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무대 뒤로 사라진 선수들
2003. 7.11 금요일
딴지일보 스포츠부
지난 6월 27일, 프랑스 스타드 드 제를랑(Stade de Gerland) 경기장에서 벌어진 2003 컨페더레이션스컵 준결승 콜롬비아vs카메룬전. 이날 전 세계는 거대한 슬픔과 애도의 물결에 휩싸였다. 경기 도중 카메룬의 미드필더 마르크 비비엥 푀(28)가 갑자기 그라운드에 쓰러져 돌연사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과학연구소에 푀의 부검을 의뢰한 결과, 푀의 사망원인은 심장질환으로 인한 자연사로 밝혀졌다.
본 기자, 푀의 죽음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가진 재능의 반에 반도 보여주지 못한 채 너무 일찍 꺾여 버린 선수들 얼굴이 하나, 둘씩 물감 번지듯 나타났다가 점점이 흩어져 이내 사라지곤 했다. 최고의 실력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스타플레이어뿐만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자기 길을 간 무명선수까지..
더 이상 뛰는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쉴 선수들.. 이 글에서는 감히 그들 중 몇몇을 추모해 보고자 한다.
2003컨페드컵 결승전이 끝난 후 푀(17번)의 사진을 들고 있는 양팀 선수들 |
1991년 6월 5일- 김은석(배구)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날은 1991년 6월 6일 현충일이었다. 디비 자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창문으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 일어났다. 입이 찢어질세라 하품을 걸판지게 한 판 한 후 목을 벅벅 긁어대면서 여느 때처럼 신문을 뒤적뒤적 거렸다. 아무 생각없이 훑어보는데 부고란 한 귀퉁이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하지만 분명 김은석이었다.
잠시동안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신문의 활자가 점점 뿌옇게 흐려지더니 또록~ 신문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사진이 다 젖어 버렸다. 혼자서 어쩔 줄 몰라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식구들이 깰세라 다시 누워 손으로 입을 막고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눈물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두 눈이 불어터진 면발처럼 팅팅 부어 있었다. 그제서야 깨어난 동거녀(?)에게 울먹거리며 한 마디 했다. "김은석이... 죽었대".
김은석.. 그는 25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백혈병으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김은석은 87년 세계청소년배구선수권대회에서 울나라가 우승했을 때 전 게임을 뛰며 MVP에 올랐었다. 그리고 90년 제7회 대통령배대회부터 고려증권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본 기자가 응원하던 팀에 평소 찜해 뒀던, 배구 한 번 기똥차게 잘하던 김은석이 입단해서 어찌나 좋았던지.. 당시 고려증권은 장윤창, 정의탁, 유중탁, 홍해천, 이재필, 이경석 등 막강멤버로 연승행진을 하고 있었고, 파릇파릇한 새내기 김은석은 교체멈버로 뛰며 레프트에서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스파이크를 뿜어댔다. 그는 신장은 작지만 '뽀빠이'라고 불릴 정도로 근육질의 강인한 체력을 갖춘 파이팅 머신이었다.
87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멤버들. |
그리고 입단 첫 해 우승이라는 값진 선물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 대회 폐막 직후 청천벽력과도 같은 백혈병 진단을 받고 코트를 떠났다. 대회 중반부터 잇몸이 부어 고생해오다 한 치과에서 잇몸 치료를 위해 혈액검사를 받던 중 급성 백혈병 판명을 받았던 것이다. 결혼을 불과 1주일 앞둔 시기의 일이었다.
그러나 김은석은 1년 후 병마를 이기고 돌아와 91년 2월 제8회 대통령배대회 2차 대회에서 모습을 보였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본 기자, 다시 뛰는 김은석을 보면서 가슴이 한없이 벅차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때 김은석은 '내 몸 속에 선배, 후배, 동료들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생각할 때마다 반드시 코트에 다시 서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눈가에 슬며시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는 동료선수들이 발벗고 모금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본 기자, 그때 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못 갔지만 나중에 사인회가 성황리에 잘 끝났다는 얘기를 듣고 속으로 '넘 잘됐다'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김은석은 끝내 마지막 수술을 받지 못했다.
울 고려증권의 차세대 에이스가 될 선수라고 주위에 얼마나 자랑을 해댔었는데.. 하루 속히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특유의 파이팅을 보여주길 바랬는데.. '완치판정'을 받고 다시 코트에 섰을 때만 해도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얼마전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봤다. 88년 서울올림픽 남자배구 국가대표 선수단 단체사진이었다. 흥미로운 눈길로 젊은 시절 선수들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씩 훑어나갔다. 그런데 본 기자, 한 선수의 얼굴에서 한동안 시선이 멈춰졌다. 바로 김은석이었다. 사진 속의 김은석은 시리도록, 아프도록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저려왔다. 애써 사진을 외면했다. 하지만 김은석에게로 자꾸만 눈길이 쏠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12년이 흘렀지만 6월 6일이 되면 아직도 개구쟁이 소년 같았던 김은석이 생각난다.
1994년 7월 2일- 에스코바르(축구)
94년 스뽀오츠계에는 유난히 굵직굵직한 사건, 사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국내에선 찬호박의 메이저리그 진출, 태권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황영조의 마라톤 한국최고기록 수립 등 빵빵한 소식들이 잇달아 전해졌고, 세계적으로는 삼바군단의 월드컵 4회 우승, 중국 여자선수들의 약물파동, 45세 할아버지 복서 조지 포먼의 세계헤비급 왕좌 탈환 등이 핫이슈가 되었다.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 |
잘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 해에는 전 세계를 충격의 도가니탕으로 몰고간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월드컵에서 자살골을 넣었다는 이유로 고국에서 살해당한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수비수 에스코바르(27) 피살사건이 그것이다.
94년 월드컵. 콜롬비아는 대회 개막 전 '축구황제' 펠레가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았을 만큼 전력이 좋았다. '얼마나 잘 하길래 저렇게 방방 띄우지?' 그 유명한 펠레가 콜롬비아를 우승 1순위로 콕 찍었다는 말에 갑자기 콜롬비아를 주목하게 되었다. 본 기자, 당근 콜롬비아 경기는 일정표에 별모냥 그려놓구서 꼭꼭 챙겨봤다.
그러나 웬 걸. 콜롬비아는 예선 첫 경기에서 루마니아한테 1-3으로 묵사발 났다. 이때만 해도 '뭐 그럴 수도 있지. 루마니아도 동유럽 축구강국이자나'. 관대한 마음을 품었더랬다. 하지만 거뜬히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쨉도 안 될 걸로 봤던 미국에게마저 1-2로 무릎을 꿇자 콜롬비아에 대한 평가는 사정없이 곤두박질 쳤다. '쳇, 콜롬비아도 별거 아니군'.
진 것도 진 거지만 더 큰 문제는 이날 콜롬비아의 패배는 에스코바르의 자살골이 빌미가 됐다는 데 있었다. 에스코바르는 전반 33분 미국의 하크스가 슛한 볼을 걷어내려다가 자기 골문 안으로 차 넣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자살골이라.. 엎친 데 덮친 격이라니.. 콜롬비아는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스위스를 2-0으로 꺾었지만 결국 조 꼴찌로 예선탈락하고 만다.
그해 월드컵은 브라질에게 돌아갔고, 이렇게 들뜬 분위기 속에서 에스코바르의 자살골은 월드컵 해프닝쯤으로 기냥저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월드컵 축제 무드가 채 가시지도 않은 7월 2일 밤,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의 한 밤거리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두운 표정의 에스코바르 |
그날 에스코바르는 자신의 고향인 매드린의 한 나이트클럽 앞에서 마약 거래상의 보디가드에 의해 12발의 총탄세례를 받고 피살당했다. 귀국 후 도박조직으로부터 살해위협에 시달리다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현재 43년형을 받고 수감 중인 범인 카스트로는 에스코바르의 가슴에 총을 겨누면서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지? '자살골에 감사한다'.
본 기자, 자살골을 넣었을 때 에스코바르의 그 뜨끄무르한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래서일까? 그후로 축구경기에서 누군가가 자살골을 넣었다고 하면 왠지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면서 섬짓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자살골은 절대로 죽을 죄가 아니다. 수비수라는 위치가 얼마나 어려운 지 잘 알잖냐? 암만 몸 던져가며 막고, 넘어지고, 쓰려져도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도 않고, 열 번 잘해도 한 번 못하면 온갖 비난을 다 들어야 하니까. 그리고 솔직히 니들은 살면서 실수 안 하냐? 그러니 선수들은 너무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하지 말고, 팬들도 그 선수를 너무 몰아세우면서 닦달하고 욕하지 말지어다.
1996년 3월 19일- 정세훈(유도)
본 기자, 이상하게 유도, 레슬링 같은 격투기 종목에 정이 간다. 물론 격투기가 좋다 그러면 주변에선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며 한 마디씩 툭 던진다. '가쓰나가 무슨 격투기를 좋아하냐?' 크크...
그래도 격투기 선수들이 넘 좋다. 야와라 같은 유도만화 낄낄대면서 보고, 테레비에서 경기하는 거 지켜본 게 다지만, 경기장 몇 번 가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파이팅! 외쳐본 게 고작이지만, 운좋게도 몇몇 선수들과 잠깐 얘기 나눠본 게 전부지만, 5개월 정도 매트에서 굴러본 게 다지만............. 좋다.
땀을 철철 흘리면서 이 앙물고 훈련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5분 여의 짧은 시간 동안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사투를 벌이는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왠지 모를 안쓰러움과 함께 본인도 모르게 동화되어 가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리고 이건 구기종목을 볼 때와는 분명 다른 감정이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본 결과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그건 격투기가 체급경기라서 그런 걸꺼다. 운동에는 영 젬병인 본 기자가 보기에도 체중감량의 고통은 아무나 견뎌낼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격투기 종목 선수들이 얼마나 빡시게 훈련하는 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들이 있기에..
그렇게 남몰래 격투기 선수들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가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96년 어느날, 본 기자는 너무도 황당하고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다. 국가대표 유도선수 정세훈이 애틀랜타 올림픽 2차 선발전을 앞두고 무리하게 체중감량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평소 체중은 70kg이 훨씬 넘었건만 한계체중 65kg에 맞추기 위해 사우나에 들어가 땀을 빼는 와중에 그런 일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세훈.. 본 기자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테레비로 지켜봤던 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 우승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특히 65kg급은 울 나라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체급이라 우승자인 정세훈을 더욱 유심히 지켜봤더랬다.
아마추어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올림픽 금메달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밤낮없이 고된 훈련을 견뎌냈건만 채 피지도 못 한 채 22살 꽃같은 나이에 그렇게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다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아무나 붙잡고 욕이라도 한바탕 내깔기고 싶었다. 소리라도 마구 질러대고 싶었다.
"누가 정세훈을 저렇게 만든 거지?"
더 갑갑한 건 대체 누구한테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누굴 원망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는 거다. 체중조절에 실패한 선수를 탓하랴? 제자의 죽음으로 그에 대한 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코치를 욕하랴. 아니, 그 누구도 나무랄 수 없었다. 결국 '성적지상주의'가 만들어낸 비극이었으니까.
비록 정세훈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한 가지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선수는 성적내는 기계가 아니고, 더 이상 이런 식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는 것.
그래, 제발 그래야 할텐데.. 다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텐데.. 근데 왜 이렇게 자신이 없는 걸까? 왜 확신에 찬 어조로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도대체 언제까지 성적에 목숨 거는 풍토만을 탓해야 하는 건지.. 답답하다.
1998년 9월 21일-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육상)
올림픽 금메달이다! |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수많은 영웅들이 배출됐다. 혼자서 세계신기록 6개를 들어올린 터키의 헤라클레스 나임 술레이마눌루, 여자수영 6관왕으로 대회 최다관왕에 오른 크리스틴 오토, 여자육상 3관왕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다이빙 황제 그렉 루가니스, 양배추 인형을 닮은 체조요정 다니엘라 실리바스..
이 중에서도 본 기자에게 가장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 선수는 그리피스 조이너였다. 그녀는 당시 여자육상 100, 200, 400m계주 3관왕에 오르며 일약 올림픽 영웅으로 떠올랐다. 육상에서는 유일한 3관왕 이었고, 200m에선 9년 동안 깨지지 않던 세계기록을 준결승(21초56), 결승(21초34)에서 연거푸 경신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화려한 미모와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는 단연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치렁치렁한 머리와 1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긴 손톱과 진한 화장, 그리고 몸에 착 달라붙는 핑크빛 유니폼과 흰색 망사 스타킹을 신고 나오는 등 파격적인 패션감각으로 '달리는 패션모델'이라는 닉네임이 전혀 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젤 인상적인 장면은 레이스 펼칠 때의 그녀의 표정이었다. 슬로비디오로 다시 봤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질주하는 동안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작지만 예리한' 두 눈을 반짝거리며 세 번, 네 번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역시 웃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전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된 올림픽 결승, 그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에 말이다.
그 모습은 본 기자에게 쇠망치로 머리를 7대를 얻어맞은 것같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경기를 봐왔지만 레이스 도중 웃는 선수는 첨 봤기 때문이다. 뛰는 것이 너무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승부를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그리피스 조이너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98년, 그리피스 조이너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외신을 통해 그녀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본 기자는 조이너의 백합보다 화사한 미소와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15초동안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죽은 후에 뒷말들이 무성했다. 88년에 갑자기 기록이 대폭 향상되자 약물복용 의혹을 산 적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언론에선 약물남용 부작용 때문이라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부검 결과 사인은 간질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발작 때문이라고 밝혀졌다. 언론은 그녀를 두 번 죽인 셈이었다.
본 기자,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어릴적 영웅이 약물남용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를 장식한 조이너 |
그녀가 88년에 세운 100(10초49), 200m(21초34) 세계기록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동안 드렉슬러, 오티, 크라베, 디버스, 토렌스, 매리언 존스 등 걸출한 스프린터들이 그녀의 기록에 강력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그 누구도 그리피스 조이너의 세계기록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언젠가는 그녀의 기록을 넘어서는 선수가 나올 것이고, 그 주인공이 누가 될 지 무척 궁금하기도 하다. 근데 참 이상하다. 본 기자, 시드니올림픽 100m에서 매리언 존스를 그렇게 열렬히 응원했건만 존스가 세계기록에 약간 못 미치는 기록으로 우승하자 왜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을까?
휴~ 아무래도 그리피스 조이너가 남긴 발자취가 너무 큰 거 같다.
95년 1월 30일, 우리는 또 한 명의 젊은 선수를 잃었다. 그 선수의 이름은 송.성.일. 그는 94히로시마아시안게임 레슬링 그레꼬로만형
100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4개월 여간의 위암 투병 끝에 결국
눈을 감았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위암 말기 환자였다니.. 당시 언론에서는 송성일을 '고통을 참고 투혼을 발휘해 금메달을 딴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라고 추켜세웠다. 투혼이라.. 말은 그럴 싸하고 멋지다. 근데 선수가 다 죽어가는데 도대체 투혼이 뭔 소용이 있고, 금메달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붕대투혼, 부상투혼.. 더 이상 투혼이라는 이름으로 아픈 선수들에게
억지로 뛸 것을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제발... 부탁이다.
딴지 스포츠부
도우넛(bluesky@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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