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강좌/시의 인문학>
■ 시의 언어와 자화상
시의 언어가 다른 장르의 언어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절제’다. 시적 대상의 내면 진실을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노력이 미문학(美文學) 시 쓰기다. 여기에서 '아름답게'라는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슬퍼서 아름다운 것이 있고, 아파서 아름다운 모든 미학을 포괄하는 뜻이다. 언어의 절제는 곧 감정의 절제를 뜻한다. 감정이 제어되지 않은 언어는 거칠게 분출된다. 가장 큰 언어의 분출은 막말이거나 욕이다. 시인도 방식은 다르지만 기쁨이나 슬픔, 혹은 외로움이나 분노를 분출하기도 한다. 시의 방법은 정서(情緖)적 울림으로 표출하기 때문에 일반 언어와는 다르다. 순간적 마음 상태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순화된 감성의 재구성으로 표현된다. 그런 감각적 정서도 혼자의 주장이 아니라 독자의 공감이 더해질 때 미감적, 쾌감적 시로 남게 된다.
시는 공감하는 문학이다. 그러나 시인의 주장으로 끝맺는 시는 독자가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여백을 빼앗아 버리는 일이기도 한다. 그것의 대표적 문장은 종결어미로 마무리된 상태를 말한다. 즉 ‘~~이다’로 끝내는 형태다. 이것을 ‘~~처럼’이나 ‘~~같이’ 또는 '그렇지만'등의 미완성 문장이나 조사(助詞)로 끝내는 방법은 여운이 길게 남기는 장치다. 특히 짧은 언술을 사진과 한 덩어리로 결합하는 디카시를 쓸 때 더욱 그렇다. 시의 언어는 절제의 언어지만, 짧은 글이라도 글의 묘미나 여운, 긴장미가 없으면 군더더기 말이다. '긴장감'이라는 것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표현한 문장이 구질구질하지 않은 상태다. 빼 버려도 뜻이 통한다면 과감히 생략하라. 설명처럼 덧붙인 친절한 부분이 말의 낭비고 감정의 낭비다.
그렇다면 시에서 자유로운 글쓰기란 어떤 글을 말하는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일까? 사람 간의 대화나 산문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시의 미감(美感)이 없으면 자유로운 시가 아니다. 함축과 생략을 통한 긴장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자유로운 글쓰기가 된다. 이는 마치 법(法)을 지켰을 때 우리의 행동이 자유로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난 선거 때 말을 함부로 내뱉은 사람으로 인하여 본인도 어려움을 겪었고 국민도 불쾌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발언으로 도덕이나 선거법에도 저촉됨으로써 낭패를 당했던 그 사례와도 견줄 수 있다. 도덕이나 법을 지킨 사람은 자유롭다. 마찬가지로 시의 미감이나 독자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쓴 글은 시가 아니라 감정의 배설물이 된다. 그러므로 이 강좌가 지향하는 바는, 시를 이루는 기본 원리 정도는 공부함으로써 자유로운 시를 쓸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탐구하자는 것이다.
시에 목마른 사람, 더 좋은 시 짓기에 대한 갈급함이 큰 사람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 시 쓰는 방법은 어떤 공식처럼 무슨 큰 내용이 있는 게 아니다. 이 강좌를 400여 회 이어오면서 시 쓰기의 기본 방법은 거의 다루었다. 밴드에 올라오는 시를 보면 강좌 내용을 건성으로 읽었거나 읽지 않은 듯한 글이 많이 눈에 띈다. 물론 더 훌륭한 시론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시를 이루는 핵심 기초는 거의 같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자유로운 자기만의 시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과 같다.
■ 회원 디카시 한 편 감상
자화상
내 눈에는
사람으로 안 보입니다만
당신은 나의 동족인가요
_최희남 시인의 디카시집 '닫아버린 것에 대하여' 中에서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꽃 사진이나 고정된 풍경으로는 좋은 디카시를 구현하기는 쉽지않다. 너무 식상한 소재이기에 그렇다. 특별하거나 개성적인 새로운 소재의 사진과 언술이 한 몸이 된 디카시가 오래 기억된다.
위의 디카시는 우선 사진이 강렬하다. 시적 언술이 주는 충격도 크다.
그러면서 사람을 향하여 무서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옳지 못한 사람은
말과 소와 같은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조선 선조 때의 권신 송강 정철이 쓴 시다. 가사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등 국문학사상 찬란한 명작들과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정작 본인은 정치의 정적들을 가혹하게 처단한 이중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정여립 옥사 때 1000명이 넘는 동인을 고문하고 죽였다. 이를 기축옥사라 한다. 그 3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쓸만한 인물을 많이 죽여버린 후유증으로 나라를 위해 나가 싸울 장수가 없었다고 하니 참혹한 일이었다. 입으로는 옳은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 처참한 옥사를 일으킨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떠올 것이다. "나는 백성을 위한다"라고 떠들지만, 결국 자기를 위하는 도구로 권력을 사용하는 현장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여 왔다.
이렇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게 하는 시가 좋다. 최희남의 위 디카시는 "이런 촌철살인도 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환유로 세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순화되고 억제된 몇 마디로 허다한 위선을 제압해 버린다.
사진의 스핑크스 고양이가 커다란 눈으로 사람에게 묻는다.
'당신은 나의 동족인가요?'
그리고 숨긴 말이 있다.
'왜 그러세요?'
최희남 디카시인
2023년도 계간 《시와 편견》 디카시 등단
제1회 ‘시사모전국디카시공모전’ 대상 수상
한국디카시학회 동인
한남대학교 사회문화행정복지대학원 졸업
건양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대전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