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17)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② 우리 시대 미래는 밝은가 어두운가 4-1/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웹문서 https://www.huffingtonpost.kr/2016/ 미래에는 세상이 이렇게 변할 것이다
② 우리 시대 미래는 밝은가 어두운가 4-1
선생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임영조 시인의 발인 날, 장지에서 선생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지도 어느새 한 달이 흘렀습니다.
과천성당에서 임영조 시인의 약력 보고를 하면서 충남 주산중학교에서
신동엽 시인한테 사사하여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고 참례하신 분들에게 말씀드렸는데,
두 분 다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요절한 시인도 물론 많았지만 시인의 생애가 40년(신동엽, 1930~1969) 혹은
60년(임영조, 1943~2003)이라면 참으로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도 건강에 신경을 쓰시길 바랍니다.
저도 4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으니 과음과 과로는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10년 전이었지요.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그 당시 문단의 화제였습니다.
정통문학권의 시집과 소설집이 너무 팔리지 않고 상업주의를 표방한 저급한 시집과 문학적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는 장편소설이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시절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문학에 큰 위기가 왔음을 인식하고 몇몇 문학평론가가 이 용어를 쓰기 시작했고
문예지들도 앞을 다투어 ‘문학의 위기’에 대해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21세기 초입인 지금은 어떤가요?
위기론은 쑥 들어갔지만 위기 상황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스컴의 위력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
텔레비전의 책 소개 프로그램인 ‘느낌표’에 나온 책들이 도서 시장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머지 출판사들은 울상을 짓고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지요.
제가 아는 어느 출판사에서 낸 한 중견 소설가의 책이 느낌표 프로그램에서 좋은 책으로 선정되었고,
이로써 죽어 있던 그 책이 기적적으로 부활한 셈이 되었습니다.
책은 물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지요.
그렇게 되자 다른 책 제작을 올스톱, 그 책 찍어내기에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이 무슨 기이한 현상인지.
저는 이번에 창간되는 《서정과 현실》이라는 시·시조 전문 무크지에 신작을 발표하는
몇 분 시인의 시를 읽고서 우리 문학은,
특히 시는 여전히 위기라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께 엉뚱한 사설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시를 비롯해 강현덕·유종인·조은길 시인의 신작을 재독,
삼독하는 과정에서 한국 시단의 일원으로서 위기의식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고,
그것을 중점적으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분들의 시편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거나 하는 차원의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시 독자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그런 관점에서 네 시인의 진지한 작업이 독자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강하게 가져봅니다.
강현덕 시인은 1994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연말 장원을 한 바로 다음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화려하게 등단하신 분입니다.
시조시단은 다소 침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강 시인은 신예에서 중견으로 발돋움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시 세계에 이분 나름의 개성이 있고,
시조로 단련하신 분답게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쓰시는 분임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습니다.
정오가 되어갑니다 물이 흔들립니다
꽃자루 맨 끝마다 붉고 흰 수련이 피어
식물원 작은 수궁(水宮)은 화궁(花宮)이 되었습니다
물길을 걸어온 잎자루도 젖은 몸을 털고
넉넉한 잎사귀를 멍석처럼 펼쳤습니다
속 깊은 이 꽃에게는 참 좋은 배경입니다
한 닷새 정도씩은 이 궁(宮)에 머물겠지요
그러다 새 꽃잎 열리면 깊은 속이 더 깊어져
툭, 하는 소리도 없이 다시 물속으로 내려간답니다
다음 이를 위하여 제자리를 내주고
아름다운 뒤처리까지 제가 다 하고 가는
이 꽃의 환한 뒷모습이 오늘따라 참 부럽습니다
―〈식물원 편지 1〉 전문
식물원의 작은 연못에서 본 수련의 생태에 시인은 탄복하고 있습니다.
제1연은 수련의 모습이고
제2연은 수련의 속성입니다. 수
련은 새 꽃잎이 열리면 깊은 속이 더 깊어져 물속으로 내려갈 줄 알고,
다음에 피는 꽃을 위하여 자리를 내줄 줄 압니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로 시작되는 조병화 시인의 시 〈의자〉가 생각납니다.
다음에 오는 이를 위하여 자기 자리를 내줄 줄 아는 자의 도량을 시인은
식물원 연못가에 와서 깨달았나 봅니다.
게다가 시인은 꽃의 환한 뒷모습이 오늘따라 참 부럽다고 합니다.
한 닷새 머물다 잠수해버리는 수련한테서 세상살이의 법칙 하나를 배운 강현덕 시인이
〈식물원 편지 2〉에서는 추억 속 아이 하나를 떠올립니다.
옆집 구열이는 버짐 핀 하얀 얼굴에 팔과 다리도 온통 버짐이 피어 있었는데
그게 그리 부끄러운지 나만 보면 숨는 아이였습니다.
자꾸만 뒤돌아서려는 구열이, 쪽지를 불쑥 건네고 달아난
푸른 셔츠의 구열이를 오늘 식물원에 와서 물푸레나무를 보니까 생각난다는 내용입니다.
글쎄요, 추억담 하나를 펼쳐놓았을 뿐, 별다른 울림이 없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시적 소재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적절히 변용시키는 방법론이 없는 시인지라 적이 실망했습니다.
설명하는 시보다는 세밀히 묘사하는 시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시보다는 은유하고 상징화하는 데서 시의 힘이 나오는 것으로 아는데
이 시는 흐름이 그거 밋밋하여 제가 그렇게 느낀 모양입니다.
〈시인〉이란 작품은 비유를 대상으로 마련했지만 재치를 보여주는 데 그친 시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이 별인 줄 알았던 ‘웃기는’ 시절이 있었다는 첫 행도 그렇고,
“톡, 쏘고 가는 벌”이라는 시적 전이, 그래서 “세상이 제 것인가 멋대로 쑤셔대고”,
“내 가슴 네 가슴 없이 저리 부풀게 하다니” 하는 감탄에 이르는 과정에서
좀 더 깊은 사유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시인이란 “평생을 벌만 서다 갈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마지막 행의 단정에 공감은 갑니다만
시인의 역할이나 존재 의의,
그와 아울러 우리 사회가 시인을 대접하는 양상 등이 그려지지 않아 아쉽습니다.
새벽의 고요가 오히려 소란스러웠던 것
애써서 겨우 눌러왔던 내 그리움도 소음이었던 것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소리 들었던 것
내 안에 우글대는 억만 년 된 공룡들이
물옥잠 하얀 그늘 찾아 하루 내내 걷는 발소리
언제든 다시 돌아와, 바람이 말을 전한다
그래 어서 돌아와, 왕버들이 출렁댄다
어느새 하늘이 열리고 먼 길 하나 달리는 것, 보인다
―〈牛浦〉 전문
〈牛浦〉는 우포늪의 새벽과 아침을 그린 시입니다.
이 시에는 독자의 한 사람인 저와 소통되지 않는 점이 각 연마다 있습니다.
새벽이 고요가 왜 오히려 소란스러웠는지,
애써서 겨우 눌러왔던 내 그리움이 왜 소음이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2연에 가서는 “내 안에 우글대는 억만 년 된 공룡”들이 “물옥잠 하얀 그늘 찾아
하루 내내 걷는 발소리”를 낸다고 했습니다.
우포늪의 새소리나 바람소리를 이렇게 묘사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막연하고,
또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요? 이윽고 바람이 “언제든 다시 돌아와” 하고 말을 건네고,
왕버들이 “그래 어서 돌아와” 하며 출렁댑니다.
“어느새 하늘이 열리고 먼 길 하나 달리는 것, 보인다”는 시의 마지막 행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이 행이 앞의 행, 연과 잘 어울리지는 않는 듯합니다.
왜 이런 인식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앞에서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연 친화적인 시라고 보기도 어렵고, 생태환경시의 일종으로 보기도 어려운 시가 바로 〈牛浦〉입니다.
소재의 참신함, 주제의 미더움, 표현의 낯설음, 이미지의 형상화 중 무엇이라도
독자에게 안겨주어야 시가 될 터인데…….
각각의 연이 진행되다가 말고 되다가 말고,
제3연 역시 모호함만 안겨주고 끝납니다. 먼 길 하나 달리는 것, 보인다? 먼 길은 무엇을 뜻하며,
어디서 어디로 달리며, 달린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반면 〈비 온다야〉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사투리가 시 속에 아주 맛깔스럽게 버무려져 있습니다.
비 온다야 어둡다야
소리도 안 낸다야
황매화 노란 덤불이
왈칵, 쏟아졌다야
산수유 놀란 가지도
같이 휘청, 거린다야
저 봐라 길이 납작하다야
아무렇게나 엎드렸다야
나처럼 누 보고 싶어
편지 쓰는 거 아이가?
허리엔 저 눈물샘 같은
물웅덩이도 달았다야
우짜노, 꽃잎 널찌네
니도 아직 못 봤는데……
그 위로 젖은 까치
종, 종, 종, 뛰온다야
니 온다 말할라는 거 아이가?
창문 열어볼란다
―〈비 온다야〉 전문
‘누’는 ‘누구’가 변한 말이겠지만 경상도에서는 ‘누야―’ 하면 누나를 부르는 말입니다.
아무튼 비가 오는데 시 속의 너는 누군가를 몹시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왜 기다리고 있는지는 시에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끝 연은 이 두 가지 정보를 다시 한 번 부연 설명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고, 꽃이 지고, 젖은 까치가 메신저인 양 종, 종, 종, 뛰어옵니다.
그래서 화자는 창문을 열고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시라는 것이 반드시 무슨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미지 묘사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시인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없나 살펴보게 되는데,
맛깔스런 사투리를 구사했다는 것 외에는 별달리 와 닿는 것이 없는 시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소감 토로 중에는 강현덕 시인의 최근작에 대해 좋은 말을 해준 것이 없는 듯합니다.
신작시 해설에서는 통상 덕담을 해주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저는 타박을 하고 말았습니다.
시를 쓰신 분께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만 좀 더 나은 시를 위한 고언이라 이해해주면 고맙겠습니다.
< ‘이승하 교수의 시쓰기 수업, 시(詩) 어떻게 쓸 것인가?(이승하, 도서출판 kim, 2017)’에서 옮겨 적음. (2022. 4.2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17)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② 우리 시대 미래는 밝은가 어두운가 4-1/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