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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남북국 시대의 사회
Ⅰ. 통일 이후 의 신라 사회
1. 민족통합정책
가. 피정복국의 지배층 포섭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유신(金庾信)과 고구려의 안승(安勝, 보장왕의 서자, 고구려왕→보덕국왕)을 진골에 편입하고 안승에게는 김씨 성을 주었다. 피정복국 백성으로서 경주에 온 고구려인은 6두품, 백제인은 5두품으로 대우했다.
나. 9주 5소경 9서당 10정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옛땅에 3주씩 9주를 설치하고 5소경을 두었으며 9서당에 백제인, 고구려인, 말갈인, 보덕국인으로 편성된 부대가 있었다.
2. 골품제의 변화
진골귀족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향유하고 진골간의 내부 경쟁이 심화되어 경쟁에서 패배한 진골귀족은 6두춤으로 추락하가도 하였으며 학문적 식견과 실무능력을 갖춘 6두품은 중대에는 전제 왕권을 뒷밭침했으나 득난(得難)아란 신분적 한계로 출세의 벽이 존재했다. 신라 말기에는 반신라적 경향을 띄었다. 1~3품은 통일후 평민으로 되었다.
Ⅱ. 통일신라 말의 사회 모순
1. 정치적 혼란
가. 왕위 계승 다툼 심화
나. 지방 세력의 성장
2. 농민의 몰락
가. 신라 하대 농민들의 처지
나. 농민의 부담 증가
3. 농민항쟁
가. 무장 조직의 등장과 봉기
나. 정권의 수립
Ⅲ. 발해의 사회
1. 이질적인 주민 구성
가. 지배층
대씨(大氏), 고씨(高氏), 양씨(楊氏) 등 고구려 유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 피지배층
대다수는 말갈족으로 부락을 단위로 자치적인 생활을 하였다..
2. 사회 모습
가. 발해의 지식인
당의 문화를 수용하고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인과 수석을 경쟁하였다.
나. 사회 분위기
고구려와 말갈사회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제4절 남북국 시대의 문화
Ⅰ. 남북국 시대의 문화의 성격
1. 남북국시대 문화적 성격
통일신라(남국) | 사회적 기반과 경제생활이 안정되면서 고구려와 백제문화를 융합하여 민족문화를 확립할 수 있었다. 당나라 문화를 중심으로 외래문화를 흡수 가미함으로서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
발해(북국) | 고구려적 요소 위에 당나라의 문화가 재구성되었다. |
2. 남북국시대 문화의 특징
통일신라(남국) | 골품제의 특권을 살린 우아하고 풍요로운 귀족문화와 질박한 민간의 문화가 공존했다. |
발해(북국) | 국제적이고 융합적인 성격을 보인다. |
Ⅱ. 통일신라의 사상
1. 유학의 보급
가. 유학기관의 설치
⑴ 국학(國學)
제31대 신문왕 2년 682년 국학(國學)을 설립했다.
⑵ 공자・10철・72 제자의 화상 국학 안치
제33대 성덕왕 16년 717년 당으로부터 공자(孔子)・10철(哲)・72 제자(弟子)의 화상(畵像)을 가져다가 국학에 안치하였다.
⑶ 태학감(太學監)
제35대 경덕왕 6년 747년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으로 개칭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교수를 담당케 하고 3과를 두었다. 9년이 되도록 학업이 진척이 없는 자는 퇴학시켰다.
3과의 과목
공통과목 | 건택과목 |
논어(論語), 효경(孝經) | 예기(禮記), 주역(周易) |
논어(論語), 효경(孝經) | 좌전(左傳), 모시(毛詩) |
논어(論語), 효경(孝經) | 상서(尙書), 문선(文選) |
⑷ 국학(國學)
36대 혜공왕 12년 776년 다시 국학으로 환원되었다
⑸ 독서3품과(讀書三品科)
38대 원성왕 4년 788년 관리채용을 위한 국가시험제도 설정 신라 때 관리 채용을 위한 일종의 국가시험 제도로서 종래의 골품제를 기초로 한 벌족(閥族) 본위의 인재 등용을 지양하여 학벌 본위의 관리 채용을 지향하기 위해 독서삼품과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응시자는 그 독서의 성적에 따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하였다. 5경(五經), 3사(三史),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통한 자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기용하였다.
상품(上品)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예기(禮記), 문선(文選)을 읽어서 능히 그 뜻에 능통하며 논어(論語), 효경(孝經)에 밝은 자
중품(中品) : 곡례(曲禮),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읽은 자
하품(下品) : 곡례(曲禮), 효경(孝經)을 읽은 자
나. 대표적인 유학자
6두품 출신이 많았고 유학은 골품제를 비판하고 사회모순을 개혁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김대문(金大問) | 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紀),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 등 역사와 지리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
김장청(金長淸) |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 |
강수(强首) | 임나출신의 6두품으로 외교문서의 작성에 공이 크고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고 비판하고 도덕을 사회적 출세보다 더 중요시하고 “김인문을 놓아주기를 청하는 글(請放仁問書)”을 당고종에게 바쳤다. |
설총(薛聰) | 원효(元曉)의 아들로서 6두품으로써 유교경전에 밝았으며 구결(口訣)로써 경서를 읽는 법을 만들고 신문왕에게 풍왕서(諷王書, 花王戒(화왕계)를 올리고 감산산조상기(甘山寺造像記)를 씀. 홍유후(弘儒侯) 칭호 |
최치원(崔致遠, 857~) | 도당유학생으로 당의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짓기도 했다. 귀국하여 제51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계원필경(桂苑筆耕), 사륙집(四六集), 제왕연대록(帝王年代曆), 향약잡영(鄕樂雜詠), 사산비명(四山碑銘). 문창후(文昌侯) 칭호 |
김필오(金弼奧) |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 : 무게 있는 탁월한 문장력 |
기타 |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등 유학자와 김운경(金雲卿, 최초 빈공과 합격자), 김가기(金可紀) 등 숙위학생 |
2. 불교사상의 발달
가. 불교의 사상적 체계화
원측(圓測) | 당의 현장(玄奬)에게서 불법을 배워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하였으며 Tibet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원효(元曉, 617~686) | 각 종파의 사상적 대립을 일심사상(一心思想)을 통해 해결하였다. 화쟁국사(和諍國師). 유심안락도(游心安樂道, 淨土信仰) :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으로 南無阿彌陀佛만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중국의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침),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산스크리트어(梵語)로 번역되어 인도의 불교계에 영향), 열반종요(涅槃宗要),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
의상(義湘. 625~702) | 지엄(智儼)의 제자로 중국 화엄종을 들여와 신라 화엄종을 창시했다. 부석사를 건립했으며 원융사상(圓融思想, 一卽多 多卽一. 一心에 의하여 만물을 통섭하는 것. 一體不離).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관음신앙 |
혜초(慧超, 704~) | 성덕왕 18년 719년 당에 가서 다시 인도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성덕왕 26년 727년 당에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남겼다. |
진표(眞表) | 백제 유민으로서 경덕왕때 김제 금산사(金山寺)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통하여 백제유민과 고구려유민 사이에 크게 환영받았다. |
김교각(金喬覺, 696~794) | 신라 왕손 출신 승려로 성덕왕 18년 719년 당에 가서 중국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에서 75년간 고행과 포교활동을 전개하다가 지장보살의 화신이 되었다. |
나. 불교의 대중화
원효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으로 南無阿彌陀佛만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하여 불교의 대중화의 길을 열었고 의상은 아미타신앙과 더불어 관음신앙을 이끌었다.
다. 선종(禪宗)의 등장
⑴ 교종(敎宗)
교종은 경전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했고 5교로 성립되었다.
⑵ 선종(禪宗)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표방하며 개인의 실존과 자각을 강조하는 실천수행을 통한 개달음을 추구하며 중국의 달마(達磨)대사가 개창하여 3국 통일 이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신라 말기에 지방호족, 6두품의 호응으로 크게 유행했고 9산문(山門)이 성립되었다.
5교 9산
宗派名 | 開創者 | 根本道場 | |
교종(5교) | 열반종(涅槃宗) | 무열왕 때 普德 | 전주 景福寺 |
계율종(戒律宗) | 선덕왕 때 慈裝律師 | 양산 通度寺 | |
법성종(法性宗 | 문무왕 때 元曉 | 경주 芬皇寺 | |
화엄종(華嚴宗) | 신문왕 때 義湘 | 영주 浮石寺 | |
법상종(法相宗) | 경덕왕 때 眞表律師 | 김제 金山寺 | |
선종(9산) | 가지산(伽智山) | 도의(道義) | 장흥 보림사(寶林寺) |
실상산(實相山) | 홍척(洪陟, 洪直) | 남원 실상사(實相寺) | |
동리산(桐裡山) | 혜철(慧哲) | 곡성 대안사(大安寺) | |
사굴산(闍崛山 | 범일(梵日) | 강릉 굴산사(굴山寺) | |
성주산(聖住山) | 무염(無染 | 보령 성주사(聖住寺) | |
봉림산(鳳林山 | 현욱(玄昱) | 창원 봉림사(鳳林寺) | |
사자산(獅子山) | 도윤(道允) | 영월 흥녕사(興寧寺, 현재 法興寺) | |
희양산(曦陽山) | 도헌(道憲) | 문경 봉암사(鳳岩寺) | |
수미산(須彌山) | 이엄(利嚴) | 해주 광조사(廣照寺) |
3.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선종 승려인 도선(道詵)은 불교의 선근공덕사상(善根功德思想)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등을 결합하여 풍수지리설을 전개했다. 지리에는 땅 기운이 순조로운 곳(明堂. 명당)과 땅 기운이 쇠약하고 거슬린 곳(凶地, 흉지)이 있는데 명당(明堂)에 양택(陽宅, 주택)이나 음택(陰宅, 무덤)을 짓거나 도읍(都邑)을 정하면 국가나 개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흉지(凶地)에 양택(陽宅, 주택)이나 음택(陰宅, 무덤)을 짓거나 도읍(都邑)을 정하면 국가나 개인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므로 비보사찰(裨補寺刹)을 지어 재앙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풀수지리설은 경주 중심의 국토관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고려시대(왕건의 훈요십조 등)와 조선시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Ⅲ. 통일신라의 과학기술
1. 천문관측
삼국사기의 일식, 월식, 지진, 헤성 출현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고 정확했다. 천문은 농업에 관련되며 천재지변은 민심을 반영하다는 믿음으로 인해 중요시했다.
2. 수학
석굴암, 석가탑, 다보탑 등의 균형 잡힌 비례구성에서 수학지식을 엿볼 수 있다.
3. 목판인쇄 및 제제술
석가탑에서 발견된 35대 경덕왕 10년 751년 이전에 만든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은 세계최고의 목판인쇄술이다. 종이는 목판과 마찬가지로 닥나무를 이용했다.
4. 범종(梵鐘)
범종에는 성덕왕 24년 725년에 제작되어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上院寺鐘)과 혜공왕 7년 771년에 제작되어 가장 유명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봉덕사종, 에밀레종, 구경 7척 5촌 높이 11척)이 현존하는 최대의 종이다. 황룡사종은 50만근의 거대한 종이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Ⅳ. 통일신라의 예술활동
1. 고분양식의 변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 茶毘)이 유행했다. 고분양식은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竪穴式赤石冢)에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었다. 봉토 주위에 둘레돌을 쌓고 12지신상을 조각하는 독특한 양식이 등장했다.
신라 | 3세기 이후 | 경주식덧널무덤 | |
4세기 이후 |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 경주평야의 98호고분(皇南大塚) : 南墳과 北墳의 쌍무덤(瓢形墳), 鳳凰大古墳, 金冠塚, 金鈴塚, 天馬塚, 瑞鳳塚 도굴이 어려움 | |
지방 |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陵) | 경산, 대구, 창령, 안양, 부산, 의성, 안동 | |
통일신라 |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 경덕왕릉, 흥덕왕릉, 掛陵(괘릉), 金庾信墓 호석(護石, 둘레돌)에 12지신상 조각 | |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
2. 건축과 탑
가. 건축
⑴ 불국사와 석굴암(石窟庵, 석불사)
경덕왕 10년 751년 김대성(金大城, 中侍)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불국사의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석가탑・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석굴암은 중국의 석불사원을 양식을 받아들여 만든 것이나 중국의 석불사원이 자연적 바위벽에 이루어 진 것인데 대하여 신라의 석불은 인공의 석굴을 만들어서 불상을 모신데 차이가 있다. 석굴암은 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후실(後室)로 되어 있고 후실 천장은 돔(dome, 穹窿, 궁륭)으로 돌을 쌓아 올린 것이다.
기술적으로 교묘할뿐만 아니라 역학적으로도 기하학적으로도 치밀하게 설계되어 조각된 38구의 불상(원래 40구)이 체계적으로 배열하여 세계에서 가장 숭고한 종교적 세계를 이룩해 놓은 신라인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나 다름 없다.
석굴암이 석불사인 점은 그 조각에 있다. 후실 중앙의 석가상(釋迦像)을 비롯하여 둘레의 벽에 부조(浮彫)된 11면 관음과 여러 보살(菩薩) 및 나한(羅漢), 전실의 8부신장(八部神將)과 인왕(仁王), 연도(羨道)의 사천왕(四天王) 등 모두가 각기 특색을 지니고 조화된 미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둥근 얼굴과 풍만한 몸은 당의 영향을 받은 바 있다.
⑵ 안압지(雁鴨池)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2월조에 의하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하여 삼국통일을 전후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문무왕 14년 674년에 완성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조경술을 보여준다.
⑶ 기타 : 679년 사천왕사, 684년 망덕사
나. 불탑
구분 | 탑 | 특징 |
초기 | 의성탑리5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 백제식 목탑을 본뜬 석탑과 신라식 모전석탑의 혼합양식 |
감은사지동서3층석탑(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 | 국보 제112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55-9 | |
불국사3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釋迦塔,석가탑) | 경덕왕 10년 751년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창건.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불국로 15-1 | |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 | 높은 예술성과 빼어난 건축술 국보 제20호. 경북 경주시 불국로 15-1 | |
말기 | 양양 진전사지3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 | 기단과 탑신에 부조로 불상을 새긴 것으로 유명. 국보 제122호.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 |
구례화엄사4사자3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황전리)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 | 국보 제57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195-1번지 | |
경주 창림사3층석탑(昌林寺三層石塔) | 제46대 문성왕 | |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3층석탑(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 | 제40대 애장왕 | |
전남 장흥 보림사3층석탑(寶林寺三層石塔) | 제47대 헌안왕을 위한 석탑 | |
전북 남원실상사3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 | ||
충남 보령 성주사3층석탑(聖住寺三層石塔) |
다. 불탑과 공예
⑴ 불상
초기 | 균형미가 뒤어난 불상들이 만드어 졌다. 석굴암은 완숙미가 뒤어나고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불과 안압지에서 나온 그 삼존불은 초기 형태이고 경주 감산터에서 옮겨온 2구의 석불은 성숙된 모습이다. |
말기 | 개성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장흥 보림사와 철원 도피안사의 비로자나불, 함안 방어산 약사여래입상,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 |
⑵ 석조물
팔각기둥형(일반형석등) | 부석사석등(통일신라 후기), 합천 청량사석등, 구례 화엄사각황전앞 석등, 남원 실상사석등(통일신라), 장흥보림사석등, 남원실상사의 백암장석등(장식적) |
쌍자자석등 | 법주사 쌍사자석등, 광양 중흥산성쌍사자석등, 합천 영암사지쌍사자석등 |
⑶ 범종 : 상원사종과 성덕대왕신종
3. 향가와 구전문학
가. 향가
4구체에서 10구체로 바뀌었으며 대부분 승려와 화랑들이 저슬했다. 향가집으로 제51대 진성여왕 2년 888년에 각간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삼대목(三代目)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 14수와 균여전에 11수가 전해진다.
나. 구전문학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에밀레종, 설씨녀, 효녀 지은(孝女 知恩, 효자 손순(孝子 孫順) 등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Ⅴ. 발해의 문화
1. 발해의 유학
귀족 자제의 유학 교육의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치했고 6부를 유교식으로 지었으며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빈공과 합격자를 배출했다.
2. 발해의 불교
발해의 절터는 5경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지배층 중심으로 불교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발해의 예술활동
가. 고분
흙무덤, 굴식돌방무덤, 벽돌무덤(塼築墳)이 있다.
주인공 | 무덤양식 | 천정방식 | 위치 | 벽화 |
정혜공주지묘(貞惠公主誌墓) |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 고임천정(모줄임방식) | 육정산 고분군 | 없음 |
정효공주지묘(貞孝公主誌墓) | 벽돌무덤(塼築墳) | 용두산 고분군 | 있음 |
나. 불상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 등에서 고구려 양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다. 조각
석등, 와당 등의 문양에서 웅건함과 소박하면서도 직선적인 고구려적 색채가 보인다.
라. 자기공예
가병고 광택이 있으며 종류, 모양, 크기, 색깔 등이 매우 다양했다.
마. 청동 낙타상과 저장구덩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있는 발해 유적지 염주성 터에서 발굴된 발해 전 시기 토층이 발견되었으며 가로 1.8cm, 세로 1.9cm 크기의 쌍봉 낙타 모양의 청동 낙타상과 더불어 발굴지역 동쪽에서는 가로・세로 1m 이상, 깊이 50cm의 염주성 내 음식・도구 저장시설로 보이는 저장구덩이 4곳이 발견되었다. 저장 구덩이에는 동물뼈, 대형 토기편, 부싯돌, 방추차편, 철제 꺽쇠, 허리띠 과대장식, 입방체 유물편, 각종 토기, 기와편 등이 다량 출토됐다. 낙타상은 2012년 발굴된 낙타뼈와 함께 발해가 육로를 통해 서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비. 고구려의 계승
⑴ 지배층 : 대씨, 고씨, 양씨 등 고구려계
⑵ 제도 : 5경제는 고구려 5부제
⑶ 문서 :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왕
⑷ 문화 : 온돌장치, 정혜공주묘의 굴식돌방무덤, 이불병좌상, 와당연화문, 발해음악, 다듬잇돌(砧石, 침석), 모줄임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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