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시와 함께 놀다
한양하
처음 우리 모임 이름은 콩세알이었다. 그러다가 책을 읽는 여우라는 모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어린이책을 읽고 공부하는 동네 아줌마들. 독서 모임을 한 지 십 년이 넘었다. 모임을 시작 할 때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들이 이제 고3이 되어 대학 갈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참 빠르다. 그래도 자라나는 둘째와 막내, 신입회원들의 아이들은 초딩들이 있어 나름 모임이 시들지는 않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엄마랑 아이들이랑 같이 모임을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공부한 거 우리 아이들과 같이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림책도 읽어주고, 마을 산책도 하고, 어린이시도 읽고, 물놀이도 하고, 아이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게 하는 시간도 가져보자고 계획을 했다.
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모임 회원 가운데 두 집이 시골에 집을 지어 들어가 전원주택에 살고 있어 모임 장소는 그 두 집에서 하기로 했다. 남순네와 해선네는 모임을 위해 기꺼이 자기 집을 내 주었고, 8월 15일 나는 마트에서 장을 봐서 남순이가 찾기 힘들테니 네비에 주소를 입력하고 오라고 알려준 대로 해서 찾아갔다.
마티즈 뒤에, 옆에 그득그득 실린 과자봉지, 술이 담긴 아이스박스, 수박이 덜컹대도록 산길을 달렸고, 결국 초등 6학년 딸은 산길에서 후진하는 엄마를 믿을 수 없다는 듯, 괜히 따라나섰다는 불안과 후회의 눈빛을 보냈다. 산길을 헤매기를 삼십여 분 만에 다행히 집을 찾았다. 원래 그렇듯이 그 집은 도로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고, 나는 굳이 애돌아 산길로 왔을 뿐이었다.
원래 계획은 계획일 뿐, 그 집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마당에 만들어진 커다란 풀에 풍덩풍덩 놀기 시작했고, 마을 산책하고 지도를 그린다든지, 그림책을 읽고 감상한다든지 하는 건 엄마들의 불가능한 욕심이라는 걸 금세 알게 해 주었다.
아이들이 만들어준 카레를 먹어보겠다고 벼르고 기다릴 수는 더더욱 없었다. 우리 딸 다은이, 남순네 수현이, 규현이, 민표, 해선네 송이, 준호, 미라네 유림이, 창림이, 미란네 현서, 현정이네 찬혁이, 수현이 친구까지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한들 말을 들어줄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신나게 놀고 난 아이들은 슬슬 힘도 빠지고, 배고 고픈지 물에서 나왔고 어른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장보고, 집 찾느라 힘 뺀 나는 맥주부터 땄고, 프로그램 없는 자유시간은 밥 먹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엄마들이 만든 카레밥을 김치와 한 그릇씩 뚝딱 먹더니 모두 여유가 생겼다.
이때다 싶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민표 아빠와 준호 아빠에게 연필을 깎아달라고 하자 아이들이 뭔가 싶어 호기심을 가졌다. 그리고 준비해 간 프린트물을 돌렸다.
이 자리는 엄마와 아빠, 아이들이 함께 어린이시를 읽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라고 하니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났다. 우리 딸, “난 시 쓰라고 하면 종이를 찢을 거야”하고 시크한 6학년 여학생이 되어 돌아앉았고, 명랑 쾌활한 민표는 선물로 나눠줄 공책에 흑심을 품고 “이모, 이거 뭐예요”하고, 읽기 빠른 아이들은 벌써 프린트물을 보고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나온 어린이 시집 『벌서다가』(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선생님들이 가려 뽑은 아이들 시/휴먼 어린이/2013)에서 15편을 뽑아 돌아가면서 읽었다. 아빠도 읽고, 엄마도 읽고, 아이들도 한 편씩 읽었다. 그리고 돌아가며 자기가 읽고 좋았다는 시를 뽑으라고 했다. 그 시를 읽고 왜 좋은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시는 ‘우리 집 영웅’이었다.
우리 집 영웅
5학년 김민기
어제 사기 전화가 왔다.
고객님의 카드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계좌번호를 알려 주고
100만원을 입금 시키라고 했다.
하지만 사기 전화인 걸 알고
바로 끊었다.
내가 우리 집 재산을 지켰다.
-『벌서다가』중 18쪽.
이 시를 읽자마자 아이들은 개그콘서트 ‘황해’라는 코너에 나오는 개그맨 흉내를 내면서 “고객님, 마이 당황하셨죠”를 연발했다. 남자애들이 이 시를 대부분 좋아했다. 준호는 “이모, 저도 이런 전화 받았는데 그렇게 사기치면 안 된다고 해 줬어요.”했다. 자기가 전화한 사람에게 잘못한 점을 일러줘서 자신이 뿌듯하다고 했다. 규현이도 마지막 ‘우리 집 재산을 지켰다’에서 자기가 한 일도 재산을 지킨 것 같아서 좋았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 인기 있었던 시는 ‘배’다. 모두 이런 경험이 있었는데 엄마, 아빠의 반응이 이 시와 비슷했다는 거다. 자신은 배가 아팠을 뿐인데 말이다.
배
4학년 김혁
아침에 일어나니
배가 아파
“아빠, 배 아파.”
그러자 아빠가 하는 말
“그럼 똥 싸.”
“엄마, 배 아파.”
그러자 엄마가 하는 말
“그래도 학교는 가라.”
‘나는 그냥 배가 아픈 건데⋯⋯.’
-『벌서다가』중 30쪽.
아이들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 아빠들 때문에 아이들이 참 속상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막내 민표가 고른 시는 ‘뿌린 대로 거두리라’였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5학년 윤현수
아침 점심은 햄버거
저녁은 치킨으로 먹어서
똥이 아주 작다.
-『벌서다가』중 62쪽.
민표는 이 시를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그리고 이 시가 좋긴 한데 이해가 안 된다며 “근데 왜 똥이 작지?” 물었다. 형들이 “패스트푸드를 먹었으니까 그렇지.”하고 대답해주었다. 민표가 꽂힌 건 ‘똥’이라는 소재였고, 자기 똥은 작지 않다고 똥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리고 공책을 나눠준 뒤 자기도 이런 경험이 있는지, 아니면 오늘 물놀이 하면서 든 생각들, 있었던 일들로 방금 읽은 시처럼 써보자고 했다. 다들 고객님, 마이 당황하셨어요 투의 시가 나오면 어쩌지 싶기도 했으나, 이렇게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모여서 시를 읽고 ‘즐겁다’는 느낌만 가져도 성공이다 싶었다.
시를 쓰라면 종이를 찢겠다던 시크한 6학년 딸내미 다은이도 공책에다가 뭔가 끄적이고 있었다. 시를 발표하고 싶은 사람들부터 일어서서 자기가 쓴 시를 읽었다.
제일 먼저 쓴 민표의 시다.
내 똥
박민표(진주 관봉초 2년)
물만 먹어도 똥이 나온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쳐 주었고, 민표는 “하나 더 써도 돼요?”했다. 아이들이 선뜻 발표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자기가 쓴 시를 또랑또랑 읽어주었다. 그리고 박수를 받았다. 엄마가 술을 안 먹었으면 좋겠다는 시도 있었고, 짝지에 대한 이야기, 부모님이 자기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각자의 시를 썼다. 준호 엄마 박해선도 시를 써서 발표했다. ‘저 잠 좀 잘게요’였는데 아이가 쓴 시를 모방해서 자기 이야기로 쓴 시여서 웃음을 주었다.
다 같이 모여 어린이시로 놀았다. 잘 쓰고, 못 쓰고 그런 거 없이 놀았다. 모두 박수 받고, 모두 웃었다. 그럼 됐다.
그리고 다 같이 읽은 시는 같이 읽은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특별한 언어가 되기도 했다.
다현이 생일
4학년 김채현
미안하다.
생일인 줄 몰라서
생일 선물 못 줬다.
하지만 마음은 줬다.
-『벌서다가』중 54쪽.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생일날 제일 중요한 마음을 줄게, 했고, 아이들은 선물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날 고기를 먹으면서도 고기보다는 마음을 줬잖아, 하며 시의 언어로 놀았다. 어린이시와 함께 잘 놀았다.
첫댓글 와~ 정말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엄마, 아빠, 친구와 시로 노는 아이들 멋지고 부러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