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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남의 역사기행 두 번째 이야기 : 낙화암아, 말해다오. 그날의 진실을......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정림사지 앞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서 식당주인이 알려준 방식으로 부여 궁남지 – 부여박물관 – 부소산성과 낙화암, 고란사선착장 – 황포돛대 – 구드레 선착장 코스를 선택했다.
궁남지는 백제 부여 궁궐 남쪽 연못이라는 뜻이다. 넓은 들판에 조성된 연못이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궁궐 연못가에는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경복궁 내 경회루가 있는 경회지, 향원정이 있는 연못, 창덕궁의 부용지, 창경궁의 춘당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신라 경주의 동궁과 월지(안압지) 등은 모두 못가에 돌담으로 들렀다.
그런데 이곳 궁남지는 돌로 두르지 않았다. 자연그대로이다. 그냥 습지 같다는 느낌이다.
[연꽃으로 덮여져 있는 궁남지 모습]
궁남지의 규모는 엄청나다. 대략 80,000여 평이나 된다. 나는 이런 엄청난 규모의 정원을 만들고 주변에는 어떻게 궁궐 건축을 했는지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궁궐의 정원이 아니라, 강을 건너온 외적들을 막을 목적으로 늪지대를 조성해 둔 것은 아닐까?
물이 아주 낮고, 진흙으로 바닥이 조성된 것이 그것을 증명하듯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처음부터 늪을 이용했기에 연꽃이 잘 자난 연못이 되었고, 평화시대에는 고기를 기르고, 연꽃 정원으로 즐기다가 외침이 있을 때에는 군사용으로 활용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에 가도 궁궐에 있는 연못이 이렇게 늪지대로 조성된 연못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규모가 너무나 크다. 이런 규모의 정원을 조성할 수 있는 것은 현대에서도 상당히 힘든 규모이다.
[연못을 연결하는 돌 징검다리 모습]
[돌로 만든 징검다리가 아닌 곳은 이렇게 나무교량으로 만들어 다니게 했다.]
연못에 설치된 돌 징검다리나 나무교량은 최근에 지자체에서 만든 것 같다. 징검다리나 나무교량은 위험하기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기에 우리는 즐겁게 다녔다.
[포용정으로 가는 다리]
[포용정의 정면 모습]
궁남지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에 대한 일화로 조성된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 오니까 궁남지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다.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은 후에 무왕이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랑을 나누웠던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후에 백제에 와서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포용정은 무왕이 된 서동의 출생설화가 있는 곳이다.
이곳 궁남지 근처에 살던 한 여인이 궁남지에서 사는 용과 사랑을 나누어 낳은 아들이 서동이라고 했다. 서동은 커서 당시에 장군이 되었고, 신라로 파송된 백제 첩자이었으나, 우연히 선화공주를 알게 되어 서로 밀통하여 비밀결혼하고서 백제로 도망쳐 왔고, 그 후에 서동은 무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抱龍亭(포용정)’ 이라는 것은 임금을 품는다는 뜻이다. 무왕의 어머니를 기리는 정자이다.
궁남지를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곳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보관된 국립부여박물관이다.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부여읍 능산리 고분군에는 가지 못하고 그냥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직행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된 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가 전시된 전시관에서 얼이 빠져서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작품이다. 아버지 성왕의 영전에 향을 피우기 위해 위덕왕이 특별히 제작하여 사용했다는 향로라고 한다.
이 향로가 귀한 것인 만큼 중요하게 보관되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후 1,350년이 지난 후에 우리의 손에 넘어오게 된 것은 기적이다. 영원히 땅속에 묻혀 있을 수 있었던 보물이다.
금동대향로의 작품 구상부터 만든 것까지 너무나 예술적이어서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작품이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해석이 가능한 인류 최대의 걸작 앞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금동대향로 전시관을 억지로 나와서 다른 곳은 건성으로 보았기에 뭘 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다시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공예품 제작에 온 힘을 쓴다고 해도 저런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 수 없을 것 같다.
조용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다음에 발걸음을 옮긴 곳은 정림사지 박물관이었는데, 그 앞에서 가만히 앉았다가 나왔다. 도저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불교 유물들,
국보급의 금동여래입상 등을 슬쩍 지나왔는데, 불교미술의 정수라고 할 것들이 그곳에 전시되었을 것이나 내가 유심히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들어가지 못하고 만 것이다.
정림사지 공연장에서 백제문화제 폐막식을 준비하고 있느라고 분주하고, 많은 사람들이 폐막식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으나 나는 거꾸로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념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힘껏 풍기는 탑이다.
정림사지는 아주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곳에 궁궐도 함께 있었지 않는가 생각되고, 당시 불교 가람과 궁궐은 함께 건립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궁남지가 조성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듯 보인다.
천천히 정림사지5층석탑을 향해 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 가까워지면서 그 위용이 느껴지면서 아주 섬세한 터치가 일품이다. 그리고 아주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오랜 세월동안 잘 견뎌 온 듯이 보인다.
[정림사지5층 석탑]
그 옛날 옛적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그 비밀을 간직하면서 1,400을 살아온 석탑에게 아직까지 말하지 않았던 그 때의 일을 말해보라고 청원했으나 석탑은 미소만 지을 뿐 묵묵부답이다.
여행의 마지막을 부소산성과 낙화암으로 정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계획했다.
내가 촬영한 부소산성 안내도가 잘 보이지 않아 이 약도를 참고했다.
관광주차장 – 부소산문(사비문) - 삼충사 – 영일루 – 군창지 – 반월루 – 사자루 – 백화정 – 낙화암 – 고란사 – 고란사 나루터 – 뱃길 – 구드레나루터
[부여 부소산성 정문, 부소산문]
부소산성의 정문인 부소산문이 마치 궁궐 정문처럼 생겼다. 아마 누가 광화문을 본떠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성의 도성 외곽 성문인 숭례문(남대문)과 비교할 때에 너무나 한가한 느낌이다. 전쟁을 수행해야 할 성문 같지 않다는 뜻이다. 누가 고증도 하지 않고 그냥 멋대로 건축한 것일까?
나는 건축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런 것을 보면 좀 불편하다. 그러기에 이 문을 이용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이 부소산성을 대표하는 정문이면서 이름난 건축적 소양을 갖췄다면 이쪽 문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숲이 반긴다. 수종개량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금강송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주 조금씩 진행한 것 같다.
부소산문에서 들어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나는 우측으로 향했다.
부소산문에서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은 삼충사이다. 삼충사는 백제 말 의자왕 때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신 사당이다
[부소산성 안에 있는 영일루]
백제의 왕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 영일루에 올라서 해를 맞이하면서 부국강병을 빌었다고 전한다.
[부소산성 군창지]
[부소산성 내 길]
부소산성 내 길은 예전과 달리 길이 잘 다듬어졌다. 그리고 산림관리가 잘 되어서 예전보다 더 산림이 풍성해지고, 울창해졌기에 산책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부소산성 반월정]
백제왕들은 밤에 반월정에 올라서 달을 맞이하면서 나라의 부국강병과 평안을 빌었다고 한다.
반월정에 오르면 부여 서북부와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경치가 매우 좋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자루]
이곳 정각에 올라가는 계단이 매우 급경사이므로 조심해야 된다.
이 정자 아래는 금강이고, 낙화암과 비슷한 절벽이 일품이다.
[낙화암 정상에 있는 백화정]
현재는 수리 중이라 올라갈 수 없다.
백화정은 1929년에 당시 부여군수 홍한표의 발의로 지방 시인과 묵객으로 구성된 부풍시사라는 단체에서 건립했는데, 백제가 망할 때에 낙화암에서 죽은 백제여인의 충절을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했다고 한다.
주로 남자들이 활용한 정자를 그녀들의 비참한 죽음의 현장이 된 바위 위에 건립하고, 또한 중국 시인 소동파 소식의 싯귀에서 백화정이라는 이름을 빌려와 사용한 것이 좋은 의도라고 볼 수 있겠는가?
이 백화정은 문화제로 지정되었다. 이번에 수리할 때에 이름도 수리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갔으면 어떤가?
이 정자 아래는 엄청난 높이의 암석으로 된 절벽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백제의 강 ‘백강’이라고 부르는 백마강(금강)이 흐른다.
나는 백제의 끝은 이곳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정상에 정자 하나가 앉아 있다. 그 정자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수많은 여인들과 유민들의 한을 깔고 앉아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을 바라보고 있다. 그 정자가 보고 있는 강은 백제의 강 ‘백강’이 아니고 금강이라고 우긴다.
하긴 사람이라면 묘지 위에 앉아서 연회를 베풀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찾아온다 할지라도 내 발로는 걸어서 저 백화정 위에 오르지 못하겠다.
[낙화암 위에 모여서 사진 촬영한 사람들]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제의 강 ‘백강’. 백마강.
삼천궁녀와 백제의 여인들이 낙화되어 떨어진 날도 이처럼 하늘이 어두웠을 것이다.
[낙화암에서 당나라 군사에게 끌려갔을 백제왕과 백성들의 넋을 전송하고 있다.]
이곳은 관광명소가 아니다. 우리의 한이 담겨진 현장이다. 외침이 아니라, 같은 민족이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우리나라 서쪽 일부를 유린하고, 도려낸 아프고 슬픈 현장이다. 그 현장에서 삼천궁녀는 외치고 있다.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우리의 누이가 울고 있다. 그 소리를 우리는 듣고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배에서 본 고란사선착장]
당초 계획은 다시 걸어서 내려오려고 했으나 배를 타고 낙화암을 직접보고 싶었기에 배에 올랐다. 배에서 본 고란사선착장이 울창한 숲에 싸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배에서 본 부소산성 전경. 고란사선착장과 낙화암이 멀리 보인다.]
[배에서 본 고란사와 낙화암 절벽]
참으로 멋진 경관이다.
고란사는 아주 작은 암자이다. 사람들이 와서 등을 받쳤기에 등을 걸기 위해 흉측한 철봉을 걸어서 등을 달았기에 보기 흉측해서 사진을 찍지 않았으나 멀리서 보니까 그 흉측한 모습이 감춰져서 보기가 나쁘지 않다.
낙화암은 오후에 석양의 빛을 받으면 적벽으로 변한다고 한다. 마치 그 적벽이 삼천궁녀가 낙화되면서 흘린 피가 석양이 되면 되살아나서 그렇게 붉게 보인다고 한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다만 그 슬픈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교훈이 그 역사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백제를 말할 때에 마지막 왕 의자왕이 어떻고, 과연 삼천궁녀가 저기에서 떨어져 죽었겠는가? 아니면 그 당시에 궁에 삼천궁녀가 있었겠는가?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자국의 평화와 세계 평화를 사랑하고 존중했던 백제가 외침과 민족 간의 갈등과 전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찬란한 문화예술이 이국 땅 일본이라는 곳으로 가서 꽃피워 우리의 것을 남에게 그냥 넘겨준 어리석음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슬픈 역사를 계속 들여다본다.
낙화암과 백강은 말이 없다. 슬픈 여인들이 낙화될 때에 온 몸으로 받아들인 백강의 물이 오늘따라 더욱 붉게 변하는 것은 그녀들의 넋이 환생하여 내게 오고 있는 느낌이다.
[배에서 바라본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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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긴 글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세세하게 써 올려 주시다니요
성공한 신사님의 삶,
그 열쇠가 적나라하게 이곳에 표출되어 있군요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많이 길었지요?
별로 맛깔스럽지 못한 글인데,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반영해서 앞으로 할 일의 목록에 추가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을 모두 처리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제 생명을 이 세상에 두실지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