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그 사로잡힘에 관하여
수능만점자 유명사립대 의대생이 여자친구를 살해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것도 의대에서 배운 경동맥(꼭 죽일려고)을 여러 차례 찔러서 살해했다고 하니, 지식을 배운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만약 지식을 배우지 않았다면, 살해까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의대생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제 곧 대학에서 징계를 밟아 퇴학을 시킨다고 하니 의대생도 아니겠지만, 이것이 질문이다. 먼저 말하면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혔기 떄문이다.
뉴스를 접한 순간 현장에서의 경험이 생각났다. 당시 5학년 도덕 교과서 내용인데, 제재가 '감정은 내 친구'였다. 여러가지 내용이 교과서에 나와 있었지만, 필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오면 먼저 감정이 상하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 교사도 감정을 실어야 한다. 예컨대 '너희 반은 5학년 중에서 공부도 제일 못하고 떠들기도 제일 심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의아해한다. 영문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 화가 올라오고, 이어서 아이들의 얼굴 근육도 서서히 일그러진다. 이를 잘 살핀 후 다시 칭찬으로 재빠르게 넘어가야 한다. "아니 그렇지 않아, 공부도 잘하고 제일 착해." 하면서 교사가 환하게 웃으면, 일그러지던 아이들의 얼굴 근육이 서서히 펴지면서 평온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어서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교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이런 상태를 살피게 하는 것이다.
그런 후 교과서 내용으로 들어갔다. 여러분이 지금 경험하는 것은 감정이다. 그리고 감정은 '나'가 아니고 '내 친구'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잘 살펴야 한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내지말고 먼저 화를 살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난다고 만약 화를 내면, 내가 감정에 놀아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쁜 것도 같다. 이때 중요한 것은 교사가 아이들이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연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같다.
이어서 만약 화가 나면 화가 나는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살펴볼 사람하고 교사가 요청을 하면, 몇 아이가 손을 든다. 이때 실습을 한 아이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 아이이다. 학교 근처에서 아이 엄마와 아이가 실랑이를 하는 순간을 한 두번 보았다. 짐작하기에 아이는 학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중이고, 아이엄마는 꼭 가야 한다는 상황으로 보인다. 아이 엄마는직장을 나가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가 없고,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상황으로 짐작되었다. 당시 필자는 아이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듯 하다.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외로워하는 아이 마음을 측은하게 느낀 것이다. 그 생각이 불현듯 난 듯, 아이를 지명했다.
교사가 아이를 보고 "박**, 도대체 왜 그 모양이야, 자세도 삐딱하게 앉아서 어쩌자고 그래." 순간 아이 얼굴이 일그러지고, 코도 실룩실룩, 이마에 일자 줄이 서고 눈썹이 치켜졌다. 아이가 울려고 하는 찰나, 필자가 먼저 항복을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 이 예뻐, 그리고 아이가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조금 준 후 필자가 말했다. "네가 한다고 그랬잖아." 하자 아이가 하는 말, "선생님, 이제 감정을 확실히 알겠어요"였다. 아이는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닿았던 모양이다. 2학기 말 마지막 수업시간, 교실로 돌아가기 전에 앞으로 나와서 "선생님, 내년에도 꼭 가르쳐주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가 웃으면서 '알겠다'라고 답한 기억이 지금도 난다. 당시 필자는 도덕과 전담교사라서 아이들이 필자의 교실로 와서 수업을 받고, 수업이 끝나면 교실로 다시 돌아갔다.
그렇다면 의대생(이하 '살인한'을 뺀다)으로 돌아와서 살펴보면 첫째, 자신의 감정을 자신이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집착으로 나아갔다. 집착으로 나아가면 그 감정에 사로잡힌다. 법륜스님은 이런 상황을 '정신병 증세'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렇게 문제가 되는 상황이기 떄문이다. 병원에 가야 하지만, 이것도 스스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둘째 사로잡히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만약 앞에서 예를 든 아이들처럼 자신의 감정이 나가 아니라는 경험을 했더라면 어떨까 한다. 살인까지는 저지르지 않았지 않았을까.
셋째,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나 폭력까지 저지르지는 않는다. 이런 폭력성은 전생의 업일 가능성이 높다. 수능을 만점까지 받자면은 굉장히 강한 성향일 것이다. 이런 성향이 오히려 부추겨 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수능 만점을 받지않았다면, 요컨대 실패를 경험했다면, 자신에게 조금 겸손해 졌을 수도 있다. 이는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넷째, 여기에서 부모가 등장한다. 부모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더 욕심을 부리게 되는데, 그럴수록 아이에게 '인간이 되라'고 해야 한다. 수능성적을 조금 못받더라도 옆에 사람을 도와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을 우선시했다면, 즉 부모가 아이의 욕심, 폭력성을 부추긴 것이다. 요컨대 부추긴 부모를 만났고, 그런 부모를 아이가 선택한 것이 전생의 업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정신세계에서 지구로, 인간으로 태어날 때 부모를 스스로 자신이 선택한다. 자신의 업에 맞는, 자신의 삶에서 이루려고 하는 목표에 맞는 그런 부모를 선택한다(슈타이너의 주장). 그러므로 아이에게 이런 업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모를 선택한 것이다. 더불어 역시 업인 이유는 사람을 죽이는 그런 폭력성은 현실의 삶에서 얻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성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결론은 아이의 무의식에 이런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었고, 그것이 현실에서 해소되는 상황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의 업이다.
그렇다면 이런 업을 바꾸는 방법은 있는가가 질문이다. 바로 말하면 이치를 깨달으면 된다. 이것이 단박에 벗어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의대생이 '아! 감정에 집착했구나'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치를 깨닫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다. 자아가 깨달아야 하는데, 자아는 현실에서 상속에 들어있다. 더불어 영혼의 속성으로 영혼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하는 이 생각의 문제점을 나는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영혼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가 무의식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자아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에 따른 슈타이너의 주장은,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선을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깥에서 내가 진리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악을 선택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한 법륜스님의 설법은, 부처님은 거기에 독이 들어 있다고만 말하지, 그 독을 먹고 안 먹고는 말씀을 안 하신다. 즉 그 독을 먹고 안 먹고는 스스로가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독이 있는지 없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이를 파악할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이란 이런 내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내 마음을 살피는 옛날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스승을 찾아가서 꺠달음을 얻고 싶다고 말하였다. 스승은 이 사람의 성품을 파악한 듯.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말을 듣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하였다. 스승은 제자로 받아들여서, 옛날 무쇠 솥이 잘못 놓여졌으니 다시 놓으라고 했다. 제자는 정성껏 솥을 놓았고 스승에게 솥을 놓았다고 말했다. 스승이 보고 잘못 놓여졌으니 다시 놓으라고 하였다. 다시 정성껏 놓았으나 스승은 다시 솥을 무너뜨렸고, 또 다시 놓으라고 말했다. 제자는 한번 두번 세번까지는 받아들였으나, 계속 다시 놓으라고 하니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스승은 계속 다시 놓으라고 말했다. 제자는 9 번까지 다시 솥을 놓았고,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 불현듯 화를 내는 자아를 본 것이다.
자아를 어떻게 보았을까.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간절했기 떄문에 순간 정신세계로 쑤욱 들어간 것이다. 정신세계는 항상 물질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자아는 언제나 이 정신세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에서 정신세계를 들어가면 언제나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정신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정신세계로들어가기 때문에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자아를 만난다고 하였다(슈타이너의 주장).
이렇게 자아를 보면 비로소 자신을 파악한다. 정신세계에 연결되면 자신의 존재, 자아가 파악되는 것이다. 자신의 본 모습은 정신세계에 연결되어있는 자아를 만나는 것이고, 그러면 사로잡힌 자신을 볼수가 있다. 결론은 상속의 자아에서 벗어나 세상의 이치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들어갔다고 계속 정신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정신세계의 속성에 내가 맞아야 들어갈 수가 있다. 이것이 사실 훨씬 더 어렵다.
결론은 자신의 감정을 영혼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감정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감정에 놀아난다는 사실은 가만히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면 안다. 기쁜 감정도 슬픈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 만약 감정이 나라면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감정을 살펴서 분노하고 속상해 하는 감정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문제는 영혼이 그런 감정에 매몰되어있기 때문인데, 감정이 '내가 아니다'라고 파악해도 영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현재 영혼의 감정에서, 영혼이 다른 감정에 놓이도록 내가 해야 한다. 예컨대 음악을 듣던지, 산책을 하던지, 영혼을 다른 상황에 내가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을 살피면 차츰 차츰 감정에서 놓여난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정신세계는 들어갔다고 해도 순식간에 다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들어갈려면 현재의 노력보다 더 큰 노력이 있어야 한다.
첫댓글 업이라는 이야기는 정신과학에서 하는 이야기이지, 현실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에서는 정신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세계의 논리로 접근하면은 허황한 이야기로 치부될 것이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특수아이들을 치료하는 강의에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 분명하게 업이라고 했고, 또 부모를 선택하는 것도 스스로의 업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