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비유
그리스인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햇볕을 흡수하려고 애쓰고 있다. 모두들 매우 진지한 얼굴이다. 일광욕 같은 건 좀더 느긋한 기분으로 하면 좋으련만 이 사람들은 햇볕에 관련해서는 매우 진지하다. 마치 태양 전지식 전기면도기가 한곳에 모여 충전을 겸한 신앙 고백 집회라도 열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부부의 말다툼이란 시리즈 영화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실베스타 스탤론의 <록키>와 같다. 설정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고 장소도 상대도 다르다. 싸우는 동기도 전술도 다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늘 같고 배경음악은 항상 같은 곡이 흐른다.
나와 아내는 인생관과 세계관의 차이가 너무나도 분명해서, 거기에는 이미 몇 천 대의 불도저를 동원해도 메울 수 없는 숙명적인 갭이 존재하고 있다.
집에서 올드 하버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정도로, 날씨가 맑은 오후에 산책하기 딱 좋은 거리였다. 마을을 빠져나가 언덕을 하나 넘으면 거기에는 후사면이 조용히 펼쳐져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뒤쳐진 채로 꾸벅꾸벅 잠들어버린 듯한 곳이다.
극장안의 손님은 절반이 아이들이다. 초등학교 3학년에서 6학년 정도의 기가 질릴 만큼 버릇없는 아이들 스물다섯 명쯤이 제일 앞좌석에 몰려 앉아 에콰도르 고지대에 사는 거미원숭이 떼처럼 꺅꺅 소란을 피우고 있다. 도무지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이번 일은 번역 두 편과 여행 스케치와 새로운 장편 소설이다. 그래서 전혀 한가하지가 않다. 내 원고를 한참 쓰다가 싫증이 나면 번역을 한다. 그러다가 변역 작업에 싫증이 나면 이번에는 다시 내 원고를 쓴다. 비 오는 날에 노천에서 하는 온천욕과 같다. 현기증이 나면 탕에서 나오고 몸이 식으면 다시 탕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이런 반복 작업이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상점의 주인 얼굴에는 표정이 일체 없다. 웃지도 않고 곤란한 표정을 짓지도 않고… 아무튼 언제 어느 때 보아도 항상 같은 얼굴이다. 아직 의욕이 넘치는데도 부하의 실수 때문에 실각한 총리처럼 분을 풀 길이 없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그와 함께 아침 산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새삼스럽게 그리스 사람들이 인사하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본인이 예의를 갖추기를 좋아하고 애매한 미소 짓기를 즐기는 것처럼, 미국인이 악수와 소송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프랑스인이 포도주와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리스 사람들은 인사하기를 좋아한다. 아침에 장을 보는 시간이나 져넉 무렵의 커피 마시는 시간에 길을 걷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인사의 홍수이다.
파레르모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동차이다. 길은 좁은데, 차는 많고 운전은 난폭하게 한다. 그래서 자동차의 90퍼센트 정도는 흠집투성이다. 파레르모에서 흠집 없는 차를 보는 것은 일본에서 찌그러진 메르세데스벤츠를 보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에서 쾅쾅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파레르모의 따뜻한 겨울만은 참기 어려웠다. 그것은 뭐랄까, 자동차 에어컨이 고장 나서 엉뚱하게 따뜻한 바람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그 바람을 멈출 수 있는지 모를 때와 같은, 조금은 곤란한 따뜻함이다.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왔으므로 불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겨울이란 본래 추운 계절이므로 춥게 보내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절실하게 느꼈다.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대중 술집에 가는 사람이 있듯이,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여자와 자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린다.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호텔의 벽장문을 열려고 할 때 열쇠가 부러졌다. 특별히 힘을 주어 열쇠를 돌린 것도 아니다. 방에 들어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는 하나, 둘, 셋 하는 식으로 무심코 돌렸는데 그만 열쇠가 똑 부러졌다. 바에서 안주로 나오는 빼빼로 과자처럼 그야말로 깨끗하게 똑 부러진 것이다. 아무런 전조 증상도 아무런 갈등도 없이, 결국 검고 빈약한 열쇠의 반은 내 손에 남고 나머지 반은 열쇠구멍 안에 남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바람이 불었다. 비행기는커녕 배도 운항하지 않는다. 섬으로 들어오는 배도 없고 섬 밖으로 나가는 배도 없다. 말하자면 섬 전체가 고립되는 것이다. 바람만이 거침없이 휘이익휘이익 하고 매정하게 불어댄다. 어느 정도 이상의 무게를 갖지 않는 것은 모두 땅 끝까지 날아가고 초목은 뭉크의 그림처럼 뒤틀린다. 하늘은 음울한 색으로 물들고 회색 구름이 불길한 소식을 알리는 사자처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몰려왔다가 몰려간다.
눈에 보이는 한, 바다는 온통 하얀 거품으로 덮여 있고 어선은 항구에 묶인 채 돛대만 덜컹덜컹 흔들리고 있다. 거리에는 사람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신비한 하얀 케이크 상자 같은 모습을 한 집 안에 틀어박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다. 그들이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대충 뜨개질을 하든가 책을 읽든가 비디오를 보고 있던가, 아마 그러고 있을 것이다.
치즈와 포도주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맛있었다. 결코 비싼 포도주는 아니고 어느 시골 농가에서 직접 만든 포도주인데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그리스에서 먹고 마신 모든 음식과 술들이 다 한심하게 생각될 만큼 기가 막힌 맛이었다. 깔끔하고 신선하며 깊은 온기가 있어 대지에 그대로 뿌리 내리고 있는 듯한 정겨운 맛이다. 이런 맛의 포도주는 레스토랑에서는 만나기 어렵다.
배낭족들이 이 마을을 거쳐 지나갔는지, 호텔 식당의 책꽂이에는 그들이 읽다가 두고 산 책들이 청춘의 묘비처럼 즐비하게 놓여 있다. 모두들 다 읽은 책을 여기에다 놔두고 대신 읽고 싶은 책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호텔 방에는 열쇠도 없다. 혹시나 하고 열쇠는 없느냐고 물어보자 주인 아주머니는 잠깐 기다리라더니 어디선가 더러운 열쇠꾸러미를 가져온다. 이중 하나일 거예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열쇠는 매우 조잡하게 생겼다. 한번 잠그면 다시는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내 뇌리를 스친다. 그런 예감이 모리스 리벨의 <밤의 가스펠> 에 등장하는 해 질 무렵의 종소리처럼 뎅그렁뎅그렁 하고 먼 곳에서 기분 나쁘게 들려온다. 나는 필요 없다며 사양한다.
포도주를 한 병 주문한다. 그리고 그릭 샐러드 한 접시와 수블라키 한 접시, 감자튀김 두 접시도. 감자튀김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정도로 양이 많다.
호텔 방문에 열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문고리조차 없었다. 덕분에 밤새도록 그 문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덜컹덜컹덜컹 하는 요란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 왠지 베토벤의 <에그먼트 서곡>이 생각났다. 어쩌면 중학교 음악실 벽에 걸려 있던 베토벤의 초상화가 그런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열쇠도 문고리도 없는 싸구려 호텔레 묵으며 밤새도록 덜컹거리는 문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얼굴을.
로비에서 계산을 끝내고, 일주일 전부터 버리지 못했던 너덜너덜한 나이키 조깅화를(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그걸 버릴 때마다 누군가가 다시 주워다 주었다) 종이봉투에 넣고 둘둘 말아, 슬며시 테이블 밑에 놓은 채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가 발차한다. 어휴, 간신히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야니스’가 쫓아오며 버스를 불러 세운다. “키리오스(당신), 이거 두고 갔어요”라며 너덜너덜 다 떨어진 나이키 조깅화를 내민다. 그 조깅화는 아무도 잊어주는 사람이 없는 과거의 작은 실수처럼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할 수 없이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종이 꾸러미를 받아든다.
책 세 권의 장정을 결정하고 편집자와 이런저런 사소한 부분도 협의를 끝내고, 이제 인쇄만 하면 되는 시점까지 빈틈없이 일을 마친 다음 다시 일본을 떠난다. 어째 일주일치 음식을 한꺼번에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두는 주부 같다.
9월 초에 일본을 떠났는데, 돌아와 있던 기간은 짧았지만 피곤한 일은 꽤 많았다. 인간관계며 감자덩굴처럼 줄줄이 생겨나는 사무적인 잡다한 일들로 머릿속이 뒤엉켜 있다. 맛있는 일본 요리를 당분간 먹을 수 없는 것은 괴롭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끔씩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 테라스에서 비를 바라보며 생선요리를 먹고 있으면 문득, 아아 정말 멀리까지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주변의 소리가 잦아들고 차가워진 백포도주 병이 땀을 흘리고, 어부들은 노란색 고무 비옷을 입고 일렬로 서서 엉겨 있는 선명한 색의 어망을 풀고 있다. 검둥개가 장례식 때 허드렛일 하는 사람 같은 몰골로 어디론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웨이터는 따분한 얼굴로 흘낏흘낏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밖으로 나와서 언덕을 조금 올라가 처음 눈에 뛴 가페니온에 들어가 찬 맥주를 주문하다. 골이 띵할 정도로 아주 차가운 맥주였다. 조용한 오후, 따뜻한 빛, “세스보스 섬은 그리스에서 맑은 날이 많기로 유명합니다.”라고 관광 팸프릿에 나와 있다. 순찰 보트가 항구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청과 백의 그리스 국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마치 인생의 양지와 같은 하루.
우리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고 우조 공장을 기웃거리고 바위산 위에 있는 교회에 올라가 미사를 구경하고 그림엽서를 몇 장 사고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바다로 떨어지는 저녁 해를 바라본다. 마치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납작하게 밀어 넓혀나가듯, 우리는 여러 가지 동작과 작업을 가능한 한 길게 늘리며 그럭저럭 시간을 보낸다. 어휴, 이제야 겨우 해가 졌다. 드디어 하루가 끝났다.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방값을 치른다. 돈을 받으며 그녀는 몹시 부끄러워하는 눈치다. 왜 그럴까. 아직 손님을 상대하는 장사에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나는 우리를 안내해 준 여자아이에게 전해 달라며 일본에서 가지고 온 동전을 기념으로 준다. 그녀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손바닥에 놓인 그 동전을 지그시 바라본다. 안녕히 계시라는 말을 남기고 우리는 그 고요한 호수 같은 슬픔 속에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길을 떠났다.
날씨는 대체적으로 언제나 나빴다. 사흘 중의 이틀은 흐리고 수시로 가랑비가 내렸다. 나쁜 세계가 도래할 것을 예고라도 하듯 싸늘하고 우울한 비였다.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고 언제 그쳤는지도 모른다. 아니, 밖을 걷고 있어도 지금 정말 비가 내리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확실치 않은 것이 런던의 비다.
마리나의 콘서트에 갔다. 바흐의 <마그니피카트>가 특히 일품이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구석구석 매우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는 정말로 품격 있는 바흐 연주였다. 손톱도 깎고 귀도 깨끗하게 청소하고 머리도 감은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훌륭한 연주이다.
바꿔준 차도 전의 것과 거의 마찬가지 수준이었다. 점화 플러그의 상태도 그렇고, 여러 가지 경고 램프가 차가 흔들릴 때마다 켜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한다. 사이드 브레이크는 확실히 성능이 괜찮았지만 이번에는 주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병아리를 목 졸라 죽이는 것 같은 비통한 소리가 난다.
그는 아주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포도주를 팔기 싫어서 그러나 싶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가 자부심을 갖고 만든 회심의 역작 포도주가 다 팔리고 없어서, 우리에게 맛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제일 좋은 밭에서 딴 제일 좋은 해에 빚은 포도주였거든요,” 인노첸티 씨는 설명한다. “그런데 다 팔렸어요.”
그는 마치 한 달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사람처럼 말한다.
계속해서 다른 종류의 적포두주를 따라준다. 이 포도주는 아까 것보다 훨씬 포도의 맛이 살아 있고 부드럽다. 모차르트의 음악에 비유하면 약간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자가 부다페스느 현약 4중주단이 연주하는 콰르테도라면, 후자는 피에르 랑팔과 아이작스턴이 연주하는 플루트 콰르테토 같은 느낌이다. 취향과 그때의 기분에 따라 다를 뿐이지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잘츠부르크라는 곳은 온 도시가 하나의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골목길은 구불구불하고 일방통행과 차량 진입금지와 막다른 길의 연속이었다. 언덕 위에 있는 호텔에 예약을 해놓았는데, 결국 그곳에 가지 못했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몇 번을 해보아도 같은 장소에 와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신상에 일어나는 재난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상상력을 발휘하면서(본래 거런 거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 정도는 대비했어야지 등등) 그것이 막상 자신의 일이 되면, 그 정신적인 추구력은 한여름 오후의 늙은 개처럼 힘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