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팥냄새가 온 집안을 감쌌다. 고사를 지낸 것이다. 정씨댁은 늙은 호박과
무를 썰어 넣고 찐 붉은 팥떡을 식칼로 쓱쓱 베어 대문과 장독대, 광에 가져다
놓고 두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일년의 재액을 막기 위해서 였다. 늘 지내오는
고사였고 해마다 근심이 없는 해가 어디 있을까마는 합장하는 마음은 매년 간
절하다. 하지만 올해 정씨댁의 손길은 유난히 간절해보였다. 처음으로 떼어낸
아들, 남편의 말이었기에 따른 것이지만 정씨댁은 살점이 뜯어져나가는 고통까
지 느낀다. 명수를 떼어 수원으로 보낸지 일 년, 그래도 정씨댁은 아직 그 허전
함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자식죽이고도 살았는데... 참기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중얼거리던 친정어머니의 말을 떠올려 보지만 그래도 정씨댁의 입술에서는 자꾸
한숨이 새어나온다. 고통은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나보다 더 크게 고통받
는 사람이 있다고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할뿐.
'그저 우리 명수 몸 건강히 잘 지내게 해주시고 선생님들에게 귀염받게 해주
시고...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귀염받아서 따순 밥 먹게..."
정씨댁은 빌다 말고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 본다. 맵싸한 바람이 지나가는
하늘로 잔별들이 가물거리며 들어선다. 아이 열을 낳아 셋만 건졌던 친정어머니
의 얼굴이 새삼 떠오른다. 전쟁 통에 속병으로 죽어간 친정어머니를 묻을 땅이
한뼘 없어서 발안 장터에서 오 리쯤 떨어진 야산에 대충 어머니를 묻고 기다란
막대기로 표시해놓은 지 벌써 이십년이 다 되어간다. 어머니를 묻고 어린 동생
들 손을 붙들고 따듯한 국밥 한 그릇 나누어 먹지 못하고 헤어졌던 그날... 조금
만 심이 피면 산소에모시리라 작정하며 눈물을 씹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시어
머니가 두려워서 친정붙이들의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지만 이제 가을이면 제 자
신이 쌀을 팔아 떡을 할 만큼 생활이 폈다. 하지만 그어머니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생각이 새삼드는 것이다. 소작을 붙여먹고 사는 막내 남동
생이 겨우 땅 한뼘을 얻어 제대로 된 산소에 모시기는 했지만 정씨댁은 새삼
어머니의 산소가 눈에 밟힌다.
'욕심 부리고 살지 않겠습니다... 천지 신명님, 그저 우리 명수 몸 건강히... 공
부 잘하고 선생님들에게 귀염받고...'
정씨댁은 눈에 밟히는 친정어머니의 초라한 산소를 머릿속에서 떼어내려 애쓰
며 중얼거린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산 사람에게는 그들이 가져야 할 고통의
몫이 있다. 그것은 현재의 것이며 미래의 것이기에 죽은 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
는 것이다. 설사 명수가 잘 되는 대가로 친정 어머니의 묘소를 파헤치라고 한들
그녀는 선택했을 것이다. 아들을, 목숨같은 아들을.
"아이고 냄새 좋다! 명수 엄마, 뭘 그렇게 비세요? 여기서 더 잘 되길 바라면
벌받는다 벌받아!"
흘러내리는 월남치마 끈을 여미며 뒷집의 점박이네가 소리쳤다. 두손을 모아
빌고 있던 정씨댁이 번쩍 고개를 든다.
"명수가 저리 의젓하고 공부 잘하지 , 정씨 아저씨가 속을 썩이나 오입을 하시
나... 게다가 대의원인데... 아유 떡 맛있네. 호박이 올해는 유난히 달아요, 성님."
정씨댁이 추스린 고사떡을 얼른 베어 한입에 넣으며 점박이네가 다시 말한다.
대의원이라는 것은 작년에 정씨가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것을
말한다. 친정어머니 산소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비장한 근심에 사로잡혀 있던
정씨댁의 얼굴이 마치 행복의 증표라도 선사받은 것처럼 얼른 피어난다.
"대의원은 무신 대의원..."
사실 따지고 들자면 읍내에서 자신만큼 근심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드물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명수가 수원에 나가 쟁쟁한 아이들을 제치고 일등자리를 놓
치지 않을 뿐 아니라, 남편 역시 이제껏 살아오면서 집안 식구들 소홀히 한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씨댁은 아직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불행하지 않은 자신을
느끼게 되면 더럭 겁이 나는 것이다. 가끔 가슴이 뛰는 증세가 나타난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난 후에 나타난 그 증세. 흰
밥을 원없이 먹어 보거나 떡을 해 놓거나 가끔 조기찌개라도 끓일 때면 뜬금없
이 가슴이 뛰었다. 이래도 되나, 내가 이렇게 근심없이 살아도 되나, 어딘가에서
시어머니가 숨어 있다가 뒷덜미를 치며 화악 머리채를 잡아챌 것만 같은 불안감
... 세월이 가면서 시어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공포는 사라졌지만 가슴이 뛰는 병
은 남았다. 정씨댁은 손을 가슴께로 가져가 본다.
정씨댁은 부엌으로 들어가 떡을 썰었다. 돌려야 할 집이 많았다. 이번에는 맘
먹고 떡을 했다. 점박이네 말마따나 대의원네 집인데, 뭐 보수가 나오는 직업도
아니고 뭐하는 대의원인지 그녀로서는 알 바 없지만 그래도 대의원인데 싶었다.
가을에 딴 단풍잎을 넣고 새로 바른 창호지 사이로 왁자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안방에서는 벌써 술판이 벌어진 것이다. 원래 술을 한방울도 하지 못하는 정씨
였지만 대의원이 되고 나서부터 이 집에 새로 생긴 풍습이다.
정씨댁은 솥안에 남은 사태를 꺼내 쓱쓱 베어놓고 굴이 듬뿍 담긴 지렛김치
도 썰어놓는다. 안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정씨댁은 뒤뜰로 나가 동치미를 좀 떠
다가 점박이네 앞에 놓아준다.
"아직 맛은 좀 덜들었는데 그래도 괜찮을 거야. 먹어 봐..."
"아이구 이거 번번이 염치가 없어서... 성님"
부뚜막에 걸친 엉덩이를 살짝 들어 말을 하다가 점박이네는 얼른 도마에 남은
사태 한점을 입 소게 쑤셔넣는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만 같다. 또 한점을
집어넣고 두 점을 집어넣는데 정씨댁이 빈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다시 들어섰다
무안한 김에 고기 묻은 손으로 얼른 시루떡을 베어먹으며 점박이 네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만다.
"성님, 명수는 고등핵교만 마치믄 장가 보내세요... 성님 나이도 있으신데 손주
부터 보셔야..."
"이 사람이 무신 숭한 소리를 혀... 키만 컸지 아직 애야..."
하지만 정씨댁의 얼굴은 함박 벌어진다. 어쩌면 떡을 하고 고기를 사고 사람
들을 불러모으는 건 이런 재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하염없는 축복의 소리들
이 설사 그것이 빈말이라 해도 정씨댁의 가슴 뛰는 병을 조금 진정시켜주니까.
대청문을 열고 댓돌에 놓인 신발을 신다 말고 명수는 얼른 얼굴을 붉힌다. 부
엌에서 어머니와 점박이 어머니가 나누는 소 리 때문일까, 명수는 천천히 검은
구두 끈을 맨다.
"왜 어디 가려구?"
아들의 기척에 예민한 정씨댁이 부엌문을 드르륵 열며 명수 쪽을 향한다.
"현준이 형이 집에 다니러 왔다는데 얼굴이나 보려구요."
"잘 됐다. 그러잖아도 내가 떡을 좀 나르려던 참이었는데..."
정씨댁은 다시 바쁘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초록색 보자기로 싼 쟁반
을 두 개 가지고 나선다.
"하나는 정인이네 거다... 정인이 할머니 좀 어떠시냐고 여쭙고... 그리고 숙모
님 바쁘지 않으시면 오시라고 해라..."
정씨댁은 벌써 두툼해지는 아들의 손에 보자기 매듭을 쥐어주면서 말한다.
숙모라는 지칭은 강현준의 어머니 김씨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현국의 아
버지 와 명수의 아버지가 외육촌간이었다. 따지자면 멀었고 환경의 차이랄까, 재
산의 차이 때문에 서로 격의 없이 왕래하지는 않았지만 정씨댁은 요즘 들어 새
삼 강씨네 집안을 챙겼다. 명수에게 형제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 겁이 나기도 했
지만 이것 역시 대위원이 되고 난 후에 부쩍 잦아진 생각이었다.
새로 사준 베이지색 돕바가 혹시 얇지는 않은지 노심초사하는 정씨댁의 시선
을 뒤로 한 채 명수는 집을 나섰다. 어디선가 개가 짖고 저녁이 일찍 내린다. 짙
푸른 겨울 저녁의 하늘 위로 까치가 집으로 돌아간다. 창마다 번지는 불빛이 벌
써 안온해지는 계절, 겨울이었다.
객지에 나가 겨울을 맞아 본 사람들은 안다. 몸보다 먼저 싸늘해지는계절의
공포를, 창호지 문으로 비집고 들어서는 싸늘한 냉기, 빨리 내리는 저녁그리고
창밖을 불어가는 바람소리가 등을 시리게 만드는 그런 계쩔의 공포를.
-난 말야, 박정희라는 사람을 존경하기로 했지, 머리가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
놈이야, 재작년 선거 유세 때 그가 했던 말 생각나니? 아마 그때 김대중이가 우
리에게 경고를 했었지, 여러분, 만일 이번에 또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
이 된다면 우리는 다시는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자
응수라도 하듯이 박이 말했었지... 여러분, 여러분이 한 번반 더 저를 청와대로
보내주신다면 맹세코 다시는 이 자리에 서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여러분...
어때? 멋지지 않니? 그는 약속을 지킨 거야, 아니 모두가 다 멋지게 속아넘어간
거지. 체육관 선거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해내다니... 유신 지지율 91.5퍼센트라
니. 이나라에 정신이 똑바로 박힌 인간들이 8.5퍼센트밖에는 살고 있지 않다니...
무서운 일이 아니냐?
지난 여름 방학 막 중학생이 된 명수를 불러넣고 무서운 일이 아니냐고 물으
면서 뜻밖에도 현준은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현준의 말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명수도 대충 상황이 돌아가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선배들 몇이 유신
반대 유인물을 작성하다가 퇴학당한 사건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현준의 말은,
무서운 일이 아니냐면서도 웃던 현준의 웃음은 혹시 대의원이 된 아버지에 대한
조롱은 아니었을까. 명수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다.
한때는읍내의 가장 큰 기와집이었던, 그러나 몇 번의 거듭된 죽음을 치러내면
서 이제는 스산한 기운을 감추지도 못하는 현준의 집으로 들어서면서 명수는 오
늘은 현준을 만나면 이 모든 것을 물어 보리라 작정했다.
하지만 현준은 집에 없었다.
"모르겠다. 모레 온다고 하더라."
토끼털을 두른 한복 조끼가 여미어지지 않을 정도로 살이 찐 현준의 생모 김
씨가 퉁명한 얼굴로 떡을 받아 들며 말했다. 쌍가락지를 낀 김씨의 손가락이 하
얗다. 명수는 왠지 그런 손가락을 한 김씨와는 내내 친근해질 수가 없었다.
"그럼 숙모님, 안녕히 계십시오."
명수는 기와집을 나섰다. 방학도 아닌데 굳이 이곳에 내려왔다면 현준이 갔을
만한 곳이 짐작이 됐다. 강현준의 형 강현국이 아내를 잃고 난 후 근처의 ㅁ사
로 들어간지 벌써 삼년이었다. 머리를 깎은 것이다.
현준의 집에서 모퉁이만 돌면 바로 정인의 집이었다. 명수는 왠지 모를 긴장
감을 느끼며 의도적으로 좀 느리게 걸었다. 싸리문밖에서 보이는 정인의 집은
죽음을 치러낸 현준의 집보다 더 스산해보였다. 싸리문 가에서 머뭇거리는 명수
를 세수를 하고 있던 정관이 먼저 알아보았다. 명수는 하는 수 없다는 기분으로
정인의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어이 도련님이 왠일이야?"
정고나이 수건으로 얼굴을 북북 문지르며 씨익 웃는다. 명수는 웃으며 떡보따
리를 마루에 내려놓을뿐 더 대꾸하지 않는다. 정관을 만나면 언제나 명수의 기
분은 묘해지곤 했다. 썩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느낌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랬기 때문에 정관과 마주칠때면 명수는 언제나 정인이 위태
롭게 느껴지곤 했다. 언제였던가 뛰어가던 정인이 넘어지면서 정관이 돌리고 있
던 팽이를 쓰러뜨린 적이 있었다. 정관은 넘어진 자신의 팽이를 들어 엎어져 있
는 정인의 목에다 박아버렸다. 곁에 잇던 명수가 먼저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
다. 하얗게 질려 울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정인을 발로 차던 정관의 입
가에서 번지는 야릇한 미소,
"들어가자, 근데 이건 뭐냐?"
정관은 벌써 자기보자 키가 커버린 명수를 두고 뒷골목의 건달처럼 어깨를 과
장되게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냐, 난 가봐야 돼... 형, 이거 할머니 드시라고... 엄마가 고사를 지냈거든..."
명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정관의 얼굴에 다시 묘한 비웃음이 번진다.
"엄마가 고사 지냈어? 엄마가?"
엄마라는 말에 비웃음을 강조하며 정관은 다시 말했다. 심심하던 차에
어디서 굴러든 개뼉다귀나 싶은 말투였다. 명수가 어쩔 줄 모르겠는 기
분이었는데 건넌방에서 요란한 기침소리가 들리고 이어 가래 뽑는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드르륵 열린다.
이미 안에서 명수가 와 있는 기척을 들을 법도 했을 텐데 정인은 명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손에 든 요강을 하
수도에 버리고는 무심한 몸짓으로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형, 그럼 나 먼저 갈게."
두 사람이 모른 척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건만 명수는 허둥
대며 정인의 집을 나선다. 말없이 펌프질을 하던 정인의 옆모습이 눈에 아른
거렸다. 벌써 손이 시린 계절이었다. 정인은 손이 빨갛게 되도록 오물을 씻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정인이 소맷자락으로 감추려 하던 터진 손등이
떠올랐다.
명수는 서둘러 골목을 돌아나간다. 정인의 집과 현준의 집, 마을과는 약간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 두 채의 집은 무언가 이상했다. 말하자면 어떤 귀기,
어떤 스산함, 어떤 광기... 명수는 생각을 멈춘다. 등 뒤에서 다가서는 발소리
그리고 이어 허공으로 퍼지는 오, 빠라는 발음... 그건 정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명수는 뒤꼭지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 자리에 선다. 나풀거리는 발걸음으로
정인이 명수의 곁에 선다. 명수는 웃음을 지으며 정인 쪽을 향하지만 차마 눈을
보지 못하고 대신 눈길을 떨어뜨리다가 낡은 스웨터 위로 볼록 솟은 정인의 작
은 젓가슴을 보고 말았다. 명수는 이번에는 고개를 외로 꺾어버린다.
"고사 지냈어?"
정인은 스스럼없는 말투로 물었다. 아까 정관과 셋이 있던 마당에서 아예 그
를 외면하던 것과는 딴판인 목소리였다. 명수는 끌리듯 정인을 바라본다. 정인
은 밝게 웃었다. 희고 고른 이가 도톰한 입술 사이로 드러났다. 이번에 명수는
그냥 가슴이 아파버린다.
"현희 언니네 집에 가는 길이야... 현희 언니 서울 간대... 알아?"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명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강남인가 하는 데로 병원을 새로 지었대... 듣고 있는 거야, 오빠?"
"응."
"그런데 그 동네 이름이 말죽거리래. 세상에 서울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동네
가 있다니... 우습지 않아?"
정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린다. 명수는 정인의 티없는 웃음에 마음이
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자연스레 보조를 맞춰 걷는다.
중학생이 된 이후에도 현희는 가끔 명수에게 카드나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멋을 낸 듯이 45도 각도로 누운 글씨들이 가득 찬 편지들... 그러나 명수는 지금
은 그 편지들 속에 여러 군데 맞춤법이 틀려 있다는 것만 기억해 낸다. 하지만
한가지 그편지속에는 들큰한 지분 냄새가 배어 있었다. 어린시절 아무도 없었던
포도밭 원두막에서 제 뺨 가까이 뺨을 가져다댔을 때 느껴지던 그 단 냄새였다.
"정희 누나는 편지 오니?"
명수는 현희를 떨쳐버리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응... 가끔..."
정인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명수는 말을 잘못 꺼냈구나 싶었지만 이미 늦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정관보다 먼저 집을 뛰쳐나가버린 정희의 일이 정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것들 셋이 붙어 댕김서 쑥덕거릴 대 알아봤어야 되는데.
정희와 함께 서울로 떠난 마을 처녀 두명을 두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었다. 딸
자식을 수원에 있는 학교로 진학시킬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 큰 처녀들을 무
작정 승냥이 아가리 같은 서울로 떼밀 수도 없었던 부모들은 그러나 딸들이
도망이라는 방법으로 서울로 갔을 때 오히려 홀가분한 눈치들을 보였다. 이제
한입 덜게 된 것도 사실이었고 밑에 동생들 공부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어쨋든 서울로 가면 그 귀한 현굼이 널려 있을 것 아닌가 싶었
던 것이다.
떠나던 날 밤, 정희는 몰래 꾸려놓은 꾸러미를 몰래 집 안에서 가져나오는 정
인을 불렀다. 정희의 눈빛은 그녀답지 않게 달떠 있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꼴 안봐도 돼.
정희는 정인에게서 보따리를 받아 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정인은 쭈뻣거
리며 정희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정희는 보푸라기가 잔뜩 인 나팔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십원짜리 세 개를 꺼내 정인에게 내밀면서 생긋 웃었다.
"너 그 새로 나온 라면 먹고 싶다고 했지?"
정희로서는 그것이 동생에게 내미는 최대한의 애정표시라는 것을 정인은 안다
떠나는 자의 감상이었을까, 할머니의 말대로 섣달 초사흗날 바람같이 쌩하던
정희는 정인의 손을 잡고 동생의 눈을 그윽하게 들여다 보았다. 정인의 눈동자
가 밤 저수지같이 검다면 정희의 눈은 갈색이었다. 닮지 않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은 자매였지만 그날은 자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둘을 세워 놓고 바라본
다면 닮은 점이 없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뭐라고 막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기는 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스산함, 어떤 결핍감, 어떤 슬픔 같은 것들...
-서울 가면 편지 할게.
정희는 생긋 웃었다. 마치 미국으로 유학이라도 떠나는 부잣집 딸처럼 의젓해
보이기도했다. 언니가 몰래 집을 떠나는데 이렇게 보따리 심부름을 해도 될까.
떨리던 정인의 심정은 언니의 그런 모습 때문에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역으로 가는 길 모퉁이의 우체통 앞에는 벌써 정희와 함께 명자와 미순이가
나와 있었다. 한결같이 허름한 가방을 든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가방은 가방이었
다. 정인은 새삼 언니가 든 자주색 보자기에 싼 보따리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세 처녀 중에 정희의 표정이 가장 자신만만해 보였다.
-너 들어가봐. 더 올거 없다구. 추석 때 온다고 할머니한테 말하고...
정희는 겁에 질린 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선 정인에게 밝게 말하며 처녀들을
이끌었다. 정인의 얼굴을 돌아보며 울음을 터뜨린 건 오히려 명자 언니 쪽이었
다. 정희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금방 내려오겠다던 정희는 일년 반 만인 지난 추석에야 처음으로 고향으로 돌
아왔다. 다른 처녀들과 함께 였다. 모두 멋쟁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휴가를
보내고 다시 서울로 떠나가던 발 언니를 배웅하면서 정인은 지난번 떠날 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느꼈다.
새로 얻은 직장에서는 낮엔 일하고 밤에는 고등학교에도 보내준다는데, 기숙
사엔 수도꼭지가 두 개나 있어서 마치 공중목욕탕에서 그러하듯이 더운 물도 나
온다던데, 연탄도 나무도 때지 않고 방에 고루 따뜻한 스팀이라는 게 들어와서
아랫목이 어디고 윗목이 어딘지 구분하지도 못한다는데, 웬일인지 이번에 정희
는 역까지 마중나가는 정인에게 그만 들어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명자는 이
번에도 또 울었지만 그것 역시 처음의 이별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정희 역시 눈
물 고인 눈을 감추려고 코스모스가 시들어가는 화단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
던 것이다. 그 화단을 바라보느라 정희는 기차가 움직일때까지 정인에게 그만
들어가라는 말을 하지도 못한 것이다.
"중학교는..."
생각에 잠긴 정인의 얼굴을 비껴가며 명수가 다시 물었다.
"미송이는 수원으로 간대..."
정인은 생각에서 깨어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너 말야... 너..."
정인은 입을 다물었다. 만일 정인이 수원으로 온다면 좀더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정인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그는 여러번 했었다. 수인선을 타고
바닷가에도 놀러가 보고 성곽도 보여주고... 어느 날은 기차를 타고 정인과 함께
서울로 가는 꿈도 꾸었다. 손을 잡고, 마치 오누이처럼 손을 꼭 붙들고... 그러나
기차는 곧 자전거가 되었고 자전거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꿈도 여러 번
이었다.
"난... 안 갈 거야."
정인이 말했다.
"안 가! 오빠!"
정인은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말했다. 정인이 먼저 이어 명수가 걸음을 멈추
었다.
"난 후회해 그때 엄마가 죽고 나도 저수지로 뛰어들었어야 했어.'
"그런 소릴..."
"오빠 알아? 나보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중학교 가고 고등학교 가고 대학가
서 선생님 되는 것 생각이나 해 봤어? 엄마가 바느질 한 고운 코트를 현희 언니
가 입는 걸 멀거니 바라보면서 저건 결코 내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 해봤냐구?
난 여기 남아서 할머니 똥걸레나 빨거나 아니면 정희언니처럼 김치 보따리 싸
들고 서울로 가겠지. 갈 길은 정해져 있었어. 내가 아무리 발더둥쳐도 소용없다
구!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또다시 이런 가난한 집에서 버려진 사람들만 있
는 집에서 태어난다면 일찌감치 아기 때 죽어버리고 말 거야!"
"그만 두지 못해?"
명수가 소리를 질렀다.
정인이 순간적인 발작 상태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명수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 삐뚤어진 아이로구나!"
명수가 다시 말했다. 말하면서 명수는 갑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워진다. 이게 뭔
가 하는 생각, 사실 집을 나설 때부터 사실은 신발끈을 맬 때부터, 그러니까 어
머니가 정인이네 집에 떡을 가져다 주라고 말하기 이전부터 아니 수원에서 기차
를 타고 이곳으로 올 때부터 사실은 정인을 만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다. 그러면서 명수는 또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뭔가 대체 이게!
"오빠가 날 알아? 난 더 이상 오빠 자전거 얻어타고 질질 우는 어린애가 아니
란 말야. 감히 나한테 삐뚤어졌다고 하지마..."
정인의 목소리는 아주 고왔다. 열세살 짜리 소녀가 내는 목소리라고 생각하기
에는 무섭도록 침착한 것이다. 그러나 마치 명수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습기를
다 빨아내버릴 듯 해면 같이 검은 눈동자는 명수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그 눈
과 하는 수 없이 마주 서서 명수는 깨달은 것이다 .정인의 눈동자 속에 이글거
리는 적의를... 명수는 갑자기 사지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