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섬

[박이랑]

섬에서 첫째 날

낯선 방. 창문을 가린 커튼의 실루엣도 낯설다.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있는 침대는 활대처럼 휜 요추의 오목한 부분이 닿지 않을 만큼 딱딱하다. 코끝으로 소독약 냄새가 스며든다....... ?뜬금없이,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란 소설제목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소설 속에 청개구리가 실제로 등장했던가하는 생각에 골똘해진다. 청개구리가 그 소설의 주연인지 조연인지 아니면 소설 속의 누군가가 내뱉어버린 타액인지 잘 생각나질 않는다. 

개구리처럼, 패대기쳐 너부러진 그대로 흰자위를 굴리는 눈꺼풀이 뻑뻑하다. 점점 불안해진 나는 가까스로 손끝에다 의식을 갖다 댄다. 명령부호를 인식한 손가락 마디가 곡두가시처럼 까딱거린다. 다행이다, 그때서야 뿌연 플라스틱 조각 안으로 둥근 형광등이 달린 구식 펜던트가 걸려있고 소형 TV가 놓여 진 발치의 벽면에 작은 브라켓 고리에 좀약을 산 망사 주머니가 탈색된 나뭇잎처럼 말라붙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네 시는 넘어서리라. 불이 꺼져 있음으로 지금의 밝기를 가늠해 대충의 시간을 짐작해 본다. 인공적인 빛의 도움 없이 사물을 식별할, 이 정도의 밝기라면 적어도 네 시는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근래 들어 네 시를 전후해 일어나 본적은 없다. 하지만 칠 월 초순의 여름인 것을 감안해서 적당한 여명의 틀에 박힌 지금의 밝기를 시각으로 환산한다면 네 시 부근일거란 생각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명이 트는 각기 다른 계절을 뭉뚱그려 네 시를 시점으로 새벽이라 단정한다. 제대로 기도를 배우지 못한 나는 새벽보다 아침이란 말을 선호하는 편이다. 아침이란 어휘는 사계의 공백을 메울만한, 보다 합리적이고 적절한 표현이라 믿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시각은 네 시에서 일곱 시 사이의 아침이라 말함이 옳을 것이다. 

지금은 네 시가 되었건 일곱 시가 되었건 중요하지 않다. 오늘 하루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앞으로 살아가야할 날들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시간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문득 시계의 행방이 궁금해진다. 아마 손 전화를 갖고부터 시계는 시계로써 갖는 품위와 지위는 장롱이나 서랍장 구석에 감금되었거나 나도 모르는 새에 어디론가 유기되어졌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시계가 주는 멋스러움도 계절마다 줄을 갈아주는 설렘도 사라져버렸다.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 소리에 태엽을 뽑고 시간을 맞추던 긴장한 날들의 기억들이 까무룩한 추억이 된지가 이미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시계가 없으니 알람도 없는 아침이다.

문틀 사이 벌어진 벽지 틈에 풍뎅이처럼 살이 오른 바퀴벌레가 보일만큼 아침의 간극이 좁혀졌다. 이 상태로 누워있든지 TV를 켜든지, 세수를 한 뒤 해안선을 따라 산책을 하든지, 내 자유다. 오늘은 거짓말처럼 열이 내려있고 잠들기 전 어눌하게 사지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누가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가벼운 몸으로 돌아와 있다.    

반듯이 누운 자세로 담배를 피운다. 게으름을 피울 시간은 넉넉하다. 매일 그랬듯이 담배를 피우며 하루의 일정을 짜 맞추는 노력 따위는 무시하기로 한다. 무시무시한 금연광고를 본 다음부터 담배의 맛은 저하되었지만 집행하는 수량은 오히려 늘어나버렸다. 어제는 종일토록 야채와 과일로 만든 주스를 마셔댔으니 담배의 해악에서 조금은 여유롭지 않겠는가. 그리고 오늘만큼은 시간이 남아돌 것이다. 담배를 태워 여분의 시간을 좀 죽인다 해서 역전될 인생도 아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담배의 잔악무도함을 고발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역성을 들 의사는 조금도 없다. 폐부를 돌아 나온 담배연기가 켜켜로 안개의 군락을 형성했다.

아무도 안개 속에 떠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두류동에 조명가게를 오픈한지 삼 년, 여전히 동네의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체 비슷한 처지의 이웃한 상인들과 작당한 술추렴도 벌써 삼 년이나 되었다. 전공과는 무관한 가게를 열어 놓고 가게의 수익만으로 월세와 두 명의 직원 월급도 겨우 댈 만큼 힘들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시내 외곽에다 조명과 관련된 가내공업 수준의 공장을 함께 꾸려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년 동안 늘어난 건 가게를 찾는 일반손님들이 잘 알지 못하는 허접한 조명용어를 섞어 그들을 현혹하는 잔머리나 다름없는 약은 꾀 뿐이다. 유행의 흐름이나 조명과 관련된 얄팍한 지식들을 나만의 노하우인 냥 제법 그럴싸하게 꾸며대는 허풍에 손님들이 깜박 넘어오는 날에는 으레 그날 저녁 상인들과 어울린 술값은 내가 대는 날이었다. 그런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사장이란 호칭으로 나를 대했다. 그렇다고 손님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운다거나 강매를 통한 부당한 이익을 챙긴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장사 수완에 조금 이력이 붙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일이 꼬여가기 시작했다. 

장사에 수완이 붙었다는 자신감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보름 전, 서울의 대형매장으로  납품한 조명기구들이 중간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두 달에 거쳐 생산한 물량의 거의 전부를 사기 당한 것이었다. 지금 내 지갑 속에는 사기에 걸 맞는 부도처리 된 어음 한 장이 덩그렇게 남아있을 뿐이다.

대형매장 주인을 가장한, 조명 밥을 먹을 만큼 먹은 소위 말하는 이 바닥의 전문 브로커에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사기임을 알고 열흘 동안 서울에 잠복하다시피 그의 뒤를 수소문했지만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탑 차에 조명기구를 실고 지방을 떠돌며 중소매장에 물건을 파는 늙은 중간상인을 믿은 게 화근이었다.

그의 소개로 알게 된 사장이란 자는 나를 서울의 한 대형매장으로 불러들였다. 그 자는 용산의 전자상가에 위치한 매장의 구석진 자리로 옮겨 다니며 진짜 주인행세를 했다. 직원을 가장해 그를 사장님이라고 호칭하는 작당한 젊은 사내의 속임수에 넘어간 나는 근처 찻집으로 자리를 마련해 납품계약서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었다. 물건이 생산되는 대로 연락을 해주면 동석한 젊은 친구를 보내 운송을 책임지겠다는 그 작자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으니 생각할수록 분하고 열불이 터질 노릇이었다.       

지극히 산란해진 머리를 시킬 겸 바람이라도 쐐야겠다는 생각을 한 뒤로 지독한 여름감기가 찾아왔다. 그는 관절과 머릿속에 일주일 째 잠복중이다. 매 번의 계획과 일거수일투족이 그에게 발각되어 몸은 점점 달아올랐다. 그를 따돌리고 탈출을 모의 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제 오전만 해도 그렇다. 가게를 둘러본 뒤 지긋지긋한 도시를 벗어나 마땅한 은신처를 물색할 요량으로 근처 공원에 나가 보았지만 실행에 옮겨 짚을 방향은 고사하고 온갖 들끓는  소음들 때문에 도로 옆 매끈한 나무의자에 앉아 뚱뚱한 비둘기를 구경하기에도 벅찼다. 알려진 대로 분지에 형성된 대구의 여름더위는 지독하였다. 아스팔트가 녹는 냄새가 매연과 함께 두통에 올라붙어 진득거렸다.

고열에 시달리다 못한 나는 다시 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짧은 거리의 이동이었지만 걸음을 땔 때마다 달라지는 미미한 체고에도 멀미를 일으킨 듯 속이 머쓱 거렸다. 결국 가게 뒤로 난 화장실로 뛰어가 억지로 먹어 두었던 소량의 음식을 다 토해내고도 모자라 위액까지 덤으로 게워낸 뒤에서야 감정과는 상관없는 눈물을 눈가에 찔끔거리며 소파에 너부러졌다.

가게와 공장의 경리 일을 맡아보는 미래는 유리탁자 위로 샹들리에 프레임을 걸어 놓고 사출한 플라스틱 구슬을 꿰다 돌아보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녀는 업무상 내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매장과 공장에 관련된 금전을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누구보다 지금의 내 처지를 헤아릴 줄 안다. 비교적 산술적인 셈에 무심한 나보다 현재의 위기를 꿰뚫어 보는 눈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하니 지금 내가 서너 날 자리를 비운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반전의 기미가 없음에도 가득이나 구겨진 인상을 대면해야하는 그녀의 입장은 오히려 단 며칠이라도 나를 안 봤으면, 하는 마음일 런지 모른다.

그녀는 가게를 오픈하면서 벼룩시장에 낸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온 첫 번째 처녀였다. 사실, 그녀가 처녀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처음에 유리문을 밀고 들어온 그녀는 베트남 처녀처럼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에 붉은색 재킷과 통이 좁은 아이보리 계통의 치마를 입었었고 여자가 매장 안에 들어서자 실내가 다 환해질 정도의 상당한 미모여서 아마 그런 후한 점수를 매겼지 싶다. 당연히 나는 그녀가 손님일거란 생각에 들뜬 소리로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수줍게 웃으면서 우연히 구인광고를 보고 왔노라 했다. 그리고 오픈한 매장의 상호가 자신의 이름과 같아서 느낌이 좋았다 그랬다. 그 뒤로 한 동안 걸려온 구직을 묻는 상담 전화는 그녀의 손에서 처리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의 전직은 시내 중앙로에 위치한 모 호텔 커피숍에서 일하던 여직원이었다. 연봉으로 따져보면 가게의 급여는 호텔 수준과는 비교하기 간지러운 낮은 임금이었다. 좋은 직장을 팽개치고 굳이 여길 택한 이유를 묻자 가게를 오픈하기 전에 인테리어 공사와 제품을 전시하는 과정들을 출퇴근 시간에 봐 왔었다 했다. 그때 진열창 너머로 넘실거리는 화려한 조명불빛에 저도 모르게 빨려 왔었다고 웃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미래가 아닌 촌스런 이름이란 걸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비밀로 붙여 두기로 했다. 아무튼 삼년이 지나 스물일곱의 나이인데 아직도 그 속을 모를 여자다.

내 행선지는 부산으로 정해졌다. 부산이라.......

내게 부산은 생경한 도시다. 아침 뉴스를 보다 사십 여 년 전의 모습으로 개폐 가능한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를 복원하는 기공식이 열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서일까, 언젠가 용두산 공원의 꽃시계와 여의주를 움켜진 용을 그림엽서에서 본 적이 있다. 한시라도 빨리 도시를 떠나고픈 마음에 그것만으로 부산을 선택할 명분으로 타당했다. 우습게도 도시를 피해 도시로 간다는 비상식적인 모순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내차는 화원IC를 빙글 돌아 직선의 도로 위에 가속이 붙은 뒤였다. 도대체 부산으로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하지만 괜한 트집이었다. 가기 싫으면 가지 않으면 그 뿐이다. 가다가 눈에 띄는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오던 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부산으로 꺾어들기 전 칠원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진주나 광양만으로, 해남의 땅 끝 동네까지 목적지를 정해 이동하는 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란 걸 인식하는데 더뎌진 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일단 영산휴게소에서 차를 세운 다음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한 다음 과일주스를 마셨다. 토할 때 위벽의 돌기가 거꾸로 올라붙은 모양인지 과즙이 넘어가는 빈속이 까칠했다. 휴게실의 목공예 테이블 앞에 앉아 새 행선지를 생각해 보기로 했지만 뇌는 아무런 반응이 없고 아까부터 눈높이의 시선은 짧은 하의를 입은 젊은 여자의 가늘고 흰 다리에 붙박여있다.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수제비처럼 뭉뚝뭉뚝 잘려 나와 관자놀이를 들이받아 몽롱한 두통으로 끓어올랐다. 여전히 시선은 좌우 대칭이 완벽한 여자의 매끄러운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리는 눈의 초점에 따라  네 개의 황금비율로 쪼개지기도 했다. 희한하게도 행방 묘연하던 머릿속 의식은 네 개의 다리로 꿈틀거린다.  

셔블 발기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자 자리 보곤 가라니 네히어라.......

처용가의 한 대목이 오버랩 된 다리 사이로 얼룽거린다.

가득이나 열이 올라 붉은 얼굴에 난데없는 역신의 천연두 화공이 날아들어 낯은 불볕처럼 화끈거린다. 처용의 처가 미소년과의 연정에 빠진 건지 아니면 역병에 걸린 건진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처용가에 나온 대로 역신과 몸을 섞은 것만은 분명한 모양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처용의 부적은 의사의 처방전이거나 간통죄를 다스리는 성문법의 법규조항 쯤 일 것이다.

따로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나의 시선은 매끈한 다리의 주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중간 굽 높이의 반짝이 샌들이 장애물을 피해 물살을 가르는 은어보다 유연하게 휴게실 구조물 사이로 빠져나간다. 주차장 차들의 지붕은 물가의 조약돌처럼 따끈하게 달아올라 가득이나 가물가물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윽고 빨강 고무대야를 엎은 것 같은 소형승용차에 멈춰선 여자가 보드라운 종아리를 들어 운전석에 오르기 전 종이류 수거함에 일반 커피 잔 서너 배 크기의 종이컵이 여자의 손끝에서 사뿐히 떨어진다. 여자는 원두커피를 마신 듯하다. 차에 바닥과 등이 구별되지 않는 투명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미래를 닮았다.

미래에 대한 나의 감정이 어디까지 개입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왠지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혹,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종일 커피 잔을 끼고 사는 미래가 마시는 커피는 의외로 석 잔 정도다. 집에서 볶아 온 원두를 손잡이가 달린 그라인더에 갈아 거름종이에 내리는 일로 그녀의 일과가 시작된다. 커피가 갖는 의학적 효능과 세계 각처에 널려있는 원산지의 지명은 물론이고 수확 시기나 건조방법과 로스팅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진다는 데야 나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하루 한두 잔의 커피는 약이라는 그녀의 말에 솔깃해 더러 마시긴 하지만 솔직히 맛에 대해서는 별로다. 다른 건 몰라도 커피에 대한 지식은 미래가 전문가였다.   

내가 여자의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여자의 차가 칠원분기점을 지나고 내서분기점을 막 스쳐지나 가면서부터였다. 이대로라면 마산시내로 빠지거나 창원과 김해를 지나 부산으로 가는 꼴이 되고 만다. 칠원이나 내서에서 함안 쪽으로 핸들을 돌렸어야 했지만 줄곧 앞차의 꽁무니만 보고 쫒아가느라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못한 것이다. 마산시내로 들어갔다, 다시 나들목을 타고 돌아 나올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여자의 차는 서마산에서 고속도로를 내렸다.  

여자는 은행나무가 심어진 산복도로를 타기 시작했다. 차를 돌리려면 고속도로에서 내려 유턴을 하거나  적당한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받아 다시 고속도로를 올라타도 상관없지만 담배와 생수를 사기 위해 일단은 여자가 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시내에서 차를 돌릴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을 거니까.

담배 생각은 간절했지만 몇 개의 수퍼를 지나치면서도 나는 섣불리 차를 세우지 못했다. 기관지가 헐어 피워봐야 담배 맛은 고사하고 숨쉬기가 더 불편해질 거라는 생각에 좀 참아보기로 했다.

여자의 차가 건널목 신호를 받아 브레이크를 밟았다. 일부러 차를 여자의 차 뒤로 바짝 들이댔다. 여자의 차는 빨강투톤의 작고 앙증맞은 마티즈2였고 그에 비해 내차는 가끔 짐을 실어 나르는 검정색의 구형 갤로퍼다. 여자는 등받이 뒤로 깍지 낀 양손을 쭉 벋은 뒤 갸웃갸웃 머리를 흔들며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경직된 목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끝에다 웨이브를 넣은 파마머리가 목보호대 좌우로 삐죽거렸다. 도로는 한적했고 길을 건너는 행인은 없다. 여자는 신호가 바뀔 때까지 법규를 준수할 셈인 모양이다. 심심풀이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듯 가벼운 두 번의 경적음을 날렸다.

여자의 깍지 낀 손이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그 자세로 상반신을 한차례 까딱 하나싶더니 이번에는 허리를 좌우로 비트는 동작으로 스트레칭을 이어갔다. 아마 바뀌지 않은 신호등을 확인했을 것이고 후미등을 통해 나의 동태를 살핀 뒤 ‘미친놈’ 하고 잘근 입술을 씹었을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 번지는.......망할, 생각해 보니 여자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럼, 나는 뭔가? 그저 미끈하게 빠진 다리에 홀려서 대책 없이 들이대는 멍청한 스토커에 불과했단 말인가? 흐흣, 한 조각의 얇은 신음이 입술을 재치고 새어 나왔다.

한심한 작자의 운전대를 잡은 왼쪽 팔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생판 모르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잠시 내가 환자라는 걸 잊고 있었다. 에어컨을 끄고 유리문을 반쯤 내렸다. 팔등의 통증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으로 푸줏간에 걸린 찹찹한 고깃덩어리의 촉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살갗의 안쪽은 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바닥처럼 뜨거웠다. 

목적지가 정확하지 않은 채로 차를 돌린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행동이다.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선 들 후회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다. 어쩌면 나는 남해를 돌아 서해안을 지나 경원선을 지나 동해안을 지나 다시 지금의 이 자리에서 발견될 지도 알 수 없다. 그렇게 돌고 돌다 날이 저물 듯 인생이 저물지도 모른다. 저문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사는 게 별거야고,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그렇게 노래하던 가수가 어느 날 갑자기 유서를 남기지 않고 자살해 버렸다. 혹평을 좋아하는 비평가의 반응은 즉각 논평을 내어 그는 타살 되었고 촌철살인의 주범으로 나를 포함시켰다. 물론 나는 극구 부인했다. 그때까지 나는 가수와 관련된 가십거리에 악플은 커녕,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 가수의 홈피나 팬클럽에 접촉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가수와 나는 생면부지였고 그가 죽고 난 뒤에 들어 본 그의 노래는 내가 선호하는 장르와도 달랐다. 가끔 라디오를 통해 서너 번 그의 노래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중간에 뉴스채널로 주파수를 돌려 그날의 사건과 사고소식을 엿듣고는 했었다. 가수의 죽음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살인의 누명을 씌운 비평가는 세간의 무관심이야 말로 가수를 죽인 최고의 살인도구라는 그럴듯한 죄목으로 나를 지목한 것이었다. 억울했지만 그 뒤로 매스컴의 접근이 차츰 두려워졌다. 그날 비평가의 논평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살인자의 오명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웠을 것이었다. 가수는 죽었지만 비평가는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더러는 남의 이목이 필요한 인간들도 있는 세상임을 그의 죽음으로 명백해진 것이다. 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가수의 노래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삶에 염증을 느낀 허무주의로 무장한 에고이스트이고 나에게 모욕을 안겨 준 지독한 새디스트였다. 그렇게 결론 짖자 동전의 양면처럼 일면식도 없는 가수와 나는 순식간에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꼴이었다. 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다 그 잘난 비평가의 험상궂은 악담 때문이었다. 손님을 꾀여 알전구 대신 값비싼 삼파장 램프를 팔아 이웃한 장사치에게 술을 사고 사장이란 부추김에 자가당착에 빠져 사는 나 같은 인간에겐 세간의 관심이란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장치에 불과하다.

나는 더 이상 비평가의 오지랖에 휘둘리지 않겠다. 오로지 나의 관심사는 걸핏하면 조명기구에 커피자국을 남기는 미래를 다그쳐 먼지 낀 진열대와 바닥을 청소하게 만들거나 함부로 나사못을 흘리고 다니는 조명기사 이군에게 두 번씩이나 가게를 들락거리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시키는 정도면 충분하다. 미래나 이군이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칠칠치 못한 실수를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 역시 내가 내지른 잔소리는 퍽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미래는 한 번씩 너나 잘하라는 식의 볼멘소리로 대들기도 했다. 어째보면 우리는 나름대로 제 멋에 사는 독특한 방법을 터득한 셈이었다.  

빠-앙, 뒤차의 무직한 경적 소리가 내차를 밀어냈다. 신호가 녹색으로 바뀐 모양이다. 이렇게 된 바에 어디 갈 때까지 가 보는 수밖에. 여자가 내 존재를 알아채든 말았든 우연을 가장한 미행으로 먼발치에서 여자의 얼굴이라도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아무리 외씨처럼 미끈한 다리라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여자의 꽁무니를 따라 왔다는 게 나로서는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산복도로가 끝나갈 무렵 삼거리 도로표지판을 확인했다. 좌측은 시청이 있는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고 우측은 외각으로 빠져 통영을 향한 길이였다. 내심 여자가 오른쪽 길로 들어서길 바랬다. 복잡한 시내로 들어서 자칫 여자의 뒤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것보다 허무한 노릇이 없지 않은가.

유치하지만 여자의 얼굴만 확인한다면 깨끗하게 여자를 놓아주고 내 갈 길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날씬한 다리와 피아노 건반 위에 어울림직한 희고 긴 손가락과 삐침머리를 가진 여자의 얼굴은 신선할 것이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빼다 박았을지 모른다. 늘 뒷전에서 지질한 망상의 변두리에 집착하는 부류가 그렀듯 나 역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실상 여자가 앞에 다가서면 말을 걸어보기는 고사하고 먼저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땅으로 처박고 자리를 모면하려 종종걸음치고는 했다. 그럴 때는 혈액형으로 분류해 둔 유들유들한 성격은 간데없고 오로지 단점으로 부각된 다혈질로 달아오른 화끈거리는 얼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물건을 사러온 젊은 여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손님이 여자일 경우에는 허둥지둥 미래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어진을 쳤다. 미래는 조리 있는 화술로 여자들의 손에 보다 비싼 물건을 쥐어준 뒤 출입문 바깥까지 살가운 배웅을 하고 돌아서서는 한심스런 눈으로 혀를 차기도 했었다. 

바램대로 여자는 오른쪽 차선으로 빠져나갔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후끈한 열기에 유리문을 올리고 다시 에어컨을 켰다. 체온조절장치가 고장 난 몸뚱이는 종잡을 수 없이 뜨겁다가도 약한 에어컨 바람에도 이내 바들바들 질려왔다. 바늘로 깁거나 구급차에 실려 갈 정도의 질병 외에는 웬만한 상처나 잔병에 약을 쓴 적이 없었다. 약 몇 첩으로 나을 수 있는 병이라면 은근히 고통을 즐기는 편이 내가 병을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그러다보니 어쭙잖은 상처나 얄궂은 통증 따위는 그 흔한 상비약 한 알 얻어걸리지 못한 채로 내 몸에서 자진해산해야하였다. 하지만 감기의 위력은 남 달랐다. 일 년에 두어 번씩 달갑지 않은 감기의 방문은 매 번 달리한 신종바이러스로 무장해 혈구를 상대로 전면전을 펼쳤다. 놈은 내 어깨 위에다 질벅한 물지게를 걸쳐놓고 지적지적 물을 뿌려가며 사지를 밟아 뭉개 기어이 온몸을 만신창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감기란 게 걸리고 나면 뾰족한 대응책이 없다는 말을 신봉하듯 한사코 나는 약을 거부했다. 그 버릇은 아직도 여전하다. 희고 둥글게 돋은 달이 그믐으로 옮겨 갈, 길고 지루한  밤들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지금은 반으로 기우는 하현이다.

여자의 차가 공룡 모양의 휴게소 건물을 지나고 배 모양의 주유소 건물을 지나고 삼거리에 있는 검문소를 통과할 무렵 오른쪽으로 한 눈으로 담기 버거운 빼곡한 아파트단지가 들어 선 시가지가 보였다. 다도해의 명성과 함께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만이 아름다운 항구의 도시. ‘그리움’을 노래한 유치환의 고향 통영이던가. 그의 형 유치진이, 불러주는 그 누구의 꽃이 되고 싶어 했던 김춘수가, 김약국의 딸 박경리가, 나비부인의 윤이상이.......전혁림의 화조도 속에 숨어 단꿈으로 어우러진 통영이다. 청마처럼, 학창시절엔 한 번 쯤 나도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에 기대 애인에게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 분명하게 가려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실제로 지구 반대편 동화 속에 나옴직한 얼음 호수가 침엽수림에 둘러싸인 북유럽의 파란 눈에 소녀에게도 주구장창 구태의연한 연서를 띄우기도하였다. 그러한 편력들도 지금에 생각하면 오래토록 닦지 않은 유리창 뒤편에 튀겨진 빗방울 자국에 드러나는 기억들 마냥 조합하기도 어색한 합성사진처럼 전혀 낯선 여자의 모습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마음에 품었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요구해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옮겨 붙지 못하는 뜨거운 불꽃에 댄 가슴의 상처에는 고름이 끊이질 않았다.

그 고질적인 질병은 밤마다 몽환에 시달리는 성병이나 다름없었다.    

통영 시내로 접어드는 여자의 차에 혹여 다른 차량이 끼어들 새라 견인이라도 된 듯 바짝 붙였다. 나란 족속이 이제는 능글맞다 못해 아예 뻔뻔스럽다. 여자의 차가 마트 전용주차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형 할인마트가 있는 도로의 풍경은 어딜 가나 엇비슷하다. 주차할 공간을 찾아보지만 저녁거리를 준비하러 나온 많은 갑각류들로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살집이 풍만한 중년의 여자가 먹거리로 가득 채운 카트를 끌고 와 육중한 디젤기관으로 무장한 쇠똥구리의 꽁무니를 따고 허겁지겁 식량을 보충하고 떠난 자리에 여자의 차가 날랜 동작으로 틀어박혔다.

여자가 내리기를 기다렸지만 후미등에 얼굴을 들이댄 체 화장을 고치는 듯하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차량들의 보글거리는 경적소리에 손을 한번 들어준 뒤 천천히 바퀴를 굴려 주차할 곳을 물색해 나갔다. 아쉽지만 주차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여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확률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이상 서둘 필요는 없었다.

단지 나는 여기가 섬에 자리한 여관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어치구니 없게도 거짓말처럼 여자가 숨어 버렸다. 내가 주차를 하고 잠깐 동안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여자의 차는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여자가 나의 존재를 눈치 챈 게 분명했다. 나를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대형마트라는 트릭을 이용한 것일까, 김이 빠지긴 했지만 뭘 어떻게 해 볼 건더기가 없어진 나는 해질 무렵에 섬으로 연결된 다리를 건너왔고 다리를 건너기 무섭게 차선을 비틀어 해안선을 타기 시작했다. 곧 어둠이 깔렸고 차선을 가르는 야명주가 박혀있는 노란 띠를 따라 바퀴 밑으로 비린내가 진동하는 물기슭의 자귀나무 숲을 지나왔다.  

어렸을 적, 옆집 마당에도 자귀가 무성했었다. 집안의 자잘한 우환이 있을 때마다 당신 스스로 불교를 믿는다던 어머니는 사찰보다 오히려 무녀의 집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 집에는 흰 분을 두껍게 바른 위로 짙은 화장을 한 늙은 무녀가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탱화와 작은 불상을 정체불명의 장군상과 함께 봉안한 그 점집이야말로 신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밖에 없는 어머니는 절의 작은 집 정도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어머니가 점집을 다녀 온 날은 당신 혼자 대문을 들어서는 법이 없어 어김없이 촌수를 매기기도 힘든 객사한 일가친척이나 호시절이었던 한때 행랑채에 머물다 병사한 거렁뱅이의 혼령을 하나씩 달고 들어왔다. 그런 날은 무녀의 신령이 접신한 요령소리처럼 집안이 어수선하기 일쑤였다. 집안 여기저기에 기묘한 문양의 부적들이 늘어났고 식구보다 훨씬 더 많은 귀신들과 한 집에 기거해야하는 중압감에 짓눌러 내심 가족관계란 붕괴직전의 지붕처럼 위태로웠다. 특히나 두 형의 반발이 여간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야야, 너그들 말이 맞다. 그런 거 믿을 거 아니더라, 내가 여태껏 점쟁이가 일러 준 방책을 써 봤지만 아무 효험도 없더라. 인자부터는 점집에도 안가고 절에도 안 갈란다.’하면서도 ‘절에도 안 갈란다.’에 여운을 남겨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의 입에서는 무녀를 둘러싼 과거사가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그 즈음에 나에게 아무도 모르는 애인이 생겼다. 물론, 당시 내 애인도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내 애인은 함부로 쌓은 시멘트 벽돌담에 삐딱하게 기댄 체 담배나 꼬나무는 바람기 가득한 비행소녀나 다름없었다. 개나 서 있음직한 고무로 된 적갈색 쓰레기통에 누렇게 뜬 불빛으로 투영되는 가로등이 내걸린 전봇대 아래로 나온 애인은 나팔꽃처럼 입술을 오히려 회청색의 동글동글한 도넛을 구워냈는데 애인이 가로등을 상대로 도넛을 팔 때는 무슨 심각한 고민이 생겼을 때나 생리통을 앓을 때였다. 그런 것쯤은 애인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에 빠져있었음으로. 언제쯤이면 애인이 그 자리에 나올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했다.

늦은 하교 길의 나를 발견한 애인은 씩, 웃으며 대담하게도 도넛에 손가락을 끼우는 외설스러운 동작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애인을 외면을 한 체 입속 가득 고이는 불량한 침을 눅눅한 담벼락에다 퉥, 뱉고는 했었다.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집 없는 한 마리의 달팽이가 들어붙어 느릿하게 아래로 기어갔는데 이튿날 아침이면 그 괴력의 달팽이가 벽 속으로 파고 든 흔적이 역력했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어머니가 내 애인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기겁하였으리라.

어머니의 얘기들 가운데 참으로 씨도 안 먹힐 황당무계한 내 애인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어머니의 건국설화 같은 화제 속 무녀의 딸도 포함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긴 했다.

말하자면, 무녀가 시집가던 이듬해 봄부터 거부할 수없는 환청에 사로잡혀 그녀는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맨발에다 속적삼 차림인 체 밤낮없이 산이며 들로 헤매 다녔다고 말했다. 여릿한 아낙의 몸 어디서 솟는지 모를 괴력이 남편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없는 지경에 일러 아예 방에다 가두기도 했지만 방문을 부수고 나가 제집은 물론이고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집 창에다 다짜고짜 늙은 호박만한 돌을 집어 던지는 광기로 주위사람들을 아연실색케 만들었다한다. 그러다 가끔 맑은 정신이 돌아올 때는 울면서 몇 번이고 죽기를 기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보았고 그때마다 회초리를 맞은 듯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고. 그런 유사한 일들이 거듭되었고 시댁식구들의 눈 밖에 날수록 그녀의 신병은 더 크게 도져만 갔었다하였다. 결국은 친정으로 내몰린 그해 여름 신어머니를 정하고 죽기보다 싫은 무녀의 길로 들어서야만 했었다고 그랬다. 시퍼런 쌍떡잎이 촘촘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동해안 어디에서 내림굿을 받았는데 내림굿을 받는 굿당 주위 실밥을 풀어내는 꽃이 한창 엉켜드는 아름드리 자귀나무 가지가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나타난 긴 수염에 누른 갑옷을 입은 장군이 자신의 몸속으로 쑥 들어오더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온몸이 불에 달군 듯 뜨거워지고 소지처럼 가벼워진 저절로 신명이 일어 작두를 타고 난 얼마 뒤 갑자기 태기가 느껴져 몇 달 후 계집아이를 해산했다 하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태어난 무녀의 딸이 필경 신령의 씨앗으로 믿는 눈치였다. 나는 돌아서서 코웃음을 치고 말았지만 어머니야말로 어디에 한 번 믿음을 두면 제아무리 제갈공명이나 항우장사가 살아온대도 당신의 의지는 쉬이 꺾지를 못할 것이었다. 그 계집아이가 시름시름 자라 내 첫사랑이 되었던 것이다.

담배연기가 흐릿해진 공간 사이로 어느새 아침의 입자들이 무더기로 몰려왔다. 이때를 틈타 남향으로 창을 튼 방 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사물들이 차례대로 깨어나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질렀다. 한 결 같이 흑백의 소품에 지나지 않았던 사물들은 농후해진 빛의 질량에 동화작용이라도 하는 듯 서둘러 형형색색의 빛깔을 빚어내고 있었다. 어둠에 녹아있던 기분 나쁜 비명들로 뭉쳐져 있던 소리들이 각자의 위치로 찾아가는 부산한 아침의 풍경은 생소했다.

어둠에 익숙한 바퀴벌레는 나이테가 맞물린 포도나무 줄기 속으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습기에 절인 포도나무의 누릇누릇한 잎사귀가 줄기의 밑동을 살짝 가렸음으로 바퀴벌레의 은신처로는 제격으로 보였다. 이 섬에서 나는 바퀴벌레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나의 목격자는 유일하게 여관주인 뿐임으로 내가 바퀴벌레를 대하듯 여관의 주인도 내게는 무관심할 것이다.

어디선가 건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소리는 마치 아득한 장소에서 속이 빈 금속상자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낮고 단조로운 울림이 되어 방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벽지 속 포도나무 넝쿨이 벽을 타고 천정 가득히 올라가고 주름진 커튼 가득 빛바래 있던 메꽃이 선명하게 피어났다. 그런가하면 짙은 밤색의 방문도 켜켜이 쌓아 놓은 여관의 나이를 증명하듯 나이테 하나하나를 슬며시 드러내기 시작했다. 소리의 입자가 굵어질수록 빛의 입자는 더욱 또렷하게 명암을 갈라놓았다.

굳이 寺中四物이 아니더라도 아침을 두드리는 소리에는 빛의 치열함이 숨어있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그녀를 기다리는 하루하루는 생기가 넘친다.

-오늘은 이만 헤어지기로 해요.-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날지도 모르죠.-

회자정리가 받아들여야할 숙명이라면 이자필반의 재회 역시 필연으로 믿는다.  

삼일 째 되던 날이던가, 중국집 전화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여관전화로 카운터에 물었다. 전화를 받은 주인남자는 전화번호를 일러주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휴게실로 배달해 먹어도 좋다는 말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밖에서 사들여와 먹은 음식냄새가 몸에 배여 찝찝하던 차에 주인남자의 그러한 배려가 더 없이 고마웠다. 마침 저녁시간도 가까워지고해서 주인남자와 통성명이나 나눌 겸 술을 곁들일 수 있는 요리를 시켰다. 며칠이 지났지만 그동안 주인내외와 마주친 것은 무슨 비밀스런 거래를 하듯 밀폐된 카운터의 쪽문을 통해 하루치의 숙박료를 지불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주인남자와 인사를 나누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당장 지금이라도 몸만 빠져나오면 여관주인과의 인과관계는 깔끔하게 종결지어질 것이고 이 섬을 벗어나면 언제 또 다시 여길 찾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일례로 관광지랍시고 내가 다녀온 장소를 두 번 이상 가본 적이 한 손으로 꼽고도 여유가 남았다. 그러니까 다음에라도 손익차원에 들지 않는 비생산적인 조우는 나 자신이 먼저 거부반응을 일으켜 만남 자체를 꺼려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남자와 통성명이나 하자는 얼토당토않은 돌발적인 행위는 돈이 오가는 금전적 거래를 통해 생겨진 습관에서 비롯된 오류임에 분명하였다. 그도 아니면 터무니없이 가게 근처의 장사치들에게 술을 사는 나쁜 버릇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거였거나. 요리주문을 한 다음에야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리 대수롭지는 않았다.

내 나이와 비슷해 뵈는 여관집 내외는 일층 객실 중 일부를 개조해 살림집으로 쓰고 있었다. 첫째 날 아침에 들었던 소리의 정체는 여관집 내외의 어린 딸이 내는 피아노소리로 드러났다. 휴게실 벽면 솜털이 보송보송한 유치원의 노란 망토를 걸친 계집아이가 생글거리는 가족사진 아래 피아노가 놓여 있는 걸로 봐서 소리의 진원지는 아마 이곳 휴게실이 틀림없을 터이다. 다장조의 음률과 피아노 악보 판에 열려있는 바이엘교본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게 그 증거의 한조각일 것이다.

여관에 따로 휴게실을 둘 필요가 없지만 휴게실은 그들의 거실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관의 현관문을 경계로 붉은 벽돌로 칸을 질러 카운터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는 일층 휴게실은 그들의 식당노릇을 하였다. 처음에는 숙박시설 전용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주위에 새로운 모텔들이 생겨나고 건물이 노후해 여관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궁여지책 살림집과 병행해 여관을 꾸려나가는 중이라는 주인남자의 푸념을 들어주느라 그날은 꽤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섬에 붙박인 며칠 이후로 눈에 띄는 몇 개의 변화가 생겼다. 칫솔이 마른 날이 늘어났지만 이상하게 입안은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한 달에 세 번씩 자르던 머리카락도 볼품없이 자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섬에 머무르는 동안 하루 종일 굶은 채 팬티 바람으로 여관 방 침대에서 뒹굴거나 창문가를 기웃거리는 담쟁이 넝쿨 속에 숨어있는 달팽이를 찾는 놀이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런 놀이들이 시들해지면 대충 겉옷을 챙겨 입고 일층 휴게실로 내려가기도 했다. 주인남자와는 중국음식을 시켜 놓고 유선TV방송을 같이 보다 그들의 저녁상에 수저 한 쌍을 보탤 만큼 친해졌다.

여주인이 주방에서 음식들을 요리하는 동안에 남자는 소파에 앉아서 마른수건으로 카본 낚시 대를 닦거나 형형색색의 낚시 소품들을 탁자 위에 펼쳐놓고 크기와 호수별로 분류해 작은 주머니가 많은 지갑 속으로 쟁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낚시를 가서 한번쯤 자신의 낚시실력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시종일관 모르쇠로 버텼다. 그는 주로 대부분의 객실손님이 체크아웃하고 나간 오후부터 저녁시간까지 낚시방송을 시청하였다. 나 역시 그 시간대에 헐렁한 박스 티에 반바지 차림으로 휴게실로 내려가 캔 맥주를 마시다보니 며칠 지나지 않아 웬만한 생김새의 고기이름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과 채비를 묶는 요령 따위가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더운 여름날에 갯바위에 나가 앉아 곤욕을 치를 자신이 없었다. 음식들을 휴게실 탁자에 나르는 일은 어린 딸이 도맡아하다시피 했다. 토란처럼 땡글땡글한 여주인의 얼굴을 빼 닮은 여자아이는 제 아빠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한지 쀼루퉁한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였다. 

한 주에 두세 번 꼴로 가게와 작업장의 사정을 전화를 통 해 확인했다. 통화 중간에 새로이 거래를 원하는 조명 숍이 나타났지만 생산량의 한계를 핑계로 정중히 거절하도록 일러 놓았다. 서울내기에 호되게 당한 터라 지금 당장은 생산한 조명기구의 납품 거래처를 기존해 오던 업체 외에 더 이상 늘일 생각이 없었다. 매사에 신중을 기한다 한들 내가 보인 틈새가 얼깃한 방충망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처럼 그들에게는 자연스럽다는 게 무엇보다 짜증이 났다. 근래 들어 내 근황이 궁금한 이웃 상인들의 발길도 예상했던 부재의 시간이 하루나 이틀을 넘어 엿가락처럼 길어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뜸해진 상태라고 귀띔해주는 미래의 목소리도 걱정 반 짜증 반이다. 주인이 없는 가게를 지키는 스트레스기압이 마른장마에 갈라지는 하늘만큼이나 변죽을 부렸지만 가게의 일은 두 사람이 그런대로 지탱해 나가는 모양이다. 하긴, 그들도 나만큼의 경력이 붙었으니 크게 걱정할 일만은 아니다.

그런 사이 놀라운 사실은 알게 되었는데 그동안 내가 소속해 있던 공간의 부재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여겼던 그 자리에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끼어든 휴게실의 분위기를 봤어도 직감할 수 있었다. 여관주인 내외도 휴게실에 수시로 들락거리는 나를 꽤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게 분명한 듯 했다.

결국 세상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고 교묘하게 짜여 진 공간의 틀인 셈이다. 그 틀 속에 누구를 끼워 넣어도 나름대로 세상은 돌아갈 것이고 그것이 다소 어긋나고 부적절하다 해서 이의를 제기할, 아무도 없다. 실패와 성공을 가름할 명확한 공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 확률이 지배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딴전을 피워 삶을 망치는 경우인들 그것을 이상하다고 눈치 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생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니까. 

오래전부터 해양관광지로 알려져 온 섬답게 해안선도로를 따라 산책이나 조깅을 할 수 있는 인도가 따로 나 있었고 전망이 좋은 인도의 중간 중간에 잔디밭을 조성해 정원수와 등나무 넝쿨을 올린 콘크리트 구조물 밑으로 등받이가 있는 나무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틈틈이 섬의 구조를 익히는 며칠 동안에 연달아 열대야가 찾아왔음으로 나는 해가 진 저녁에는 비닐재질의 실내용 여관슬리퍼를 끌고 언덕을 내려가 가로등이 환한 해안도로 노천카페의 나무의자에서 밤늦게 상온에서 보관한 뜨뜻한 맥주를 시켜 마시기도 하였다. 시가지의 불빛을 부어놓은 바다와 발아래로 끓어 넘치는 포말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의 거품 맛은 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주로 흐린 날에 나는 섬의 일주도로를 걷거나 가벼운 뜀박질로 도시생활로 찌든 심폐기능의 성능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그런 행동들이 일탈의 연장선에서 벌리는 별 의미가 없는 일회용 사치일 뿐이지만 일부러 사래 쳐 자신을 낮추는 무의미한 의식은 하지 않았다. 여유를 즐기는 것이 부자만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고 꼭이 물질을 초월한 자연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노하우도 아닐 것이다. 근사한 삶이란 결코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여행의 갓길에서 나란 존재가 하루의 품삯에도 미치지 않는 화학적인 성분에 지나지 않는, 누구나 한번쯤은 자문하게 되는 정체성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나는 그런 복잡한 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흐린 날이지만 비를 머금은 구름 사이로 언뜻 들어나는 햇볕에  노출된 오르막을 오를 때면 이마에 설 맺힌 땀이 샛강을 타듯 목선을 따라 가슴팍으로 흘러내렸다. 도시생활에서 생성된 일방적인 규율로 축척된 노폐물이 녹아내리는 후련함을 느꼈다. 뛰다 걷다하는 아스팔트바닥에서 목걸이 하나를 발견했다. 별모양의 투명한 광석이 박힌 가는 금줄 목걸이였다. 이 일주도로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은 시작할 때 바다를 끼는 우측통행을 하는 것이 관행인 듯 보였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줄 본인이 모른다면 목걸이는 주인 품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성냥 알갱이 크기의 광물이 내가 생각하는 진짜 보석이라면 나는 정말 엄청난 습득을 한 셈이다.

조깅을 멈추고 등나무 그늘아래 숨을 골랐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간간히 손에 약수통을 든 중년의 여자들이 지나갔지만 목걸이의 주인일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늘 그렇듯 손바닥 안에 감춘 목걸이의 주인은 동화 속을 헤맨다.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들 역시 나이를 먹어도 개선되지 않는 고질병이나 다름없다.

그러던 차 내가 진행하던 방향의 반대편 도로에서 타이트한 흰색 운동복을 입은 여자가 산모퉁이를 돌아 사뿐사뿐 뛰어 오고 있었다. 가름한 얼굴, 검은데다 검은 것을 덧대 유난히 반짝이는 머리카락이었다. 교차하는 발길에 아스팔트의 탄성이 가세해 파랗게 날을 베른 칼로 썩썩 빗은 것 같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들썩였다. 여자와의 간격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심장을 밟는 여자의 뜀박질 소리로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초록의 나무도 눈이 부신지 여자의 움직임 뒤에서 어룽거렸다. 좁혀지던 간격이 틈을 벌려 멀어지기는 너무 쉽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속에 구겨 넣고 휘파람을 불고 싶었다. 직감적으로 중얼거렸다. 이 여자다.......

“저기요.”

내 앞을 지나치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힐끗 돌아보는 흰 얼굴로 여자의 삐친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흩어졌다.

“혹시. 뭘 잃어버리지 않았나요?

갑자기 멈춰버린 탓에 숨이 차오르는지 여자는 허리를 굽히고 한쪽 손으로 허벅지를 짚은 뒤 다른 손으로 가슴을 눌렸다. 그 자세로 잠시 숨을 고른 여자는 피식, 웃었다.

“혹시, 주운 게 목걸인가요?”

“예. 그것도 아주 비싼.”

“그래요? 몰랐는데, 요즘엔 큐빅도 꽤 값을 쳐주는 모양이죠?”

상큼하게 생긴 만큼이나 말에도 거침이 없다. 몸을 일으킨 여자가 천천히 길을 가로질러 내게로 걸어왔다. 다가온 여자가 가웃가웃 고개를 젖혀가며 앉아있는 나를 관찰하듯 뜯어보던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아- 당신이었군요!”

“예?...... .”

“목걸이도 찾아 주었는데 이따 저녁에 술 한 잔 어때요? 그때 얘기해요, 우리. 슈게이징.......”

집게 모양으로 오므린 흰 손가락이 내 손바닥 위의 목걸이를 집어내며 ‘슈게이징’하고는 느닷없이 내 발을 살짝 밟더니 그대로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순간, 어정쩡해진 나는 되물을 새도 없이 내 앞을 휙 지나가는 여자의 얼굴과 머릿속에 입력된 내가 아는 여자들의 얼굴들을 활동사진처럼 넘겨보았지만 그 어떤 여자도 지금 눈앞을 스쳐간 여자와는 연결고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알아보는 이 여자는 내가 미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숫한 여자들 중 하나이거나 어쩌면 반대로 나에게 고백해 오지 못한 여자들 중 하나일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작위적인 설정이라도 세상을 살다보면 그럴 사유도 충분히 생길 법하지 않는가.

나는 여자의 가살궂은 스킨십에 간지러움이 채 가시지 않은 발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슈게이징? 

‘shoe gazing'은 지하에 있는 술집이었다. 청장이 꽤 높아 보였고 군데군데 장식용 대형 샹들리에가 달려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홀 분위기는 90년대식 가라오케 풍경을 연상케 했다. 나는 등받이 없는 엉덩이 크기의 둥근 의자가 돌다리처럼 듬성듬성 놓여 있는 홀 중앙의 타원형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시켰다.

질기고 나른하다 못해 폐쇄적인 음악이 천장에 매당글린 초롱꽃 장식의 실링팬 돌아가는 소리에 맞물려 오래 된 LP판처럼 서걱거렸다. 대체 이런 노래를 부르는 이가 누구일까 싶을 정도로 느슨한 연주가 맨살 위를 거미줄처럼 치렁치렁 엉켜들었다. 겨우 얼굴을 식별할 정도의 어두침침한 홀의 가장자리 곳곳에 짝을 이룬 남녀들은 서로 볼을 비비거나 이마를 맞대고 키득거렸다. 서치라이트처럼 돌아가는 사이키조명이 사방으로 시뻘건 핏덩이를 뚝뚝 떼어놓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내 몸은 허물어지는 가락의 역방향으로 종아리부터 뻣뻣해 지더니 활처럼 휜 등뼈가 장작개비처럼 곧추 서기 시작했고 그 무렵에 그녀가 막 도착했다. 나는 그녀가 바의 맞은편 의자에 앉기를 기다릴 새도 없이 마치 대들기라도 하듯 다그쳤다.   

“나를 알아요?”

그녀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찾아 재차 백 속을 더듬거릴 때였다. 잠간동안 그녀의 손이 백 속에서 머뭇거렸다. 

“글쎄요.......라이터나 좀 빌려 주실래요?”

그녀는 백 속의 담배 갑에서 버지니아 한 개비를 뽑아내며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취조라도 벌리듯 얼떨결에 내 뱉은 말에 나도 모르게 확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기껏 여자를 술집에다 앉혀 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어떻게 날 아느냐 라니. 거품이 꺼진 맥주잔을 들어 버걱버걱 들어 마셨다. 역시 맥주의 쓴맛을 음미하기에는 상자에 보관된 미지근한 병맥주가 제격이다.  

“...이런 곳이 처음이라.......”

망할 놈의 사이키조명이 눈자위를 슬쩍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말끝이 흐려졌다.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우리, 술이나 마셔요. 지금부터.”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세상 돌아가는 그렇고 그런 얘기나 술 마시는 거라면 딸릴 것이 없는 나다. 그녀의 제안이 내가 바라던 바다. 나를 아는 그녀의 정체를 밝히려면 술의 힘을 믿어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자면 맥주로는 갈증을 풀 정도지 신경계통의 회로들을 자극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기본으로 나온 맥주를 비우고 커티삭12로 주문했다.

내 주량도 주량이지만 그녀 역시 만만하게 볼 술 실력은 아니었다. 양주 두 병으로 다소 자세가 풀어지긴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 섹시하게 보였다.

우리는 주로 섬에서 겪었던 얘기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한 체 세 병째의 위스키가 바닥날 때쯤 그녀는 ‘한 병 더’하고는 기웃기웃  몸을 가눠 화장실을 갔다 와 자리에 앉으며 자기가 마신 주량에 꼬이지 않을 정도의 느린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이 카페는 내가 섬에서 찾아 낸 보물이죠. 당신에게 처음 공개하는 거예요.”

그녀가 섬에서 보물찾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녀의 말속엔 나에게 선심이라도 쓴다는 투다.

“처음엔 우연히 간판만 보고 들어 왔지만 드림 팝 계통의 음악이 나오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말 포티쉐드랑 트리키, 마이블러디발렌타인, 라디오헤드의 노래가 나오는 거 있죠.”

“.......음악을 하시는가보죠?”

공원에서 처음 봤을 때 흰색운동복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피부는 배우처럼 희고 깨끗했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거나 프리랜스를 직업으로 가진 여자일 거라는 쪽으로만 상상을 몰고 갔다. 그녀의 얼굴 윤곽과 몸매가 니콜 키드먼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니콜 키드먼이 나오는 영화는 거의 빼 놓지 않고 봐 왔었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본 영화는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녀의 출세작인 ‘출생’보다 2년 뒤에 나온 ‘인터프리터’였는데 평론가들로부터는 그다지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누가 뭐래도 나는 ‘인터프리터’에서 동시 통역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의 화면을 압도하는 금발머리와 엄청난 캐럿의 푸른 눈이 그녀가 출연한 작품 중 최고의 명장면이라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뒤로 외모와 연관 지어 사람의 직업을 판단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그게 지금 지적인 이미지가 전문직 여성의 트레이드마크로 작용하는 중이다.  

“음악은 무슨, 그냥 마니아라고 해두죠.”

담배를 낀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슬쩍 웃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고른 치열이 붉은 조명을 받아 석류 알처럼 반짝거렸다.

그녀가 나를 안다면 나도 언제 어디선가 그녀를 봤음직도 한데 도무지 떠 오른 게 아무것도 없다. 더군다나 이 정도의 미모를 못 알아본다는 게 저어기 안타깝기까지 하다.

“들어 봐요, 지금 나오는 곡이 매시버어텍의 티어드랍이란 곡인데.......”

영화 얘기라면 그런대로 이것저것 섞어가며 장단을 칠 수 있겠는데 이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알앤비나 락이 재즈와 힙합하고 어떻게 다른지 정도는 알아야 대화가 통할 상황이다.

마고자와 지구볼이 뒤섞인 샹들리에의 둔각을 통과한 스펙트럼이 마른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홀 바닥을 적셨다 말렸다하기를 거듭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일컫는 화려한 로코코풍의 쉔부룬 궁전 여주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조명의 역사도 새롭게 쓰여 졌다고 본다. 남편과 아들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앉힐 만큼 대단한 여걸답게 뛰어난 예술 감각도 함께 갖춘 그녀는 유리공예 장인들을 독려해 궁전 내부에 온통 크리스털 샹들리에로 장식케 한 장본이기도 했다. 사방천지로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모차르트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짧은 생애를 예감하지 못한 채 천진스럽게 뛰어 다녔으리라. 그리고 또 터키의 옛 수도 이스탄불에는 술탄 압둘마지드의 명에 의해 19세기 중반에 건립된 돌마바흐체 왕궁의 중앙 홀에 걸려있는 세계 최대 크기의 샹들리에는 어떠하고. 현대 크리스털 공예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스와르보스키가 보헤미안 지방에서 태어난 장인의 이름이 그대로 굳어  최고명품의 상품 브랜드가 된 사실이며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10년 뒤인 어느 봄날 저녁 경복궁 내 건천궁에 작은 불씨 하나가 매달린 것 하며.

이러 듯 조명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녀를 끌어안고 밤을 새워도 모자랄 테지만 말이다. 

“어때요?”

젠장맞을,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무슨 대답을 하라고?

“그게.......뭐랄까.......좀 자조적으로 들리네요.......음침한 것 같기도 하고.......모르겠어요.”

“정말 그렇게 들려요?”

왼 주먹으로 턱을 괴고 삐딱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미안합니다. 내가 워낙 그쪽으로는 먹통이라.......”

여자의 저런 자세는 뭔가 꼬투리를 잡았을 때나 기어이 상대를 수세로 몰아넣고 말겠다는 때의 자세다. 그러니 솔직하게 들리는 그대로 말할 수밖에. 그녀의 입에서 줄줄이 꿰어져 나오는 밴드나 곡목으로 보아 상당한 경지에 다다랐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괜히 이 마당에 고상한 척 어쭙잖은 사설을 늘어 놔 봤자 자칫 등신취급을 받을 게 뻔 한 이치다. 이럴 때는 그저 무식함의 소치라 읍소하고 먼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맘이 편할 테니까. 

“제대로 들었네요.......들은 그대로죠.”

“......?”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이 여자가 지금 사람을 갖고 놀자는 건가 뭔가. 속으로 주억거리며 두어 모금의 위스키로 입천장을 훑어 내렸다.

“막말로 따로 국밥이죠.”

“뭐가요?”

“슈게이징이나 트립합의 특징이 관객들을 의식하지 않고 저들끼리 흥얼거리는 거거든요. 락 같기도 블루스 같기도 재즈 같기도 어떨 때는 힙합 같기도, 하여간 저들 꼴리는 대로 부르니까요. 그러니까 듣는 입장도 달리 머리 터지게 해독할 필요 없이 지껄이는 대로 듣기만 하면 되죠. 그게 이해의 포인트랄까, 아무튼 그래요.”

그녀의 논리가 맞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별 거지발싸개 같은 감상법도 다 있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녀 주장대로라면 음악적인 소양이 없는 나로서는 부르거나 말거나 듣거나 말거나한 희한하고 기가 막히게 좋은 음악인 셈이다. 

그 뒤로 흐르는 시간은 끝도 없이 웅얼거리는 노래 소리와 생면부지로 만난 여자와 술에 절인 붉은 점박이 불빛이 뚝뚝 떨어지는 카페의 풍경은 느릿느릿 뭉개져 내렸다. 사물들이 쭈그러지고 쪼개지고 찢어져 가라앉거나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간간히 파생되는 대화는 이따금 저속한 농담으로 이어졌고 술을 따르다 상대의 잔을 엎지르는 실수의 빈도가 늘어나면서부터는 얘기 중에 그나마 공통분모로 산출해낸 우변의 곱을 좌변으로 장황하게 불려놓은 체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거리는 이상한 형국으로 전개되어나갔다.      

“어떻게 당신을 아냐고요? 내가 말해줄 의무라도 있는 건가요?”

매립지 해안공원 모퉁이의 난간을 잡고 바닷물 속으로 위장을 비워내면서 띄엄띄엄 게워내는 여자의 말에 대꾸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볼이 터지도록 구역질이 나왔지만 간신히 삼키는 모가지에 울컥 신물이 넘어온다. 아무 말이든 해야 하는데, 하다못해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라고 객쩍은 농을 건네더라도 유치하지 않을 만큼 술에 취해 있었지만 정작 머릿속은 부연 연기들로 뒤덮여있다.             

“이 섬에는 불문율이 있어요.......과거는, 상대가 말할 때까지, 묻지 않는다. 이거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에게 옮겨 붙은 키득거림이 들어 마신 담배연기에 섞여 무딘 입술을 비집고 비죽비죽 흘러나온다. 

“이 섬에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인간들은 스스로를 갈 때까지 간 인생 막장이라고 부르죠. 불야성 같은 과거가 있든 없든 섬에 숨어든 이상 다들 하나같이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드라구요. 그쪽이나 나나 어치구니 없는 이 섬에 발을 들여 논 순간부터 이미 환자였어요. 킥킥킥.......”

키득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술이 올라 자꾸 속이 울렁거린다.

[(松堂)남상효]

몇번더와서 보겟습니다 서정에오시어 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