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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양천부원군 충정공 상우당 양천허공 종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陽川府院君 忠貞公 尙友堂 陽川許公 琮)
공(公)의 휘(諱)는 종(琮)이며 자는 종경(宗卿) 또는 종지(宗之) 호는 상우당(尙友堂)으로
양천인(陽川人) 18세 (十八世) 이다.
증조(曾祖)는 광주목사(廣州牧使) 매헌공(梅軒公) 기 (기, 十五世)이고 조(祖)는 양양도호
부사(襄陽都護府使) 비 (扉, 十六世) 이며 부(父)는 재령군수(載寧郡 守)로 우의정(右議政)
과 양천부원군(陽川府院君)으로 추봉된 손 (蓀, 十七世) 이다. 母는 화순최씨(和順崔氏)로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 최안선(崔安善)의 따님이다.
公은 어려서부터 기개(氣槪)가 비범(非凡) 하였으며 세조2년(1456) 23세로 생원시(生員試)
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갑과(文甲科)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나라안이 가물었는데 급제자 호명시 公이 호명될때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
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 급히 자리를 피했는데 公은 태연히 앉아있었다. 담당관리들이 말하
기를 "하늘이 공의 합격을 축하하는 "총우" 라고 경탄하였다".
세조6년(1460) 여진족(女眞族)이 침입 하였을때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출정하였고 그 후 형조좌랑(刑曹佐郞),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이어 평안, 황해, 강원, 함길
도제찰사 한명회(韓明 澮)의 종사관이 북변경영(北邊經營)에 공헌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
에 올랐다.
세조12년(1466) 함길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부친상(父親 喪)을 당해 물러나 있던 중 이
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부름을 받고 조석문(曺錫文), 강순(康純), 어유소(魚有
沼), 남이(南怡)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적충출기포의적개순성좌리공신(積忠出氣布義敵愾純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예종1년(1469)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전라도병마절도
사 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오르고 그 이듬해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또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중추부사(判
中樞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할머니의 상(喪)을 당해 잠시물러나 있다가 환조(還朝)하여 북변방어를 위한 평안도연변제
읍부로요해산험이도(平安道沿邊諸邑賦路要解山險易圖)를 올렸다.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어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다. 세조 비(妃) 정희왕후(貞熹王
后) 尹氏의 국장때는 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맡았다. 서거정(徐巨正), 노사신(盧
思 愼), 유순(柳洵) 등과 연주시격(聯珠詩格) ,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언해(諺解) 하였
고 성종16년(1485)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잠시 물러나 있다가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다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여진족(女眞族)이 함길도 방면으로 침입하여 임금으로 부터
검을하사 받고 북정도원수(北征都元 帥)가 되어 이를 격퇴하니 야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하였다. 이듬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겸했다.
성종25년 (1494) 61세로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은 3일동안 철조
(철조)하고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하였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주한씨(淸
州韓氏)로 이조정랑 한서봉(韓瑞鳳)의 따님이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확(確)으로 양천군동돈령(陽川君同敦寧)이고. 차자는
광(광)으로 제양군전주부윤(霽陽君全州府尹)이며, 3자 추(추) 교위(校尉)와, 양산군(陽山
君) 상(石桑) 그리고 염(石廉)이다.
청백리(淸白吏)에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침(琛)이 公의 아우
이다. 公 또한 청백리에 녹선되어 형제정승에 형제청백리(兄弟淸白吏)라는 자랑스러운 명
성을 남겼다. 公은 천품(天稟)이 고매하고 학문에도 힘써서 성리학(性理學)은 물론이고 천
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역산(歷算)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하였으며 公의 시문
(詩文)은 맑고 굳세기로 이름이났었다. 문집으로는 상우당집(尙友堂集)이 있고 편서로는 의
문정요(醫門精要) 가 있다.
후에 충정(忠貞)의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신도비(神道碑)는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이 찬하
고 공조참판 남응운(南應雲)이 전(篆)하였으며 지제교(知製敎) 이충원(李忠元)이 썼고 행장
(行狀)은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護)가 썼다. 公은 얼굴이 준수하고 이마가 넓었으며
키가 11척2촌(11尺2寸)으로 수염이 아름다워 신선과 같았다. 公의 墓는 경기도 장단군 우
근리 종산에 자좌오향(子坐午向)이다. 남북분단으로 성묘를 할 수 없어 서울 강동구 고덕동
산 93 - 2 제양군 묘역에 단비(壇碑)를 세워 숭모(崇慕)의 념(念)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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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천허씨 충정공(상우당) 종회에 올려진 글로서, 최안선의 따님이 우의정을 지낸 양천허씨 상우당의 모친으로 적혀져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