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강좌 / 시의 인문학>
■ 초보 시인 맨땅에 헤딩하기(3)
시는 소통이라는 호흡을 담아내는 생명의 그릇이다. 억울하거나 나의 사정을 하소연할 곳 없을 때, 술로 울분을 달래거나 속으로 끙끙 앓는 사람이 있다. 그런 방법은 건강을 해치거나 해결 방법도 아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을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정리가 안 되는데 무슨 시냐?”라고 반문한다면 아직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불특정 다수에게 내 마음을 시적 대상을 빌어서 순치(馴致)시켜 풀어놓거나 내려놓는 생명의 호흡을 하는 사람이다. 이때, 내 감정을 그대로 표현 한다면 시가 아니라 격문이나 울분 토로, 또는 욕을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누구를 다치게할 목적으로 시를 쓰면 안 된다. 돌려서 말하고, 전쟁의 참상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을 읽는 사람이 문학적으로 깊은 공감을 불러일어킬 수 있다면 훨씬 효과도 크다. 속울음을 함께 할 수 있고, 슬프지만 아름다움이 있는 시를 쓸 수만 있다면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에게 가장 큰 복수를 하는 셈이다. 시인의 삶은 보통 사람과 인격의 차이가 나는 사람이라고 동서양의 고금이 이야기 해주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 강좌에서 수도 없이 강조하는 시 짓기의 가장 기초인 "시는 '말하기(telling)'가 아니라 '보여주기(showing)'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 좋겠다. 시는 손이나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쓰는 장르다. 시적 대상을 깊게 응시한 후에 써라"는 말을 몸성 언어로 각인되어야 한다. ‘보여주기’의 중심에는 내면 풍경과 리듬이 있다. 시의 리듬은 ‘내재율’을 말한다. 낭송했을 때 자연스럽게 읽히는 문장, 호흡이 헝클어지지 않는 상태의 생래적 리듬이 있는 시를 “내재율이 살아있다”라고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산문시도 리듬이 없으면 시로 인정받지 못한다. 시가 아니라 산문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그림은 화가의 의도나 이미지가 살아 있다. 이미지는 '상상력'에서 온다. 흔히 사람들은 '상상'과 '공상'을 혼동한다. ‘공상’은 현실의 삶과 연관성이 없는 뜬구름 같은 관념이지만, 상상은 눈앞의 현실과는 다르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수도 있는, 혹은 실현될 가치가 있는 생각이다. 문명의 발전은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그린 미래의 그림을 디딤돌로 이뤄진 것이다. 그런 상상력을 시에서는 ‘내면 풍경’이라고 한다. 내면 풍경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직간접 체험이라는 ‘외면풍경’을 바탕으로 그려내야 공허하지 않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실이나 현상과 관련을 맺거나 맺을 수도 있는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 없는 테크놀로지를 창조했다는 스티브 잡스도 "세상을 바꿀만한 첨단 기술도 현실과 연결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시는, 보이는 대상 너머에 있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미지(형상)를 그려낸 내면풍경(內面風景)인 것이다.
내면 풍경을 연마하는 방법으로는 '사물에게 말 걸기'가 있다. 계속 말을 걸어보면 어느 순간 그 사물이 대답할 것이다. 기회는 이때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놓치지 않는 방법은 '시적 대상과 몸 바꾸기'다. 내가 그 사물이 되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입장이 바뀌었을 때 낯설게 해석되는 그것을 받아적는 방법이다. 결국 시 짓기는 외면 풍경과 시인의 정서를 담은 내면 풍경으로 정교하게 짜 맞춰진 언어의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을 튼튼히 받치는 기둥은 제목이다. 제목(題目)이라는 기둥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최상의 재목(材木)을 골라야 한다. 특색 있게 하고 궁금증을 유발하되 어렴풋이 내용과 연결 된다면 좋은 상태다. 시의 집은 백인백색(百人百色)으로 각기 다르게 지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일률적인 아파트의 외형을 보곤 세계 유명 건축가들은 특성 없는 비슷한 건축물이라고 비웃는다. 도시가 하나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유럽의 도시나 미국의 맨해튼을 비롯한 특색 있는 건축물이 가득한 도시는, 기존 건축물과 같은 형태는 아예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시(詩)도 특색있게 지어야 아름답거나 오래 기억에 남는다.
1992년에 돌아가신 석전 황욱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악필(握筆)서예의 대가다. 악필이란 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붓의 위쪽을 엄지로 고정하여 쓰는 작법이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호남이 알아주는 서예가로 명성을 날렸다. 나이가 들어 심한 수전증으로 붓을 제대로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서예가에게서 손 떨림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모두가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피눈물 나는 연습으로 독창적인 악필 서예 세계를 구축한다. 그러나 악필법으로도 더 이상 오른손으로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수전증이 악화되자, 이젠 왼손 악필법을 연마하며 남은 생을 불태웠다.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이글을 접하고 석전 선생에 대해서 비로소 알게 된 순간, 나의 머리는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진한 감동을 받았다. 82세에 쓴 ‘一物觀萬物(일물관만물)’, 해석하자면 ‘한가지 사물을 통하여 만물의 이치를 관찰하다’라는 말이다. 이 글은 내면 풍경과 관물론의 핵심이자 시 짓기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석전 어른처럼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의 세계는 반드시 열릴 것이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한동안 떠나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