(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문을 얼마나 높이시는지 보게 됩니다.
2.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을 요셉이 되갚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두려움으로 인해 울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의 놀라운 고백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20).
3. 요셉이 이집트라는 대국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그 어려운 환경을 지나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연단, 성숙시키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더 큰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은 인간의 악한 의도까지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함을 자신의 거룩한 계획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바꾸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배우지 못한다면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알고, 경험하고 있습니까?
4. 요셉도 죽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24). 돌보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방문, 즉 인간의 역사를 바꾸시기 위해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방문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미래에 펼쳐지게 될 것을 보장하는 말입니다(출 3:16~17).
5. 성도들은 자신의 미래가 하나님의 계획안에 놓여있으며, 현재의 세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가 아무리 컸어도 그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땅은 여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살았습니다. 당신도 여기가 우리가 영원히 살아가야 할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창세기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약속과 함께, 하나님께서 장차 모든 약속을 성취해 주실 것에 대한 기대와 함께 마무리됩니다. 이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방문(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가져야 하는 신앙의 내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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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야곱의 죽음 후에 요셉에게 있었던 일과 요셉의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죽음을 맞이하자 요셉은 아들로서 의무를 다하는데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릅니다. 요셉이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과 그 규모입니다. 시신이 썩지 않도록 40일에 걸쳐서 향으로 처리를 하고 슬퍼하며 곡을 하는데, 애굽 사람들이 곡을 하는 기간이 무려 70일입니다. 바로가 죽었을 때 애곡하는 기간이 72일인 것과 비교하면 요셉의 아버지는 바로의 애도 기간보다 불과 2일이 적은 기간입니다.
장례 기간뿐만 아니라 요셉이 바로의 허락을 받아 가나안으로 떠나는데 규모를 보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7~9)
장례의 기간이나 규모를 통해 애굽에서 요셉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성대하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매장지에 아버지를 장사합니다.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요셉, 열일곱 살에 떠나 대략 39년 만에 고향 땅을 밟는 겁니다.
야곱의 장례를 보면서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슬픔입니다. 애굽에서 70일의 애도의 기간이 지나고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와서 다시 7일 동안 슬퍼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면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요셉은 자신의 체면이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슬픔을 표한 것이 아니라 정말 큰 슬픔에 빠져 울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이렇게 슬퍼하는 요셉을 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요셉의 형들은 별로 슬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슬퍼하는 요셉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요셉의 형들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요셉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요셉의 형들은 슬픔보다 다른 것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15)
그들이 행한 악을 요셉이 되갚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요셉은 두려움에 빠진 형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마소서”(19, 21)하고 말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했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동생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열일곱 살이었던 요셉이 당한 충격과 괴로움은 당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이야기는 어떤 걸까요?
밑바닥까지 떨어진 주인공이 이를 악물고 복수를 다짐해서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통쾌하게 갚아주는 것, 그런 걸 기대합니다.
이제 요셉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요셉과 형들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고 요셉의 말 한 마디면 형들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자신을 외면했던 형들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돌려 줄 수 있습니다. 곁에서 요셉을 말릴 수 있는 아버지는 안계십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한 말입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17) 형들은 아버지가 남긴 말씀을 전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죄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어렵게 만듭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형들에게는 죄책감이 남아있었고 불안했던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또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조금이라도 치르고 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까 불안하고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면 이렇게 할 거 같으니까 상대방도 이렇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요셉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지금이 기회인데 분명 복수할거야! 당한 만큼 돌려줄 거야!‘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 아닙니까?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 그 사람도 아팠으면 좋겠고,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더 힘들었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래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야’,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마음에 불만과 원망이 생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한 본성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본성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떻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과 다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셉처럼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하나님을 대신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상황을 아시고 나의 어려움을 아시고,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을 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죄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통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해치려고 했지만, 그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은 우리를 속입니다. 그 상황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셉이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미워해서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자유를 빼앗긴 나의 상황, 거짓말로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 여자,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나의 상황, 상황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상황들은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니 그런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상황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문제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어려움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수하고픈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속삭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 내가 뭐라고 반대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나에게는 어려움 일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감사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큰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괴로웠지만,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그 일에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상황은 어떠십니까? 어떤 상황이 여러분을 속이려고 합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 말 못할 아픔으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고, 앞뒤에 꽉 막힌 상황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고, 남들과 비교되는 나의 처지 때문에 낙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와 계획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 뜻대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그림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습니다. 복수하는 것,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갚아 주는 것, 요셉은 이런 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그의 마지막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자손들에게 유언의 말을 전합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4~25)
요셉의 유언은 두 가지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땅에 이를 때에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 약속에 대한 요셉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요셉의 유언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표현입니다. 요셉은 특별히 강조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방문한다’,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찾아오실 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오셔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킬 것이니 하나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자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 명하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이와 같은 요셉의 삶을 우리는 아름다운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셉의 삶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어려움을 이기고 총리가 되어 성공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삶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이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아름답게 가꾼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의 삶이 하나님이 빚으신 작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빚어 가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KBS 다큐에 방영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채팅방에도 공유된 적이 있는데 교회오빠라는 제목의 다큐입니다.
젊은 한 부부가 나오는데 남편이 어느 날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며 투병 생활을 하는데, 다음해에는 아내가 산후 조리를 마치고 나와서 검사를 받았는데 림프종 혈액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남편의 항암치료가 끝나자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이 아내의 항암치료가 시작됩니다.
남편은 그 과정 속에서 이런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이러다 저희 가정 다 죽겠습니다.’ 그러면서 부부는 서로가 그 아픔을 알기에 배우자가 투병 중에 있을 때 어떤 마음인지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고 치료는 종료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14개월 만에 남편의 암은 재발되었고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복막에서부터 여러 장기에까지 전이된 것입니다. 의사의 표현으로 모래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는 겁니다.
제가 이 영상을 보는데, 그냥 눈물이 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할 텐데‘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암에서 나아서 건강해져야 될 텐데’
그런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말이 제 마음을 울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내가 이 질병에서 완치되어야지 기적이라고 생각할거야 그런 기적들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우리가 질병을 만나서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인지 우리는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서 깨달았잖아. 그래서 암 자체는 축복은 아니지만, 암을 통해 우리가 얻은 유익인거 같아“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보고 하루라도 더 살아야 되냐고 물어봤을 때는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서 제가 조금이라도 더 온전해지는 기회를 얻고 싶은 거예요“
“하루하루 눈뜨고 호흡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우리 부부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명, 그렇게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죽는 죽음이라면 삶에 대한 후회가 없을 것 같고“
그의 아내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부르심을 받는다 해도 ‘네’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닌 걸 우리는 알잖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우리에게 펼쳐질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다리며 삽니다. 약속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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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장례_준비(1-3절)
오늘 본문은 야곱의 장례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될 12아들에게 유언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내용 중에는 축복은 물론 저주도 있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서 유언과 같은 기도를 드리는데 왜 좋은 내용으로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복이 되지 않을 만한 내용은 다 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그대로 했던 것은 그것이 단지 ‘아버지의 아들을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그 기도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자녀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우리에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은 자신의 마지막 말을 하고, 147세의 일기로 마지막 숨을 내어 쉬었습니다. 모세는 야곱의 죽음에 대해서 ‘그의 백성(열조_조상)에게로 돌아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죽음’을 다른 말로 정의하면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죽다’의 표현이 열 가지도 넘게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돌아가다’입니다.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처음에 출발한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없고서는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해외로 여행을 가거나 파견 또는 유학을 떠나게 되면, 그곳에서 짧게는 1-2주에서 길게는 수년을 살게 됩니다.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어떤 물건을 사더라도 그것이 조국으로 돌아가서도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해외에 머무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1-2달 머물다가 돌아갈 텐데, 그곳에서 자동차를 사고, 대형 TV, 냉장고 등을 산다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출발했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야곱처럼 자기 자녀에게 누워서 할 수 있는 말을 전부 다 하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모세처럼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즉 자신이 정말 원했고, 이루고 싶었던 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바통을 넘겨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회오리바람으로 데려가신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 ‘갑자기’는 예상하지 못한 질병의 증상일 수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헤롯왕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한 야고보 사도처럼 본인이 인식했던 인식하지 못했든지 간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숨이 끊어져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살다가 어떤 형태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는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적절하고도 중요한 지침이 되는 말씀이 시편 116:15인데,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라고 증거합니다.
‘귀중한’은 ‘아주 가치가 있는’, ‘빛나는’이란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 그것이 얼마의 가치가 있든지 간에,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의 죽음은 그것보다 더 귀중하고, 가치가 더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죽음과 장례식에서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깨닫게 되는지 모릅니다.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결혼식은 있을 수 있어도 깨달음이 없는 장례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마지막 숨을 내어 쉰 것을 확인하고서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야곱의 죽음은 호상(好喪) 중에서도 호상이었습니다. 야곱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하면 적게 살았지만, 아들 요셉에 비하면 37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요셉은 110세를 살았지만, 야곱은 147세나 살았습니다. 그가 표현한 대로 그의 인생은 ‘험악한 세월’이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22년 동안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었고, 더구나 당시 최강대국 중의 하나인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아들이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총리 아들을 만남에 따라 긴 기근의 세월을 이길 수 있었고, 수백 년 후에 있게 될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은 그의 평생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아들을 축복하면서 요셉에게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아브라함, 이삭)의 축복보다 더 낫다”라고 자신 있게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총이 더욱 컸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아무리 연세가 높아서 세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떠나보내는 자식에게는 ‘이제 나에게 뿌리와 같았던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라는 상실감이 찾아오기 때문에 마음이 힘듭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궁극적인 차이 중의 하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에게 입을(굿바이 키스를) 맞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아버지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의 죽음을 보게 되더라도 ‘울다’와 ‘입 맞추다’를 잘해야 합니다.
(2-3)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미라(mummy)로 만들게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시신을 미라로 만들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먼 미래에 그 생명이 본래의 몸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아주 부유한 사람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왕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를 위해서 72일 동안 애곡하는 기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을 위해서는 70일 동안 애곡을 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의 국가장(國家葬)에 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사람은 요셉이 아버지의 시신을 미라로 만든 것은 애굽의 장례법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시신을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안장하려면 시신 그대로 운구해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듦으로 애굽의 장례법도 존중하고, 시신도 온전히 보존함으로 아버지의 유언도 지키는 일거양득(一擧兩得)과 같았습니다.
야곱의 장례_가나안으로 운구(4-9절)
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요셉은 바로왕에게 장례를 위한 휴가를 요청했습니다.
(4-6)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요셉은 바로왕에게 직접 나아가지 아니하고 대리인을 보내어서 장례 휴가를 요청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지는 70일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애굽 사람은 평소에는 수염을 짧게 깎아야 했지만, 상중(喪中)에는 그 표시로 수염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과 고대 중동에서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상중에는 애통의 표시로 머리와 수염을 깎았습니다. 요셉은 히브리사람이었지만 애굽의 문화도 존중했던 것입니다. 애굽 민족과 히브리 민족의 문화가 다른 것처럼, 모든 국가의 문화는 다 다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각 지방의 문화도 다르고, 개인의 문화도 다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이 지혜이고 성숙입니다. 다름은 다름이고 틀림은 틀림입니다. 다름을 틀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알수록 더 넓고 더 깊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요셉은 바로왕의 허락을 받고서 바로 장례식을 시작했습니다.
(7-9)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정승 부인(또는 정승집 말 또는 개)이 죽으면 조문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정승 부인이 죽으면 밥을 먹다가도 뛰어나가고, 정승이 죽으면 밥을 다 먹고 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야곱의 장례식에 정말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습니다. ‘바로의 신하 모두’, ‘바로의 궁의 원로들’, ‘애굽 온 나라에 있는 원로’, ‘요셉의 온 집안과 그 형제들’, ‘아버지의 집안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병거와 기병, 지금으로 하면 탱크부대와 같은 특수부대까지 동원되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올라갔다는 것의 강조적인 표현입니다. 즉 야곱의 집안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어린아이들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장례식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는 것은 요셉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그동안의 그의 치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흔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의 자녀로 태어나 누구의 부모로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야곱의 장례가 부러운 것은 아들이 애굽의 총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집안이 신앙의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신앙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 부럽습니다.
야곱의 장례_막벨라굴에 안장(10~14절)
(10-11)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야곱의 장례 행렬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가시나무)이라는 곳에 이르자 거기서 일주일 동안 다시 애곡을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애굽에서는 애굽식으로 치르고, 가나안 땅에서는 다시 가나안식으로 치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장례식에서 요셉과 그 가족들이 심하게 통곡하는 것을 보고, 아닷 지방 사람들이 그곳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벨미스라임’은 성경 아래쪽 각주에 쓰여있는 것과 같이 ‘애굽인의 (통)곡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장례식에서 의아한 것은 요셉은 고센에서 막벨라 굴이 있는 헤브론까지 최단 거리인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올라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시내 반도를 가로질러서 가데스바네아를 거친 후, 염해(사해)를 돌아서 올라갔습니다. 왜 그렇게 먼 거리를 돌아서 갔는지 이유를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돌아서 가도록 하신 것은 블레셋 사람과 전쟁하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들어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것이라,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출 13:17). 이때도 블레셋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돌아간 길이 나중에 출애굽의 길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후에 있게 될 출애굽의 길을 미리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도 동일하게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하신 후에 일을 맡기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곤 하지 않습니까?
(12-14)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야곱은 요셉에게, 그리고 12아들에게 간곡하게 그리고 아주 강하게 자신을 애굽에 매장하지 말고,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매장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것은 단지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이거나 가족묘에 묻히고 싶은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의 자손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147년의 인생을 통해서, 자기의 야망과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는 삶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움켜쥐는 삶에서, 자신의 인생이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에 쥐여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족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하나님의 손안에서 살아가십시다.
야곱의 죽음 이후 재차 용서를 구하는 형들 (15-18절)
어제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진행 된 야곱의 장례식 이후, 요셉의 형들은 다시금 요셉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들이 다시 요셉을 두려워 한 이유는 야곱의 성대한 장례식을 통해 애굽 안에서의 요셉의 권력과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의 형들의 이 두려움은 인간적인 두려움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동생이었을 때에는 요셉에게 큰 힘이 없어 그를 함부로 하였으나, 이제는 총리 요셉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지 않게 형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보았을 때 요셉의 형들은 세상적인 힘과 권력은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업신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간 자신들을 향한 요셉의 너그러운 행동을 이 형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큰 회개를 하여도 한순간에 완벽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형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앙의 성숙도가 아직 부족하여, 요셉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야곱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형들에 대한 복수를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특별히 15절 마지막인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라는 표현은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대변하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악을 요셉이 아직 다 갚지 않았기에, 요셉의 용서와 섬김을 거짓된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상호거래’라는 개념에 익숙하여 사랑과 용서, 섬김과 배려라는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무언가를 주고받는 ‘거래의 개념’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본성입니다.
(16-17)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형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이들은 요셉에게 직접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어 야곱을 핑계 삼아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메시지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자신들을 용서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야곱이 요셉의 형들에게 참으로 이러한 말을 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는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형들이 아직도, 이미 이루어진 ‘요셉의 용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형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울었습니다. 자신은 분명 여러 차례 확실한 말과 약속을 하며 형들을 용서를 했는데, 이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던 것이었습니다.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자신들이 보낸 메시지에 요셉이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전해들은 후 조심스럽게 요셉 앞으로 나올 용기가 생긴 형들은 납작 엎드려, 자신들은 요셉의 종이라고 외쳤습니다. 요셉의 형들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남김없이 용서하여 주셨다는 사실 역시 하나님을 향한 큰 믿음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과거 요셉이 야곱과 형들의 모든 가족들을 애굽으로 불러오면서 한 말과 행동, 그리고 약속들 모두가 요셉이 용서를 하였다는 증거가 되었듯이,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기간,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같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무게 앞에 불안하고 힘들 때 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용서와 구원에 대한 증거들을 다시금 찾고, 의지하며, 눈을 들어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일을 해야합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5장 8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의심과 질문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 설명한 ‘세상적인 거래’와는 다른 계산법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요셉의 용서가 또 하나님의 용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 총리인 요셉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총리님, 저 사람들을 왜 용서해 주십니까?’ ‘그래도 과거의 잘못을 조금은 갚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주변의 질문 속에서도 요셉이 ‘괜찮다.’라고 선언하면 더 이상 이 용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공식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더 큰 은혜로 다 갚아 주셨다고 선언하면 이 용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신 치르게 하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시면 그 누구도 항변할 자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를 못 믿으면, 계속해서 죄의 어두움에 갇혀, 부들부들 떨며,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형들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거듭 약속함 (19-21절)
이어지는 19-21절까지의 내용은 아직도 두려워하는 형들을 향한 요셉의 용서와 사랑의 내용입니다. 먼저 19절입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의 형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감정을 파악하여 다시금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요셉 자신은 직접 형들의 지난날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마음이 없다는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재판장이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이에 합당하게 이 땅의 모든 일들을 치리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매일 눈을 들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요셉은 지금 자신의 삶의 과정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오늘의 나의 선택을 하나님을 떠나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고백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이어지는 요셉의 두 번째 표현은 20절입니다.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자신이 함부로 인생의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함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요셉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삶에 중심에 확실하게 자리를 자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다양한 결정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결국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히 성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들에게 떠밀리지 않으시고, 뒤돌아 그들 사이를 지나올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범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영원히 붙들어 주시는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이 땅의 여러 일들에 담대하게 맞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때로 크고 작은 일들이, 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관계가 더 나아가 세속적인 가치관의 물결이 우리를 낭떠러지 아내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할지라도, 신자들을 붙드시고, 세상의 일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손은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손은 영원한 생명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21절입니다.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여기서 요셉이 자신의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라는 단어는 요셉이 이들의 생활을 책임져주겠다는 의미와 함께 이들을 ‘보호’하며, ‘받들어 섬기겠다’는 의미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냥 적당히 용서해주시고, 그 뒤로는 계속 하나님의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그런 치사한 용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과거 우리의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해주시는 용서,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 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1장 18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나와서 나랑 이야기하자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이야기하시며, ‘내 용서는 완벽한 용서이다, 내 사랑은 완벽한 사랑이다’라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확인시켜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요셉이 자신이 한 약속대로 요셉의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까지 잘 지키고, 잘 섬겨주었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22-23절에 나타납니다.
요셉의 죽음과 약속의 성취 (22-26절)
(22-23)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이 자신의 형들에게 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었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향해 하신 약속, ‘영원한 생명’이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요셉이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였고, 애굽이라는 나라의 총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나 그도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러하였듯, 이삭이 그러하였듯, 자신의 아버지 야곱이 그러하였듯,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 마지막 24-26절입니다.
(24-26)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은 자신이 아무리 애굽에서 총리라는 직을 가지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가나안 땅이 아니고 결국 타국 땅인 애굽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진정으로 사모하는 본향은 오직 믿음의 선조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훗날 자신의 해골이라도 메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 달라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기 14절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고, 애굽 땅에서 다시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이러한 믿음은 여호수아 24장 32절에서 결국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요셉의 바램과 그 후손들을 통해 이루어진 일들을 통해 확인되는 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사건은 결국 ‘애굽’과 같은 ‘죽음의 자리’에서 꺼내어, ‘가나안’과 같은 ‘천국’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이들 한 명, 한 명을 끝까지 기억하시어 이들을 반드시 구원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예언과 같은 자신의 마지막 말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들을 돌보시고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실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기억하시어 출애굽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출애굽기 2: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긴 시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선언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요셉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을 돌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필요와 연약함을 기억하시고,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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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면, 아담과 하와의 가정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가정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창세기는 문자 그대로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가 아니라, 창가정기, 즉 하나님께서 가정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보여주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으로 끝나고, 3장부터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야기를 시작으로 그 후손들의 가정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야기로 시작된 창세기는 야곱의 가정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선악과를 따먹어 범죄함으로 깨어졌다면,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깨진 가정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야곱에게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고.. 야곱 자신이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자식들 때문에 야곱의 인생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험악한 인생이,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노예로 팔려 십수년을 고생한 요셉에 의해 평탄한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깨진 가정이 회복되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역사를 통해 가능했음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연약하고 끊임없이 범죄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미련함을 지혜롭게 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범죄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죄사함 얻게 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결코 짧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14절까지는 야곱의 장례식을, 15~21절까지는 요셉과 그의 형제간의 화목한 이야기를, 22~26절까지는 요셉의 유언과 죽음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의 전통적 관례에 준하여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요셉의 명에 따라 장례준비만 40일이나 걸렸으며, 장례는 70일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더운 열대 지방에서 70일간 장례가 진행되었지만 그 시신이 상하지 않은 것은 고도로 발달된 미라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일찍부터 왕족이나 귀족이 죽으면 그 시신이 썩지 않고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40일간의 장례준비와 70일 동안 국장으로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룬 것을 보면, 당시 요셉이 애굽땅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70일이 지나 야곱의 출관일이 다가오자 요셉은 애굽의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의 장지가 이집트 애굽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나안 땅임을 알리고 허락을 구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요셉은 사람을 시켜 바로에게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바로의 허락을 받은 요셉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데, 그때 장례행렬이 얼마나 웅장했는지를 7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바로의 모든 신하와 궁의 원로들 뿐만아니라,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까지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가나안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로왕은 애굽의 총리로서의 요셉의 명예를 존중해 주기 위해 병거와 기병까지 동원시켜 장례를 더욱 성대하게 치루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애굽에서 왕과 원로들과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와 존경을 얻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 요셉의 형들은 과거에 저지른 자신의 죄로 인한 보복이 두려워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을 때에 한 말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17절입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죄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요셉 때문에 애굽의 고센땅으로 옮겨 산지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17년 동안 요셉의 형들은 이전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불안과 걱정,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옛말에 ‘때린 놈은 다리를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를 뻗고 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잠도 편히 못 잔다는 말입니다. 허나 이 말도 말 그대로 옛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때린 놈이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죄책감은커녕 자신을 변호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범죄자들의 ‘인권’을 운운하면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삶을 두 번 죽이는 일조차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한마디면 아무리 흉악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가볍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흉흉하고 각박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17년 동안 톡톡히 치루며 살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범죄의 댓가를 자신이 갚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처벌하지 않은 것은 악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로 인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무엇이 내 감정을 다스려 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요셉은 110세를 살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유언으로 남긴 요셉의 말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갈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이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보장해 준 땅이었지만, 자신의 시신이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요셉의 궁극적인 삶의 지향점이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 넘어 영원한 세상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가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처럼 영원한 약속의 땅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아름답게 결실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정 또한 결코 짧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할 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내가 살고 나의 가족이 사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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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가정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펼쳐가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해 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에게도 그 약속은 전수되었으며, 야곱을 거쳐 요셉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확히 말씀드리면 헤브론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장사되었고, 오늘 본문의 요셉도 훗날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가서 그 땅에 장사지내 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처럼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 즉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신앙여정의 출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아는대로 약속의 성취를 위해 출애급 했으며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였고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거치기까지 그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와 바벨론의 공격으로 약속의 땅을 떠났다가 포로시대를 거쳐 다시 돌아왔지만, 서기 77년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완전히 초토화 됨으로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2000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나라 잃은 설움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나라를 잃어버린지 2000년만에 다시 독립국으로 인정받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더 큰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인해 촉발된 1차, 2차, 3차, 4차 중동전쟁을 시작으로 레바논전쟁, 팔레스타인전쟁, 하마스전쟁 등 수많은 전쟁이 이스라엘의 독립 때문에 바로 그 약속의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회복했다는 자부심에 기뻐 어쩔줄 몰라 했지만, 2000년 동안이나 그 땅에서 살아왔던 수 많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은 도저히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로인해 지금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죽음과 테러의 공포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 왜 이처럼 전쟁터로 변하고 죽음의 공포를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지옥의 땅으로 변한 것입니까? 그것은 약속의 땅을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 2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요셉이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기전에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말들을 하지만, 죽기전에는 가장 중요한 말 한마디를 남기는 법입니다.
요셉이 남긴 마지막 말은 자기 해골을 약속의 땅으로 가져가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믿음의 조상들은 왜 이토록 집요하게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한 것입니까?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흐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습니다. 풍요롭기로 말하자면, 오히려 지금 요셉이 거하는 애굽이 더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약속의 땅에 거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데만 관심이 있었지, 왜 그 땅을 차지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의 땅에 거한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잊어버린데 그 비극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해골이 묻혀 있는 헤브론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의미하는 장소였습니다. 헤브론의 히브리어 본래 뜻은 ‘연합’ ‘동맹’ ‘교제’입니다. 약속의 땅 헤브론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하며 영원히 교제하기를 원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은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주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본래의 정신은 잊어버리고 그 땅에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알맹이는 내 버리고 포장지만 붙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포장지는 그 알맹이를 돋보이게 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포장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알맹이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약속의 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약속의 땅에 담겨 있는 그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의 정절을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순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약속의 땅은 세상적인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필요한 장소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의 징표로 반지를 주고 받습니다. 반지는 상대를 향한 사랑의 상징입니다. 살다보면 생활이 힘들어서 반지를 파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지를 팔았다고 두 사람의 사랑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를 향한 사랑은 사라졌는데, 두 사람 손에 반지가 끼여 있다면 그때도 반지가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약속의 땅은 사랑의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반지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강대국에 의해 약속의 땅을 빼앗겼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존재한다면, 약속의 땅은 사라져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사라졌는데, 약속의 땅만 차지하겠다고 달려든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두 남녀가 서로의 반지를 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약속의 땅은 테러와 죽음의 공포만이 존재하는 지옥의 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은 어디입니까? 주님은 약속의 땅을 다른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구약에서 약속의 땅은 신약에서 땅끝입니다. 땅 끝이란 지구가 둥글기에 앞으로 걸어가면 결국 내가 서 있는 자리로 돌아오므로 땅 끝은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 땅 끝은 머나먼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약속의 땅은 특별한 장소, 성지가 아니라,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장소가 바로 약속의 땅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은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은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만들기 위해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들이 간절히 원했던 약속의 땅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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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죽음으로 위대한 족장의 시대는 끝나고 본격적인 애굽 시대가 시작됩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은 요셉이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옮겨 가서 장사 지내는 것과 형제들과 다시 화해를 확인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요셉도 자기가 죽으면 시체를 애굽에 매장하지 말고 미이라로 만들어서 애굽을 떠날 때 메고 가라고 유언을 합니다.
1. 야곱의 죽음
창세기 49장 말미에 야곱이 자식들에게 자신을 가나안 땅 조상에 묘실에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습니다.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창 49장)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하여 샀고, 아브라함 자신이 묻힌 막벨라 동굴에 자기를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아마 야곱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애굽에 묻힌다면 왕의 피라미드에 버금가는 거대한 피라미드에 묻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굳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묻히고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묻힌 그 초라한 가나안의 동굴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위대한 약속을 주셨고, 야곱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후손이 바로 이 위대한 약속을 상속받는 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복의 근원이 되며 가나안 땅을 영원한 유업으로 차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창 49장 3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창 49:3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기 세대에 하나님의 축복이 다 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오히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부흥이 오는데, 그것은 자기들이 살면서 체험했던 것과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애굽의 생활이 풍족하고 이 세상이 좋아도 절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고 붙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죽음은 단순히 야곱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족장의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우선 그들은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이방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의 가장 큰 공은 열두 아들 중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중에서 이삭만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사랑한 아들이었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삭은 쌍둥이 아들 중에서 야곱만 얻었습니다. 에서는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 모두를 얻어서 결국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야곱의 아들들 중에는 살인이 있었고, 간음이 있었으며, 인신매매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하나님의 은혜가 강했기 때문에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약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2. 야곱의 장례
야곱의 장례식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애굽의 방식입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 맞추고 그 수종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1-3절)
여기서 몸에 향료를 넣는다는 것은 시체가 썩지 않도록 미이라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운명하자 자기의 전속 주치의에게 명하여 아버지 몸에 향료를 넣어서 장례를 하는데 무려 40일이 소요되었고, 또 요셉은 70일을 따로 애곡하는 기간으로 정해서 온 애굽인들이 이방인 야곱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거의 애굽의 국부의 죽음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굳이 애굽의 방식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관직을 가진 자의 부모가 상(喪)을 당하면 그 수준에 맞는 장례식을 치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애굽 사람들은 요셉이 흉년에서 그들을 살렸기 때문에 야곱의 장례식을 바로의 장례식에 준해서 거창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요셉은 일단 야곱의 유언대로 시체를 가나안 땅에 매장한다면 장례하는 방법은 반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장례 일행은 가나안 땅에 가서는 두 번째 가나안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10, 11절)
가나안의 장례식 풍습은 타작마당에서 일주일 동안 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시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사람이 죽으면 타작마당에서 일주일동안 애곡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요셉이 요단강을 건넌 후 아닷 타작마당에서 7일간 애곡을 한 것은 가나안 방식으로 한 번 더 장례를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 우리나라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자기 나라에 가서 한 번 더 그 나라 방식으로 결혼식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의 장례식은 국제적인 장례식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장례식이 모든 나라에 평화를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당시 행진한 방향을 보면 빠른 길이 아니라 광야 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할 수 있는 대로 주위 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광야 길을 우회했는데 놀랍게도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의 길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방식인 요셉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막벨라 동굴에 아버지를 장사한 것입니다.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13절)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굳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예수님 당시의 옷을 입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사람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야곱의 시체에 향료를 넣고 타작마당에서 일주일간 곡을 하더라도 결국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막벨라 동굴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애굽 사람들이나 가나안 사람들은 그 엄청난 장례 행렬이 겨우 조그만 동굴에 도착해서 거기에 시체를 안장하는 것을 보고서는 놀랐을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아버지를 장사 지낸 후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고, 또 실제로 장사 지낸 후 애굽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5절)
왜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기회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칼빈은 요셉이 애굽에 벌여 놓은 일이 많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은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위대한 족장의 시대가 끝났고, 이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였습니다. 족장들은 자신의 갈 길을 다 달려갔고, 그들의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 요셉은 이제 새로운 믿음의 시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개인으로 실천했던 믿음이 이제는 이스라엘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개인 신앙이 공동체 신앙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이방인 같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교회로 모여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의 벽돌이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성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형제들의 두려움
아버지 야곱의 죽음은 위대한 족장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부터 이스라엘이 하나의 하나님 나라를 형성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죄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15-17절)
아마 당시에는 자식들 사이에 원한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에는 자식들 사이에 복수를 하지 않고 참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나면 무서운 피의 복수를 했던 것입니다. 에서도 야곱을 그토록 미워했지만 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으면 야곱에게 복수하려고 했는데 그동안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드디어 요셉이 자기들에게 무서운 복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다가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화해를 청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난 30년 동안 전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과거에 지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미 모든 과거를 다 용서하고 모든 원한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했지만 형들은 그것이 아직 청산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는데 형들은 전혀 그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그의 진심을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끼리만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두려움을 요셉에게 알리고 용서를 빌기로 했습니다. 만일 형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18절)
요셉에게 이 이야기를 하러 간자가 요셉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더라고 하니까 형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에게 이 원한은 가슴에 사무친 것이며, 공연히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고 생각해서 모두 달려와서 요셉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렇게 해서 요셉의 본심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으로 불안한 것은 몇 번씩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확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19, 20절)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형들은 요셉을 해치려고 했었습니다. 형들이 한 악한 짓 때문에 요셉은 젊은 시절을 불행하게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악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우리 인간은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인간이 가장 악한 것을 하나님은 가장 큰 구원으로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악을 바꾸어서 선을 이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손을 쓰시지 않으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미래 비전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노예 생활을 하거나 감옥에 있을 때 가졌던 비전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끝난 후 요셉은 새로운 비전을 가졌습니다.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21절)
이제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하여 하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린양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함으로 위대한 이스라엘의 시대를 만드시려고 하십니다. 요셉은 이제 자기가 남은 기간 동안 할 것은 그동안 연구한 것을 책으로 쓰는 것이나 더 위대한 정책을 펴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이스라엘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 안에 모든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단지 그때마다 하나님이 쓰시는 배경에 불과한 것 입니다.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으로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4. 요셉의 임종과 비전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25, 26절)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죽으면 관에 넣어서 해골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애굽을 떠날 때 자기 관을 들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요셉의 관을 볼 때마다 자기들이 언젠가는 애굽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비전은 후손들이 애굽에서 영원히 잘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전승된 비전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셉의 용서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해서 위대한 부흥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두 개의 나라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미래가 불투명한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영적인 공동체인 이스라엘입니다. 단순히 내가 신앙생활을 잘했고 세상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영광스러운 위대한 하나님의 나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원한과 허물을 뒤로 하고 다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붙들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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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태초의 시작이라는 웅장한 주제로 시작되었으나 그 마지막은 슬픈 죽음의 사건들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야곱은 위대한 믿음의 아버지였고 요셉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선물받은 탁월한 통치자였지만, 이들 역시 한 인간으로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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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50장에서 우리는 야곱과 요셉의 훌륭한 신앙과 그들의 생애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22년이라는 긴 세월을 헤어져 살아야 했던 아버지를 극적으로 다시 만나 가족의 기쁨을 맛보며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아버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눈물을 흘리며 그 창백한 얼굴에 입을 맞추며 이별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 그는 장례를 관장하는 의원에게 야곱을 향으로 처리하라고 명합니다.
향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미이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의술이 발달하였던 고대 애굽에 있어서 귀족들이 죽었을 때 행해졌던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풍속은 왕이 죽으면 70일간 애도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애굽인들이 70일 간을 요셉과 함께 애도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왕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4절에 곡하는 기한이 지난 후에 요셉은 모든 장례를 철저히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진행했습니다.
7절에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도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까지 모든 장례의 일정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요셉의 애굽에서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장례가 끝나자 현실적으로 아버지의 영향력도 함께 끝났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던 방패막이 사라지자 오래 전에 요셉을 노예로 판 것에 대한 죄책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복수할까 두려워하며 매우 불안해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로 불안해하는 형제들의 모습은 죄의 문제로 안정하지 못하고 불안 가운데 사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나아와 아버지의 뜻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17절에 요셉은 형들이 자신들을 '종'으로 낮추면서 지난날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했을 때 측은한 생각과 더불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요셉의 눈물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용서와 사랑의 눈물이었으며 요셉의 전인적인 인격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용서를 바라는 형들의 심정을 위로하고 포근히 감싸 주는 요셉의 자세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위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형들을 이미 오래 전에 용서했던 요셉은, 지금까지 형들이 지난날의 잘못과 죄를 기억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당시 요셉의 형들이 얼마나 공포에 질려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잠언 28:1절 말씀처럼 죄를 지은 사람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괜히 지레짐작하여 두려워하고 도망가는 법입니다.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21절에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간곡하다’는 단어는 ‘속사람, 심장으로’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진정으로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심장으로, 그들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숙한 신앙인의 입에서 고백되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위로할 수 있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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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형들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를 통해 모든 죄악된 관계가 사랑과 위로의 관계로 변화되는 이러한 역사가 우리의 삶에도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칠 세의 소년으로 애굽으로 팔려 온 요셉은 믿음 하나로 모진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동행했던 요셉은 자손 3대를 보기까지 장수함으로써 이전에 야곱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손자들까지 그의 무릎에 앉힐 만큼 장수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슬픈 빛이나 두려운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믿음 가운데서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이렇게 유언합니다.
다함께 24절 읽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그는 야곱이 그러했듯이 이 땅의 부귀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더 의지하며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죽으면 야곱과 같이 가나안에 장사지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지면 그의 자손들이 애굽땅에서 멸시를 받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몸이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원했지만 자손들을 위해서 자신의 무덤이 애굽에 있게 한 것입니다.
참 믿음의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후에 장차 출애굽을 하게 되면 반드시 해골이라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장해야 함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백십 세까지 살고 죽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언제나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께는 영광을, 사람에게는 은혜를, 후손에게는 믿음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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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 창세기가 요셉의 죽음과 유언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 끝납니다. 다시 말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1절~14절은 야곱의 장례식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15~21절은 요셉이 형들이 저지른 악행을 재차 용서해 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22~26절은 요셉의 죽음과 입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은 야곱이 숨을 거둔 후에 요셉은 최상의 예우를 다해 부친 야곱의 장례룰 준비하게 합니다. 장장 40일에 걸쳐서 부친의 시신에 향품을 넣어 부패하지 않도록 시신을 보존하는 조치를 취하게 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고대박물관에는 피라미드 등에서 발굴된 시신의 미이라 사진을 본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검색해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는 시신 보존 처리 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는데 요셉은 야곱의 시신도 그렇게 처리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데 걸린 기간이 40일이고, 애굽인들이 고인을 위하여 칠십일 동안 곡하였다는 것은 여곱의 장례식이 가족장이 아니라 애굽이란 나라의 국장 수준으로 대규모로 거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때는 애굽에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 끝난 지 12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지위와 권력 기간이 든든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4절과 5절을 보면 약간 흥미로운 부분이 보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맹세하게 한 대로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의 모지에 부친의 시신을 안장하는 일로 바로 왕의 허락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직접 바로에게 말하지 않고 바로 궁 사람들을 통해서 바로에게 청을 넣게 합니다. 이것은 바로와 요셉의 사이가 예전과 달리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상주의 신분에게 왕을 배알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암튼 바로는 요셉의 청을 받아들여 즉시 허락해 줍니다. 왕명에 따라 요셉은 부친을 장사지내기 위해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부친을 장사하러 가는데 그 무리에 동행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이 그 장례 행렬에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에서 권력층에 포진한 내노라 하는 힘있는 사람들이 모두 요셉과 함께 야곱의 장례식에 동행했다는 것은 요셉의 권력과 위세가 애굽 내에서 여전히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요셉과 함께 애굽의 중요한 요인들이 모두 동행했기 때문에 그들을 호위하고 수행할 대규모 군 병력이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11절에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이렇게 대규모의 애굽 사람들이 가나안에 몰려와서 통곡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일을 보고 가나안 사람들이 요셉 일행이 머물렀던 장소를 일컬어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는 의미에서 "아벨 미스라임"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을 왜 미스라임이라 하였을까요? 미스라임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낳은 아들들 가운데 둘째 아들의 이름입니다.
창세기 10장 6절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
13.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함의 둘째 아들들 가운데 첫째 아들 구스는 에디오피아의 조상이 되었고, 미스라임은 애굽인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붓은 현재 리비아 지역의 조상이라 칭하고, 가나안은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에 거주한 여러 민족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전 애굽인들의 추모 속에서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헤브론 지역에 있는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아안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는 큰 약속을 받았지만 실제로 그의 전 생애 동안에 자신의 소유로 삼은 것은 죽은 후에 묻힐 무덤 뿐이었는데 이 무덤에 야곱이 묻히게 된 것입니다.
15절에서는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요셉의 마음이 변하여 자신들을 핍박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친의 유언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통곡하며 울면서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한다고 했는데 형제들은 왜 뜬금없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요? 참 궁금합니다. 추측하건데 그것은 부친의 장례식을 주관할 때 애굽의 내노라 하는 권력자들이 모두 동행하여 수행할 정도로 요셉이 지닌 권세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 두 눈으로 보고 체감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애굽 사람들도 요셉 앞에서는 설설 기는데 그들에게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던 야곱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요셉이 앙심을 품고 보복한다면 어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죄 지은 사람의 입장은 이렇게 옹색하고 당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형들은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여기고 요셉 앞에 나와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 선처해 주기를 호소합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사이를 이렇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 무엇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없는 것도, 마귀에게 눌려 고난과 학대를 당하는 것도 모두 죄 때문입니다. 죄는 스스로 그 죄값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용서 외에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의 신앙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죄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인데 내가 어찌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형님들의 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으리이까. 형님들이 나를 해치려고 한 악행에 대해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셨으니 그대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가 애굽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 용서하였고, 잊었다고 했습니다. (큰 아들 이름을 므낫세로 지은 이유) 그 마음과 그 뜻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판하시고,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렘51:56) 요셉은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 교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참 신앙인의 인격은 이렇게 일관성이 있습니다.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이 11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전에 요셉은 후손들에게 두 가지를 유언으로 남깁니다. 요셉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이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실행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하게 하실 때 자신의 유골도 함께 가나안으로 옮겨가라는 유지를 남긴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람의 부친 데라가 등장하는 시점부터 하나님은 전체 인류 가운데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언약이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요셉에 이르렀고 그것이 애굽에 정착한 후손들을 통해 가나안으로 이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한 믿음의 선조들의 깊은 신뢰로 끝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선택하여 부르셨고,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역사는 요셉의 사역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의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각자를 통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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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야곱이 죽었습니다. 요셉은 죽은 아버지의 얼굴에 입맞추었습니다. 요셉은 의원에게 아버지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얼마동안 향을 처리했나요? 무려 사십일 동안 향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야곱의 죽음을 일을 애곡하였습니다. 얼마 동안을 애곡했나요? 칠십일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애곡한 시간을 기록하여 그 장례식이 성대하였음을 강조합니다. 거의 국장처럼 합니다.
(가나안에 장사하라는 바로의 허락)
4-6절을 보십시오.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유언하였습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야곱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 막벨라굴에 야곱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바로는 흔쾌히 요셉에게 아버지를 막벨라 굴에 장사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바로는 요셉을 신뢰하였고 요셉의 신앙을 존중히 여겨 요셉의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요셉은 신임받는 총리였습니다.
(심히 큰 떼를 이룬 장례 행렬)
7-9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요셉은 바로의 허락을 받고 야곱을 장사하러 가나안 땅으로 올라갔습니다. 장례식에는 누구 참여했나요?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이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요셉의 형제들이 상여를 따라서 올라갔습니다. 애굽 정부의 모든 장관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각도의 장관들이 왔습니다. 애굽의 군 장성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병거와 기병이 따라 가며 요셉을 호위하였습니다. 상여의 행렬이 매우 길었습니다. 마치 바로의 장례식과 방불했습니다. 요셉의 영향력이 애굽 전역에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요셉의 슬픔에 함께 하였습니다.
(애굽 사람의 큰 애통)
10-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요셉은 요단강을 건너서 아닷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크게 울며 애통하며 칠 일을 애곡하였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요셉이 운 곳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애굽 사람들의 애통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슬픔이 바로 애굽 모든 백성의 슬픔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을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의 국장처럼 성대하였습니다. 마치 애굽왕 바로의 죽음과 같습니다. 야곱은 당시 최강대국 애굽에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사실 장례식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광보다는 자녀의 영광입니다. 부모님 장례식의 성대함은 자녀들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보고 오기보다 상주들을 보고 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야곱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 요셉을 보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 요셉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조화가 오십 개는 족히 놓였습니다. 조화 하나에 거의 십만 원입니다. 이는 자녀들이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남일녀입니다. 큰형은 농사를 짓고 농촌의 유지입니다. 둘째형은 중소기업 사장입니다. 셋째는 대기업의 이사입니다. 넷째도 중소기업의 사장입니다. 나는 인간적으로는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손님도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의 조문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부모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자식들의 영화롭게 되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요셉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고난 후의 영광이 있다)
하나님은 왜 요셉의 삶을 영광스럽게 해주셨을까요? 요셉이 온전히 믿음으로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되기 전에 요셉에게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어서 노예로 팔렸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정욕의 유혹을 물리치다 죄수가 되었습니다. 이런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얻기 원한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예수님과 함께 영광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제가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도록 기도해도 되나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나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어야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는 효가 자식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식이 영광스럽게 되어야 아버지가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영화롭게 되어야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다만 십자가를 짐으로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장 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가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을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도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엘리야와 모세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영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대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 땅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나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셔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신자의 영광은 고난으로 결정된다.)
우리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하셨습니다.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은 연쇄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단 우리가 이런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에수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해야합니다.
(영광스럽게 된 사람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영광스럽게 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항상 영화롭게 하셨고 최종적으로 더욱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노년에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주시고 아브라함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을 영화롭게 하사 주위 부족들이 찾아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모세를 영화롭게 하셔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엘리야를 영화롭게 하셔서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사도바울은 지상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들은 영광스럽게 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영광스럽게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인류의 스승이 되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당대에도 그들의 순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심으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또한 오랜 역사 속에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주십니다. 영광스러운 새하늘과 새땅에 살게 하십니다.
(막벨라 굴에 묻힌 야곱)
12-14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야곱은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 사서 매장지로 삼은 곳입니다. 이곳에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가 묻혔습니다. 나중에는 요셉도 묻히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묻혔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을 축복하셔서 여호수아 때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비씨 586년에 나라를 잃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을 축복하사 다시 가나안 땅을 1945년에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가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믿음을 축복하셔서 세계 캠퍼스를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축복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십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의 두려움)
16절을 보십시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죽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요셉이 혹시 미워하여 우리가 행한 모든 악을 다 복수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아직도 완전한 죄사함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단이 주는 거짓된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요셉의 네 번째 울음)
16-18절을 보십시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17세에 팔렸습니다. 지금 요셉의 나이는 오십륙세였습니다. 형들은 삼십구 년이 흘렀는데도 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죄의식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을 지배하고 고통하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복수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용서하라고 하였으니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우리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요셉은 이들의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네 번째 울음입니다. 첫 번째는 형들이 죄의식에 사로잡혔을 때 울었습니다. 두 번째는 베냐민을 만났을 때 울었습니다. 세 번째는 유다가 대속자가 되겠다는 말에 감동을 받아 울었습니다. 이제는 형들이 자신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울음을 보고도 요셉에게 요셉의 종이 될 테니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다시 요청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19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미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유다가 베냐민 대신 대속물이 된다고 하였을 때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때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를 당할까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한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이미 다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다시 한번 위로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복수할 수 없습니다. 심판은 의로우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복수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심판하여야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
20,21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형들이 요셉을 해하려고 한 것은 맞습니다. 형들이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요셉을 총리로 삼으셨습니다. 죽어갈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악도 선으로 바꾸시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자신을 인도하신 좋으신 하나님을 볼 때 형들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진심으로 회개한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킵니다. 요셉은 형들과 그 자녀들까지 돌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볼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창세기 저자가 더욱 강조하는 것은 용서를 받아들이는 형들의 태도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이미 용서했는데도 이런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 형들의 문제입니다.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받고 감사해야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해주신 사랑을 생각하고 항상 감사해야합니다. 그것이 용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용서를 받아들여서 나의 것으로 만들고 용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합니다.
지난 주에 어떤 펀드 회사 사장이 자살하였습니다. 자신이 투자를 잘못하여서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허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사장의 빚을 다 갚아 주었다고 합시다. 그런데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살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빚을 갚아주신 사람의 사랑을 거절하는 악한 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가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은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값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다 갚으시고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용서를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 죄를 용서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이미 용서받았는데도 과거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려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감기만 걸려도 죄 때문에 걸리고 길에서 넘어지기만 해도 죄 때문에 넘어지고 월급만 안 나와도 죄 때문에 안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한 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백십 세에 죽은 요셉)
22-23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은 애굽에 거주하며 백십세를 살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147에 죽고 400년 후에 모세가 120세를 산 것에 비하며 요셉은 일찍 죽은 것입니다. 형들이 죽기 전에 요셉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자손들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죽으며 형들에게 유언합니다.
(요셉의 꿈의 성취)
24-26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은 죽는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해골을 가나안 땅으로 메고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축복의 때에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복을 받을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 약속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할 때 요셉의 해골을 메고 올라갑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요셉의 이 죽음을 믿음의 행위로 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브리서 11장 22절) 그는 사백년 후에 있을 출애굽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소망하며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아야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해야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 나라로 떠날 것을 말하며 죽어야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합니다. “내 앞에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도다. 예수님이 나를 안아 주시는구나!” 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