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우리는 혹독한 가뭄에 시달렸는가 하면 곧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연의 거대하고 엄혹한 힘과 그 앞에 선 인간의 왜소함을 생각한다. 어쩌면 자연은 아직도 인간들을 곤경에 빠트릴 수 있는 유일한 시험 출제관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자연을 정복과 개발의 대상으로 여긴 서구・근대적인 자연관은 진취적 일면이 없진 않으나 여전히 무모할 뿐더러 실효가 적고 환경 파괴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인간들이 제출할 수 있는 적절한 답변이 아니란 생각을 굳히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은 정복되지 않는다, 정복했다는 인간의 오만한 착각은 늘 거대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결과만 빚었다.
자연 앞에 겸손하게 머리 조아릴 줄 알았던 우리 선조들의 환경친화적 지혜는 이 시대에 더더욱 빛을 발하는 생생지리(生生之理)라는 것이 최근 우리 전북작가회의의 생각이다. 자연과의 화해로운 삶은 합일과 융화를 도모하는 일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함에도, 이 나라의 정책 입안자들은 아직도 전투적이고 돌진적인 개발론을 신봉하고 있는 듯 하다. 마치, 이같은 한발과 장마의 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지난 11일 건설교통부에서는 전국에 중소형댐 12곳을 건설하겠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가뭄과 장마의 내습으로 국민들의 마음과 몸이 피폐해진 틈을 노린 기습이 아닐 수 없다. 건설 후보지 12곳 중 해당 지자체나 지역 주민과 건설 합의를 한 곳은 고작 3곳에 불과하다는 언론보도가 그를 입증한다.
‘국민의 정부’를 자처하는 현정권 하에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이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밝힌다.
특히, 이 지역의 양심적 문학인들로 결성된 우리 전북작가회의에서 가장 크게 우려하는 것은 섬진강 수계인 순창 적성 지역에 댐을 건설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사실이다.
이 지역에 댐을 건설하겠다는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90년대 두어 차례, 건설 계획이 흘러나왔고, 그때마다 해당 지역 주민은 물론 전북 도민 전체가 ‘순창 적성댐 건설 불가’의 한 목소리를 냈었다.
이같은 현지의 목소리를 건설교통부에서는 전혀 듣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귀찮은 1회성 항의로 평가절하, 아예 무시했단 말인가?
이번 건설교통부 계획안에 따르면, 2011년에 완공되는 순창 적성댐의 규모는 총저수용량 규모로 4번째 큰 댐이다. 따라서, 그만치 많은 면적(약 240만평으로 추산)이 수몰될 수밖에 없고, 한 순간에 삶의 터전은 물론, 유・무형의 문화사적 전통 역시 영원히 수면 아래 잠길 수밖에 없게 된다.
순창 적성댐 건설이 강행될 경우, 현시대를 사는 우리는 물론 자자손손 영구히 잃어버리게 될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환경적 악영향에 대해서는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각종 환경단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니 언급을 자제하겠으나, 장차 수몰될 지도 모를 문화적 자산은 적시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댐 건설이 강행될 경우, 이 민족은 우리 국민의 자랑스러운 애송시 ‘섬진강’의 문화적 태반을 모두 상실케 된다. 환전적(換錢的) 가치만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게 그다지 소중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문화의 질이 곧 삶의 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로서는 ‘섬진강’의 상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인 김용택과 ‘섬진강’은 우리 시대가 배출한, 귀중한 문화 자산이다. 오래된 유물을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일만큼이나 새로운 문화 전통을 창출하는 일 또한 소중한 것. 최근 작고한 문인들의 생가를 일부러 복원하기도 하고 문학 현장을 관광명소화하는데, 거금을 쏟아붓는 것을 생각해보면, 섬진강의 보존 이유는 보다 더 자명해진다. 없던 것도 일부러 만들고 부서진 것을 새로이 보수하려 애쓰는 공무원들이 있는 반면, 문화적 맥락은 도외시한 채 지도 위에 쭉쭉 붉은 줄만 그어대는 공무원들이 한 나라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혼란스럽기조차 하다.
또, 댐 건설 현장으로 지목되고 있는 곳은 순창 구미리 일대는, 이제 이 나라에 몇 군데 남지 않은 집성촌 보존 지역이다. 이곳이 바로 흔히 ‘귀미리 양씨’라고 불리는 ‘남원 양(楊)씨’의 발흥지이며, 현재에도 200여 가구에 이르는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양씨 세거지’이다. 이 마을은 고려말에 형성된 이래 600년이 넘도록, 그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을뿐더러 수백년 세월에 걸쳐 조성된 묘역은 물론, ‘쌍매당’이나 조선 세조 당시 건립된 ‘정녀문’ 등이 존치된 곳이기도 하다. 하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원 양씨’의 후손들이 영구히 몸과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뿐인가, 수몰예정지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는 회문산 일원은 물론, ‘선돌’ 지역의 고인돌 유적, 순창군에서 ‘자연수석공원’을 건립키로 예정했던 지역이 모두 포함된다. 또, 섬진강은 한국 5대강 중 그나마 유구한 한반도의 역사적 지형 변천의 역사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강이 아닌가!
물론, ‘잠재적 물 부족 국가’라는 이 나라의 형편상 댐 건설은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 얼만큼의 규모의 댐을 건설할 것인가, 댐을 건설했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절대적 선결 조건이다. 권위적 강압이나 행정적 편의를 이유로 이 과정이 무시될 수 없는 일이다.
전북의 경우, 금강 수계는 이미 용담댐 건설과 그 물 채우기로 크게 한 번 막혔고, 만경강과 동진강 수계는 새만금사업에 따라 거대한 담수호가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대한민국에 남은 강 중 유일하다시피 그 생태계 보존이 양호한 섬진강 수계마저 이제 댐 공사를 한다는 것이 전북 도민의 정서에 미칠 악영향을, 건교부 당국자들은 생각하기 바란다. 더구나 그 위에는 이미 옥정호가 있지 않은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상되는 물 부족에 대한 대비가 자연 생태계를 인간의 편의대로 ‘강제조정’하는 식이어선 안 된다. 외국의 경우, 억지로 물길을 막고 있던 기존의 댐을 없애고 자연을 원상 복원한다고 하지 않던가.
1. 위 연유로 전북작가회의 회원 111명은 국민적 합의 없는 순창 적성댐 건설을 반대하며,
2. 섬진강이 가진 환경적 가치는 물론, 문화적 가치 또한 댐 건설 반대의 명백한 사유가
된다는 점을 밝히며,
3. 예상되는 물 부족 사태에 대한 대비를 가장 편의적 방식인 댐 막기로 시도하는 건교부
당국자들에게 보다 환경친화적인 대책을 강구할 것을 촉구한다.
2001년 7월 24일
(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전북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