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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고종황제의 딸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평민보다도 못한 삶을 산 덕혜옹주의 사연 많은 일생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기사를 보면서 나는 오래 전에 내가 잠깐 본 덕혜옹주가 떠올랐다.
1983년,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할 때 내가 근무하는 병동에 덕혜옹주가 입원을 하였다. 업무 인수를 받고 병실에 들어가서 덕혜옹주를 처음 보는 순간은 지금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눈을 감고 자는 듯이 누워있는 덕혜옹주의 얼굴은 마치 고종황제의 사진을 보는 것만큼이나 아버지를 닮았고, 피부는 아기처럼 티 없이 고우며 키는 작은 편이었다. 아마 그때 신장이 안 좋아서 입원하였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입원 기간 동안 그 분은 내내 눈을 감고 있었기에 눈뜬 모습도, 목소리도 한 번 듣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퇴원하는 날 우리 병동의 간호사들은 ‘지나온 세월(1980. 남영문화사, 비매품)’이라는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을 한 권씩 선물 받았고, 나는 그 책을 통해서 덕혜옹주와 영친왕, 그리고 이방자 여사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에 의해 조선의 왕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일본사람인데, 다행히 영친왕과 부부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덕혜옹주와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이다. 덕혜옹주는 열네 살에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고, 일본에서 덕혜옹주를 맞은 날을 이방자 여사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이윽고 덕혜옹주가 일행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내가 한국에 갔을 때 본 옹주와는 영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굉장히 성장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얼굴에는 애수와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했던 눈초리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수줍은 어린 소녀에게 불행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을 했다.
“긴 여행을 하시느라 피곤하신가 보군요.”
나는 조용하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옹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한국말로 했다. 그러나 옹주는 이번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고 미소마저 띠지도 않았다.’
나는 이 글에서 어린 소녀의 절망과 일본에 대한 반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심의 표출이었으리라. 일본은 더 잔인하게도 덕혜옹주가 낯 선 일본 땅에서 오빠인 영친왕과 함께 지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이방자 여사는 밝히고 있다.
아버지인 고종의 독살, 그리고 강제 유학, 어머니의 죽음, 일본인과의 강제 결혼… 이러한 아픔을 겪으면서 덕혜옹주는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고 15년간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살았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삶이 힘없는 조선의 슬픔을 그대로 반영한 것만 같아 안타깝다.
1962년에 귀국한 덕혜옹주는 이방자 여사와 함께 낙선재에서 살다가 1989년 77세로 돌아가시고, 9일 후엔 이방자 여사도 세상을 떠나셨다. 여러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평온하게 지낸 낙선재에서의 생활이 그나마 덕혜옹주에겐 위안이지 않았을까?
요즘 한일 관계가 좋지 않은데 덕혜옹주에 관한 영화가 세상에 나오면 일본사람들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같은 핏줄인 이방자 여사조차 ‘일본인은 한국인에 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했는데…
첫댓글 빌려왔습니다.
이 글을 보니 마음이 다시 저립니다.
스스로 권익으 찾는 것은 나라가 강해야 합니다.
강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