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려 가는 소
조동연(경산 부림 6년)
소가 차에 올라가지 않아서 소 장수 아저씨가 “이라.”하며 꼬리를 감아 미신다. 엄마소는 새끼 놔 두고는 안 올라간다며 눈을 꼭 감고 뒤로 버틴다. 소 장수는 새끼를 풀어 와서 차에 실었다. 새끼가 올라가니 엄마소도 올라갔다. 그런데 그만 새끼소도 내려오지 않는다. 발을 묶어 내릴려고 해도 목을 맨 줄을 당겨도 엄마소 옆으로만 자꾸자꾸 파고 들어간다. 결국 엄마소는 새끼만 보며 울고 간다. (1987.12.18.) *이호철 엮음, 《요놈의 감홍시》, 보리, 2009년. |
육아휴직을 하고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오늘 뭘 만들어 줄까? 뭐하고 놀지? 무슨 책을 같이 읽을까? 어디로 여행 갈까? 등이다.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안성팜랜드에 다녀왔다. 가축을 만지고 먹이를 줄 수 있는 체험 목장인데 놀이 기구도 있고 산책 코스도 있어 하루 나들이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한창 동물 먹이 주는 걸 좋아하는 시기의 아이들은 한껏 들떴다. 천 원을 주니 작은 바구니에 볏짚 조금과 사료를 섞어서 준다. 양한테 한 바구니 줘 봐야 10초 만에 다 먹어 버린다. 7살인 큰애는 혼자 먹이를 주다 1초 만에 바구니 통째로 빼앗겼다. 잘 먹는 게 재밌는지 자꾸 사료를 사 달란다. 염소, 돼지, 말, 양, 토끼, 소 등의 먹이를 주는 게 재밌는지 무한정 먹이를 사주기만 하면 밤이라도 샐 기세다.
우리 아이들에겐 가축들의 먹이 주는 게 신기한 체험이고 놀이지만, 어렸을 때 나에겐 생활이고 일이었다. 돈 내고 들어와서 돈 내고 사료 사서 먹이를 주고 간다니 묘한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한테 제일 듣기 싫은 말은 ‘공부해라’가 아니고, “개 밥 줘라, 염소 몰아라, 소 밥 줘라.”였다. 매일 매일 가축들의 먹이를 줘야 하는 게 너무나 싫었는데 오랜만이라 기분이 묘하면서 재밌다.
아이 둘 다 소를 한참 바라본다. 동물원에 없으니 잘 볼이 없고 어쩌면 곰이나 호랑이보다 더 생소한지도 모르겠다. 4살인 딸은 소 크기를 보면서 아빠소, 엄마소, 오빠소, 아기소란다. 함께 있어 행복한 가족이라고……. 소는 크고 선한 눈 때문에 계속 보게 된다. 소의 눈빛을 보니 소를 키우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소를 팔던 장면도, 그리고 어머니도 떠오른다.
‘팔려 가는 소’는 소를 파는 날의 장면이 그려진다. 소장수에게 엄마소를 판 날 어미는 새끼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한사코 차에 올라가지 않는다. 소장수에게 이런 이별 현장을 보는 일은 다반사일 것이다.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지만 엄마소는 완강하게 버틴다. 그런 엄마소도 새끼소를 먼저 차에 태우자 따라서 올라탄다. 그런데 두 마리 소의 다음 행동이 눈물겹다. 팔 예정이 아닌 새끼소가 내려가지 않고 어미 몸으로 자꾸만 파고들고 어미는 새끼를 보며 계속해서 우는 것이다. 결국 모자는 헤어지게 되었고 그날 어미와 새끼는 많이 울었을 것이다.
돈 내고 먹이 주는 체험을 하러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보기 힘든 경험이다. 사실 요즘은 시골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예전엔 집에 소 한두 쯤은 다 키웠지만 요즘은 전문 축산 농가 외에는 소를 잘 키우지 않으니 말이다. 시를 쓴 아이는 그 장면을 잘 붙잡아 썼다. 헤어지기 싫어하는 엄마소와 새끼소의 이별 장면을 통해 모자 간의 애틋하면서도 끈끈한 사랑을 표현했다.
시를 쓴 아이와 같은 시기에 나도 초등학생이었고 시골에 살았다. 장날에 소를 팔려면 하얀 트럭이 왔다. 주로 새끼소를 팔았는데 트럭에 안 올라가려고 버티던 장면이 눈에 생생하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미끄러운 흙길에 소가 미끄러지기도 하고, 자칫 줄을 놓치면 여기저기로 정신없이 날뛰었다. 소 장사들은 트럭에 사료나 풀을 두고 유인하기도 하고 소를 밀고 당기고 한바탕 실랑이를 한다. 시에서는 눈을 감고 버틴다고 했는데 내가 본 기억으로는 소가 눈을 감지 않으면서 버텼다. 그런데 그게 더 슬퍼 보였다.
조병화 시인도 같은 제목의 시에서 말했다. 팔려 가는 소보다 쓸쓸한 풍경이 / 또 있으랴 / 시골 버스 창 너머로 줄지어 보이는 / 장터로 가는 소들 / 나는 그 눈들을 볼 수가 없다.(‘팔려 가는 소’ 중에서) 안 끌려가려고 버둥거리는 소의 눈빛도 안타깝고, 빨리 팔아야 하는데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는 엄마의 눈빛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런 직접적인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시를 이해 못할 사람은 없다. 시를 쓴 아이의 감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잘 전달된다. 엄마소와 새끼소의 이별 장면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자신이 겪었던 이별 장면이나 부모님과 관계로 바꿔서 느낄 수 있다. 시를 쓴 상황은 특별하지만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누군가는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는 친구와의 이별이나 키우던 애완동물과 이별을 떠올릴 것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님의 사랑과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너무 핥고 빨아서 애가 닳아 없어지겠다는 농담도 이해가 된다.
이 시는 사람 못지않은 엄마소와 새끼소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슬펐다’, ‘불쌍했다’, ‘나도 울었다.’ 등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특별한 기교나 기법 없이 담담하게 장면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감정을 배제한 담담한 묘사가 오히려 강한 공감과 감동을 준다. 매일 보던 소를 파는 일은 그 아이에게 엄청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미만 팔려고 새끼를 떼어 놓으려고 하니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일어나려는 참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에 대한 세심한 묘사가 이 시를 살리고 있다.
‘엄마소는 새끼 놔 두고는 / 안 올라간다며 눈을 꼭 감고 / 뒤로 버틴다.’는
평소 자신이 쓰는 일상적인 표현으로 잘 담아내고 있다. 보고 느낀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만 / 새끼소도 내려오지 않는다.’ // ‘엄마소 옆으로만 / 자꾸자꾸 파고들어 간다.’ 이 부분의 묘사는 주제를 잘 드러내 준다. 짧지만 불필요한 말 이 없고 감정을 배제한 묘사만으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엄마소는 새끼만 보며 울고 간다.’ 현재형의 상황 묘사로 끝나면서 슬픈 마음과 감동이 길게 여운으로 남게 만든다. 시를 읽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지만 깔끔하게 마무리 하면서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이 시의 형식은 연 구분 없이 18행이다. 내용에 따라 연을 나눌 수도 있으나 일련의 장면 연결성으로 볼 때 연을 나누지 않은 것이 더 매끄럽다. 실제 엄마소를 태운 시간이 길 수도 있고 생각보다 짧았을 수도 있다. 연을 구분하지 않아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고, 상황 묘사와 관련해 장면이 더 잘 드러난다.
‘송아지’라는 말 대신 ‘새끼소’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새끼소’가 시의 느낌에 더 잘 부합한다. 시를 쓸 때 평소 쓰는 말이라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썼을 것이다. 여기서는 엄마소와 새끼소 관계가 더 선명하게 부각되고 자연스럽다. ‘아이고 내 새끼’ 등의 말에서 보듯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그리고 애틋함이 더 잘 드러나는 듯하다. 또 ‘송아지’는 동요에서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는’ 이미지가 강해 귀엽고 장난스러운 느낌이 있다.
‘팔려 가는 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시의 장면이 떠오르면서 아버지, 어머니와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시 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 아이들이 떠오른다. 어린이집 버스 타고 둘이서 끊임없이 손을 흔들고 큰 하트, 작은 하트를 끊임없이 날려댄다. 몇 시간 있으면 볼 텐데 뭘 이렇게까지……. 하원할 땐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달려와서 안긴다. 그리고 둘이서 동시에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늘어놓아서 정신이 없다. 놀 때도, 잘 때도 끊임없이 아빠를 찾는다. 가끔 피곤할 때도 있지만 모두가 얘기하듯 이 시기는 금방 지나가니 한껏 예뻐해 주고 안아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