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43) 아웃사이더, 바깥에 길이 있다 - ③ 고독의 힘/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
아웃사이더, 바깥에 길이 있다
Daum카페 http://cafe.daum.net/arisoosarang/ 청산에 살리라(세상 번뇌 시름 잊고~)
③ 고독의 힘
고등학교 때 배운 또 하나의 청산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음악시간입니다.
합창대회에서도 많이 불렸죠. 바로 김연준 작사 작곡의 우리 가곡 〈청산에 살리라〉입니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이 봄도 산허리엔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 살리라
길고 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변하여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짧지만 장엄한 이 곡은 예스럽다기보다는 어른스럽다는 느낌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노랫말이나 선율 모두, 절제된 의연함과 온화함이 어우러져 진짜 어른 같은 품격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저만 그랬던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철없는 남자 고등학생들이었지만, 이 곡의 합창이 끝나면 적막공산처럼 찾아오는 여윤,
일련의 숙연함이나 비장함 같은 기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혹해하곤 했습니다.
아무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낯선 감정과 분위기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좀 기분 좋게 어색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성숙의 조짐이란 걸 그때 알기나 했을까요.
그 까까머리 학생이 어른이 되고 교수가 되어 훗날 그 작곡가가 설립한 대학에 몸을 담게 될 줄
그때 상상이나 했을까요.
백남(白南) 김연준(1914~2008) 선생은 한양학원을 설립한 교육자로 알려져 있지만 작곡가로도 유명한 분이지요. 그의 대표곡인 저 〈청산에 살리라〉는 그가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낼 때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그는 대한일보라는 언론사를 경영하는 사주를 겸하고 있었는데,
신문사의 수재의연금 횡령사건으로 1973년 5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총장직에서도 물러나고
신문도 자진 폐간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이듬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되지만,
하루아침에 파렴치범 취급을 받으며 옥중에 갇힌 그는 아마도 나락에 떨어지는 고통을 겪었을 겁니다.
훗날 이 사건의 배후에는 박정희 정부 시절 최대의 쿠데타 모의 혐의라 불리는,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시대의 가학 앞에서 개인은 속수무책이었을 겁니다.
답답하고 억울하지만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한 개인, 부귀공명도,
승승장구하던 성공가도도 다 허무하기만 했을 겁니다.
그때 그 캄캄한 옥중에서 그는 청산을 만납니다.
세상 번뇌 시름 다 잊고 사는 저 푸른 산, 무상하기만 한 인생,
온갖 세상 다 변해도 늘 의구(依舊)할 영원의 안식처, 청산 말입니다. 그러자 악상이 떠오릅니다.
노랫말이 풀려나오고 선율이 달라붙습니다.
손톱으로, 펜으로 악보를 그려나갑니다.
구치소 안인데 어찌나 평화로운지 시가(詩歌)에는 험하거나 한스러운 구석 어디 하나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작곡을 수도 없이 반복해 불러보았을 겁니다.
눈물이 나다가도 노래를 하면 견딜 만했고,
노래를 하다가도 눈물이 터져 나와 몇 번을 멈추곤 했을 것입니다.
그 덕에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마음은 이미 청산에서 살고 있었을 테니까요.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후, 그렇다고 ‘자연인’이 될 수 없던 그가 찾아간 청산은 음악이었습니다.
〈청산별곡〉과 달리 그는 술 대신 음악을 택했고 퇴폐 대신 신앙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후, 성가를 비롯해 가곡 작품을 홍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여생토록 만든 수천 곡 중에서도 대표곡은 단연 〈청산에 살리라〉였습니다.
그만큼 절실한 노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원치 않던 운명의 길에서 찾은 청산이지만,
그가 찾은 음악이라는 청산은 현실에서 떠밀려 억지로 찾아간 도피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진실한 삶의 처소는 어디인지,
진정한 삶의 태도는 어찌해야 할지 값진 고난이 가르쳐준 푸르디푸른 이상의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7.2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43) 아웃사이더, 바깥에 길이 있다 - ③ 고독의 힘/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