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경 과장이 이마를 짚은 채 비틀거린 것 같았다.
“팀장님!”
나는 허둥지둥 그녀에게 달려갔다. 둘이서 저녁을 먹은 뒤 그녀를 바래다주려고 온 길이었다. 그녀의 집이 있는 한남동에서 함께 택시를 내리긴 했지만, 정혜경 과장은 언덕길부터는 굳이 혼자서 가겠다며 사양한 터였다. 한데 수십 미터쯤 골목을 올라가다 말고 갑자기 휘청거리며 걸음을 멈춘 그녀였다.
“괜찮으세요, 팀장님?”
“아…. 차, 창희 씨.”
내가 이미 가 버린 줄 알았던 것일까. 나보다 정혜경 과장이 더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흠칫거리며 얼굴을 가리더니 재빨리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저는 팀장님이 비틀거리시는 것 같길래…. 어디 안 좋으신 거예요?”
다급히 물어도 그녀는 애써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는 양 눈가에 손을 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야 뭔가를 털어 낼 것처럼 머리채를 흔들었다.
“미안해요. 잠깐 술기운이 올라왔나 봐요.”
“안 되겠어요.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까 제 팔이라도 잡으세요.”
나는 억지로 끌어당기다시피 정혜경 과장의 팔뚝을 붙들어 주었다. 주춤거리는 그녀와 나란히 팔짱을 낀 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팔꿈치에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무심코 그녀 쪽을 돌아봐야 했다. 어색함 탓에 힘이 들어갔는지 블라우스로 가려진 그녀의 가슴이 뭉클하게 닿아 있었다.
정혜경 과장이 금세 몸을 떼긴 했으나 겉보기보다 훨씬 더 풍만한 느낌이었다 - 그러나 내 시선을 끈 것은 정혜경 과장의 젖가슴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내 팔을 붙잡은 손바닥 안에 꽁꽁 숨기듯 들고 있던 물건을, 슬그머니 다른 손으로 옮겨 쥔 채 등 뒤로 감추는 광경을 발견했다.
그건 손수건이었다.
“여기…. 여기예요.”
순간 정혜경 과장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조그만 원룸형 아파트 앞이었다.
“고마워요. 그럼 내일 봐요, 창희 씨.”
미처 인사를 건넬 틈도 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풀자마자 도망치듯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건물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녀의 집 앞에 우두커니 선 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제야 전에도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입사 후 처음으로 정혜경 과장과 단둘이 술을 마셨던 날 목격했던 장면. 당시에 그녀는 내가 우연히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때도 분명 술집 화장실에서 오늘처럼 손수건으로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정혜경 과장이 취기 때문에 멈춰 섰다고 여긴 것은 내 착각이었다. 일부러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던 것도 나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나를 돌려보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 그녀는 몰래 손수건을 꺼내 눈물방울을 닦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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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술김에 울음보를 터뜨리는 사람이야 흔하다. 그러나 그날 밤 우리는 고작 맥주 몇 병을 비운 게 전부였고, 그나마 3분의 2는 내가 마신 터였다.
나는 지금껏 정혜경 과장과 함께했던 술자리들을 곰곰 되짚어 보았다. 맨 처음 회사 앞의 호프집에서 그녀는 민정이와 헤어지게 됐다는 나에게 자신의 유학 시절 얘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이번 명동의 중국집에서는 윤은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두 번 다 우울한 화제였어도, 그렇다고 그녀가 눈물을 훔칠 만큼 슬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정혜경 과장은 그 정도로 여린 여자가 결코 아니었다.
설마 유학을 가기 전에 이혼했다는, 청요리를 좋아하던 전남편이 떠올라서? 그러고 보니 불현듯 의문스러워졌다. 정혜경 과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 사표를 내고 떠난 윤은선이 부럽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만난 정혜경 과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까마득한 부하직원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당연히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녀는 평소대로 단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채에 정숙한 정장 차림을 한 채 사무적으로 나를 대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딱 하룻밤만 아주 우연히 그녀가 숨기고 있는 뭔가를 목격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아무튼 그날 저녁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마감 브리핑을 하는 회의실 안에서 정혜경 과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업무 얘기는 이걸로 마치죠. 그건 그렇고 오 대리님, 이번에 우리 부서로 배치될 인원은 인사명령서가 나왔나요?”
그러자 오동호 대리가 신이 난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예, 팀장님. 아까 오후에 확인했습니다. 상품기획실에는 총 세 사람이 발령을 받았습니다. 1팀에 두 명, 우리 2팀에 한 명씩이요.”
“인사 발령이라뇨…?”
내 질문에 오 대리 입가에 씨익 미소가 번졌다.
“내일 우리 사무실에 새로 인턴직원이 온다네. 미스터 한 자네도 이제 정직원이 됐으니 당연하잖아.”
인턴? 그가 키들대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왜? 자네 밑으로 누가 들어온다니까 감개무량한가? 이번엔 자네처럼 그룹 본부에서 전공자 특채로 뽑은 게 아니라, 대영섬유 자체로 선발한 인원들일세. 우리 회사 차원에서 인턴을 받은 건 거의 일이 년 만이지. 듣자니까 우리 팀으로 올 인턴직원은 이번 학기에 졸업하는 여학생이라더군. 흐흐, 어쨌거나 부디 예쁘장한….”
그 대목에서 오 대리는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정혜경 과장이 안경 너머로 찌푸린 눈빛을 보내고 있는 탓이었다.
오 대리의 말마따나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오후 내내 싱글벙글하더니, 그가 하려던 말은 필경 부디 예쁘장한 아가씨가 와야 할 텐데, 쯤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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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쪽은 한창희 씨. 엊그제 새로 발령을 받은, 우리 상품기획 2팀의 정직원들 중에서는 막내지. 자, 인사들 하라구.”
오동호 대리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튿날 아침, 그는 첫 출근한 인턴직원과 함께 사무실을 돌며 부서원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정혜경 과장부터 시작해 맨 마지막이 내 차례였다. 나 역시 오래 전에 똑같은 경험을 했지만, 우리 팀의 막내 정직원이라는 말만큼은 새삼 생소하게 들렸다. 오 대리 곁에 서 있던 아가씨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민현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민현주라는 신입 인턴을 보자마자 오 대리의 소원이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살색 스타킹을 신고 조신하게 치마정장을 차려 입은 그녀는 160센티미터가 약간 넘을 듯한 키에 아담한 몸매였다. 하지만 동그란 계란형의 앳된 인상이었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살짝 처진 긴 속눈썹이 미인까지는 아닐지라도 제법 귀엽다고 할 만했다.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고개를 꾸벅였다. 그때였다. 이윽고 얼굴을 든 민현주라는 이름의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앗…!”
그녀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마치 비명처럼 아아앗, 하는 톤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졸지에 휘둥그레진 표정을 지어야 했다.
“왜 그래, 현주 씨?”
오동호 대리가 당황한 채 물었다. 그제야 화들짝 주위를 살핀 민현주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려다 말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그, 그게 어디서 뵌 분 같아서….”
“한창희 씨를?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야?”
물론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사이였다. 단순히 오가며 만났던 적도 없고, 듣기로는 여대 졸업반이라고 했으니 학교에서 봤을 리도 없었다. 귀밑이 새빨개진 그녀가 사방을 향해 허둥지둥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무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윽고 오 대리가 회사 안을 구경시켜 준다며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대체 뭐지? 내 얼굴이 누구랑 닮기라도 했나? 나는 떨떠름히 으쓱거리고 말았다.
어쨌든 민현주의 첫인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턴이라는 말 때문일까. 그녀가 오기 전의 유일한 여자 인턴직원이었던 - 유학을 가버리면서 헤어진 내 옛 애인 민정이와 무의식중에 비교하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민정이에 비하면 민현주는 적어도 겉보기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얌전한 편이었다. 그녀는 노출증에 걸린 것처럼 엉덩이를 가까스로 가린 미니스커트를 입지도, 인턴 주제에 입사 첫날부터 희망 부서를 조잘거리지도 않았다. 민정이같이 으리으리한 렉서스를 몰고 출근한 것도 아니었고, 수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새로 정해진 민현주의 자리는 그때껏 내내 비어 있던 민정이의 책상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부서의 막내 자리를 나에게 물려 준 서지은이 그녀의 지도사원을 맡게 되었다.
다소 엉뚱했지만 그것이 현주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 왜 그렇게 놀랐는지 알게 된 건 며칠이 더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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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팀장님. 현주 씨 환영 회식은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그날 오후에 오동호 대리가 헛기침을 하며 정혜경 과장에게 물었다.
“회식이요?”
“네. 어차피 한창희 씨도 다음주부터 교육을 받으러 들어가니까, 기왕이면 그 전에 다들 모이는 게 나을 듯해서 말입니다.”
나의 정직원 입사 교육 - 정확히는 다다음 주부터 일주일 동안이 교육 기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주말부터 출근을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인턴 계약을 끝내고 정식 발령 절차에 따르는 형식적인 일정 때문이었다. 정혜경 과장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내일모레로 하죠. 금요일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메뉴는 뭘로 할까요?”
“글쎄요, 그건 늘 그랬듯이 당사자가 원하는 걸로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 대리가 지당하시다는 양 민현주에게 말했다.
“팀장님 말씀 들었지, 미스 민? 한식, 양식, 일식, 마음대로 골라 봐. 혹시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저요? 전 그냥 아무거나 잘 먹는데요.”
그녀가 대꾸했다.
“에이, 사양하지 말고 얘기하라구. 현주 씨도 여자인데 못 먹는 음식도 있을 거 아냐?”
민현주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새침데기였던 민정이와 달리 그녀는 꽤 웃음기가 많았다.
“아니요. 저는 정말로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하나도 가리는 게 없는 걸요.”
“하나도 없다고? 그렇다면 생선회처럼 날것도 먹어?”
“네. 활어회도 먹고, 참치도요.”
“선지 해장국 같은 건?”
“술 마신 다음날엔 가끔씩요.”
허어, 오 대리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개고기는 못 먹겠지?”
“개고기라면….”
현주가 발랄하게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골이나 수육도 괜찮지만, 제일 좋아하는 개갈비예요. 어릴 적부터 아빠랑 복날마다 먹으러 다녔거든요.”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오동호 대리와 서지은은 얼이 빠진 듯 감탄하는 얼굴이었고, 정혜경 과장은 심각하게 이마를 - 최기범 선배도 비슷한 표정인 걸로 봐서는, 그도 못 먹는 눈치였다 - 찡그리고 있었다
첫댓글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