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애 / 박이랑
왕중양이 두 권의 무학기서를 구해 열흘 만에 독파한 뒤 사제 주백통에게 기서에 기록된 무공을 익히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기고 죽는다. 사형의 뜻을 받든 주백통이 두 권의 기서 중 한 권을 땅에다 묻고 나머지 한 권 만을 보관해 오던 어느 날, 강호를 주유하던 도화도주 황약사와 풍아형 부부를 만나게 된다. 아마도 천하제일 어리바리 주백통의 천성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들 앞에서 분명, 기서를 자랑하며 거들먹거렸을 게 뻔하다. 허- 그런데 그들이 누구이던가? 천하을 주무르는 무림오절중 하나인 동사부부가 아니던가! 궁극의 무공이 담긴 기서를 그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마침내 풍아형은 주백통을 상대로 수작을 건다. 있지도 않은 책이라며 허풍쟁이라고 놀리는 풍아형의 잔꾀에 넘어간 주백통은 기어이 품속의 기서를 꺼내 보이고 만다. 천진난만한 우리의 주백통, 뒤늦게 풍아형에게 속은 것을 눈치 챈 주백통은 분통을 터트리며 돌려받은 비급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하지만 이미 총명하기 그지없는 황약사의 처, 풍아형의 머릿속에 기서의 내용이 낱낱이 입력 돼버린 뒤였다. 황약사와 함께 도화도에 돌아간 풍아형은 딸, 황용을 낳는다. 그리고 가물가물 기억을 되살려 남편인 동사를 위해 기서의 복사본을 기술하다 그만 죽고 만다. 산후 조리를 해야 할 때 기서를 복원 하느라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게 원인이었다. 설상가상, 동사 황약사에게는 아내 풍아형의 죽음과 맞바꾼 거나 다름없는 미완의 복사본마저 제자인 진현풍과 매초풍이 훔쳐 달아나는 불운이 겹친다. 스승의 비급을 훔치는 폐륜을 저진 그들은 진현풍의 몸에다 기서의 내용을 필사한 다음 곧바로 복사본을 태워 증거인멸 한다. 어찌하다 진현풍이 죽었고, 죽은 진현풍의 가죽을 벗겨 보관하던 매초풍은 강남칠괴의 둘째, 주총에게 가죽 필사본을 소매치기 당하고 만다. 그것은 다시 우여곡절 끝에 곽정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곽정은 황용과 함께 그녀의 부친인 동사에게 결혼을 승낙 받기 위해 도화도를 찾게 된다. 때마침 도화도에는 동사를 만나러 온 주백통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우연찮게 무림 최고의 절세무공을 배우게 된다.
읍내에 나갈 요량으로 지갑 속을 뒤적이다 몇 장의 명함 가운데 별스럽게 불거진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며칠 전 택시 안에서 기사가 건넨 명함이다. 그날 나는 명함에 박힌 사진 속 인물의, 어디서 눈에 익다싶은 이름 석 자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무협지의 한 장르를 훑어가기 시작했다.
김용의 '사조영웅문'에서 무림 최고의 무공을 담은 '구음진경'이라는 기서의 행방을 추적하게 된 사유는 명함에 박혀 있는 이름 탓이었다.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택시기사로부터 받은 명함이었다. 겨우 기본요금 거리밖에 되질 않는 읍내에 주거하는 손님보다 만 칠천원식이나 미터기를 찍어주는 나처럼의 장거리 손님에게 대체로 기사들은 하나 같이 친절한 편이었다. 머리맡에 굵직한 돋움체로 ‘친절택시'라고 찍혀있는 명암 주인의 이름이 아무래도 어디서 본 듯한데 좀처럼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구음진경은 '의천도룡기'에서 구양진경과 함께 달마조사의 구술을 받아 쓴, 범문으로 기록된 ‘능가경’의 행간 사이로 들어가 원래 자리인 소림사의 서고에 안치되었는데, 아뿔싸! 이를 또 악인 소상자와 윤극서가 훔쳐 달아난다. 뒤를 쫒던 소림사의 어린 종 장삼풍과 일전을 치러던 윤극서는 몰래 자신이 기르던 원숭이의 배속에다 ‘능가경’을 숨기고 죽는다. 황망 간에 주인을 잃고 사냥개에 쫒기든 원숭이를 무당의 식솔이던 장무기가 구해 주고 원숭이로부터 절세의 무학비급을 얻는다. 그리고 비급 속의 내공을 바탕으로 건곤대나이를 연마한 장무기는 명교의 명실상부한 교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아- 윤극서! 나는 딱,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을 들어 이마를 쳤다. 친절택시의 기사 이름이 무협지에 등장하는 달변의 보석상인 그 윤극서와 같았던 것이다. 오십을 훨씬 넘긴 듯, 작은 체구의 택시기사 윤극서와 무협지에 나오는 악인 윤극서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무협지의 줄거리를 더듬게 된 것은 다분히 튀어 보이는, 순전히 그의 이름 때문이었다.
몇 일전 읍내에 나갔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는 젊어 조선소에 들어가 삼 년 전 정년퇴직을 하였노라며 자신의 이력을 장황하게 밝혔다. 그리고 운전을 여생의 천직으로 삼고자, 영업택시를 몰다 올봄에야 겨우 개인택시를 부릴 수 있는 자격이 생겨 개인면허를 취득했다고. 자신의 차를 단골로 이용해 주면 택시 요금의 일부를 깎아주겠다고 제의했다. 대신, 지금 자신이 한 말을 비밀에 붙여 달라 당부했다.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물론 장거리에 한해서 그러겠다는 말이다.
뭔가 게름직한 기분이었지만 한 달에 열 번 내외로 장거리 택시를 이용하는 나로서는 당연 구미가 당기는 유혹임에 확실했다. 나야 뭐,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에 그러자며 웃었다. 모반이나 다름없는 그와의 구두계약을 끝내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도무지 식별할 수 없는 신권의 지폐들을 꺼내 들고 별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은 미터기의 명멸하는 불빛에 가려내 이만 원을 건넸다. 늙은 기사는 천연덕스럽게 삼천 원의 잔돈을 거슬러 주면서 말했다. 이번은 첫 번째 거래니 미터기에 나온 요금대로 받고 다음 탑승 때부터는 삼천 원을 감해 주겠다고.
차를 돌려 읍내 쪽으로 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뜨악하니 중얼거렸다. 이런, 윤극서 같은 인간.......
전에 다녔던 직장의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택시를 부를 참이다. 붉은 색으로 새겨진 전화번호 아랫단에 전국 어디나 신속, 친절하게 모시겠다는 녹색의 문구가 당구장 표시에 갇혀 있다. 자장면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집이나 모 익스프레스란 거창한 간판을 내 건 이삿짐센터를 연상케 한다. 짧은 문장은 요란한 색조로 치장한 택시의 이미지 그림 밑에서 명함의 얇은 비닐 막을 뚫고 나올 듯 선명하다. 아무래도 명암도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에 기름기 같은 웃음 한 방울이 입가에 톡, 번진다. 번호를 따라 엄지손가락이 옮겨 다니고 전화기는 뽀작뽀작 버턴 음을 게워낸다.
.......여보세요? 운전 중인지 한참만에야 전화를 받는다.......아, 예. 친절택시죠?.......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전화기 저쪽에서 '경성 스캔들'의 테마음악인 희망가가 흘러나온다. 여기, 덕곡인데요. 지금 와 주실 수 있나요?.......나는 연속극의 내용보다 주인공들의 외모에 더 후한 점수를 매겨 TV를 시청하는 타입이다. 외모지상주의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외모에 적잖은 콤플렉스를 가진, 판에 박은 성형의 대열에 끼지 못한 요즘세태의 피해자 중 하나다. 그러다보니 TV를 통해나마 대리만족의 위안을 삼고자 스스로 그리 버릇을 들였다. 갈수록 그런 습관에 길 들여져 요즘은 이튿날이면 간밤에 본 연속극의 내용은 간 곳없고 해사한 여주인공의 얼굴만 눈앞에 어른거려 헤벌쭉, 정신을 앗기고 만다.......예? 덕곡이요? 아이구, 이거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참! 요즘 들어 내 애인은 '고맙습니다.'의 봄이 엄마에서 '경성 스캔들'의 조마자로 바꿨다.......장거리 손님을 태우고 시외로 운전 중이라서.......슬쩍 머리에 열이 오른다.......곧 바로 연락해서 다른 기사 분을 보내.......또 다시 윤극서라는 인간에게 삼천 원을 손해 본 듯 묘한 기분이다.
소형 조선소 하청업체의 도급을 받아 도장을 전문으로 시공하는 일명 때려먹기의 팀장이었던 나는 최근에 팀을 해산하고 두문불출,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하청에 하청을 맡아하는 일이 다 그렇듯 이 일 또한 빠듯한 기성으로 팀원의 임금을 맞추고 나면 정작 팀장이라는 자의 손에 쥐어지는 돈이란 개털이나 다름없는 허름한 금액에 불과했다. 도장이란 자체가 워낙에 3디 업종이다 보니 사고의 위험은 곳곳에 매복하다 약간이라도 방심하면 어디에고 할 것 없이 냉큼 재해가 올라붙는 직종 중 하나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턱없이 적은 기성으로 허덕이던 나는 해가 바뀌면서 업체를 상대로 재계약을 시도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기성을 상향조정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업체는 회사 내부 사정을 조목조목 열거해 가며 난색을 들어냈다.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다 결국 협상을 결렬되고 말았다.
나는 겨우 현상유지와 적자의 질곡을 윤회하듯 허우적대다 끝내 하던 일을 포기했다. 그리고 팀원들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기존의 업체에 스며들거나 동종의 타 업체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로 나는 자주는 아니지만 창문 너머로 구절산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무료한 날을 잡아 과거의 동료들을 만나러 읍내로 나가곤 했다. 그런 모임을 갖는 날은 대체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불특정 다수의 대상을 싸잡아 험담을 늘어놓다 핼간 낮 빛으로 택시에 너부러져 늦은 귀가를 했다. 이렇듯 읍내로 나가는 날에는 무슨 핑계를 둘러대듯 술잔을 잡아야하는 정당한 사유가 생겨났다. 오늘도 그런 날 지나지 않다.
읍내로 태워 줄 플라스틱 악기 같은 택시의 경적 음이 골목을 타고 왔다.
토요일 오전 일과를 정리하고 나온 다섯 명의 역전의 동료들은 먼저 화사하게 웃으며 서로의 안부부터 물었다. 거리를 배회할 나이가 지난 우리는 대낮을 아랑곳하지 않고 읍내 원조 할매아구찜 집으로 들어가 아귀수육과 찜과 소주를 시켰다. 우리는 각자의 신변잡기에서 다니는 직장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대선에 관한 짧은 식견들이 오고갔고 문화나 유행에 관한 두서없는 토막들을 나눠 가졌다. 칼럼이나 시사에는 비교적 어두운, 우리같은 비정규직 노무자들의 대화란 강단 없고 허술해 군데군데 끊어졌고 끝말잇기라도 하듯 그때마다 다른 이야기들로 술판을 이어갔다. 실업자가 된 이후로 모임은 주로 나의 주도하에 부정기적으로 이뤄졌다. 새로울 것도 없는 백수의 하루하루는 번번이 나태에 지배당하지만 혼자만이 갖는 공간의 친근함도 시간이 갈수록 곧 시들해진다. 그 즈음에 나는 전화기에 입력된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 올린다. 궁색하나마 차후의 일을 핑계로 그들과 접촉을 시도하곤 했다. 그렇게 마련한 자리는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과유불급의 시간을 따로 소비할 때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내가 말도 안 되는 토설로 버무려 분해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주었다.
무리 중 홍일점인 정애만은 잡다한 입놀림 중간 중간에 가볍게 웃거나 미간을 찡그리며 긍정과 부정 사이를 넘나들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곳 앉아 술잔에 양각으로 새겨진 푸른 글씨를 손톱으로 긁거나 아귀의 살을 뼈에서 바르거나 그도 아니면 벽에 걸린 각 방송사의 맛 탐방에 나온 홍보용 대형 걸개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습자지 식탁보 위로 흉물스런 아귀의 뼈만 남아 배속 가득히 포만감이 쌓일 즘의 대화는 띄엄띄엄 뜬금없는 질문과 건성의 대답으로 이어졌다. 자칫 묻어두었을지 모를 적의가 술의 힘을 빌려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내심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화기애애했던 처음의 분위기가 말미에서 돌출된 엉뚱한 언행으로 생채기를 내는 경우를 종종 봐왔던 터라 서로가 조심해야할 시간대가 막잔을 들 때임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화젯거리를 댈 게 없어 서로가 조금씩 서먹해질 때쯤 우리는 후식으로 나온 식혜나 커피를 받아들고 해처럼 벌건 얼굴로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남들도 다 하는 가벼운 손 흔들기로 작별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다음에 보자는, 실제로는 기약 없는 인사를 서로에게 남겼다. 우리의 만남은 늘 그런 식으로 시작되고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지었다. 좌우지간 같은 일에 종사하는 한,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염탐을 하듯 서로의 안부를 묻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만남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훌륭한 이해집단인 셈이다.
정애의 집은 내가 가는 방향의 길목에 있어 자연스레 우리는 같이 택시를 탔다. 통영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진동을 지나서 왼쪽 창포로 갈라지는 바닷길이다. 언덕이 물린 갓길로 횟집이 즐비하다. 바다와 맞닿은 해안선 콘크리트 담장이 턱없이 높다.
"친구야, 별 일 없음 우리 한 잔만 더 하자."
도심의 방음벽처럼 좌측 시야를 가로막는 방조제가 시작되는 동네 입구에 들어서자 그녀가 제안했다. 나보다 세 살인가 아래인 그녀가 말을 놓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요즘은 가슴이 꽉 막혀 숨을 쉴 수 없어, 막 욕이 나오려고 해."
그리고 보니 일 년은 조금 안된 것 같다. 그녀가 말을 튼 시점이, 작년 여름휴가를 갔다 온 다음부터니.
여름휴가 서너 날 전이었다. 휴가 전 마무리 검사를 받아 내기 위해 검사수행원으로 나서 감독관의 지적사항을 수정하고 있는 그녀에게, 세 살 먹은 자기 딸을 데려다 시켜도 아줌마보다 낫겠다고 빈정거리는 감독관의 말에 발끈한 그녀가 사단을 낸 적이 있었다. 도장검사의 특성상 다분히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검사과정이다 보니 검사관마다 나름대로의 잣대를 들이대고 퇴짜를 놓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수행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에게 무안당한 감독관이 더 이상 검사를 진행할 리가 만무했다. 나는 검사도중 돌아서 내려가는 검사관의 등짝에다 '시발 새끼'라는 육두문자의 묵직한 낙인을 눌러 찍었다. 힐끗 돌아보며 현장을 내려가는 검사관의 인상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나 역시 그에게 눈을 부라려 보였다. 그녀의 눈이 껌벅일 때마다 그렁그렁한 물기가 소낙비보다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절절 끓는 철판 위로 뚝뚝 떨어져 소금 꽃을 하얗게 피워냈다.
사건이 있고 나서 나는 수십 번도 넘게 업체 사무실로 불려 올라가 질책을 들었고 감독관 사무실로 찾아가 그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받았다. 눈을 치켜들고 계속 뻗대기에는 당시의 내 처지가 상대적 약자라는 허탈감에 점점 눈의 초점이 사그라졌다. 하청에 하청이란 궁지에 몰린 나는 결국 그의 사무실로 몇 번이나 찾아가 마음에 없는 사죄의 말로 용서를 구해야만 했었다. 그 뒤로 내가 올린 검사는 여지없이 잘리기를 거듭했다. 이판사판, 속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올라 와 목구멍으로 울꺽 게워 낼 직전에야 그 자는 능글스런 웃음을 베어 물고 검사를 끝내주었다. 그 무렵 그녀가 말을 논 것 같다. 같이 사회 생활하는 남녀 간에 서너 살 차이는 친구로 지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대는 요즘 어떻게 살아?"
나야 머, 그 동안 너네들 등 쳐서 꼬불쳐둔 거 곶감 빼 먹듯 야금야금 까먹고 있는 중이지. 그러는 당신은?"
택시에서 내려 검은 차양막이 쳐진 횟집 마당 평상으로 향하면서 새삼스레 근황을 묻는 그녀에게 농담 비슷하게 받아 넘겼다. 둘이 있을 때는 막역한 사이가 된다. 친구하기로 한 다음부터 점점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중구난방이 돼버렸다. 이름을 부르다 당신으로 변했다 자기로 변했다 심지어 새끼라는 말도 호칭이 되어 입에서 불거져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는 부부나 연인인 줄 안다.
"시발, 하나같이 내 주변에 있는 남자새끼들은 고양이 같아. 잔뜩 웅크리고 뭐 하나 채 갈 게 없나 하는......."
뭐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토라진 듯 볼통하게 부풀린 그녀의 볼은 귀엽다. 남자를 지칭해 쓰기엔 늑대가 제격이 아닌가? 하필이면 고양일까. 내가 아는 고양이는 그 까칠한 성질머리로 봐서 여자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인칭 대명사인데.
"나 말이야?"
"내가 그대한테 뺏길거나 있나 뭐?"
뺏고 빼앗긴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고양이는 시베리아캐츠나 렉스캐츠 같은 애완용 고양이는 아닌 거다. 최소한 그놈들은 탐욕을 가질 만큼 궁색하지 않다.
"그대도 알지? 왜, 작년 여름 그 거지같이 생긴 검사관한테 내가 당한 거. 근데 그거 한참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그거, 있을 수도 있는 일이겠더라고. 내가 그 새끼의 더러운 성질을 평소에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날 내가 맛이 살짝 갔나 봐. 그날 정말 더웠잖아 왜?"
더웠던 기억을 주지시키듯 손부채를 만들어 얼굴에다 팔랑팔랑 부채질 시늉을 낸다.
하긴 여름휴가를 목전에 둔 그날, 우라지게도 더웠었다. 손수건만한 햇빛가리개 하나 없는 야외 작업장에서 하루 종일 직사광선에 담금질된 철판은 신발 밑창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였으니. 게다가 흰색 페인트로 마감한 철판의 복사광에 시려 눈도 제대로 뭇 뜰 지경이었다. 이 삼 십분 철판 사이를 기어 다니면 불쾌지수고 뭐고 간에 금방이라도 숨이 껄떡 넘어갈 판이었다.
"그 얘긴 머 하러 꺼내."
그 이후로 그녀는 한 동안 내게 미안해했다. 검사 지연으로 인한 금전적 손해는 둘째 치고 나 역시 퍽이나 꼬장꼬장한 성질머리라 불한당 같은 검사관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분개해 매일 저녁이면 술에 취해 나가떨어지는 일이 예사였다. 그래도 이튿날이면 간이고 쓸개고 다 접어두고 검사에 입회했어야 했다. 그 일로 신경성 위염이 발작을 일으켜 더러 병원 신세도 져야만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나, 단순한 거 알잖아. 누가 나한테 조금 짓궂다 하는 농담 걸어오면 금방 달아올라 화학반응 일으키는 거......."
횟집 여자가 끼어드는 바람에 그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 방에 에어컨을 틀어놔 바깥보다 시원할 거라며 방에서 먹겠냐고 묻는다. 그녀는 방은 답답해서 싫다한다. 답답하긴 바깥도 매 한가지다. 동네의 초입부터 벗어날 때까지 도로를 따라 해안선을 막아 놓은 시멘트 벽 때문에 창포의 포구란 말이 무색하다. 벽에는 붉은 색 스프레이로 휘갈겨 쓴 전위성 구호로 난무했다.
태풍 매미 때, 이 일대 거의가 해일로 침수되었다 들었다. 보상을 둘러싸고 행정관청과 주민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행정을 보는 입장에선 매 번 해수가 범람할 때마다 골치 아프게 보상을 둘러 싼 잡음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제방을 쌓아 재해를 사전에 차단해 보자는 속셈일거고 주민들 다수의 입장은 회를 팔아 생계를 잇는데 바다를 막아 버리면 조망권이 사라진 이 동네에 누가 회를 먹으러 오겠냐고, 당장에 생존을 위협하는 제방공사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공사는 강행되었고 서로간의 불신으로 패인 골을 따라 반 환경 친화적인 장막이 솟구쳐 올라 끝내 극한의 대립 양상을 보이는 거라고 추측해 볼 수밖에. 여자에게 감성돔을 주문했다
그녀가 단순하다는 것은 같이 일해 본 사람이면 얼추 다 아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본인만 모르는 별명이 '사오정꽃돼지'일까. 사오정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해석해 버리는 그녀의 순진함이고 꽃 돼지는 아무 때나 터뜨리는 그녀의 직설적인 성격이 저팔계에 비유 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합성어가 그녀의 별명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장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뒤끝이 없는 털털한 성격 때문이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녀의 성격 탓에 가끔씩 동료들과 감정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다툴 때뿐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식이었다.
"정말 그때는 그 자식이 날, 애비 없는 애 딸린 년이라고 업신여기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울꺽 대들고 나서 눈물을 쏙 빼놓고 나니까 거제서야 퍼뜩 생각나더라. 지가 어떻게 알아? 내게 서방이고 자식이고 있는지 없는지. 후회막급인거 있지, 너 보기도 미안하고 진짜 챙피해 죽는 줄 알았어."
"나야 뭐, 고마웠지. 막말로 내 입장으로는 그놈한테 대놓고 다구리 깔 처지가 아니었질 않냐? 그때."
내 말에 그녀가 덧니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는다. 그녀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그녀는 정서의 이면으로 아무것도 덧대지 않은 유리처럼 투명하다. 아픔과 기쁨과 당혹함과 공포와 절망과 그 밖의 모든 감정들이 그녀의 몸을 빛처럼 투과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녀는 정말 사랑스런 여자다.
고기모양 그대로 포를 뜬 감성돔 회와 소주가 나왔다. 그녀는 약간의 겨자를 간장에다 푼 뒤 회를 집으면서 말했다. 사실, 배가 고팠다고......? 식당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귀찜 집에서 뼈만 발랐을 뿐 먹는 걸 보지 못한 것 같다. 당연히 먹고 있을 거라는 무의식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뿐.
"매운 거 잘 안 먹거든."
........?
연거푸 젓가락질 하는걸 봐서 진짜 배가 고팠나보다. 회를 입 속에 집어넣고 오물거리며 말한다.
"독해질까봐. 매운 걸 자꾸 먹다보면 매운 거에 내성이 생기잖아? 전에 한 번 억지로 땡초만 골라, 그것도 한꺼번에 몇 개씩 입에 틀어박고 어적어적 먹은 적 있어. 하늘이 노래지고 핑, 하고 기타줄 끊어지듯 머릿속 신경들이 툭툭 끊어져 나가는 거 있지. 오기로 몇 번을 그렇게 먹다보니 정말로 독기 비슷한 게 생기더니 나도 뭐든지 저지를 수 있다는 독사 같은 생각이 머리를 바짝 치켜들더라. 사실 그러려고 먹은 건데......."
한 입에 소주잔을 털어 넣고 부르르 떨더니 캬,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도 이가 드러나도록 웃는다.
찰라지만 어깨에 걸친 단발 생머리가 팔랑거린다. 그 순간 페퍼민트 향이 머릿결 밑으로 사르르 흘러내린다. 샴푸라기보다는 빨래의 헹굼제처럼 상쾌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그 향기는 그녀의 흰색 브라우즈의 접힌 깃에 숨어있다 동작의 크기에 맞춰 적당한 양으로 직물의 결을 따라 또르륵, 타고 내린 것 같다.
"자기 말대로라면 우리나라 사람 거의 다 독종이겠다. 땡초 잘 먹지, 마늘 잘 먹지,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 자극적인 음식들 무지 좋아하잖냐."
그녀를 쳐다보며 싱긋이 이죽거렸다. 난데없이 땡초를 먹고 독해지려 했다는 말이 웃게 만들었다. 고추라면 오히려 난폭한 성질을 중화시켜 주는 알칼리식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기어이 독해지려하면 차라리 인스턴트 음식이나 고깃덩어리를 질겅질겅 씹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요즘의 나처럼 말이다.
"사상체질이란 게 있다 그러잖아. 체질이 바뀌면 성격도 바뀐다, 그러던데?"
"개뿔, 그렇다 치고 땡초 먹으면 독해진다고 어느 책 몇 장 몇 절에 나오디?"
"그런 건 모르겠고 나는 땡초 먹으니까 독해지더라 뭐."
내가 보기엔 천성이 독해질 수 없는 여자 같다. 가끔 길길이 날뛰긴 하지만.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는 지극히 자기방어적인 행위일 뿐 결코 남에게 해꼬지할 인품이 못된다. 여태껏 격어 본 바로는 그렇다.
살점을 유린당한 감성돔의 아가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크게 열렸다 천천히 닫힌다. 어디서 봤더라? 물고기의 신경조직에는 아픔을 느끼는 통점이 없다고. 아무리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지만 설마?.......그렇다하고, 통증을 느낄 수 없다 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도 느끼지 못할까? 멀뚱히 제 살을 집어 먹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는 감성돔의 눈빛이 차츰 흐릿해 진다. 어쨌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거 하고는 살풍경이다.
"독해져서 뭐에 써 먹게?"
들은 바로는 감성돔의 산란 시기는 오월과 유월 사이에 이뤄진다 한다. 오뉴월 감성돔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산란을 하느라 기진맥진한 감성돔의 육질이 마치 스펀지처럼 퍼석해져 맛이 없다 해서 생긴 말이다. 사실 이 맘 때의 감성돔은 맛이 별로다.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접근한 감성돔은 경계심이 약해지고 산란에 필요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 먹이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해진다고 한다. 웬만큼 실력을 갖춘 낚시꾼이 마음만 먹는다면 연중에서 감성돔을 가장 많이 잡을 수 있는 시기가 지금이라 들었다. 그런 소문의 속내에는 마구잡이로 포회해 씨를 말리는 일부의 지각없는 부류들로부터 어종의 개체수를 보호하기 위해 피워 놓은 연막의 의미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작년까지 나 좋아한다 치근대며 쫒아 다니던 남자 하나 있었잖아. 왜, 수안이라고......."
"어? 어 그래, 장수안이. 알지.......근데, 그 사람이 왜?"
검은 얼굴에다 흡사 도둑놈처럼 주야로 암갈색 렌즈의 안경을 쓴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독수리가 그려진 125cc 오토바이를 몰고 종일 현장을 돌아다니던 그는 협력업체 용접 파트의 팀장이었다. 매일 아침이면 작업자를 블록 앞에 모아놓고 작업지시를 내릴 때는 이웃해 있는 다른 파트의 조회장까지 그의 목소리가 쩌렁거렸다. 작업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가끔 모이는 업체 간의 회의석상에서도 단연 그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그는 과장된 몸짓과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작업의 순위를 결정 짖는데 우선권이란 프리미엄을 가져갔었다. 호방한 성격에 걸 맞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다.
"동거해, 그 남자랑."
툭! 달맞이 꽃 하나가 가슴에서 떨어진다.
"미쳤어! 너?"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회를 집으려다 깜짝 놀란 그녀가 빈 젓가락을 입에 물고 빤히 내 눈을 쳐다본다. 그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동거란 단어가 뇌관을 타격해 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그녀나 나나 밑도 끝도 없이 내 뱉은 말에 둘 다 동시에 놀란 거다. 갑자기 내가 왜 흥분하는지 모르겠다.
"왜? 나는 남자랑 살면 안 돼?'
정당히 술이 오른 내 머리는 '남자랑 하면 안 돼?'라고 해독한다. 그녀가 연애를 하던 살림을 차리든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어슷 썰은 청무 한 조각이 창자 속으로 아리하게 떠 내려간다.
"애는 죽순 자라듯 커고 언제까지 막일이나 하고 살아야 하는 생각에 슬슬 일이 싫어지던 참에 그 사람이 결혼하자고 그랬어. 나보고는 자기랑 같이 딱 일 년만 맞벌이하고 결혼식을 올린 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고 그러더라. 그 뒤부터는 자기가 다 알아서 책임지고 먹여 살린다고 말했어. 알고 보니 나보다 나이도 세 살이나 어리더라고. 생각해 보니 경제활동 년 수도 어느 정도 확보되고 잘만 다독거리면 손에 쥐고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녀는 한때 모 전자회사 생산라인 작업반장이었다. 노조활동을 하던 중 회사의 압력에 권고사직이라는 멍에를 쓰고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그만 두어야했다. 회사를 나오기 전 사내연애로 아이를 가졌다. 중간급 간부였던 애인이 회사의 편만 드는 냉랭한 태도에 질려 기어이 일전을 치룬 뒤 절교를 선언하고 직장을 때려 치웠다고 말했었다. 남자 없이 혼자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지금 초등학교 이학년 계집아이로 컸다. 둘은 지금 모녀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 돼 공공기관의 임대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는 걸로 안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그녀의 말을 뭉뚝 자르는, 건조한 소리로 빗장을 질렀다. 약간이지만 내 말소리가 목젖에서 공명을 일으켜 입술 밖으로 새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에 따라 아랫배가 저릿해 온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려 했지만 내 속은 자꾸만 꼬여간다. 그녀에게 어떤 연정이라도 품었던가? 이런 되먹지 못한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 그녀에게 발각되지 않아야 될 텐데 하는 조바심에 성대를 조절하기가 예사로 어렵지 않다.
다소 성격이 급한 나다. 혹여 남들과 언쟁이라도 벌릴라치면 몇 마디 큰소리가 오가기도 전에 성을 참아내지 못한 성대가 먼저 덜덜 떨리기 일쑤였다. 만약 상대가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약간의 지략만 준비해서 전투 모드에 돌입해도 충분히 나를 제압할 수 있다. 그는 내 성대의 바이브레이션만으로도 그때의 흥분상태를 간파해낸다. 그리고는 단계에 따라 손끝으로 물 풍선을 건드리듯 툭툭 나무토막 같은 말 몇 마디를 던짐으로써 작정한 심리전을 구사하면 그걸로 끝이다. 적절한 주파수로 혈압을 올리거나 낮춰가면서 그가 목표한 바를 획득하는데 별반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시한폭탄처럼 자폭하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지난 이월부터. 정확하게 말하면 회식했던 날 이 후."
팀웍을 다질 목적으로 매번 달의 둘째 일요일마다 회식자리를 가졌었다. 이월부터라면 일월에 마지막으로 했던 회식 이 후란 얘기가 된다. 그 무렵이면 고육지책, 내가 팀을 해체하기 직전 고심에 빠져있던 시기에 마련한 회식이었다. 마침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그 달 회식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격려와 위로의 말들을 남발했던 걸로 기억한다. 상당히 늦게까지 술을 마셨음은 물론이다. 이 차로 노래방에 가 너나없이 구성지고 청승맞은 노래들만 골라 악성의 쉰 모가지로 늘어지게 뽑아 재꼈다. 그렇게 이별에 대한 깍듯한 예절의 의식을 수순에 맞춰 치러갔었다. 그런 중간 중간 뇌의 필름이 번번이 끊어져 나갔다. 동료들은 머릿속 길이 끊기듯, 끊어져 나간 샛길로 하나씩 둘씩 비적비적 걸어 나가 각자의 집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끊어질 듯 길게 늘어난 필름 속에서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이 정애였다.
따뜻한 콧잔등으로 보릿짚을 태우는 부드럽고 은은한 냄새가 났다. 아득히 종다리가 날아 오르는 머릿속은 개꽃을 피운 산처럼 가물가물 현기증이 일었다. 봉긋한 묏등에 기댄 듯, 귀에는 아주 은밀한 골을 타는 물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봄이 오고 여름이 온 걸까.......
가까스로 정신이 들 무렵에야 비로소 그녀의 존재가 인식되었다. 내 몸은 운전석에 너부러져 오른쪽으로 완전히 꺾여 있었다. 머리가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가슴에 묻혀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이 미끄러져 내리는 내 머리를 아래서 받쳐주는 모양새의 그림이었다. 주량을 넘어 혼미해진 의식을 그녀의 가슴에다 오롯이 맡겨버린 참으로 민망하고 꼴사나운 풍경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사방이 검은 얼음으로 쩡쩡 얼어붙은 것 같은 캄캄한 어둠속, 낮선 길섶의 차안에서였다.
노래방을 나온 뒤 억지를 부려 운전대를 잡은 게 화근이었다. 그녀를 태우고는 취한 것 같지 않게 고갯길 하나를 잘 넘었다했다.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절개지 도로를 지날 때에는 울퉁불퉁 돌멩이가 튀어나온 노면에서 바퀴가 뜨지 않도록 감속운전을 할 만큼 차분했다고. 그런데 으슥한 산길을 막 벋어나는 바다와 인접한 낚시공원 초입의 커버머리를 도는 순간, 아스팔트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갓길 비탈에다 풀썩, 보닛을 꼬라박아버리더라고.
그녀는 자신은 못 봤지만 내가 길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시간대면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외곽도로이다 보니 종종 야생동물의 출몰이 잦은 지역이었다. 워낙에 저속운전이라 잠깐 몸이 앞으로 쏠렸을 뿐, 별다른 충격을 받거나 상처를 내지는 않았다고. 그래놓고선 넋 나간 사람마냥 한참을 혼자 궁시렁거리다 핸들에 푹 꼬꾸라져 그대로 골아 떨어져 버렸다했다.
밤 고양이라도 본 건가? 내가 깨어나자마자 놈은 놀랍도록 잽싼 동작으로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그녀의 말인 즉, 팀이 해체되자 그때 사건 이 후로 눈 밖에 난 상태라 기존의 업체에 흡수되지 못하고 부득불, 다른 공단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 쯤 지나서 어떻게 자기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장수안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해 꼬박 일주일을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더니 한날, 만나서 꼭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일마치고 같이 저녁을 먹자했다. 전부터 집적대던 걸로 보나 그 동안의 통화내용으로 봐서 안 들어도 빤한 얘기지만 평소와는 달리 그날따라 그 사람 목소리에 은근히 끌리는 맛이 있더라고.
"아마 그때, 내가 마술에서 풀린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나 봐. 은근히 남자가 그리웠던 걸 보면.......미친 척하고 나갔어. 저녁을 곁들어 술이나 한 잔 울겨 먹을까하고. 시내에서 제법.......먼저 와 있었어."
시내에서 제법 이름이 난 ㅇㅇ한정식 집으로 장소를 정한 남자가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와 최고급 코스요리를 주문시켜 놓았다는 그 집은 내가 팀장으로 있을 때 접대 차, 손님을 모시고 몇 번 들락거린 적 있다. 요정처럼 각각 독립된 밀실로 꾸며져 있는 한옥집이였다. 대청으로 올라서면 비슷비슷한 크기의 방들이 늘어선 일자형 구조로 지어진, 그런 방마다 창호지를 바른 동일한 완자무늬의 미닫이가 달렸었다. 처음 그 집에 간 날, 안주인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방의 미닫이를 열고 들어 설 때 뜨악하니 정면 벽에 걸린 포구 한 점이 떠오른다. 거기엔 풀처럼 너부러진 한자들이 난데없는 할로겐조명 아래 다섯 줄기의 폭포로 쏟아지는 두루마리 족자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문외한인 내 눈으로도 도화지 위의 인쇄판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걸 탓하자는 게 아니다. 거기다가 조명을 달아 논 의도가 자못 궁금했다. 불빛에 번들거리는 기름먹이 유난히 거슬러 대화도중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초서로 내리꽂는 폭포 밑 반닫이 장식장에 잎만 쭈뼛한 란 한 촉은 저 혼자 문자향에 취한 듯 횡으로 늘어져있던 기억이 난다.
어째든 그녀는 몇 년 만에 그런 고급음식점에서 밥을 먹는다는 생각에 기분은 좋았단다. 작업복 차림 그대로 나온, 있는 모습 그대로인 것 같은 남자에게 조금씩 호감이 갔다한다. 불내나는 남자의 작업복에 왠지 믿음이 갔었다고 말을 잇는다.
"저녁 먹으면서 시종일관 분위기 안 맞는 시시껄렁한 얘기를 탁구공 넘기듯 하다 보니 하도 어색해서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그랬어."
하긴, 우리같이 돼지국밥에나 익숙한 부류들은 고급음식점에서 격식 따져가며 코스요리를 먹는다는 자체가 닭살이 돋고 온몸에 득실이 이가 기는 일이다. 더러 공감이 가는 그녀의 말에 망연자실, 지금의 사태를 잠시 망각하고 저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조명 빨 좋은 술집으로 데려가더니 자기는 마티니를 시키고 나한테는 맨하탄인가 뭔가 하는 칵테일을 시켜줬어. 흰옷이 조명에 남빛으로 파리한 전통의상을 입은 필리핀 여자가수 노래를 들으며 같은 걸로 몇 잔을 더 시켜 먹었어. 그 자리에서 그랬어. 남자가, 자기랑 결혼해 주겠냐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속에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남자의 속삭이듯 하는 말에 숨이 가빠지는 거 있지."
끓는 납을 삼킨 것처럼 속이 타들어 간다. 지그시 다문 입 속에 화근내가 난다.
"갑자기 아니, 그가 만나자고 그럴 때부터 그(너)랑 살고 싶어 졌는지 몰라. 그(너)랑 같이 잠들고 그(너)랑 동시에 일어나 아침저녁으로 칫솔 하나로 나누어 이를 닦는 상상을 했었어. 일요일에는 셋이서 놀이공원에도 가고 돌아오는 길에 맛있는 외식도 하고.......연속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장면들이 머릿속에 막 그려지더라고.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잖아."
기포가 보글거리는 횟집 수족관 아래, 쇠비름과의 채송화가 머리를 헝클리고 해산 하려는 듯 빨간 벽돌을 베고 누우려한다.
회식의 말미에서 사고를 낸 그날, 두어 시간을 그렇게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머쓱한 잠에서 깨어난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고 자정을 훨씬 넘겨버린 시간을 질러가기라도 할 듯 다소 빠른 속도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한결 취기는 가셨지만 그렇다고 운전을 할 만큼 체내의 알코올농도가 떨어지지 않았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서 오밤중에, 낯선 도로변에 그녀를 방치해 놓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녀는 조수석 문짝으로 모로 꼬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전 내내 캄캄한 창밖에다 시선을 꽂은 채로 무엇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 미동조차 없었다. 화물차 한 대가 과속으로 내 차를 추월해 갔다. 철의장품을 가득 실은 차다. 납품업체에다 짐을 부리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과속은 흔한 일이었다. 나도 조금씩 더 속도를 불려 나갔다. 어서 집에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한층 길을 재촉해 고치 속 같이 아늑한 서식지로 기어들어 숙면을 취할 생각에 가속 페달을 밟는 발끝으로 힘을 모았다. 낚시공원의 바닷길을 벗어나는 경사의 오르막에 오르자 수은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는 삼거리에 위치한 민가들이 보였다. 버스 정거장의 나무의자 뒤, 오래된 느티나무의 깡마른 가지 사이로 얼음조각 같은 푸릇푸릇한 빛들이 새고 있었다. 그녀의 집까지는 국도에서 지방도로 갈라지는 삼거리의 우측 길로 들어서 차로 이십 여분 거리였다. 내리막을 내려와 동네 어귀 삼거리를 삼십 여 미터 앞둔 지점에서 갑자기 바퀴 밑으로 뚝, 하는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우측 전조등의 불빛이 맥없이 꺼져버렸다. 경기 든 아이마냥 깜짝 놀라 돌아앉는 그녀의 동그래진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브레이크를 밟아 갓길에다 차를 세우고 가라앉아 쳐져가는 상반신을 등받이에 길게 늘어뜨렸다. 제기랄, 결국은 고양이를 치고 말았다.
평소, 고양이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진 나였다. 순간 어릴 때 보았던 한 장면이 불쑥 머릿속에 엄습해 왔다. 목줄을 매단 채 도망 나온 고양이가 나무를 타다 그만 줄의 한쪽 끝이 가지에 휘감겨 공중으로 추락하는 모습이었다. 나목의 여원 가지에 대롱거리며 죽어가는 고양이의 눈에서 피가 흐르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높고 상그러운 가지 끝이라 속수무책 구해 낼 엄두를 못 내고 숨이 끊어진 뒤에야 톱을 든 청년의 손에 의해 나무에서 내려졌었다.
낚시공원 입구에서 비탈을 들이박을 때 전조등 전구에 충격이 간 건지 아니면 수명을 다한 필라멘트가 저절로 끊어진 건지 모르지만 일단은 고양이를 치었고, 그 순간 전구가 나갔다는 우연이라 치부해 버리기엔 불길한, 머리 위로 어릴 때 기억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 전신을 훑어 내렸다.
일단 정신을 가다듬고 차에서 내려 고양이 사체를 치울만한 물건을 찾아보았지만 마땅히 눈에 띄는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트렁크를 열어 일 년에 몇 번 칠까 말까하는 한 조의 배드민턴 채를 꺼내 들었다. 가로등 불빛에 스테인리스 샤프트가 살의를 품은 듯 파리하게 반짝거렸다. 문방구에서도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채였다. 죽은 고양이를 채에 포개 도로 옆 논바닥에 유기할 요량이었다. 아마 술을 먹지 않은 맨 정신이었다면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고양이에 접근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떨리긴 채를 움켜진 손도 마찬가지였다. 흰 바탕에 갈색 무늬를 입은 중간 크기의 흔한 길고양이로 보였다.
차가운 길바닥에 모로 늘어진 고양이는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특별한 외상없이 깨끗한 죽음을 맞은 듯했다. 비늘을 세운 찬바람이 가르마를 타듯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을 빗어 넘겼다. 주춤주춤 망설이다 재빠른 수습을 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오른손에 든 채의 프레임을 비스듬히 바닥에 눕히고 왼손에 잡은 채로 빗자루를 대신해 고양이의 등짝을 쓸어 올리는 순간.......헉! 하는 헛기침 같은 비명과 함께 철퍼덕, 도로바닥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이내 손등에서 낭자한 피가 솟구쳐 올랐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고양이가 느닷없이 활처럼 튕겨 올라 오른쪽 손등을 딛고 냅다 논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새 어둠속에 흔적 없이 묻혀버렸다. 잠시 기절을 했었던 걸까. 망할 놈의 고양이 같으니라고........
그때 내가 왔던 방향에서 승용차 한 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나를 발견한 승용차가 상하로 전조등을 깜박거렸다. 서행을 하는가싶더니 난타하는 경적소리와 중앙선을 넘어 가속페달을 밟는 요란한 소음으로 쌩하니 스쳐 지나가며 걸쭉한 욕설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야심한 도로에서 양손에 번들거리는 흉기 같은 물건을 든 괴한이 길 가운데서 피를 흘리고 퍼질러 앉아서니 그도 기겁할 만도 했을 것이다.
따가운 경적 음에 조수석의 얼어붙은 유리를 내린 그녀는 열린 틈 사이로 손바닥을 받히고 턱을 고인 상태로 미처 사태를 눈치 채지 못한 듯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망연자실, 연거푸 두 번이나 이따위 일을 당하다니. 발작을 일으키듯 손에 쥔 배드민턴 채를 고양이가 사라진 쪽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휘적휘적 차에 올라탔다. 거제서야 그녀가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정유회사 마크가 뚜렷한 주유소 화장지로 손등의 피를 닦아내자 네 개의 움푹 페인 자국 밑으로 활키고 간 또 하나의 상처가 드러났다.......고양이 발톱도 다섯 개였나?
한쪽 눈을 감으면 원근 감각이 둔해지듯, 제대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한 개의 전조등으로 이 차선 도로의 커버 길을 주행하기란 고역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음주까지 곁들렸으니 바느질을 하듯 한 땀 한 땀 길을 기워 가야할 도리밖에 없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그녀가 노래를 부른다. 지금 시각이면 몽둥이를 치켜 든 오리온성좌의 사냥꾼이 서쪽으로 이동할 시간이다.
노래에서처럼 보통 때와는 절반에도 못 미치는 주행속도는 답답하리만큼 느려터지다. 계기판의 전자시계가 노쇠한 별처럼 깜빡거린다. 기능의 일부를 상실한 차가 수 십 개의 초신성을 거느린 주유소의 커버 길에서 크게 타원형을 거리며 휘어지는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점점 빛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순간순간 물줄기가 변하는 천강의 기슭으로 갈수록 내차는 차츰차츰 쪽배로 변해간다. 성형의 틀에 박힌, 나를 에워싼 거푸집이 솜씨 좋은 목수의 손에 뜯겨나가듯 하나씩 하나씩 벗겨져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는 미리내의 서쪽으로 하염없이 표류하기 시작한다.
은하수를 건너서 푸른 나라로 푸른 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빛이 있는 건 샛별의 눈을 찾아 길을 찾아라.......노래는 끝이 없는 되돌이표로 이어진다. 별일이 없다면 그녀와 나는 황소별의 플레이아데스 여울목을 핑그르르 돌아서 쌍둥이별쯤에서는 한때의 유성 비를 맞을 것이다. 게와 사자별 다음으로 그녀의 성 처녀별이다. 제대로만 가준다면 사냥꾼의 집인 오리온 성을 못미처 호시탐탐 독침을 겨루는 전갈의 꼬리가 닿기 직전, 아프로디테가 사랑하는 나의 별 주벤엘게누비가 있다....... 우주의 자궁에서 별이 태어나고 있는 걸까, 저만치 앞에서 일등성과도 비교할 수 없는 밝은 별이 번쩍거린다. 다가갈수록 광도가 선명한 신생별의 언저리에 광선검의 붉은 검기가 난무하다. 뭔가 잘못된 거다. 아- 결국, 나의 부주의로 스타워즈에서처럼 시스족이 강탈한 악의 축, 펠러틴황제의 영토를 짚은 것인가. 그녀의 안위가 염려된다.......
가까이 다가가자 도로 옆으로 순찰차 한 대가 서 있고, 그 앞에서 아래위로 형광봉을 흔들어 대는 경관이 내 차를 세웠다. 시발, 이 늦은 시간에 단속이라니. 머피의 그물에 걸려 든 걸 인지한 순간 환상의 껍질들이 쩍쩍 금이 가고 손 쓸 겨를 없이 와작, 깨져 적나라한 현실의 공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흐흐흐, 온전할 리 없는 내 처지가 여지없이 발각될 위기의 순간에, 당황한 그녀가 급히 핸드백을 뒤져 껌 하나를 건넸다.
회식의 말미에 오른쪽 범퍼가 깨지는 사고를 시작으로 그날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기어이 그날에 쓴 회식비의 몇 곱절의 벌금을 물고 면허까지 취소되는 얄궂은 공경에 처하고 말았다. 사실 그날 밤, 어떤 연유인지 끝끝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밤의 외진 곳을 한없이 겉돌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서로의 가슴에다 밀봉한 비밀 하나씩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달을 유희하던 고양이의 은밀한 발톱으로 월계수를 타고 올라 으스러지기 직전의 각자의 별로 되돌아갔다.
착지가 불안해 보이는 재갈매기 한 마리가 해안선의 콘크리트 둑 위로 내려앉는다. 놈은 날개를 꾸깃꾸깃 겨드랑이 사이로 접어 넣는다. 그물을 걷어 올린 배가 포구에 들어 올 시간이 다 돼가는 모양이다. 도시에 비만한 비둘기가 살듯 어촌에도 비행이 서툰 갈매기가 산다. 놈은 어부가 던져주는 생선 내장이나 작은 물고기를 기억할 것이다.
“아줌마- 여기 고추 좀 갖다 줘요, 매운 걸로요.”......?
연신 젓가락질을 하다만 그녀가 주방아줌마를 큰 소리로 부른다.
혼자서 거의 소주 한 병을 비워 낸 그녀의 볼이 발그레 상기하다. 매워서 싫다더니 아니, 독해질까봐 안 먹는다던 그녀가 지금 청량고추를 찾고 있다.
“요즘 들어 쫌 먹었다하면 속이 니글거려 미치겠어.”
자신을 단련시키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 듯 그녀는 야채바구니에 담겨 나온 청량고추를 집어 들고 노려보듯 미간을 찌푸린다.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과 헤어져야 할 것 같아. 혼자 살 버릇해서 그런지 영 적응을 못하겠어.......”
마치 독해져야할 이유라도 생긴 것처럼 덧니가 단호한 어금니로 아작, 베어 문다. 얼마나 매운지, 매운 내가 내게까지 진동한다.
“.......그렇다고.......”
나는 무어라 해야 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복잡 미묘한 감정의 기복과는 달리 내가 생각해도 내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다. 막상 남자와 헤어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오히려 가슴이 오므라드는 느낌이다. 멀어지는가 하면 가까워지고, 가까워 지는가하면 다시 멀어지는. 그녀와 나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불규칙한 주기로 한 번씩 타원형으로 지구를 비껴가는 혜성처럼 요원하다.
“남자랑 살면 전에 보다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살아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네. 그러니까 내가 아마, 그에게 기대가 컸었나 봐. 사소한 시비에도 짜증이 나는 걸 보면. 생각지도 못한 성가신 일이 늘어나는 만큼 그 사람이 미워지는 거 있지. 그때마다 딸애한테도 미안한 생각이 들고.......”
체증이라도 든 듯 한쪽 손바닥으로 배를 쓸어내린다. 얼핏 보아하니 그녀의 복부가 봉긋이 불러 보인다. 헐렁한 브라우즈를 입어 몰랐었는데 방금 그녀가 자신의 배를 만질 때 드러난, 서른 중반의 뱃살 치고는 유난히 도드라져있다. 차츰, 내 아랫배도 묵직이 불러오는 느낌이다.
“몇 달이지만, 같이 살면서 그치가 내게 땡전 한 푼 건네 준 적 없는데.......”
“.......”
검고 단단한 근육질의 각진 얼굴을 가진 남자. 업체 간 회의 상에서 서로 마주보고 대화란 걸 했었지만 지극히 사무적인 내용만 교환했을 뿐 특별히 관심을 가질 만큼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 번도 안경을 벋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광대뼈의 윤곽을 따라 위로 살짝 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매는 그대로 드러났었다. 당연히 그의 눈매는 다갈색 안경알로 일부 순화시켜 가며서도 단호한 어조로 적절히 회의를 주도해가는 면밀함을 드러냈다. 업무의 추진능력으로 따지자면 그는 꽤 능력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 이상은 그에 대해 아는바가 별로 없다.
만난 사내마다 하나같이 고양이 같다는, 전에 한 그녀 말이 발딱 발톱을 세워 가슴을 활키고 고추씨 하나 떨어트린 듯 따끔거린다. 그녀의 성격으로 차마 남자에게 돈 얘기는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살림을 맡은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남자가 월급을 맡겨올 거라고 기다리며 속을 태웠을 게 뻔하다.
그렇게 고추 한 개를 게 눈 감추듯 해치운 뒤 다시 젓가락을 들어 아니, 젓가락은 그녀의 손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손톱처럼 손바닥 안으로 말아 쥔 채로 술잔을 잡거나 다른 물건들을 집었다. 다시 젓가락을 펴서 몇 점 남지 않은 회가 아쉬운 듯, 한 무더기로 끌어 모은다. 이미 아귀로 배를 불린 내가 먹는 둥 마는 둥 한 사이에 생선회 접시는 탁자의 중간에서 그녀 쪽으로 반쯤 쏠려있다. 산란철 감성돔 회라 별 맛이 없을 법도 한데 그녀의 식탐이 허기진 고양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익명이 요구되는 사생아의 작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의 동남쪽 오랜 시간동안 대륙에서 떨어져 독자적인 생태계로 진화한 한반도 세 배 크기의 섬. 마다가스카르에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포식자중 하나인 푸사라는 사향고양이가 산다. 나무타기에서는 날다람쥐나 긴 꼬리 원숭이에 뒤지지 않고 탁월한 감각으로 무장한 발톱은 사자보다 용맹하다한다. 나는 새를 잡을 만큼이나 민첩해서 마다가스카르의 사냥꾼이란 별명을 가진, 섬에서 최고의 포식자이다. 대개의 포식자가 그러하듯 사향고양이 역시 사냥을 제외한 나머지 때에는 시간이 멈춰버린 박물관 같은 권태로운 섬의 게으른 식구 중 하나에 다름없다.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지 않는 그들에 비해 인간들은 훨씬 고양이답다.
물론 고양이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그렀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