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표현주의 선구자 "
Arshile Gorky 아쉴 고르키의 작품세계
(1904년~1948년)
아쉴 고르키( (Arshile Gorky), (1904년~1948년)
아쉴 고르키는 1904년 오토만 제국의 점령지였던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난 작가의 본명은 Vosdanig Manoog Adoian입니다.
1915년 11살 때 터키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아버지는 터키군에 징집되었고, 작가는 누나와 어머니를 따라 고향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곧 굶어죽는 비극을 지켜보고 맙니다.
1920년 15세 때 미국에서 아버지와 만난 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와 뉴욕에서 디자인과 공예를 배워 미국의 화단에 뛰어듭니다. 이때 본명을 버리고 아쉴 고르키란 이름을 스스로 붙이는데, 러시아의 작가인 고르키를 좋아한 까닭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러시아어 아쉴(Arshile)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스의 뜻이고, 고르끼(Gorky)는 ‘쓴맛’ 혹은 ‘씁쓸함’과 같은 고통의 뜻입니다. 인생의 온갖 쓴맛을 겪은 작가의 고민이자 그런 삶에 대한 반항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뉴욕의 미술관을 자주 찾아 피카소, 칸딘스키, 미로 등 유럽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양식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초기에는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렸는데, 특히 어린 시절 겪었던 비극과 고난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삼았습니다. 작가는 아르메니아 학살의 생존자인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미술가와 그의 어머니’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1912년에 찍은 어린 시절의 유일한 사진을 정성껏 캔버스에 그려 그 순간을 그 기억들을 복원시켰던 겁니다. ? 1934년 필라델피아의 멜론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연방예술계획에 참가해 뉴워크 공항의 벽화를 디자인하기도 하였죠.
1940년대부터 뉴욕의 주요 미술관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했고, 1944년부터 뉴욕에서 브르통을 비롯한 유럽 화가들과 교류합니다.
기존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의 표현방식에서 더 나아가 단순히 기하학적 추상에 머물지 않고, 유기적이고 회화적인 작품을 발표합니다.
1946년 작가의 작업실에 화재가 나서 작품들이 타버린 데다가 한 달 후에는 암 진단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악재들이 겹치면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나아가 1948년 6월 자동차 사고를 당해 목이 부러져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고, 이번에는 아내마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를 떠나 버리고 맙니다. 결국 그해 7월 작가는 스스로 목을 매어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Master-bill
Waterfall, 1943
Waterfall 1943
After the bath
Agony, 1947
The Liver is the Cock's Comb 19944
Good Afternoon, Mrs. Lincoln 1944
One Year the Milkweed 1944
Organization, 1936
The Artist with His Mother, 1936
Blue Figure in a Chair, 1931
Portrait of Myself and My Imaginary Wife, 1934
Tracking Down Guiltless Doves, 1936
Enigmatic Combat, 1937
Composition, 1940
Garden in Sochi, 1941
Garden in Sochi, 1943
an untitled 1943
Diary of a Seducer 1945
Plumage landscape 1947
The Artist and His Mother, 1926-36
Untitled, 1944
Water of the Flowery Mill, 1944
Nude, 1946
Soft Night, 1947
Summation, 1947
The Betrothal II, 1947
Portrait of a Woman (The Artist's Wife) 1935
Fireplace in Virginia 1946
Mother and Child 1937
The Leaf of the Artichoke is an Owl, 1944
Mans head
Self-Portrait, 1929
Composition with Vegetables, 1928
Abstraction, 1936
How My Mother's Embroidered Apron Unfolds in My Life, 1944
Untitled, 1945
The Betrothal II, 1947
The Limit, 1947
19세기 말 아방가르드로 격변을 겪던 프랑스 예술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파리파(샤갈, 모딜리아니 등) 등 수많은 새로운 기법과 사조들이 활발하게 시도되었고 인근 국가들은 이를 모방하거나 따라가기 바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리를 점령한 독일 정권은 모든 추상미술을 퇴폐한 예술로 간주해서 수많은 작품들을 파괴하거나 약탈했고 미술계는 심한 침체 상태에 빠졌다. 프랑스에 거주하던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 망명길에 오르며 자본과 결합한 예술은 폭발한다. 그 중심에 잭슨 폴락, 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로버트 머더웰, 바넷 뉴먼, 프란츠 클라인, 아돌프 고틀리브, 클리퍼드 스틸 등이 주도한 “추상표현주의(Abstractive Expressionism)"가 있었다.
고르키는 폴록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으며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폴록과 함께 그로부터 수학한 필립 페이비어는 “고르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고르키로부터 수학한 휘트니 대로우는 “고르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고르키는 자신의 강의실에 헝가리아인 바이올린 연주자를 데리고 와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동안 연주하게 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감성을 작품에 이입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고르키는 처음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의 별명은 ‘워싱톤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긴 후로는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로베르토 마타, 호앙 미로의 그림을 연구했다. 고르키는 동갑내기 드 쿠닝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 쿠닝은 고르키를 가리켜서 자신이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고르키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의 자신의 화실에서 자살했다. 그는 자살하기 한 해 전에 <고통 Agony>을 그렸는데 피빛 붉은색과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 <고통>을 보면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상징들을 사용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의 내장과도 같은 그가 사용한 유기적 형태들은 아르프, 미로, 혹은 마티스의 것들과는 달랐는데 고르키는 식물에서 주로 형태들을 가져왔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한 화가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한다면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 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첫댓글 고르키의 그림에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 추상표현주의가 다 있어요..ㅋ
그런 불행한 개인사가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