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4번 말씀
제목 : 교회로 흐르는 야곱의 축복
창 27: 26-30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30.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아멘.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복음을 설명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꼭 성경에 기록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그런 의구심을 자아낼만한 내용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가 오늘 공부할 창세기 27장의 내용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차남이 장남의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고 어머니와 공모를 해서 아버지까지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얻어내는가 하면 장남은 자기 동생이 가로챈 아버지의 축복은 무효라며 다시 자기에게 축복을 하라고 방성대곡을 하고 장자의 축복을 뺏은 동생을 죽이겠다고 벼르는, 그런 마치 주말 연속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그런 이야기죠. 저는 어렸을 적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이 있었어요.
그 첫 번째가 과연 그렇게 속여서 받은 축복도 효과가 있는 걸까? 전 혼자서 답을 내리길 그렇게 도득한 축복은 하나님도 무효로 처리하신다고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왜냐면 야곱이 속여서 가로챈 그 축복으로 그가 꽤 험악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야곱이 보여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그런 집념을 하나님이 기특하게 보셔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면 그의 삶이 그렇게 험악하게 끝나버리면 안 되잖아요.
두 번째 질문은 만일 제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속여서 가로챈 축복이 유효한 것이 아니라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다가 간 것이라면 왜 이삭은 야곱에게 한 축복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네가 나를 속였기 때문에 내가 너한테 준 거지 그렇지 않으면 난 너한테 절대 축복하지 않았을 거야, 라고 그렇게 무효라고 선언해버리고 장자인 에서에게 다시 축복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는 장자와 차자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기만 했을까? 였어요. 다시 하면 되잖아요? 하나님의 축복은 한번 입 밖으로 내뱉어지면 절대 번복이 불가능한 건가요? 누가 속였어도?
사실 성경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성경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항상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수렴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러한 작은 질문들은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그리고 교회로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서 공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원고가 좀 많아서 제가 뚝뚝 잘라서 넘어갈 텐데 나중에 제가 나눠드릴 테니까 잘 읽으셔서 더 깊은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주는 축복의 내용이 나오는데요. 잘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주는 축복은 땅에 관한 축복과 열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이미 여러 차례 봤어요. 그런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먼저 그 축복의 내용에 대해서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공부하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당신의 언약을 이삭이 야곱에게 그대로 그냥 반복하고 있는 거에 불과한 거예요. 창세기 15장 18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에 대한 언약, 땅에 대한 약속, 땅에 대한 축복을 하시고 창세기 17장 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통치권에 대한 언약을 해주세요. 열국의 아비가 될 거야. 다 네 앞에 무릎 꿇을 거야, 라고 이렇게 축복을 하십니다. 그 언약이 점진적인 형태로 지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 손자 야곱에게로 계승되고 있는 거예요. 그걸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한다, 그랬죠. 그죠? 성경은 유기적이며 반복적이며 점진적이다, 라고 그렇게 설명해드린 적이 있었어요. 무엇을 향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하나님은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무작정 그가 머물고 있는 땅에서 떠나라고 그랬어요. 그리고는 그의 목적지를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 아주 애매모호하게 말씀하셨어요.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서 무작정 떠나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디로 떠나야 돼요? 그랬더니 내가 지시할 땅. ‘지시 할 땅’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지시할 땅. 일단은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당신의 백성을 뽑아내셔서 어떤 다른 땅으로 옮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힌트 하는 것입니다,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에요. 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가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란 말입니다. 거기는 4천 년 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러한 문명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뽑아내서 다른 땅으로 옮기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뽑아내신 인류 최초의 갈대아 문명은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자기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어서 살겠다고 만들어낸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거예요. 거기가 바벨론이에요. 갈대아 우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보겠다고 하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그 ‘문명’,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그 문명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진짜 복된 땅’ ‘진짜 기름진 땅’ 진짜 풍성한 땅‘으로 인도하시고야 마실 것이다, 라는 것을 힌트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뽑아내어 하나님 나라로 옮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죄의 세상에서 뽑아내어 하나님 나라로 옮기시겠다는 것을 힌트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실이 최초의 계시로 주어졌을 때에는 아주 모호하게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만 주어진 거예요. 그렇게 그가 가야할 땅이 어디인지도 가르쳐주시지 않은 채 그를 끌어내시고는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 여기가 그 땅이다, 라고 가르쳐주셨어요. 미리 좀 가르쳐주시지. 그냥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무작정 걸어가는데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여기가 그 땅이니라, 라고 그 땅의 정체를 밟히셨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땅이 오늘 본문에서는 기름지고 풍요한 땅으로 한 단계 이제 더 명확히 밝히 계시가 되는 거고 요한계시록에 이르러서는 그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임이 밝혀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신 내용을 보면 그 땅은 기름진 땅이며 포도주와 곡식이 풍성한 땅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출애굽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거예요. 그것은요 거기가 이 땅에서 최고로 좋은 땅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책의 저자인 모세가 그 전에 기록된 어떤 말에 대해서 극단적인, 완전히 대조가 되는 대 반전의 단어들을 끌어다 쓴 것뿐이에요.
창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
완전히 반대죠, 그죠?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땅이 저주를 받았어요. ‘모든 땅’. 그 어느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온통 저주를 받은 이 세상에서 저주 받은 땅이 아닌 기름지고 복된 땅을 약속하고 계세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구이언하시는 걸까요? 땅을 전부 저주해놓고 아냐, 그 때 사실은 요거는 아니었어. 이렇게 일구이언하시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땅은 그 때 다 저주 받았어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 세상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뚫고 들어오게 될 것임을, 침투해 들어오게 될 것임을 미리 예시하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그 저주 받은 땅이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어요. 하나님이 그 저주 받은 땅 갈대아 우르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늘의 땅으로 창세전에 택해진 당신의 백성을 반드시 옮기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을 성경이 점진적으로 계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그 축복을 탈취하여 도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 한 푼도 못 받고 축복은 가로채긴 했는데 쫓겨났어요. 왜? 그에게 주어질 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축복을 받았음에도. 풍성한 포도주와 기름진 소산이 다 네 거다, 그랬는데 하나도 못 받고 쫓겨났다니까요. 14년 동안. 그 후에도 알거지 돼서 애굽으로 도망갔단 말입니다. 밥 얻어먹으러. 아들이 있는 애굽으로 밥 얻어먹으러 도망간 거예요. 그게 무슨 축복이에요? 오늘 그가 도득한 축복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죠? 하늘의 축복,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언약을 이렇게 작은 그림에서부터 시작해서 큰 그림으로 옮겨가며 결국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꽝, 하고 밝혀내는 거예요. 그게 땅에 관한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 중에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에 관한 언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아브라함과 땅이라는 그 설교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으니까 다시 한 번 들어보세요.
두 번째로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담 안에서 마귀의 종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들의 머리를 밟고 결국 열국의 왕으로 통치자로, 하늘의 왕 노릇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지금 야곱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언약인 거예요. 그 약속 또한 창세기 3장에서 미리 힌트 되어져 있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지금 뱀한테 저주하시는 거거든요. 여기서 후손, 제라, 라는 단어가 처음 나와요. 그리고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 다윗의 언약, 언약에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 후손이라는 단어가.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아들로 딱 드러나게 되거든요. 그걸 제가 밝혀드릴 거예요. 여기에서 여자의 후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죠? 너무나 우리가 많이 봤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선 설명 안 할게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게 될 모든 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선 제가 잠시 후에 설명해드릴게요. 따라서 예수의 승리는 바로 교회의 승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가 뱀의 머리를 밟을 때 그 안에서 교회가 함께 그 머리를 밟는 거예요, 어떻게? 십자가 안에서. 그러니까 성경의 주제는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가 없이는 성경의 어느 구절도 열 수가 없어요. 그 십자가로만 다 풀 수 있어요. 사복음서도 전부 십자가로만 풀 수 있어요. 제가 지난주에 하나 예를 들어드렸죠? 예, 그것이 바로 바울신학의 백미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n Christ의 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승리자로 만드시고야 마실 것이다, 라는 결연한 의지가 바로 여기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을 학자들은 원시복음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최초의 복음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서 믿음의 자손들에게 계승되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언약은요 그 자체가 축복의 내용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언약은 전부 축복이에요. 축복과 언약은 혼용해서 쓸 수 있는 단어에요. 그리고 그 내용은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는 저주와 사망의 땅에서, 그게 이 세상이거든요. 그 땅에서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어야 할 자들 중에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갈대아 우리에서 뽑아낸 것처럼, 뽑아내셔서 죄의 머리를 밟게 하시고, 세상을 밟게 하시고, 세상이 그들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걸 밟게 한다는 거예요. 세상을 밟게 하시고 하늘의 풍요가 충만히 넘치는 약속의 나라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그 복음을 그 언약이 담고 있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축복이 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야곱이 탈취하여 도득한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흐르는 모든 언약의 내용이에요. 그 언약에 대해서는 제가 요한복음 강해 때 자세하게 설명해드린 적이 있었어요. 그걸 다시 한 번 참고해서 들으세요. 그러니까 처음 오신 분들은 들을 게 많아요. 그냥 여기서부터 출발하면 하나도 못 알아들어요. 그 전에, 사전에 공부를 많이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 언약과 축복의 수혜자, 그 언약과 축복을 받는 자들은 그 자신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과 그분의 은혜에 의해서 선택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장자 에서가 아닌 차자 야곱에게 장자권이 주어지는 거예요. 교회에게 설명하기 위해. 야곱이 뭐가 잘 나서가 아니에요. 겉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남자답죠. 야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여튼 속이는 자에요. 야비한 자로 나타나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그를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내시고야 마는구나,를 보여주는 게 야곱의 삶인 것입니다. 야곱이 그 하나님의 축복을 도둑질해서 야, 저건 정말 좋은 거니까 나는 반드시 저걸 차지하고 말 거야, 라는 그런 집념을 발휘해서 그 축복이 그의 것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거예요. 우린 그걸 로마서에서도 봤고 이미 우리가 창세기 25장 공부할 때도 공부를 했어요. 하나님은 벌써 그들이 배속에 있을 때 야곱을 내가 택했다. 내가 야곱만 사랑했다, 라고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축복이 유효한 게 되는 것이지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집념을 나타내서 하나님이 그걸 기특하게 보셔서 그에게 축복을 허락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도둑질은 나쁜 거예요. 야곱은 가만히 있어도 그 축복이 자기 것이 될 건데도 불구하고 자기 꾀를 사용해서 그렇게 그것을 도득해버리는 바람에 험악한 삶을 살게 된 거예요. 안 그랬어도 될 걸 갖다가 말이죠. 그런 사기꾼 야곱을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 야곱,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는 게 바로 야곱의 이야기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고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에서, 수세식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며 살던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서 하나님 당신 누구에요? 그러는데 내가 하나님이야, ‘에고 에이미’, 내가 하나님이야. 내가 스스로 있는 자야, 라고 자기를 밝히시고 그를 거기서 끌어내 오셔서 결국 모리아 산에 세우시는 그러한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에도 간섭하셔서 그를 결국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더라, 라는 구원의 서정이 그의 삶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노파심에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자칫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사기를 쳐서라도 빼앗을 수 있다는, 그러니까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 될 수 있다, 라는 그런 Pragmatism이나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그런 구절로 오해를 하시면 안 돼요. 그런 오해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꿩 잡는 게 매에요. 사람만 많이 모으고 예배당 크게 지으면 그게 왔다 에요. 그러니까 방법과 수단은 어떻게 정당화 되도 괜찮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거기에 대한 오해를 더하는 에피소드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는 사건인데요. 주님께서 어떤 마을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 사람들이 나무 많아서 주님께 가까이 오지 못한 중풍병자와 그를 침상에 들고 온 그의 친구들이 그 집의 지붕을 뚫고 침상을 아래로 내리죠. 그 때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세요. 그걸 보고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남들이 기다리건 말건 새치기를 하거나 남의 집 지붕을 마음대로 뜯어도 괜찮다는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나쁜 짓이에요. 질서를 지켜야죠. 남들은 전부 기다리고 있는데 지들만 새치기해서 지붕 뚫고 올라가서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 얘기 하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 때에 그렇게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세요. 그런데 고쳐주시고 나서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일어나서 걸어가라, 그러지 않고 네 죄가 사해졌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 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아니, 참람하도다. 네가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단 말이냐? 라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일어나서 걸어가라는 말과 네 죄가 사해졌다, 라는 말과 어떤 게 더 쉬운 말이냐? 헬라어로는 일어나 걸어가라, 가 간단한 말이거든요. 당연히 일어나 걸어가라지 그랬을 때 근데 왜 내가 네 죄가 사해졌다, 라고 이야기를 했겠느냐? 라고 이유를 밝혀주시는데 뭐라 그래요?
내가 죄를 사하러 이 땅에 왔음을 나에게 그럴 권세가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기 위해 내가 일부러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그 중풍병자에게 야, 너 내 은혜를 나의 권세를 네가 믿고 이렇게 남의 지붕까지 뜯어서 새치기를 하면서까지 나에게 찾아왔구나! 잘했다, 이놈. 기특한 놈, 하고 고쳐주신 게 아니라 너는 지금 나에게 네 병을 고쳐달라고 남의 집 지붕까지 뜯어내면서까지 이렇게 찾아왔지만 나는 그런 걸 해주러 온 사람이 아니야. 나는 죄를 사해주러 온 거란다,를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네 죄가 사해졌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건 그의 열심이 기특해서 고침을 받은 게 아니라 원래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 들어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죄가 사해진 것뿐이에요.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야단쳤단 말입니다. 질서를 지켜야지. 그리고 나에게 와서 세상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을 구했어야지. 너는 고작 네 병 낫겠다고 남의 집 지붕까지 뜯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 않느냐? 그러나 너는 너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죄 사해주러 온 거야. 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열심 이 특심이어서 그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네, 아버지가 형을 속이지 않고 그렇게 자기의 열심을, 집념을 드러내고 또 자기의 병이 낫기 위해서 남의 지붕을 뜯어내고, 하는 그러한 행위 그런 아무 상관없었다는 거예요]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렇죠? 분명히 나오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했는지. 그건 하나님의 은혜는 수혜자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라고 명확히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기로 가로채도 그 축복이 유효 한가 아닌가, 라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향한 야곱의 기특한 집념 같은 걸 설명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될 수 없으며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됨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교회에게 설명하시는 한편의 드라마인 거예요.
그렇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어진 하나님의 축복은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 속에서 좀 더 점진적인 그림으로 보여져요. 그게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게서 나타난 구원의 모양, 그것이 한 가족에게 그리고 한 민족에게, 한 나라에게 그렇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게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꽝 하고 확인 도장이 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탈취하여 취한 축복의 내용이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그 나라와 민족을 거쳐서 예수에게로, 또 예수에게로 나와서 교회로 이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축복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이 되는 지까지 연결을 해드릴 거예요. 야곱이 도득한 그 축복의 내용이 어떻게 계시록까지 이어지게 되는지, 예수를 거쳐서.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죠, 그죠?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된 거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의 새 이름 이스라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시작된 거예요.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의하고 있는,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축소하여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교회의 역사이기도 한 거예요. 영적 이스라엘. 그게 교회니까, 그죠?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돼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삶을 살다가 그 복을 아래로 흘려보냈던 것처럼. 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런 상태에서 구원해서 이렇게 만드시는구나,를 그의 삶에 담고 있었잖아요. 그러고 나서 그 하나님의 언약을 다음 라인인 자기 후손에게, 하나님의 선택된 다음 라인에게 또 계승해주잖아요. 그럼 걔가 또 담고 있어요. 야곱이, 이삭이 그 삶을, 복음을 삶으로 잘 살다가 또 그 다음 세대에게 또 계승해주고. 그러잖아요, 그죠?
그것처럼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삶으로 살게 돼요. 하나님이 지시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가나안 방백들을 모두 몰아내는 승리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그들로부터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도록 복의 근원의 삶을 살게 하세요. 이스라엘이 물론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지만 거기서부터 복음이 전파되었잖아요. 그러니까 복의 근원의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 물론 상징적인 땅이지만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 있는 대적들을 전부 몰아내서 열국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 그러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고 그들이, 그런 풍요하고 기름진 땅에서 잘 먹고 잘살았을 때가 있었단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의 나라에 성취된 것처럼 보였잖아요.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 왕 때에 이제 만개하죠. 완전히 거기서 이제 성취된 것처럼 보여요. 다윗 왕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 땅 일경이 전부, 그 때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땅이 돼요. 그리고 그 땅에는 은과 금이 길에 구르는 돌처럼 아주 흔했다고 그러죠? 그리고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되죠.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축복이 완전히 성취가 된 듯 보여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야곱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수시로 그 땅에서 쫓아내버리셨잖아요?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수시로 가나안에서 쫓아내죠? 그리고 수많은 적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했으면 심지어 그들을 다른 나라에 포로로 몽땅 내모시기도 했어요. 70년 정도가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마치 야곱의 험악한 삶과 방불하죠. 그러니까 야곱과 이스라엘의 인생과 그 역사 자체도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거예요. 이것도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요한계시록으로 계속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내가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잘 보고 쫓아오라는 거예요. 내가 상징으로 약속의 땅을 약속했고 또 너희들의 삶에 풍요와 기름짐을 약속했지만 근데, 너희들의 삶 속에 그런 것들이 자꾸 없어지고 또 대적들의 공격이 너희들의 삶 속에 자꾸 오는 그것을 보더라도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것을 알거 아니냐? 그러니까 그거 말고 진짜 내가 이야기하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바라보며 기대하며 좇아오라는 거예요. 누구에게? 성경의 수신자인 교회에게.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등장인물들, 그리고 이러한 배경들, 무대 세트 등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은 하늘의 그 풍요와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걸 허락해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허락이 되어지는지 그 복음의 내용을 잘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이삭과 야곱, 다윗, 모세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설명해주기 위해 등장인물로 모델로 쓰여진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삶 전체가 기록돼 있는 성경을 통해서 야, 이게 복음이구나! 라는 것을 배우는 거고요. 그러니까 그들이 오히려 여러분을 부러워해야 되는 거예요. 그 언약은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삼하 7:12-15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계속 등장하는 후손에 대한 예언이 또 등장해요. 여기에서 이 후손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을 가리키지만 진짜는 누구를 가리키는 거예요? 예수님을 가리키는 거죠. 그죠? 자, 이 후손이 누구라 그래요? 아들이라 그러잖아요. 내 아들이 될 거라, 그러죠?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에요? 예수님이잖아요. 근데 이상한 게 여기에 보면 그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면서 그 후손에게서 내 언약이, 내 축복이 온전히 성취될 거라고 말씀하시는데 그의 왕위가 이제 어떻게 되지 않고 견고해지리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후손에게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완전히 성취가 될 거라고 하는데 여기보시면 그 아들을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시면서 아들을 만드시겠다, 그래요. 그럼 보세요, 분명히 이 후손은 창세기 3장 15절부터 등장하는 그 후손, 여인의 후손은 예수님인데 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아들을 만드시겠다고 하실까요? 먼저 갈라디아서 3장 16절 보세요.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창세기 3장 15절부터 등장하는 후손이란 단어, 제라는 전부 단수에요. 네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에서의 그 후손도 단수에요. 그러면 이게 안 맞는 거죠? 그죠? 근데 왜 거기서는 계속해서 단수를 쓰셨느냐? 에요. 그리고 그 후손,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윗의 언약, 나단의 신탁에서는 그를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아들을 만드시겠다, 라고 이야기하시냔 말에요. 그러니까 그 후손,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대가리를 밟게 하겠다는, 그래서 승리자로 만들겠다는 그 후손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함의 하고 있는 거예요. 이중적 상징인 거예요. 하나는 누구?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구원받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그것이 바로 예수이며 여러분인 거예요. 교회인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히 가지고 있는 교회.
롬 4:16-17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누구? 하나님의 백성들의 조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후손이란 얘기에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얘기에요]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음으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예, 바로 그 후손. 그 후손이 바로 우리인 거예요. 교회인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구원받게 될 교회.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우리 교회에게 너희들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목적지로 가게 될 것인가를 설명해주는 책이 바로 성경인 거예요. 그걸 조금 더 점진적으로, 조금 더 점진적으로, 조금 더 큰 그림으로 그렇게 설명해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결론으로 이거다! 라고 우리에게 주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아들을 삼으셔서 죄를 밟아 뭉개고, 창세기 3장 15절, 뱀의 머리를 밟아 뭉개고 하늘을 통치하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내가 바로 그 승리를 너희들에게 선물해주겠다,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야곱의 인생인 거예요. 그게 바로 야곱이 도득해낸, 탈취한 축복의 내용인 거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무얼? 축복, 하나님이 야곱에게 한 축복, 이걸 유업으로 얻을 텐데]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누가?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아들이 되리라, 에요. 후손, 진정한 후손 제라, 창세기 3장 15절의 그 아들, 내 아들이 되는데 조건이 붙어 있어요. 이기는 자는. 그러면 우리가 이왕 야곱의 삶 속에서 교회의 삶을 추론해내기로 했으니까 야곱이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됐죠? 승리라는 이름이 그에게 어떻게 주어졌어요? 얍복 강가에서 그가 죽어야 되는데, 절대 하나님에게도 안지잖아요. 하나님에게도 안지는 그 자를 하나님이 다시 죽여 버리고 새롭게 창조해내야 되는데 그를 죽이면 안 되니까 예수 안에 그를 넣어서 예수를 죽여 버리고 그에게 이스라엘, 승리, 라는 이름을 줬잖아요? 그게 제가 지난주에 설명해드린 얍복 강가의 사건 아닙니까? 그렇게 바로 십자가로 너희들에게 이김, 승리를 주겠다는 거예요. 우리를 그렇게 이스라엘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의 인생이에요. 어렵지 않죠?
그렇게 지금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하는 복의 근원으로써의 그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질 그 후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 받은 그 교회, 그 교회가 이렇게 일관성 있게 하나로 연결이 쫙 되세요? 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는 이 땅에서 무엇을 목표로 하여 살아가야 하는가, 까지 가야 되겠죠, 그죠? 승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기는 자가 그 유업을 받고 아들이 되는 거니까, 그 승리, 이기는 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야곱이 어떻게 그의 인생을 승리로 끝내는지 보면 될 거 아녜요. 어디에 나와 있어요? 그게?
창 48:17-20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19.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이거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근데 달라요. 보실래요?]
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뜻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취향과 욕심에 이끌려서 사기와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이 등장하잖아요. 이삭, 야곱과 에서가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작은 자가 큰 자 위에 서게 되리라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들었습니다. 리브라, 마찬가지에요. 야곱? 이름 자체가 속이는 자에요. 평생을 얍삽하게 자기의 목적과 야망을 위해서만 산 자죠? 에서? 마찬가지에요. 자기의 욕심과 눈앞에 보이는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초개처럼 여겨버린 자들. 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 자기의 배,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던 자들이 오늘 본문 창세기 27장에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어때요?
똑같은 인물인 야곱이 등장하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되어버린 거예요. 아들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아버지, 장남은 므낫세에요. 그러니까 장남 머리에다가 오른 손을 얹으셔야죠, 라고 했더니 아냐,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게 아냐, 라고 하면서 손을 어긋 맞춰 축복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내 욕심과 내 꾀를 좇아 살던 어떤 이가 결국 험악한 삼을 통과하여 내 뜻이 아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부탁하는데도 아냐,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돼, 라고 어긋 맞춰 순종하는 자로 삶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의 인생인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삶이며 그게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삶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목적지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뭐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배를 위해서 하나님을 내 힘으로 동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가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가는 거예요. 나를 비우고 내가 낮아져서 나의 손해와 상황을 감수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 바로 교회의 본무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는 엉뚱하게 이삭과 에서의 삶을 살고 있어요. 이삭은 자기의 별미, 자기가 먹고 싶은 이 세상의 것, 자기의 쾌락,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축복을, 자기에게 좋은 것 주는 자에게 전해주려고 했어요. 그게 뭐죠? 여러분?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고 그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걸 뭐라 그래요? 무당의 주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오늘 본문의 제목을 주술의 시작이라고 붙였어요. 이삭을 묵사발 만든 거죠. 주술의 시작. 이삭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냐? 는 거예요. 약속의 자손이라는 이삭이 자기의 입에 맞는 별미를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개똥처럼 여기더라는 것입니다. 그거 한 점 얻어먹고 복을 빌어주더라는 거예요. 주술의 시작.
여러분 성경은 우리 교회에게 구원이란 무엇이며 교회의 본질과 본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해서 존재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책이지 절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것을 충족시켜 주고 여러분이 해결해야할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에요. 그런 건 한 줄,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 참 후손, 진짜 아들, 진짜 승리자인 예수의 삶이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한번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가 분명히 나타나겠죠?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했나 보세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통치권]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왕권입니다]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 기름진 하늘의 땅과 그 풍요한 하늘의 땅을 예수에게 줬어요. 그리고 모든 것들을 그 앞에 무릎 꿇게 하셨어요. 오늘 야곱이 탈취해낸 그 축복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는 거죠. 근데 그 비결이 뭐에요? 죽기까지 순종한 거라니까요. 이 세상에서 인기 얻고 이 세상에서 많은 돈을 벌고 높은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를 보여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낮아지고 비워지고 섬겨주고 사랑해줌으로 말미암아 승리자가 되는 이 역설을 이해하는 걸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이기는 자는’, 이렇게 이겼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러니까 교회는 낮아주고 퍼주고 섬겨주고 사랑해주는 것을 목적지로 삼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아들의 삶이에요. 그게 하늘나라의 왕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그 예수 그리스도,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가장 높은 곳에 등극하신 그 예수님의 자리에 신비주의 기복주의 실용주의 물질주의 번영의 신학 고지론, 이런 것들이 차고 앉아버렸단 말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기독교라고 합니까? 여러분. 무조건 번영하고 성공하고 많이 모으면 그게 장땡이에요? 방법은 어떠해도 상관없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는 개독교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개독교를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예수 믿는 성도, 아들들을 기뻐하시지 그러한 이 세상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 바벨론이 상징하는 그 세상에 물들어서 그 세상의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하는 개독교인들은 관심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을 쫓아가요. 여러분, 그건 절대 안 돼요.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바벨론에서 여러분을 뽑아내시는 분이에요. 거기에다가 밀어 넣고 거기서 벽에 뭐 바를 때까지 거기서 잘 먹고 잘 살아라가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은 거기서 뽑아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속에 때로는 그러한 문명이 낳은, 세상의 힘이, 세상 사람들이 가치라고 정해놓은 것들이 여러분 삶 속에서 빠져나가기도 하는 거예요. 그 때에도 내 안에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인 거예요.
그렇게 이상한 가짜를, 가짜 하나님을 전하는 이들은 절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진리를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예수 믿으면 무조건 잘 돼요.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병 나아요. 예수 믿으면 무조건 만사형통이에요. 소원성취에요. 안 돼요? 나한테 오세요. 내가 안수하면 다 돼요.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좋아해요. 근데 예수님은 절대 안 된다. 거기 가지 말아라, 라고 이야기하셨어요. 볼까요?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런 스승만을 쫓아다닌다는 거예요. 자기 욕심을 충족시켜주는 발언을 잘 해주는. 귀에 단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 그런 스승을 많이 두고]
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이야기에요. 가짜 스승들이 와서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그들을 많이 모을 거야. 그러나 네가 진리를 이야기하면 너는 고난을 받게 될 거야. 그러나 고난을 받아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라. 고난을 받아라, 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듣기 싫은 이야기라도 죄 이야기, 저주의 이야기, 심판의 이야기, 복음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보혈의 이야기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에요, 다 잘 될 거예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긍정의 힘, 잘 되는 나. 그래서 조엘 오스틴의 신학이라는 게 생겼어요. ㅎㅎ. 그런 이야기를 듣기 좋아해요. 하루에 삼천 번씩 이런 기도문을 외워보세요. 그대로 됩니다. 말에는 창조력이 있어요! 웃기지 말라 그러세요. 실지로 그렇게 되던가요? 그건 자기 최면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기독교는 없어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요. ㅎㅎ. 저도 여러분이 듣기 좋은 이야기 많이 해드리고 싶습니다. 어저께 우리 청년들이 여기 씨디실에서 성경공부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분이 이제 씨디를 사러 오셨어요. 그래갖고 제가 있다니까 저를 찾아오셨는데 앉아가지고 좌불안석. 어쩔 줄을 몰라 하세요. 내가 그래서 왜 그러세요? 그랬더니 무서워서요. ㅎㅎㅎㅎ. 아 왜 무서우세요? 그랬더니 몇 년 동안 설교만 들어갖고 제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인 줄 알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 진짜로 보니까 굉장히 무섭네요, 그러고 얼굴에 손을 얹으고 떼지를 않아요. ㅎㅎㅎ. 나이 드신 어른인데. 남자분이신데. 그래서 아니에요, 저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그러고 이제 좀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어, 아니네요. 그러시면서, 우리 이사 가면 마루를 깔아주시겠다는 분이 그분이시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분이 유년부 유아부 마루를 본인이 깔아주시겠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너무 무서웠대요. 왜 평소엔 그렇지 않으신 분이 설교를 그렇게 무섭게 하세요? 그러시더라고요, 저한테. 그런 이유에요, 여러분. 여러분이 무서우라고 제가 이런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누군가가 계속 그렇게 지적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요. 마귀는 이 세상이 너무 재미나고 너무 달콤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놨기 때문에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 주면 그걸로 끝이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그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전 굉장히 따듯한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러분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자주 못해드리냐 하면 그거는 다른 이들이 많이 해주고 있잖아요? 그리고 여러분은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시면 안 돼요. 잘 될 거예요. 소원성취 될 거예요. 병 나을 거예요, 그게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 지금은 이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잖아요. 우리가 기대해야 할 그 실체가 진짜로 존재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기세요! 가, 믿음으로 이기세요, 가 위로가 돼야지. 여러분의 삶 속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거예요. 그거는 아니란 말입니다. 허탄한 말이란 말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경험해보셔서 아시잖아요. 그게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거예요. 그 땐 하나님이 어떻게 할 거라고 그랬어요? 도망가라, 내 새끼들아. 그랬어요. 거룩한 곳에 믿음만을 가지고 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이고 내 귀에 아무 증거 아니 들려도 믿음만을 가지고 굳게굳게 걸어가고 있는 그런 성도들, 그들이 믿음의 자리에 엉뚱한 것, 기복 신비 이런 것들이 들어와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막 흔들어 버리는, 오히려 그 자리를 엉뚱한 것들이 꿰차고 않아 있을 때에 얘들아, 도망가라! 거기로 개떼처럼 모여라, 가 아니라니까요. 도망가라! 그랬다니까요. 근데 전부 거기 가 있어요.
막 13:6,14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내가 그로라, 가 에고 에이미에요. 내가 하나님이다, 에요. 내가 하나님이다. 꿩 잡는 게 매야. 내가 하나님이야. 이게 예수 잘 믿는 거야. 엉뚱한 게 거기 와 있단 말이에요.
14.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도망가라! 성경의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성과 묵시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물론 이 이야기는 AD 칠십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동시에 묵시로 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 멸망의 가증한 것이, 엔티오쿠스 에피파라스가 성전에다가 돼지를 갖다 놓고 그 돼지 피로 그 제사상을 그냥 전부 물들여버린 것처럼 이제 AD 칠십 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텐데 그런 일이 교회에게 계속해서 일어날 거라는 거예요. 이 신성한 하나님 앞에 와서 돼지 피 같은 세상 것들을 갖고 와서 그것들을 주고 받는, 그러한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거든 도망가라, 얘들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란 말입니다.
근데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라고 그러는데 여전히 그 안에 앉아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리를 돼지 피로 물들이고 있어요? 그건 안 되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도망가라, 도망가라, 도망가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망각하는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올바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목표지점이 어딘지를 매주 날카롭게 후벼 파버리는 그 앞에 서계셔야 돼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를 이 땅에서 불도저처럼 밀고 와서 오징어포를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 난 아니에요. 자기부인. 그랬을 때 우리가 은혜를 꼭 붙들게 되는 거고 그의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해 안 되는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난다 할지라도 나는 저주 받은 자인가 봐 이렇게 가시면 안 돼요. 자폭하시면 안 돼요. 아니요, 야곱도 손을 어긋 맞추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반드시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내어 모리아 산에 세우시는 분이에요. 여러분은 적어도 그 사람들 보다는 낫잖아요?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마누라 두 번씩 안 팔아먹잖아요. 그죠? 그러한 자도 그렇게 만들어냈는데 내 백성아,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반드시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겪은 것은 삶 속에서 험악한 삶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러나 그게 복이란 말입니다! 예수 잘 믿고 천국 가셔야 돼요, 여러분. 올바른 목적지 어디인지 우리는 잘 알죠? 네, 그리로 가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