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416) 상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 ① 당신의 버킷리스트/ 시인,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정재찬
상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Daum카페 https://cafe.daum.net/cyh007kr/ 버킷리스트(Bucket list)와 유언장(遺言狀)
① 당신의 버킷리스트
여러분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인가요?
저는 ‘유재석과 아이유 만나기’ 빼고 다른 건 소박한 편입니다. 가족하고, 친구들하고, 그리고 혼자,
소박하게 배낭 하나만 들고 세계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달러만 가득 들어 있는 배낭이 좋겠군요.
‘버킷리스트(bucket list)’라는 말은 마치 소원을 가득 담은 바구니처럼 근사하게 들리지만,
어원을 알고 나면 섬뜩합니다. 중세시대에 교수형을 처하거나
목을 매어 자살할 때면 양동이, 영어로 버킷(bucket)을 뒤집어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올가미를 목에 두른 다음, 발을 굴러 양동이를 참으로써 끝을 맺었죠.
이를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이라 하는데, 그래서 이로부터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픈 일들의 목록’이란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
버킷리스트(bucket list)라는 겁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롭 라이너 감독의 영화 〈버킷리스트〉가 개봉된 이후의 일이죠.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등
로맨틱 드라마의 대가답게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죽음을 앞둔
노인들의 로망과 가족애를 따스하고 뭉클하게 잘 그려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버킷리스트 만들기가 유행을 하기도 했지요.
죽음을 대비한 리스트를 넘어 올해의 버킷리스트, 학창시절의 버킷리스트 등
다양한 양태로 만들어지기도 하고요.
버킷리스트를 쓰다 보면 그 성취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망외의 소득이 생기기도 합니다. 리스트를 계속 수정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니까요.
또한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꿈이 설정되면서 행복이 실현 가능한 목표로 다가오거나,
혹은 실현 가능한 행복을 목표로 삼으며 살게 되는 겁니다.
영화 〈버킷리스트〉의 초반부는 부러움 그 자체입니다.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노인네들의 삶이 환상적이기 때문이죠.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머스탱을 운전하고, 북극 위를 날아가고,
프랑스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가 하면,
인도의 타지마할, 중국의 만리장성, 아프리카의 사파리,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누빕니다.
그들이 시한부 처지라는 것도 잊고 마냥 부러워지기만 할 정도로 그들의 버킷리스트는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진정한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죽기 전에 했어야 할 일은 딸과의 화해였습니다.
역시 인생 최고의 버킷리스트는 가족의 사랑이었던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두 노인 중 한 사람이 먼저 생을 마감하자 남은 이는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의 의미를 깨달으며
‘낯선 사람을 도와주기’ 항목을 리스트에서 지웁니다.
역시 인생 최대의 버킷리스트는 우정과 봉사였습니다.
급기야 영화의 에필로그에서는 두 노인의 유골함이 히말라야 산맥에 이르자
마지막 버킷리스트 ‘정말 장엄한 것을 목격하기’ 항목을 지워버립니다.
역시 인생 최후의 버킷리스트는 자연과 신에 대한 경의였습니다.
버킷리스트를 그저 위시리스트처럼 여기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작성하려고 하면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꿈은 이룬다고 해서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 같지도 않고,
막상 실천하자니 은근히 귀찮고 복잡해 보이기도 하며, 이룬들 부질없어 뵈거나
이루려고 하는 게 측은해 뵈는 소원들도 있습니다.
죽기 전에 진짜 꼭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무엇을 더 이루고 더 얻고 더 경험하는 것도 소중하겠지요.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어려서나 젊어서나 아니 최근이라도, 알건 알지 못했건,
고의로든 실수든, 내가 잘못하거나 죄짓거나 상처 준 분들,
그 분이 가족이든, 친구든, 낯선 이든, 신이든,
세상 뜨기 전에 한번이라도 만나 진심으로 미안하단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용서야 받든 못 받든 그건 내 몫이 아니고, 다만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일들에 관해 죽을 용기를 내어 매듭짓고 싶을 따름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지우고 싶은 후회들이 참 많이도 남는다고 합니다.
천 명의 죽음을 지켜본 한 호스피스가 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을 때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 중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였답니다.
그 다음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꿈을 이루려 노력했더라면’,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고향을 찾아가 보았더라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맛보았더라면’, ‘결혼했더라면’, ‘자식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저 목록들을 뒤집어놓으면 그게 바로 버킷리스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저 항목 하나하나 되게 쉬워 보이지 않나요?
진작 마땅히 해야 했던 것들 아닌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하기가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당장 하면 되는 건데,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안 하는 겁니다.
그러고 후회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평범한 일들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만 챙기는 데도 바쁘다 보니 일상에는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었다며 핑계대어 보지만,
결국 소중한 건 저 특별하지도 딱히 귀해 보이지도 않는 일상이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특별한 날 가장 평범한 사람을, 평범한 날 가장 특별한 사람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지요?
시 한 편 읽고 갑시다. 아니면 노래 한 곡을 부르셔도 좋고요.
푸르른 날
서정주 시, 송창식 작곡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동천》(은행나무, 2019)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2. 6.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416) 상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 ① 당신의 버킷리스트/ 시인,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