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간까지 열흘동안 바울의 여정을 따라서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대로 바울의 경로를 따라서 성지를 다니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차를 타고 가도 이렇게 먼거리를 어떻게 복음만을 위해서 다녔을까, 그 많은 핍박과 매를 맞으면서도 지치거나 낙심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로마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서 무슨 마음이었을까, 그 죽음의 길을 가면서 두려웠다면 감당했을까? 그 답은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히스토리를 가슴에 담고 그 길을 걸으면서 바울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고 마지막 그 길이 두려움 없이 얼마나 행복한 바울의 마음이었나 알 수가 있었습니다. 천국가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죽음의 길을 걷는 그 길에서도 오히려 살아계신 주님이 내게 실제였기 때문에, 그 주님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당연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로마를 갔는데 생생한 마음으로 복음인 히스토리를 마음에 담고 가서 다시 보았을 때 바울이 어떤 마음이었고 그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증인으로 살았 주셨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사울) 바울은 자기가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조하는 증인으로 그의 죽음을 똑똑히 보았는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반겨 맞이한다면서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는 것을 보았고 스데반이 마지막 하는 말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데 그 당시 사울에게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이 모든것이 다 이해가 되고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기가막힌 영적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세 분수교회는 바울이 처형당한 곳을 기념해서 세운 곳이고 거기에 바울을 참수한 돌, 그 머리가 떨어져 나뒹굴었지만 그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그 머리가 세 번 튀었는데 그 자리마다 물이 솟았고 그 자리를 기념해서 세 분수교회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 순간까지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 실제였기에 마지막 죽음의 두려움보다도 더 행복한 바울, 죽이던 그들이 오히려 마음이 서늘했던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고 우리가 전한 히스토리였습니다. 너무 감사했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오늘 말씀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막연하고 못 믿는 사람들에게, 이래도 못믿겠느냐 하면서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택하신 분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1,4)
이사야가 예언할 때는 고레스가 등장하기 140년 전입니다.
아직 바벨론이 왕성해서 누구도 바벨론이 망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고레스’를 통해서 망하게 할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줄 알지만 결국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는데 그때 잘난 척하고 자기가 주인처럼 착각을 하는 것이 못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또는 악인으로 사용되는데 그들에게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리라”(3)
내가 오늘 이 순간에도 살아가는 것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도록 나를 택하고 지명하여 땅에 두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택하고 지명했다는 것 ‘이제부터 네 인생 내가 주관한다’라는 뜻입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제 그분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까? 무엇인가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이 나에게 하라 하시는 것, 하게 하신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일을 할 때, 고역이 있고 사명이 있고 성역이 있습니다.
고역을 죽지 못해서 하는 일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내가 해야 할 일 같지도 않은데 의미없는 일 같습니다. 그래서 늘 칭찬이 필요하고 이것이 없으면 불평과 불만이 따라옵니다.
사역은 사명감으로 하는 것인데, 이것도 나의 의지로 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기도 합니다. 해야 하는데, 알고는 있지만 너무 힘에 부칩니다.
성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바울이 마지막 죽음의 현장을 걸을 때 성역입니다. 나와 함께 걸어가는 주님의 손을 잡고 걷는 것 같습니다. 준비된 사람, 택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달라고 주님은 지금도 나에게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4) 하나님은 나를 꼭 집어서 ‘너 밖에 없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었다’ 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모든 일들이 사역을 넘어 성역이 되고 그분과 함께 그 길을 가는 즐겁고 행복한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 해 뜨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이가 없느니라”(5,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바벨론에 넘기셨습니까? 바벨론에 왔더니 우상들이 천지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 손으로 깎아서 만들고 절을 하며 오직 자기가 잘되고 자기 뜻대로 되는 소원만 비는 한심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제서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부터’(히11:3) 나왔다는 것이 이스라엘 땅에 있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이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사는 것 같지만 모든것을 운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내 인생의 여호와, 구원자. 이것이 확실하게 믿어져야 그 다음에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일본의 정리의 여신이라고 하는 <곤도마리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정리를 할 때 원칙이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입니다. 정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버리는 일인데 버리는 기준은 ‘설렘’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무리 아까운 물건이라도 그것이 자신을 설레게 하지 않으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설레게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나에게 소중하거나 의미있는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나의 영적생활도 이렇게 판단할수 있습니다.
‘복음이 나를 설레게 하는가?’ 저는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돈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생기가 도는 사람은 ‘돈의 사람’입니다. 자식이면 자식의 사람, 게임을 생각할 때마다 설레이면 ‘게임의 사람’입니다.
예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이는 사람은 ‘예수의 사람’입니다.
예수가 주인인 사람이고 주님은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예수를 믿고 있는데 왜 복음이 누군가에게는 들어도 들어도 장미향기 같아서 또 듣고 눈물 흘리고 감격하는데 왜 나는 그 냄새가 지겹고 힘겨울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분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설레게 하시는 분이셔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7) 창조주가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무슨 관계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나를 찾아 이 땅에 오셔서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죄값으로 피 흘리며 죽으셔서 나를 사시고 아들 삼으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자기 생명을 버려서 나를 사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나의 현실이 되시고 지금도 살아 함께 계심을 내가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14:17-18)
이것을 몸으로 아는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아도 행복하고 하늘이 환하게 보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네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나는 드디어 선한 싸움 다 싸웠고 드디어 달려갈 길도, 믿음도 끝까지 지켰다, 이제 내게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 행복을 알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누리고 산 사람이 바울이고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지금 이 시간 해와 달도 만드시고 평안도 환난도 창조하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면서 아들 삼아주신 나의 아버지, 오늘도 내게 무슨 일을 또 만드셔서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보일지 나는 지금 알지 못해도 분명한 것은 그분은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눈에는 내가 너무 잘 보이고 우리에게 성령으로 실제 살아계심은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1. 오늘 듣는 말씀으로 바울의 심정을 느낄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그렇게 살았다면 바울이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증인입니다. 나도 느낄수 있겠습니까?
2. 나를 택하신 분, 이제 네 인생을 내가 주관한다, 하시는 그분의 지명에 나는 무엇으로 응답하십니까? 고역입니까? 사역이나 성역이십니까?
3. 주님 때문에 설렘이 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