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가 아닌 사랑.
1. 본문에 기록된 첫 사건은 움직이지도 못하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그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일입니다(1~12). 주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 집에 사람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친구의 중풍병을 고칠 기회를 얻기 위해서, 네 친구는 병든 친구를 침상에 눕혀 지붕을 뜯어내고 주님 계신 곳으로 내렸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심은 중풍병자를 포함한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말입니다(5).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주님은 병 고침만이 아니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고, 이 말씀은 서기관들의 마음을 자극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아무에게도 죄 사하는 권세가 없으므로, 그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느꼈습니다. 주님은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쉽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지만, 주님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임을 드러내시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을 고치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데, 만약 중풍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본다면 예수님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숨기시려는 의도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은 사람들에게 오해되는 메시아상이 아니라 올바른 메시아 정체성을 적절히 드러내시면서 십자가의 시기를 조절하시고 계십니다.
3. 두 번째 사건은 세리 마태(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일입니다(13~17).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입니다. 주님은 마태를 부르시고 식사를 하시는데, 그 자리에는 세리와 죄인들로 붐볐고, 이것이 서기관들에게 시비 거리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상황을 통하여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 메시아의 사명을 드러내십니다. 이 사건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을 줍니다. 첫째, 죄인임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둘째, 우리의 편견으로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거나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거나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생각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기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배격하시면서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는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4. 주님은 금식의 문제를 다루십니다(18~22).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금식 관행과, 주님과 그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의 비교에서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식의 비유로 대답하시는데, 결혼 잔치에서 즐겁게 먹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때는 잔치의 흥이 깨지고 금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은 구약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여기서는 주님 자신이 신랑으로 오신 것을 암시합니다. 주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유대교의 의식에는 복음의 생명력을 담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가진 기존의 종교적 틀 속에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담아내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기존의 사고와 사상의 틀 속에 복음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성경을 읽고 대하는 것으로는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새 마음을 성령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주님의 사역에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안식일의 문제가 등장합니다(23~28).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삶은 일거수일투족 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감시 아래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주님은 다윗 때 다윗과 따르는 이들이 제사장만 먹게 되었던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끌어내 안식일의 의미를 해석하십니다(삼상 21:1~6).
6.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만큼 율법을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교정해주십니다.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것을 마치 목사의 눈치를 보거나,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어려운 짐을 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주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이 아닌 의무로 주일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깨뜨리십니다.
♡♡♡♡♡♡♡♥︎♡♡♡♡♡♡♡♡♡♥︎♡♡♡♡♡♡♡♡♡♥︎
본문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심(1-12)
(1-2)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수 일 후’라는 표현은 1장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병든 자를 낫게 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하여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가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어 가르치시는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모여든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도’를 전하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로 인해 자칫 대중의 인기에 함몰되어 그 인기의 노예가 될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인 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도’를 헬라어 원문에서는 ‘로고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여든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를 전하셨습니다. 이때, 한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3-4)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워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예수님 앞으로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이 네 사람이 보인 행동은 그들의 간절했고 절박한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자칫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었지만, 이들의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감에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런 비슷한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였지만, 그들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딸의 죽음이라는 장벽이,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는 사회적 냉대와 부끄러움이라는 장벽이, 맹인 바디매오도 마찬가지로 가로막던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장벽이 예수님께로 나아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의 확신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던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중풍병자와 그를 달아 내린 이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결코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행동을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믿음은 단지 어떤 것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확신에 따라 포기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 과정에서 장애물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장벽을 넘어서 어떻게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그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며 포기해버렸거나 내 일이 아니라며 모른척하였다면, 기적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절박함과 의지는 더 강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사함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의 해결은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로 생각한 서기관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6-7)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성모독’으로 표현된 헬라어 원문은 ‘블라스페메이’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거나 모독되었을 때, 둘째는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이 사람에게 돌려지거나 우상에게 돌려지게 되었을 때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하신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책을 잡으며, 인간이 어떻게 죄 사함에 대해서 선언할 수 있느냐 비판한 것입니다. 죄 사함의 선언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선언을 하는 자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임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8-9)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를 죄 사함의 표적으로 사용하십니다. 병이 치유 받았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병을 치유하시는 표적을 사용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죄 사함의 선언은 그 효력을 당장 검증할 수 있는 길은 없지만,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하는 것은 당장 많은 사람들 앞에서 효력이 검증되기 때문에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할 때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죄 사함의 선언도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표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10-12)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언이 정당하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권세를 받은 분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시며 선지서를 통해 예언된 ‘인자 같은 이’가 바로 자신임을 암시하십니다.
(다니엘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신적인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권세에 죄 사함의 권세가 포함된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 사함의 은혜 가운데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 신성모독으로 간주될 위험을 감수하시면서도 죄 사함을 선언하신 이유는 죄 사함의 사역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알게 하려’로 표현된 헬라어 원문은 ‘오이다’입니다. 이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이 의도가 분명히 증명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 가운데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중풍병자를 향한 죄 사함의 선포는 온 인류를 향한 죄 사함의 선포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바닷가에 나가십니다.
레위를 부르심(13-17)
(13-14)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신적 존재, 메시아임을 알게 하시고 다시 바닷가에 나가 큰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던 중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레위를 부르십니다. 세리는 기준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 자기 몫으로 착복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직책을 수락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가족과 친구들도 수치를 당했습니다.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시 동족으로부터 멸시당하고 죄인 취급당하던 사람을 회복하신 사건입니다. 레위는 “나를 따르라”라는 그 한 마디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반응합니다. ‘따르라’로 표현된 헬라어 원문은 ‘아코루세이’입니다. 이는 명령형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초청이나 권유가 아니라 행동의 개시와 지속을 원하는 명령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에게 같은 길을 걷도록 부르셨고, 레위는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을 강권적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지체함이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전격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15-16)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레위는 큰 부자였으므로 많은 음식을 차렸고, 또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습니다. 외적 경건을 생명처럼 중시했던 유대인들은 레위와 같은 세리와, 율법 규례를 잘 지키지 않았던 자들을 죄인이라 부르며 경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식사하는 것조차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경멸하지 않으시고 어울려 함께 식사하심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이며 구원받아야 할 자들임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찌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동시에 이 땅에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죄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죄인을 불러 교제하며,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경험하게 하고, 또한 참여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건강하다거나 의롭다고 여기며 당신을 외면하는 바리새인들이나 그와 같은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알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부름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 역시 부족한 죄인입니다. 우리 안에 죄 된 본성이, 우리를 계속해서 범죄함 가운데로 몰아만 갑니다. 그래서 매 순간 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그 부르심에 가난한 심령으로 응답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의 인생을 굽어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레위를 부르셨고, 죄인들과 함께 잡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이 오늘 이 새벽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각이 어떤 사람이건, 어떤 문제를 안고 있건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가 주님의 따스한 품 안에 머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 부르심의 은혜에 합당하게 나아가십시다. 그러면 누구든지 주님의 따스한 품 안에 거하는 평안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님을 힘입어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연마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십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갈릴리 사역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혼자 사역을 하지 않으시고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귀신 들린 사람과 각종 병든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치유하신 병든 사람은 오늘날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기 어려운 난치병 환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는 가운데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리는 차원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침과 치유 사역을 통하여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을 때에 심기가 매우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율법을 잘 준수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른다며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바리새인들의 시선에는 예수님의 사역은 단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행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은 죄인과 함께 있더라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죄를 사하러 왔다는 뜻으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이 발언 이후에 바리새인들과의 금식논쟁과 안식일논쟁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8-22절)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두 집단이 동일한 질문을 하였지만 질문의 의도는 각각 달랐습니다. 당시 경건한 사람들이 정기적 또는 비정기적으로 금식을 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관한 질문은 이 두 집단이 아니더라도 당시 경건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궁금한 점에 대한 질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슨 의도로 질문을 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상대의 질문에 악의적 의도를 가졌다고 단정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어떤 질문을 하거나 질문을 받을 때에 요한의 제자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해야 하고 주님처럼 선한 마음으로 정직한 답변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답변해 주셨습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대적 상황을 이해합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오셨음을 인정해야지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죄인을 구하시러 구원자가 오셨으니 슬퍼할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자신이 메시아로 온 것은 마치 혼인 잔치의 신랑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혼인잔치에 신랑을 축하하기 위한 하객과 같으니 금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해 대신 죽을 때 금식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해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은 예수님의 고난를 생각하며 금식하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고 부활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금식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기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금식하며 슬퍼해야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때는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사에 힘든 것이 많이 있지만 항상 우울하게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기뻐해야 합니다. 범죄와 전쟁과 테러와 질병과 재해 등 다양한 형태의 위협으로 인해 세상이 어둡다고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렵고 사업이 위기에 빠져 있고 진로가 불투명하고 생계유지가 막막하다고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 회복의 때를 기다리며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힘이신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혼인잔치’ 비유에 이어서 ‘생베 조각’ 비유와 ‘새 포도주’ 비유를 이어가셨습니다.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은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역시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덧대어 깁게 되면 생베 조각이 세탁 시 줄어들면서 낡은 옷을 더 해어지게 만들고,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되면서 부피 팽창으로 인해 낡은 가죽부대를 터트리게 됩니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복음의 질서를 뜻하며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의 형식주의를 상징하는 구시대 질서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사람이 된 사람은 구시대와 결합하게 되면 옷이 더 해어지고 가죽부대가 터지는 것처럼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새사람은 세속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혹시 하는 일마다 일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새사람이기에 구시대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시대 환경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그냥 두시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세속적 가치관에 빠져 살아갈 때에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는다면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우리는 새로운 복음의 질서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3-28절)
23절부터 28절까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을 벌인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밀밭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보를 지켜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퉁명스럽게 질문을 했습니다.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것을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이유는 마태복음 12장에서는 먹기 위해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제자들이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은 행동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예로 드셨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가다가 당시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인 떡, 진설병을 먹었던 사건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왕 시대처럼 국권이 회복되길 원하였고 다윗을 존경의 인물로 생각했기에 다윗의 행동에 대해 어떤 반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만 그 떡을 먹은 것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 역시 그 떡을 먹었습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셨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중요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안식일 역시 사람을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날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굶주린 사람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에 얽매이면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며 또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분쟁들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복음의 질서 속에 살아가는 새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7,28절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제정된 것이기에 사람이 안식일에 속박되어서는 되지 않음을 밝히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관한 세부 조항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구속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자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함을 알려주셨습니다.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도록 바꾸어 놓은 것이 있다면 목적과 수단을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오히려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반하는 일,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교회와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면을 연마해야 하겠습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안식일에도’라는 어법을 통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메시아, 죄인을 부르러 오신 메시아, 혼인잔치의 신랑으로서 메시아, 그리고 안식일에도 주인이신 메시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복음의 질서에 편입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메시아, 성자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지 않으면 과거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복음의 질서 가운데 살아가는 새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몸은 속해 있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이 세상이라는 낡은 가죽부대와 조화를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의 새 가죽부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으로 내면을 연마함으로 새로운 복음의 질서에 맞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
주님은 갈릴리 지역의 수많은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셨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능력을 가지셨다는 소문이 그 지역 전체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오늘 묵상할 본문 말씀에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12절은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며, 13절에서 17절에는 세관에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사건입니다.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먼저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을 살펴봅니다.
2절에는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에게 모여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계신 집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고, 찾아 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최선의 대접을 하셨습니다.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중요했던 것 즉, 가장 소중한 생명의 말씀, 구원의 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곳에서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며 능력을 행하시느라 분명 피곤하셨을 것이 분명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을 사모하여 나오는 이에게 주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며 사랑으로 응답을 하시고,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때에 중풍병자가 주님께 고침을 받기 위하여 친구들의 손에 의지하여 집에 왔습니다. 4절, 5절입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니”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 네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친구를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침상을 달아 내리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다 싶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좋게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난관이 앞에 가로 막혀 있었지만, 장애물을 넘어서서 어떻게든지 하나님 앞에, 주 예수님의 은혜를 입으려는 그들의 믿음을 예수님은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요즘 우리에게는 이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는 이 순간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것을 알리시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중풍병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전인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선언하시며,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셨습니다. 그 때 중풍병자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곧바로 일어나 걸어 나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쌍한 영혼이 고침을 받는 아름다운 사랑의 기적은 그 집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모두를 감동하게 하였고,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노라 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쉬운 것은 바로 이런 순간에도 어떤 서기관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만, 트집을 잡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악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트집거리를 잡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주님의 사랑의 행동을 신학적, 율법적 논리로만 분석하고 따졌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죄사함의 문제에 대해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으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논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의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지식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 지금 내 앞에 기적을 행하시며 육체와 영혼을 모두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같은 사건을 이렇듯 다른 입장에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의 고침을 위해 지붕을 뜯어서라도 주께 나아가려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서기관들처럼 비판적인 사람들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서기관들의 마음을 아시고, 왜 그런 관점으로 생각하는지 안타까이 책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두 번째 부분인 13절부터 17절에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던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그 당시 사회통념으로 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과 식사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레위는 동족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받아 식민지배 로마제국에 납부하는 직업인 세리였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매우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기록에는 세리를 “아첨꾼, 뚜장이, 간통자”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돈은 벌었겠지만, 마음속에 아픔을 지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시고, 제자 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멀리하려 하는 사람을 친구라 부르시고, 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사회적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우리 생활을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직업에 대해, 흘러다니는 소문들에 쉽게 동조합니다. 그러나 진정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면, 스스로 마음에 힘들어 하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교회에 나갈 수 없다면, 참된 신앙과 구원, 생명의 복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또다시 예수님이 이런 행동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율법을 범한 자들, 매국노들, 죄인들과 너희 스승 예수는 왜 함께 식사를 하고 어울리는가?’ 따집니다. 그들의 관습과 상식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레위는 자기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초대하였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친구들을 불러서 예수님의 사랑과 관용, 새 삶과 희망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소개하며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기쁜 일입니까? 예수님도 그의 초청을 기쁘게 승낙하셨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소외된 사람들, 그 땅에 버려진 사람들 갈 곳 없어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자신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고,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높은 자리에 서서 죄인들을 내려다보면서 경멸하였고, 그런 죄인들에게 오염될까 하는 두려움에 더욱 정죄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적 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자기 의와 자기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하시고 분명하게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따스한 치유의 손길과 친구로 품어 주시며, 제자 삼아 주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칫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겠다는 사랑으로 가득 차 예수님께 나아갔던 사람들처럼,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 갑시다.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 앞에 겸손하게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금식에 대한 논쟁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 무리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자신들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경건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데 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통해 참된 종교적 경건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 집착하고 있는 무리들을 향해 혼인집 광경을 비유로 답변하셨습니다. 유대인의 혼인은 특히 경사스러운 행사였습니다. 초대된 손님들은 때로는 한 주간이나 지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하였습니다. 즐거움과 행복함과 경사스러움이 어우러진 혼인 잔치에서 금식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혼인집 경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최고조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율법에도 혼인식 전후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등 여러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배려가 있었습니다(신20:7).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으로 자처하셨습니다. 잔치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기쁨에 참여하면 될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잔치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빼앗길 때에는 금식이 어울릴 것이라고 덧붙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난 이후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금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새로운 진리, 새로운 교훈, 새로운 삶의 자세는 옛 틀에 국한될 수 없음을 비유로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생베 조각’은 ‘표백 처리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은 천’으로 즉 새로 짠 천을 의미합니다. ‘낡은 옷’은 ‘거의 헤어져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찢어져 버릴 생명력이 결여된 천’을 가리킵니다. 새 천을 낡은 천을 위해 사용하면 둘 다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신축성을 잃고 늘어난 낡은 가죽 부대는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생긴 가스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리게 될 뿐임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혼인집에서는 즐길 줄 알고, 새 천을 낡은 천에 사용하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위해 새 가죽 부대를 사용할 줄 알기는 알았으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벗어나 새 시대의 새로운 진리가 자신들의 눈앞에 현존하고 계심에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기록된 사건은 안식일에 대한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지켜야 할 조항을 39가지로 규정해놓고 지켰습니다. 자신들은 목숨처럼 지키고 있는 규정 중에서 밀 이삭을 자르는 행동을 보인 제자들의 행동을 책잡고 있습니다. 밀 이삭을 자른 행위를 바리새인들은 추수로 본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증거하는 누가복음 6장에는 제자들이 자른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먹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손으로 비빈 행위는 타작을 한 행위로 바리새인들에게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깬 제자들을 고발하며 예수님께 직접 항의를 하는 무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다윗이 한 행동을 상기시키셨습니다(삼상21:1-6). 율법에는 매 안식일에 12덩이의 떡을 새롭게 만들어 성소에 들임으로 이전 것과 교체하도록 하였고, 교체된 떡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무리들이 사울 왕의 살해 위협에 쫓기며 배고팠던 시절에 성소에 진설되었던 떡을 먹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떡을 먹어서라도 생명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 당시 다윗과 그의 무리들의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꺼이 용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직접적인 필요가 단순한 의식 규범과 형식적인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시며 주님께 고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구약에 기록된 다윗의 일을 읽고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느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느냐 라고 반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의 중요성보다 종교적인 틀에 매어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율법의 멍에는 인간을 법조문에 찌들게 하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며, 생명과 환희를 맛보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들의 주인임을 선언하심으로 안식일에 대한 온전한 설명을 하실 수 있는 자격과 신분을 지니고 계심을 선언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