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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기후의 조성과 감동의 파상波狀
-성춘복 시인의 감성적 잠언箴言과 주의 집중
엄창섭(관동대 교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1. 삶의 구조構造와 생명외경
『예언자』의 저자 칼 지브란은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修辭學은 눈송이다. 불길과 눈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바 있다. 근간에 삶의 황혼기인 고희古稀의 세월을 분망하게 부딪끼며 뼈저리게 절감한 그 자신의 서정과 일상의 미감을 정신기후로 조성한 감동의 파상은 아득한 한 장의 정신풍경으로 확장된다. 모름지기 ‘푸른 시와 시인’ 성춘복成春福의 동공瞳孔은, 생명의 본체인 우주를 향해 항시 열려 있다. 이 점에 있어 오랜 날 그 자신이 추구한 시적내용물과 기본 골격을 ’삶의 구조와 생명외경’이라는 관점에 접목시켜 간행한 제17시집 『봉선화 꽃물』(도서출판 마을, 2009)은, 따뜻한 감성과 자기 특유의 음성, 색깔, 느낌으로 채색되어 일순의 격정을 평정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격랑의 시간대를 만보漫步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신앙처럼 떠받들며 세세한 바람의 선율旋律을 영혼의 울림으로 형상화 하여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다이돌핀(Dynorphin)을 쏟아내는 그의 시적 행위는 경이로움에 빗대어진다.
앞서 몇몇 시인들이 “진실로 시를 사랑하는 시인(황금찬)”, “고성능 새마을 급행열차 같은 사나이(조병화)”, “때 묻지 않은 문인의 투명한 면모(이성주)” 등으로 지적되어 우리에게 친숙한 충북 상주 출신으로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성춘복 시인의 존재와 무게를 실증한 바 있다. 『현대문학』(1959년)에 <어항 속에서> 외 시편으로 천료하고 1966년에 시집 『공원 파고다』, 『오지행』을 출간한 이후, 강한 허무감 속에서도 반어적 수사(rhetoric)를 즐겨 역설적 반증의 시적 기교로 변주시킨 그가 독자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자因子는 언어에 대한 식별력과 우리의 시적 토양에 자신의 사유(홀로 있기)를 경비하게 표출시키지 않는 신중하되 정치精緻하고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책머리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쓰는 일이 창작의 직분임을 알고 있기에 이전과 같은 달음질에 채찍을 들었을 뿐이다.”라는 자기성찰을 통한 겸허함으로, 젊은 시인 오웬의 지적처럼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라.”는 내면인식의 깨어 있음과 마침표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충직함은 이 땅의 시인들에게 교시적 의미를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편, 언어의 집으로 응축되는 그의 시편 “차디찬 처마 끝에서/ 창틀을 밝히는 너는/ 내 가슴 안의 풍경이거니(너를 닮은 나는)”에서의 메타 퍼는 숨 막힘의 현상에서 단절, 거리두기가 아닌 경계 허물기이기에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는 정신작업에 해당된다. 이 같은 다양성을 고려할 때 애써 그의 시편을 생태 시학으로 한정지어 분할·통합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로 한계 지을 수는 없다. 보편적으로 삶을 자적自適하며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일상의 구조로 의식하며 영혼의 잔을 비우는 행위에 열중하기에 그의 시편은 “누군가의 내부에 자신과 비슷한 상태의 존재를 세우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까닭에 하나의 축軸으로 윤무 하되, 언어기호의 도식과 유희적 가식에 지나침이 없기에 독자의 관심을 끄는 일에는 거부감이 없다. 이처럼 내면인식의 형상화인 시 쓰기를 즐기는 시격詩格의 소유자 성춘복 시인은 보다 차분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부단히 일깨우며 진지한 삶의 자세마저 겨냥하고 있다.
‘보다 천천히’ 라는 미끄러짐의 미학에 익숙한 그가 동일한 시간대에 제 16집(시조) 『내 안 뜨거워』와 함께 묶어낸 『봉선화 꽃물』은 분명코 다망한 일상에서의 감성적 삶의 잠언箴言으로 [Ⅰ 풍경화, Ⅱ 마음의 뒤 안, Ⅲ 안타까움 또는 두려움, Ⅳ 참 몹쓸 일들]에 수용된 47편의 함축적인 메타 퍼로 차별화된 다의적인 교시를 내포하고 있다. 그 자신의 시편에 대하여 충직한 독자인 우리가 감지할 수는 있는 것은 일관성 있게 내면적 성찰을 육성으로 나직하고 절절하게 풀어내고 있는 점이다. 다시금 숨을 고르고 손금을 보듯 찬찬히 정신적 등가물인 성춘복 시인의 시편을 심도 있게 검색하노라면 공간의 개념은 ‘화자(persona)의 응시→아득한 정신 풍경→ 자잘한 심상→ 봉선화 꽃물’로 변형되어 감미로운 서정이 붉고 투명한 서정의 그리움으로 형사形似된다.
2. 시적 상상력과 시종자의 극대화
일단, 감정의 절제에 의한 영혼의 잠식으로 해석되는 성춘복 시인의 시정신은 푸른 생명의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며, 그만이 겪는 황홀함이기에 미적 주권의 순수서정으로 빛난다. 그 자신이 “풀들처럼 아무렇게/ 쭉쭉 뻗기나 해서/ 바람 앞에 너부죽이/ 한껏 고함칠 수 있었으면.(풀들처럼-풍경화·1)”로 형상화하였듯이 우리가 예감할 수 있는 시인의 실체는, 지극히 온유한 심성과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순수서정의 꽃 향을 발산하는 그의 지난至難한 시적 행보는 ‘독야청(獨也靑) 푸르른/ 팔을 치켜 올려/ 아우성인 평생의 내 잘못을/ 달게 받는 늘 푸른 나무들이여(나무들을 보아라)’라는 내면인식의 통로를 걸쳐 영혼의 잠식蠶食에 접목된다. 그토록 자신의 관조적 삶을 통해 언어예술로 직조해낸 『봉선화 꽃물』에 수록된 그만의 시편들은 다양한 체험을 통해 응축된 낯익은 언어들이기에 애매모호함이나 현학성이 드러나지 않아 친밀감이 묻어난다.
성춘복 시인의 내면의식에 점철된 순수서정과 정신풍경에는 아니마(anima)적인 평온함이 자리해 있어 풀꽃 향을 발산하는 체취에는 ‘안타까움 또는 두려움’마저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외경畏敬이 있다. 그의 시작詩作 과정에서 삶의 현상으로부터의 일탈과 인식의 전이轉移를 시라는 매개를 통해 정신적 자유를 구가하는 비장한 결의 또한 파악할 수 있다. 그 까닭에 실리적 이해관계로 붓의 날을 세우는 비열하고 천박한 시인에 견주어 그의 소박한 품격은 빠삭한 속셈에 항상 낯설어 모가 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결구도의 양상과는 거리가 먼 그만의 정직한 심성은, 시편에 봉선화 꽃물처럼 묻어나 독자의 정신기후를 따뜻하게 조성시켜주는 저력을 지니고 있다.
다 자란 나무들/ 산비알로 가 숨고/ 풀꽃도 어둠으로 자지러들 무렵/ 몇 개의 점으 로 새들은 날다가/ 노을 속 흩어져 사라지고 말면/ 바람이듯 구름은 끝없이/ 서쪽으로 끌려가 피를 토하고/ 정말 어쩔 수 없는지/ 나도 묵은 갈대잎 속의 저물녘이 되고 만 다.// -<해질 무렵-풍경화·5> 전문
“풀꽃도 어둠으로 자지러들 무렵/ 몇 개의 점으로 새들은 날다가/ 노을 속 흩어져 사라지고 말면/...생략.../나도 묵은 갈대잎 속의 저물녘이 되고 만다.” 이처럼 성춘복 시인의 시적 형상은, 삶의 공간에서 접하는 대상물과 자신의 관계성을 응시하는 최선最善의 드러남인 생명외경의 엄숙성으로 뛰어난 시적 능력이 형상화되고 있다. 여기서 실체의 껍질을 벗기고 일순간 깊은 사상에 몰입하는 정신력이 직관적이라면, 사물의 전체를 거시적 관점에서 주시하는 정신력의 한 방법이 관조의 세계로 해석되어 질 때 그의 시적 상관성은 ‘시적 상상력에 의한 시종자의 극대화’로 변화·발전한다. “손으로 눈 가리듯/ 마음조차 환희/ 이 꽃을 위하여/ 나도 얼마는 초롱한 눈을 하고/ 의젓이 서 있어 보자꾸나.(초롱꽃 보며)” 시의 현상과 존재론적 해석의 문제로 고뇌하며, 때로는 한 송이 꽃을 응시하다가도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성춘복 시인의 체질과 느낌, 지난한 몸부림이 시의 씨앗(種子)을 발아시키는 행위를 통하여 단숨에 한편의 시를 빚어내는 열정은 눈물겹다. 시적 상황의 존재론적 해석을 위해 자신의 기억력을 재생시키며 따뜻한 영혼을 지닌 엄숙한 사제司祭로서의 소임을 실천궁행하는 그만의 시의식과 작품에 대한 의미 있는 작업은, 분할과 통합이라는 각고의 통로를 걸친 결과물이기에 더욱 그 가치가 새롭게 평가된다.
바다로 누웠던 산들이/ 몸을 일으킨다/ 어둠 속의 기억을 떨쳐내듯/ 그림자에 지나 지 않던 길// 꽃들도 이슬을 털며/ 세상의 문밖으로 달아나// -<세월에게>에서
보편적으로 어두운 삶의 질곡 속에서 가시적인 모든 물상은 끝내 소멸될 대상이지만, 그는 시적 수사로 활유법과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 주의집중과 치밀한 관찰, 그리고 정직한 시인의 당당함으로 맞서고 있다. 또한 즉물적 물상의 심부를 해체시켜주는 기법과 도식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들어냄보다는 감춤’의 담론을 표출하여 사라지는 것의 소중함마저 실증하여 준다. “역사가 그러하듯/ 하루에도 두어 차례/ 아픈 자국 흘려들으며/ 새 삶의 꺾인 골목을 나는 오간다.(수강궁(壽康宮) 옛길 돌아)”에서 확인되듯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 심성이 지극히 선한 성춘복 시인의 시어詩語의 상징성은 존재의 의미로 자리매김 되어 깨달음과 영혼의 정화精華로 결속된다. 때문에 생명외경이 내제된 감성의 시학으로 해석되는 그만의 소박하고 진지한 시적 행보는 혼성모방(pastiche)이나 화려한 희언戱言(pun)을 생리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자신만의 육성으로 정체성 있는 독자적 시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다.
어찌되었건 충직한 독자로서의 우리는 그만의 시적 대상이 주의집중과 몰입에서 비롯된 지속적인 관심거리이기에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다. “가슴 속의 불씨 지펴/ 가당찮은 세월 거듭 보태고/ 뭉뚱그려 무두질로 마음들 펴서/ 한밤에도 닦달을 해야 하는/ 어기찬 문둥이들아(친구들에게)” 바로 이 같은 인자因子는 천편일률적으로 그의 시편을 관통하는 유년에 대한 시적 인식은 생명에 대한 소중한 일깨움이며 삶의 즐거움이기에 비정한 후기산업사회의 공간 속에서도 본질적으로 대결·갈등 구조를 못내 고집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투명의 하얀 꽃내에 취하여/ 산목련과 찔레무덤도 뭉뚱그려/ 녹색의 바람 일으키 는 곳에서/ 나도 일어나 나무 소리를 해댄다//
이 밤 다하고 날 들면 그 산 아래/ 속세로 나는 떠나지만/ 남겨 놓은 여름꽃 두어 송이/ 내 정신의 황량을 웃어대고 있을 테지.// -<유명산 아래로>에서
예시처럼 시인의 추상작업(object)을 고통과 저항을 냉소적 도전의 표징으로 형상화 하지 아니하고 고뇌 속에서도 시적 상상력을 획일적이거나 애매모호하게 처리하지 아니하고 있다. 여기서 성춘복 시인은 언어의 정치성精緻性과 분별력을 통하여, 유형의 인상에 민감한 시인이지만 자연의 이법을 결코 거스르지 않음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점은 정신적으로 창조된 것은 물질보다 한결 생명적이기에, 정신세계의 의미망을 확장할 때의 층위는, ‘감동의 파상과 영혼의 정화, 즉 시인의 시적 서정과 내면 풍경’이라는 새로운 관심의 연계성과 결부되어 빛나게 된다. 자신의 기억 흔적을 순수서정의 시학으로 해석되는 성춘복 시인이 서정시를 쓰기 고통스러운 시간대에서 <눈 닦고 보면>의 시편처럼 “백두나 설악이나 또는 한라/ 몇 구루 나무에 묻고 답하는/ 착한 백성의 심성으로 우리/ 오늘을 흔쾌히 밟아가도록 하자.” 이 같은 서정성으로 상실한 감동의 진동을 다시금 회복시켜주는 것은 사유思惟라는 내적 충만감에서 발현된 감동의 파상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을 버린 친구들아/ 이 흉흉한 계절의 허망 앞에/ 그 마음을 어디에 버리려 하는가.(묵은해를 접으며)”의 서정적 표현처럼 일단, 그의 고백은 시 창작에 몰두하는 시간이 때로는 “우리는 더욱 밝아 좋아라/ 갓밝이의 빛나는 눈동자로/ 새벽 동녘을 불게 태워/ 그 길 새롭도록 비춰주느니.(밝아서 참 좋은)”처럼 때로는 한스러움에 젖어도 어둠이 말끔 씻긴 풍경화로 빛나기에 그의 하늘은 항시 투명하다 못해 푸르게 채색되는 것이다. “한 순간 분노가 치솟아 오를 때, 좋은 기억이나 시를 떠올리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는 노만 핀센트 빌의 지론처럼, 성춘복 시인은 정신적인 아픔이나 병폐적인 내면의 갈등마저 해소하고, 영혼을 정화시켜주는 시적치유詩的治療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한편, “봄 지나 한낮을 넘어/ 오동잎 진 후의 달 밝기로/ 새벽하늘 인 찬 이슬처럼/ 영롱한 빛깔이었어라(학의 춤 같은-김선영 선생의 八耋)”에서 확인되듯 성춘복 시인의 시작 행위는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우리네 사회현상에서 겪는 존재의 가벼움을 반복적으로 체험해 온 그 불안, 초조, 암울함마저 ‘영롱한 빛깔’로 변형시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이처럼 그 자신이 소망하는 밝은 미래사회를 구축하는 힘은, 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소중한 삶에 있어 집이란, 보람의 처소이기에 정신적 종사자가 온 몸으로 진동하는 푸른 식물성 언어를 창조하는 행위는 존재의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에 해당된다.
시창작의 과정에 있어 소재의 선택이나 표현 기법, 그리고 새로운 실험적 시도와 개성적 특이성의 서술은 미적 진실성을 심화시켜 준다. 발상적 동기에 있어 예술을 무한無限으로까지 추구하는 변증법의 모색은 의미 있는 행위이다. 존재의 뿌리인 고향은, 주제의 참신성을 위해 도전하는 시인에게 끊임없이 일깨워짐으로써 되돌아가 머물러야 할 공간이다. 비록 “세상이 열리는 저문 산 저 켠에서/ 재넘이(山風)가 몰아쳐/ 가을 잎을 더욱 붉게 태우는데/ 허리 젖혀 동기들 짓찧으며/ 가슴마다 창틀을 단다(버즘나무 그 큰 발자취)”에서처럼 흘려버린 시간의 아쉬움에 눈물짓기도 하지만, 그는 귀향(Heimkunft)하는 자로서의 소임을 스키마(Schema)로 기억 흔적에 담고 있다. 모름지기 “창조자의 이름에 합당한 것, 신과 시인 말고는 없다.”라는 셀리(P. B. Shelley)의 시론을 논의하지 아니 하더라도, 창조활동을 다양하게 펼쳐나가야 할 시인들은 영감의 비의秘義를 해명하는 사제司祭로서 비공인의 입법자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까닭에 성춘복 시인의 시편에-회색의 그림자, 곧 세 개의 어둠의 그림자인 ‘공허함, 죄책감, 두려움(공포)’ 속에서의 생존 대상이 인간이지만, 칙칙한 그늘이 자리하지 아니 한 점은, 독자들에게 ‘꿈의 날개를 달아 주려는’ 그만의 관심사며 애정의 결과이다.
삶의 일상에서 눈앞에 가려진 물안개에 보다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가시적可視的 현상 뒤의 불가시적 본체의 드러남이 암시되고 있는 <낙엽 구르는 소리-풍경화·4>, <잠이 없는 날 밤에는>, <그런 나무가 되어> 등은 문명에 찌든 우리의 영혼에 푸른 생명의 바람을 안겨 준다. “두 팔 한껏 치켜들고/ 바람 얻어 새 세상 얻는/ 우리 오늘 나무가 되자” 어찌하였던 그의 정신적 아픔은 지구의 회전 반응에 의한 현상과 접하면서도 시적형상화로 불안의식 속에서도 넉넉함과 여유로움의 눈부신 약속을 위해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견고한 고독을 높이 평가하는데 인색하거나 더 이상 주저할 수는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시편에서 서정적 미감의 뛰어남으로 카타르시스는 물론 단절, 절망, 패배를 희망, 승화로 전이시키는 긍정적 사고력이 그의 “눈물 받아 손 씻게 하고/ 슬픔마저 거두어야 하는/ 내 어여쁨이사 오래된 것(내 어여쁨이사-풍경화·3)”처럼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만유萬有는 우주 생성의 연맥緣脈 속에 기인한다. 하찮은 물상에도 생명을 주어 삶의 외경과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그의 작위作爲는 자연의 비의를 통한 자기 확인의 도구로서 심상의 형상화 작업이다. 비교적 자연 관조를 거쳐 생성된 그의 시는 정관적인 면을 구축하고 있어 그의 시는 내면적 성찰을 통한 체험과 일맥상통하기에,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과 행복한 집짓기로 해명되어지는 그의 시정신은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며, 황홀함이다.
3. 의미론적 순환循環과 주의집중
자신을 해체하고 재조합 하는 창조적 작업은 시적 상상력과 결부된다. 근시안적으로 성춘복 시인의 시편만을 놓고 언어질서에 의해 통일된 체계의 유지와 전통의 재확인이라는 차원에서 우주의 신비를 캐어내는 현상이 가늠되기에 결코 응축 미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불확실한 시대에 몸담고 있는 우리에게 참담함을 충격적으로 안겨주는 항목들을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그 중에서 기억 흔적에 남겨두어야 할 것은 질서가 무너짐과 으깨어진 도덕성의 불감증일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는 누구보다 삶의 처소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적 소재를 비중 있는 실체로 다루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흘려보낸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문自問하고 있다.
특히 자연의 이법理法을 거스르지 않은 담담한 마음 씀과 건강한 서정성을 접할 수 있지만, 그의 밝고 투명한 시어가 영혼을 구가하는 내재된 시적 비법으로 변형되어 ‘분열된 자아의 회복’이라는 시격으로 결정潔淨된다. 본질적으로 견고한 고정 체를 언어로 빚어내는 시 쓰기의 작업은 행복한 집짓기에 비견되기에, 여기서 논의의 초점은 아니나 창조와 모방은 연계성을 지닌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심리에는 자연을 거부하거나 자연과 대립하는 창조의 정신을 지닌 동시에 자연을 모방하고 순응하는 모방정신의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 같은 대립 구조는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상호보완적인 공존의 양상으로 자리한다. 시 쓰기의 작위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후기산업사회에 몸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생명적이고 의미 있는 창조 작업이다. 항시 책의 그늘은 넓고 깊기에 ‘허공 속의 꽃은 피고 짐이 없고, 산언덕에 오르면 뗏목이 필요 없기에 뱃사공에게 길을 묻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반복하지 말고 책(箴言)을 통해 지적인 해답을 구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호대비 시키는 그만의 시적 발상은 순백의 언어로 정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의 경이로움에 견주어진다. 그의 시적 음계는 낮은음자리표로 미끄러져 가는 연계 음이 자리해 있어, ‘존재의 사라짐’을 서정적 미감으로 수용한 이상성(Ideality)과 시의미의 추구 또한 이채로워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거부감이 없다. 푸른 식물성 언어를 통한 성춘복 시인의 시 의식이 평화에의 합일과 그 궤를 함께 하기에 시적 지형성(Topography)은 모순어법적이어거나 생경하지 않고 낯익어, 추상적이면서도 물상적物像的인 시어의 편린들이 그의 시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불안, 초조, 조급함에 익숙한 이 땅의 시인들에 비해 그를 황간黃侃의 유인遊刃에 견주어 예술의 고매한 품격을 향유한 천부적 시인으로 감히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창조적인 생명력이 넘쳐나는 미적 주권의 확립에 연유한 까닭이다.
정신적으로 빈궁한 삶의 현상에서 더 없이 좋은 시인과의 만남은 결코 우연일 수 없는 행복한 필연적 만남이다. 모쪼록 자신의 투명한 눈물마저 선명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그에게, 피폐된 독자의 영혼에 자연적인 대상에서 발아되는 식물성 언어를 개성적으로 통신하며 우리 곁의 친근한 삶의 동력 자가 되어 줄 것과 그만의 시편을 통해 명증하는 즉물적인 편린은, 사물을 관찰하는 예리한 눈(心眼)이 물상과 관념이라는 상오의 연계성을 중시한 결과물로 우리의 다양한 삶에 그만의 시혼이 겨냥한 새로운 발견과 접근, 그리고 치밀한 느낌과 색깔로 사물을 예리하게 투시하되 정치精緻하게 표현하는 시적 기법을 조심스럽게 글의 말미에서 주문한다.
결론적으로 [책 끝에]서 그 자신이 “문사로서의 내 삶(50년의 시 작업)도 그렇기를 바라나 아직은 나도 더 열심히 써야하고 시처럼 건강을 유지해 나를 살아내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천명하였듯, 경계 허물기로 소외된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 본질에 충실하되 시적 상상력을 확장시켜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이轉移시키는 비공인의 입법자로서의 역할은 물론, 우리가 성춘복 시인에게 거는 소박한 기대라면 푸른 생명의 언어로 상처받은 이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견고한 고독이 자리한 처소에서 일관된 선함과 지혜로움으로 예지의 붓끝 세우는 비전을 제시하되, 끊임없이 영혼의 닻줄을 움켜잡는 진정한 예언자로서의 소임을 엄숙하게 수행하여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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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꽃과 눈송이 이렇게 휼륭한 글을 시인들이나 회원들이 다 읽어 보시면 좋겟습니다 이 교수님은 모시기 힘 든 분이심니다 다른 카페 활동을 하시지 않으시는 바쁘시고 애국자이신 국어 사랑의 교수님이십니다
소향 강은혜 시인님. 부끄럽습니다. 항시 언어의 분별력과 배려라는 소중한 의식을 가지고, 누군가 거리감 없이 등을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심정으로 글 쓰는 작업에 그렇게 주의집중을 할 뿐입니다.
정랑선생님 처럼 휼륭하신 분의 글을 볼수만 잇다는 것이 기쁨이지요 감 사드림니다
정랑선셍님 눈녹듯이 살살녹는 글 매거러운 언어들 너무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을 쓰는 작업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친 언어유희(말장난)는 경계해야 할 항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작가가 피로 쓴 책을 읽겠다.'라는 지론을 우리는 저마다 기억 흔적에 담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자료 모셔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