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사는 가지들의 행복
제 8 장
안디옥연대기
The Antioch Chronicle
주후 41년~47년(A.D. 41~A.D. 47)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20-21)
주후 41년(A.D.41)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크리스천들은 베니게(Phoenicia, 페니키아)와 구브로(Cyprus, 사이프러스), 그리고 수리아(Syria)의 큰 성읍 안디옥(Antioch)까지 나아갔다. 이들 크리스천은 그곳에 거주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집중 조명 : 수리아에 소재한 도시 안디옥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300마일(약 4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 오론테스(Orontes) 강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A.D. 100)에 의하면 안디옥은 로마(Rome)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다음으로 큰, 규모로만 보자면 전 로마제국에서 셋째 가는 도시였다고 한다. 당시 안디옥은 ‘동방의 여왕’, ‘아름다운 안디옥’ 그리고 ‘제국의 셋째 성읍’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안디옥은 로마와 페르사아 국경지대를 잇는 상업과 무역의 요충지이며 정치 및 군사적 교두보이기도 했다. 안디옥은 부유한 도시였다. 당시 거리에 가로등을 설치해 놓은 도시는 안디옥뿐이었다. 도시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간선도로는 잘 다듬어 광을 낸 돌로 포장되었고, 길을 따라 가로수가 심어졌다. 안디옥의 인구는 어림잡아 30만에서 50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 중 유대 인구는 2만 2천에서 5만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초대교회가 세운 ‘7인’(‘일곱 집사’로 알려진) 중 한 명인 니골라는 안디옥 출신으로서 유대교에 입문한 사람있다. 수리아의 안디옥은 장차 이방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할, 복음 선교의 핵심지로서 자리매김 된다.
안디옥은 1세기 ‘그리스로마 도시’의 표본있다. 이 도시는 각종 전염병의 온상이었다. 거리는 환자들로 가득했다. 가볍게는 눈이 붓거나, 피부발진을 앓는 사람으로부터 크게는 수족을 잃은 환자들이 즐비했다. 새롭게 이주해 온 사람들로 도시의 인구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거리는 항상 낯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시 전체가 불행 고통 위험 절망과 공포 그리고 증오로 가득 찼다. 중산층 가정은 보통 더렵고 붐비는 막사에서 살았다. 자녀 중 절반 이상이 태어나자마자 즉사하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또 대부분의 아이들이 편부 혹은 편모슬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인종 간의 대립이 심해 도시 전역에 증오가 만연해 있었고, 계속되는 외국인의 이주로 말미암아 인종문제는 나날이 심각해져만 갔다. 범죄는 창궐했고, 밤거리는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했다. 상당수의 거주자들이 집이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이 도시에 안겨 줄 것은 제국에서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줄 ‘새로운 문화’였다. 도시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희락, 소망, 자비, 가족애, 그리고 사회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수리아의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
A Church Planted in Antioch of Syria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받고 방방곡곡으로 흩어진 크리스천들 가운데 몇몇(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기독교인)은 안디옥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안디옥으로 도망쳐 온 크리스천 가운데 나손(Mnason)이라는 구브로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들과 함께 했으므로 많은 헬라 사람들이 복음을 믿게 되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안디옥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곧 안디옥 교회는 율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방인들로 가득 찬 교회가 되었다.
안디옥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전해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본래 구브로 사람인 바나바를 파송하여 그곳의 크리스천들을 돌보고 감독하게 한다(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크게 신뢰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바라보고 미칠 듯이 기뻐했다. 그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이 안디옥 교회에 용기를 북돋아주고 성도들을 격려해 주었다.
주후 42년(A.D. 42)
다소의 사울은 여전히 자기 고향인 길리기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사울은 심오한 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또 신비로운 경험이었기에, 자신이 육체 안에 있었는지 육체 밖에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사울은 어떤 연유로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 밝히진 않았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세 번째 하늘로 들려졌고, 그곳에서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디옥의 크리스천들
The Antioch Christians
안디옥 교회의 성도 수가 급속도로 불어나 이제, 바나바 한 사람이 감독하기엔 무리였다. 이때, 바나바는 사울을 기억했다. 또 그가 헬라어를 말할 줄 아라고 헬라 문화권인 다소 출신이라는 점과 주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역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 다소로 향했다. 사울을 만난 바나바는 그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1년간 안디옥에 머물면서 교회를 튼튼하게 했다. 바나바는 목회 전반을 담당했고, 사울은 그의 도제(徒弟)로서 바나바의 사역을 도왔다.
안디옥에서 사울은 구레네 사람 시몬(혹은 시므온이라고도 불림)의 가정에 머물렀다. 시몬에겐 아내오 두 아들, 루퍼스(Rutus)와 알렉산더(Alexander)가 있었다. 시몬의 아내는 사울을 자신의 친 아들처럼 여기고 극진히 돌봐주었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사람이다).
‘크리스천’(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갖게 된 것은 안디옥의 성도들이 처음이었다. 물론 성도들끼리는 크리스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크리스천’이라는 칭호는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붙여준 이름도 아니었다(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크리스천’이라는 호칭은 주로 헬라어를 말하는 안디옥 지역 사람들이 예수 믿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안디옥의 성도들이 끊임없이 예수를 증거 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 아버지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안디옥의 크리스천들은, 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사로잡힌바 되었기에, 입술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에 의한 이 새로운 움직임을 가리켜 ‘유일한 길(The Way)'이라 불렀다. ’유일한 길‘은 크리스천들이 구원의 방법과 생명의 길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했던 용어였다. 안디옥에서 성도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불린 반면, 팔레스타인 지방의 성도들은 ’나사렛 사람들‘(Nazarenes)이라고 불렸다.
안디옥 연대기의 중심부엔 중요한 등장인물 두 명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누가(Luke)와 디도(Titus)가 그들이다. 디도는 교회 안에서 영적인 훈련을 충분히 받은 후, 훗날 사도적 임무(교회 개척)를 담당하는 사역자가 된다. 누가는 이방인으로서 이곳저곳을 순회(여행)하는 의사였는데, 특히 드로아(Troas)나 빌립보(Philippi)같은 지역으로 자주 출장을 다녔다. 디도는 누가의 친동생이다.
다가올 기근
The Coming Famine
주후 43년, 그 해 여름(Summer 43)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들이 안디옥을 방문했다. 그 중 아가보(Agabus)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앞으로 큰 기근이 로마 전역에 닥칠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기근이 닥치게 되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디옥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구제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능력과 재산에 따라 기부했다. 안디옥 교회는 이 구호자금을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세웠다. 당시 유대 땅은 헤롯 아그랍바(Herod Agrippa)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헤롯 아그립바는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의 손자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부흥하였다. 이에 유대인 기득권층은 위협을 느겼다.
야고보 사도의 순교
James the Apostle Is Martyred
주후 44년 4월(April 44)
무교절 기간이었다. 평소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헤롯 왕은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이 크리스천들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세베대의 아들이자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를 무참히 죽였다. 야고보는 참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열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야고보의 죽음에 유대인들은 기뻐했다. 유대인들이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헤롯 아그립바는 베드로마저 잡아 옥에 가둔다. 여러 날, 여러 밤 동안 4인 1조로 구성된 군사들이 교대해 가며 베드로가 갇혀 있는 감방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헤롯은 유월절이 끝남과 동시에 베드로를 공개 처형하기로 마음먹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베드로가 풀려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베드로를 풀어내신다.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곧장, ‘요한 마가’(John Mark)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향한다(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었었던 그 장소다-역자 주). 그가 도착했을 때 그 집에 많은 성도들이 모여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문을 두드렸다. 그의 인기척에 로데(Rhoda)가 응했다. 문까지 다가가 베드로의 음성을 확인한 이 소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곧장 사람들에게 달려가 “베드로가 문밖에 와 있다!”고 소리쳐 말했다. 사람들은 로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 베드로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성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베드로는 간밤에 일어났던 기적에 대해 이야기했고 곧이어 야고보(예수의 이복형제-역자 주) 및 나머지 교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곳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헤롯은 베드로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밤 동안 옥문을 지켰던 간수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헤롯은 유대 땅을 떠나 가이사랴로 향했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는 두로(Tyre)와 시돈(Sidon)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정치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주후 44년, 8월 1일(August 1, 44)
가이사랴에 도착한 헤롯은 그곳의 주민들에게 멋진 연설을 했다. 그는 높은 왕좌에 앉았고, 또 은으로 치장된 화려한 왕복을 입고 있었는데, 태양빛이 닿으면 반사되어 나오는 빛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가 연설하는 동안 사람들이 환호하길 “왕은 영원불변하십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신(神)입니다!” 했다. 하지만 헤롯은 이처럼 불경한 말을 내뱉는 자들에게 꾸지람을 주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아첨을 좋게 여기며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그 즉시, 하나님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쳤다. 그는 내장기관에 통증을 호소하면서 군중들로부터 몸을 감췄다. 그 후로 5일 동안 위통증을 앓다가 숨을 거뒀는데 사인(死因)은 ‘회충’이었다. 회충이 그의 내장을 갉아먹은 것이다.
안디옥의 구호 기부금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다
Jarusalem Gets Relief From Antioch
재개된 기독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사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구호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안디옥을 떠났다. 그들은 이 여정을 디도와 함께 동행했는데,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대표자로서 디도를 선택한 것이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480킬로키터 떨어져 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울, 바나바, 디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구호자금을 전달했다.
이 세 사람은 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인 베드로, 야고보(예수의 이복형제-역자 주), 요한과 회동했다. 이 모임을 통해 사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지역의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도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사역의 짐을 함께 나눌 것을 권고했다.
할례당 소속의 ‘거짓 형제’들도 그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안디옥의 이방인들을 모세 율법의 굴레 속에 집어넣으려는 속셈으로 몰래 잠입한 할례당의 스파이였다. 이들은 회의의 안건을 슬그머니 할례 문제로 돌리면서, 할례 받지 않은 디도를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할례당의 주장에 설득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고 복음’(Law-free gospel)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울의 이야기를 인정해 주었다. 곧, 세 사도는 바나바와 사울에게 ‘교제의 악수, 친교의 오른손’을 내밀며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을 맺었다. 그리고 사울과 바나바의 주된 사역 범위는 이방세계가 될 것이며, 베드로의 주된 사역 대상은 유대인이 될 것이라는 점을 상호관에 인정했다.
예루살렘의 세 사도는 사울과 바나바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가난한 성도를 돕고자 하는 생각은 이미 사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훗날,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고질적 궁핍을 돕기 위해 자신이 개척한 모든 이방 교회로부터 후원금을 모은다). 사울, 바나바, 디도는 다시금 안디옥으로 향한다. 이 여정 가운데 바나바의 어린 사촌이 동참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도 불리고 ‘마가’라고도 물렸다(John Mark) ('요한‘은 그의 유대 이름이며 ’마가‘는 그의 로마식 이름이다. 그가 바로 마가복음의 저자이다).
특별한 기도모임
A Special Prayer Meeting
주후 47년 봄(Spring 47)
이제 안디옥 교회가 개척된 지 7년째 접어든다. 안디옥 교회의 다섯 성도가 모여 기도모임을 가졌는데, 이들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금식하며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했다. 아래는 이들의 이름이다.
* 니게르(Niger)라 불린 ‘시므온’(Simeon)
니게르(Niger)는 그의 라틴어 성(性)인데 그의 피부색이 검다는 것을 알려준다(Niger는 라틴어로 ‘검은색’이라는 뜻이다-역자주). 또한 시므온은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도 알려졌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이 바로 이 시몬이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Lucius)
* 마나엔(Manaen)
귀족출신.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젖동생일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막내 아들이다.
*바나바
*사울
포도나무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사는 가지들의 행복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다
Barnabas and Saul Are Sent
하늘 아버지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듯이, 또 그 아들이 열두 제자를 부르고 파송했듯이 이제, 성령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부르시고 교회 개척의 일을 위해 그들을 파송하신다. 열두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바나바와 사울 역시 '보냄을 받은 자' (사도, Apostles)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파송이 아무런 준비 없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바나바는 17년간 '교회'를 경험했다(예루살렘 교회에서 10년, 안디옥 교회에서 7년). 그는 또한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울 역시 5년 동안 안디옥에서 교회를 체험했다. 사울은 바나바의 가르침을 받았다. 시므온, 루기오, 마나안은 안디옥 교회를 대신하여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한 후,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들을 파송했다.
제 9 장
갈라디아 연대기
The Galatian Chronicle
주후 47년~50년
A.D. 47~A.D. 50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 13:14)
바울의 1차 전도여행(Ap쑈t이ic Journey) '미리보기'
* 총 기간: 2년
* 연도: 주후 47~49년
* 여행거리: 1,200마일(약 1,920킬로미터)
* 개척한 교회: 4개
비시디아의 안디옥 교회(수리아의 안디옥과 다름),
이고니온 교회,
루스드라 교회
더베 교회
* 교회 개척에 걸린 시간:
비시디아 안디옥 = 3~4개월,
이고니온 = 3~4개월
루스드라 = 3~4개월
더베 = 3~4개월
바나바와 사울은 수리아의 안디옥을 떠나 또 다시 여행을 떠난다. 이 여정의 리더는 바나바이다. '요한' 이라고도 불리는 파가' (John Mark, 이하 '요한 마가' )가 그들을 돕기 위해 이 여정에 동반한다. '요한 마가'는 사을과 바나바의 짐을 나눠들었고 몇 가지 필수품을 챙겨 운반했다. 그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 중 한 사람이었기에 마가의 동반은 두 사도가 외국 땅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세 사람은 실루기아(Seleucia)의 항구로 향했다. 실루기아는 수리아의 안디옥으로부터 2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이들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내려갔다. 구브로는 수리아의 안디옥으로부터 14해리 정도 떨어져 있다(약 26킬로미터).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다.
구브로를 방문하다
A Visit to Cyprus
주후 47년, 그해 봄
Spring 47
집중 조명: 구브로는 길리기아의 속도(屬島)이다. 구브로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이다. 섬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구리Copper의 어원이 바로 구브로Cyprus이다. 약 5천 년 전부터 구브로 섬에서 구리가 채산되었는데 이 후 이 섬은 '구리섬' Copper isand이라고 알려지게 된다-역자 주).
17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바나바가 팔았던 땅은 아마 구리 광산일지도 모른다. 섬의 동서 횡단 거리는 224킬로미터 정도다. 거의 모든 거주민이 그리스인(헬라인)들이었지만 유대인도 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요한 마가'는 구브로 섬의 동쪽에 위치한 살라미(Salamis) 마을에 도착했다. 살라미에는 큰 규모의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고 회당도 여러 개 있었다. 바나바와 사울은 회당에서 설교했다. 이후 '회당 설교'는 사울의 복음 전파 방법의 특징이 되었다. 사울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후에 이방인에게' 전했다.
세 사람은 섬의 동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나아갔다. 길을 가다 회당을 발견하면 그곳에서 설교했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도망쳐 왔던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 섬에 개척해 놓은 교회들을 찾아가서 그곳의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했다. 섬의 서편에 닿은 그들은 바보' (Paphos, 혹은 New Paphos라 불림)라는 마을에서 여장을 풀었다. 바보'는 구브로의 행정 수도였다. 그 곳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기둥에 묶인 채로 채찍질 당한 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은 것) 감옥에 갇히게 된다.
당시 구브로의 총독(Proconsul: 로마의 지방총독)은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이었다. 서기오 바울은 이 세 사람을 초청하여 이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해 듣고자 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그가 개인적으로 데리고 있던 바예수(Bar-Jesus)라는 마술사가 두 사도의 복음 설교를 무례히 저지했다(바예수는 엘루마 Elymas라고도 불렸음. 엘루마는 셈 언어로서 미술사' 라는 뜻).
이에 사울이 바예수를 꾸짖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이 그를 내리쳐, 바예수는 앞을 못 보게 되었다! 이 기적적인 광경을 목격한 서기오 바울은 곧 크리스천이 되었다. 이로써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나바와 사울의 첫 번째 이방인 열매(회심자)로 기록된다. 서기오 바울에게는 여러 친척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갈라디아 (Galatia) 지방의 비시디아(Pisidia)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서기오 바울은 두 사도에게 비시디이를 방문하여 자신의 친지들도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요한 마가', 이렇게 세 사람은 비시디아를 향해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갈라디아 남부 항으로 배를 타고 가다
Sailing to South Galatia
주후 47년, 그 해 여름 Summer 47
세 사람은 바보에서 출발, 지중해를 따라 밤빌리아(Pamphylia)의 버가(Perga)라는 마을까지 항해한다. 그동안 여행의 주도권은 바나바에게 있었는데, 이때부터는 사울이 이 여정의 리더가 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유대 이름인 사을 대신 그리스로마식 이름, 바울 을 사용한다.
집중 조명: 주후 1세기에는 여객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해로를 통해 여행하고자 하는 행객들은 상선이나 화물선에 여분의 공간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선박의 규모가 클수록 여행은 안전했다. 당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선박은 곡물을 운반하는 수송선이었다. 뱃삯은 그다지 비싼편이 아니었다.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동절기에 운항하는 선박은 없었다. 거친 기후 때문이다. 11월 11부터 3월 10일까지 해상 기후는 변덕이 심하다. 운항하기에 가장 적절한 기간은 5월 27일부터 9월 14일까지이다. 3월 10일에서 5월 26일까지 그리고 9월 14일부터 11월 11일까지는 비록 위험요소가 있긴 하지만 운항은 가능했다. 하지만 연중 어느 때든 상관없이 이방인 항해자들은 출항 전에 항상, 신의 전조(前兆)가 내리길 기다렸다. 그들은 출항 전 일찌감치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는데, 짐승의 배를 갈랐을 때 드러난 내장의 모양을 보고 항해의 일진을 점쳤다(바울이 로마에 가기 위해 탔던 알렉산드리아의 선박은 그 뱃머리에 쌍둥이 신, 카스토르와 풀록스Castor and Pullox의 두상이 붙여져 있었다. 이방인들은 카스트로와 풀록스가 폭풍으로부터 선박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사도행전 28:11).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요한마가가 탔던 선박의 운항 경로에는 에티지언 계절풍(Etesians, 지중해 동부에서 부는 건조한 북서풍-역자 주)이 골칫거리였다. 에티지언은 여름과 초가을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으로서 에게 해를 거쳐 남쪽으로, 지중해 동편에까지 닿는 바람이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은 해발 3,600피트(약 1,100미터) 높이에 자리하고 있는 성읍이다. 그곳에 가려면 디라스 산(Taurus Mountain)을 넘어야 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여행길이었다. 산은 험준했고 게다가 강도로 득실거렸다. 또 비시디아의 강들은 자주 범람했는데, 이 때문에 빠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바울이 “강도와 강의 위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고린도후서 11:26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버가에서 비시디아에 이르는 여정 가운데 겪었던 일들이었다. 주후 1세기의 일반 성인이 도보로 여행했던 거리가 하루 평균 32킬로미터임을 감안했을 때, 버가에서 비시디아까지 가는 여정은 대략 10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여행 중 바울 일행은 선술집 같은 여인숙에 머물렀을 것이다. 물론 유복한 로마인들은 이런 곳에 머물리 없다 왜냐하면 여인숙은 대체로 더러운 침실과 물 섞은 포도주, 덤터기 씌우는 주인, 도박꾼, 도둑, 창녀의 소굴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벌레가 득실대는 침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바보에서 버가로 가는 중, 배가 난파된 일이 있었다. 배가 난파된 것은 물론 디라스 산(Mount Taurus)에 자주 출몰했던 도적떼로 인해 '요한 마가'는 크게 낙심하여 여행을 중단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자신의 사촌인 바나바가 더 이상 이 전도여행의 리더가 아니라는 점, 또 바울이 회당 밖에서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자신감을 갖고 설교한다는 점이 '요한 마가'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 이 모든 요소로 인해 '요한 마가'는 향수병에 걸렸다. 그는 결국 여행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바울의 눈에 비친 '요한 마가'의 행동은 불성실한 포기로 비취졌다. 이 모든 일들이 여행에 차질을 빚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울의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세운 교회
A Church Planted in Antioch of Pisidia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땅에 발을 들였을 때, 그들은 안디옥이라 불리는 로마의 속령에 머물렀다-그곳이 바로 비시디아의 안디옥이다(수리아의 안디옥과 다름).
집중 조명: 로마정부는 남부 갈라디아의 정치 행정구역을 다음과 같이 나눴다. '비시디아(Pisidia), 리고니아(Lyconia), 브리기아(Phrygia).' 비시디아의 안디옥은 오늘날로 보자면, 터키의 서부 중앙구이다. 안디옥은 로마의 속령으로서 위치상 비시디아보다는 브리기아에 더 가까웠다 안디옥의 기술적 명칭은 '비시디아 근방 안디옥' 이다. 이 도시 전역에는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해 헌정된 기념건물들로 가득하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은 갈라디아 지방의 행정 중심지이다. 지식층은 주로 그리스인(헬라인)들이지만 인구의 대다수는 브리기아인이었다. 브리기아인은 수세기 동안 타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으로, 전혀 호전적인 기색이 없다. 실제로 '브리기아인' 이라는 말은 노예 신분인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깔보는 칭호이다. 안디옥에서는 헬라어와 브리기아어 모두 통용되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소수민족 사회를 훌륭하게 구성했다. 물론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는 그 도시에 유대교 회당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교 회당을 방문했다. 회당 모임 가운데 율법서와 선지서를 낭독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낭독이 끝나면, 초청받은 강연자가 회중들에게 권고의 말을 전하는 순서가 있었다. 회당 관료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회중 앞에서 할 말이 있으면 하라” 고 했다. 그곳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바울의 설교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전했던 설교와 똑같은 내용이었다. 바을은 스데반의 설교를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중은 유대인, 유대교로 입문한 사람들, 그리고 경건한 이방인(God-fearer)들로 이뤄졌다. 먼저 유대인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는다. 그들의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을 상징한다. 유대교 입문자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지칭한다. 그들도 할례를 받는다. 성례를 따라 목욕을 하며 희생제도 드린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로 서약한다. 그러므로 유대교 입문자들은 거의 유대인과 같아진다. 이렇게 유대교 입문자들은 회당의 정식 회원이 된다. 경건한 이방인(Godfearer)은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는다(앞 장에서 살펴본 고넬료의 경우가 바로 '경건한 이방인' 이다). 할례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회당의 정식 회원은 될 수 없다.
회당에서의 예배가 끝난 뒤, 사람들은 바울에게 다가가 “돌아오는 안식일에 설교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허다한 유대인과 유대교 입문자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다니며 평소 여러 가지 궁금해 했던 것들을 질문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십시오.”라고 말하며 권고했다. 바울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가 이미 이 땅에 왔다”는 내용으로 설교했는데 그의 설교는 소문을 타고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었다. 소문을 듣고 기대에 부풀어 있는 도시의 모든 주민이 하나같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회당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바울을 몹시 질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이 설교하려고 입을 열자, 이에 질세라 그의 말에 반격을 가하며 그를 힐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울의 몸이 아픈 것을 지적하면서, 그의 메시지는 다만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유대인들은 질병에 걸린 사람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쫓기듯 회당을 나와야 했다. 더 이상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두 사도는 이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바울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은 그를 ‘하나님의 사자’ 로 여겼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이 지역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나서였다. 유대인들은 이 지역의 이방인 관료 및 경건한 이방인들 중 귀족 부인 몇 명을 선동하여 그들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게 했다. 결국 유대인의 음모에 넘어간 이방인 관료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법적 추방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두 사도는 몽둥이와 각목으로 매를 맞았다(추방조치 과정 중 몽둥이로 때리는 것은 공식적인 절차였다). 이후 그들은 발에서 먼지를 떨어내고 도시를 떠났다.
비록 바울과 바나바는 이 도시에서 추방당했지만, 그곳에 교회를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공동체-바로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가 그것이다. 성도 대부분이 이방인이었다. 교회의 새신자들은 모두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다.
이고니온에 세운 교회
A Church Planted in Iconium
주후 47~48년
A.D. 47~48
매 맞은 흉터가 아물고 생채기에서 스며났던 피가 마를즈음, 바울과 바나바는 남동쪽으로 144킬로미터 떨어진 이고니온의 국경지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 거리는 어림잡아도 도보로 5일 이상을 가야하는 거리다. 두 사도는 비아 세바스테(Ⅵa Sebaste, 세바스테 가도는 주전 6년에 건설됨)라고 불리는 로마 군사도로를 택하여 걷는다. 그 길을 따라 가면 루스드라(Lystra)와 더베(Derbe)가 나온다.
이고니온은 그리스(헬라) 도시이다. 이고니온에서는 헬라어와 브리기아어가 통용된다. 늘 하던 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회당을 방문하여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했다. 두 사도는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다. 그들의 설교는 즉시 효과를 나타내어 수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뒤이은 이적과 표적을 통해 확증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안디옥에서의 아픈 경험이 이고니온에서도 반복되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두 사도를 질투하여 무리 가운데 큰 동요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은 여러 사람들과 공모하여 두 사도를 대적했다. 결국 이고니온의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유대인들과 함께 했고, 다른 한 무리는 바울과 바나바 편에 섰다.
몇몇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도시 관료들에 의해 두 사도를 돌로 치려는 음모가 계획되었다. 낌새를 차린 바울과 바나바는 곧장 그곳을 떠났다. 폭동이 일어날 줄 알고 미리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리고니아(Lyconia)의 두 도시 루스드라와 더베로 나아가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촌락에서도 복음을 전파했다.
물론, 불미스런 일로 이고니온을 떠나야 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몸을 남겼다. 이 도시에 하나님의 생명력과 그의 성품을 드러낼 공동체가 세워진 것이다.-바로 이고니온 교회이다.
루스드라에 세운 교회
A Church Planted in Lystra
바울과 바나바는 비아 세바스테를 통해 남쪽으로 30킬로미터를 더 걸어가 루스드라라는 로마의 속령에 도달했다. 루스드라는 조그만 언덕에 세워진 원시 형태의 부락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옛 리고니아 방언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헬라어도 사용했다. 루스드라는 로마의 속령이었기 때문에 법정이나 로마군 내에서는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루스드라에는 유대교 회당이 없었다. 이는 루스드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 거의 없다는 증거이다.
루스드라에는 오래된 전설이 하나 있다. 그리스의 신 제우스(Zeus, 쓰스)와 해르메스(Hermes, 허메)가 루스드라를 방문했다는 설이 그것인데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 집집을 돌아다니며 머물 곳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거절했고 마지막으로 한 노부부가 그들을 자기 집으로 들여 잠자리를 제공했다. 이에 그들은 노부부의 집을 궁전으로 바꾸었다. 그 궁궐이 바로 제우스의 신전이라는 것 -이것이 전설의 골자이다(제우스의 신전은 도시의 입구에 위치해 있다-역자 주).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날 때부터 절름발이였던 남자를 치유했다. 이 기적을 목도한 리고니아(루스드라) 사람들은 헤르메스가 바울의 형상으로, 제우스가 바나바의 모습으로 나타나 루스드라에 귀환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바울을 해르메스로 생각한 이유는 두 사도 중 바울이 주로 '말하는 자' 였기 때문이다.
두 사도를 신으로 착각한 제우스의 사제는 황소를 끌고 또 화환을 들고 성문 앞(제우스 신전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두 사도에게 희생제를 드리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 챈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황급히 군중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치길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희생제물을 바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일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로 내려오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루스드라의 군중을 동요해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게 했다. 곧 리고니아(루스드라) 사람들은 한때 신으로 추앙했던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어 바울을 돌로 치고 그를 성문 밖으로 내던졌다. 거기서 피홀리며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한 젊은이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크리스천으로 회심한 루스드라 출신의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디모데(Timothy, 혹은 디모두스 Timotheus)이다. 그의 어머니 유니게(Eunice)와 그의 외조모 로이스(Lois) 역시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신앙인들이었다. 유니게와 로이스는 유대인이었으나, 디모데의 부친은 헬라인이었다. 루스드라의 성도들은 쓰러져 있는 바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울이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온전히 치유 받았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여전히 돌에 맞은 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자국들은 영구히 상흔으로 남게 된다. 이후 바울은 그의 육신에 '예수의 흔적'이 있음을 증거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짐을 꾸리기 위해 다시금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이들은 루스드라를 떠난다. 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낼 공동체를 남겼다. 이제 그곳에 교회가 섰다-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이 도시 안에 살아있게 된 것이다.
더베에 세운 교회
A Church Planted in Derbe
두 사도는 남동쪽으로 110킬로미터를 더 내려가 국경에 인접한 작은 마을, 더베에 도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가이오(Gaius)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 더베에도 교회가 세워졌다-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공동체가 말이다!
더베에서 복음 전하기를 마치고, 바울과 바나바는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비록 그들을 쫓아내고 추방했던 도시들이었으나 두 사도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을 차례로 방문한다. 각 성읍에서 짧게나마 그곳에 세워진 교회를 찾아가 성도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또한 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해서도 일러주었다. 각각의 교회에서 두 사도는 금식하고 기도한 후, 성도 가운데 나이 지긋한 사람들 중 가장 성숙한 사람을 분별해 내어 교회의 리더로 세웠다. 그리고 그들을 '장로' (elders)라 칭했다. 방문한 교회를 축복하고 또 교회의 모든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의탁한 후, 바울과 바나바는 또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집중 조명: 두 사도의 여행 시간을 계산해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데 걸린 시간은 각 교회당 3~5개월 정도로 볼 수 있다. 향후 바울의 교회개척 사역은 이 패턴을 따른다. 그가 교회 기반을 구축하고 견고히 다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았다. 이렇게 단기간 동안에 개척한 뒤, 바울은 어떠한 지도자도 세우지 않고, 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동안 교회를 내버려 두었다.
그 후 바울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성도들을 만나러 갈라디아 교회로 돌아온다. 남부 갈라디아 지방의 크리스천들 대부분은 교양이 없는 이방인이다. 물론 그들 중,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 지역의 이방인들은 과거 불결한 이교도들이었다. 그들이 자라온 배경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미신,' ‘거짓 신들’ '도덕적 타락' 이라 할 수 있다. '경건한 이방인 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회당 모임에 참석하는 이방인들이다. 유대인들은 깔끔하고 교양이 있으며 양심을 지닌 교회 성도들이었다.
새로이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사람 중,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는 노예였다. 또 많은 수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freedmen)이었다. 이들 중 얼마는 로마 군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상인들도 몇 명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 로마 세계의 노예와 일반인들을 비교했을 때, 눈에 보이는 구별이나 교육적 수준의 치이는 없다. 노예 대부분은 제조업이나 가사를 돌보는 일에 종사했다. 노예가 양산되는 주된 경로는 전쟁이었다. 패전국의 병사 흑은 국민들이 노예가 되는 일이 많았다. 때때로 해적들에 붙잡힌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빚을 지고 갚지 못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의 자손들은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흑 그 자손이 자유케 되었을지라도 종종 노예로 팔려나가곤 했다. 여자일 경우엔 더욱 그랬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freedmen)은,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권리 모두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 자유민들은 사회적으로 과거 노예 신분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불안한 지위이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이 극빈층을 이루었다.
남부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 가운데 성경책을 소유한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신약성경은 아직 기록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지역에 세워진 네 개의 교회 중 한 교회, 그 중 유대인 성도 한 명이 구약성경 중 한두 사본(두루 마리) 정도를 소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갈라디아의 교회 중 그 어떤 교회도 구약성경 전권을 구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 지역의 모든 성도들에게 완성된 성경 사본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유익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전체 인구 중 오직 5~10%만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이다(제국 전체적으로 90%에 달하는 인구가 문맹이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많다던 도시라고 해봤자, 인구의 30%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또 그러한 헬라도시도 몇 개 안 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서부 지역에선 문맹률 95%를 자랑하는 도시들로 즐비했다). 서신 대필자, 속기사, 법원 서기, 그리고 드문드문 등장하는 시인들을 다 합쳐도 인구의 4%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도 나이가 40이 되면 원시안이 되기 때문에 글을 쓸 땐 사자생(寫字生, 전문적으로 대필해 주는 비서)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 역시 서신을 쓸 때 사자생을 통해 기록했던 것이다(로마서 16:22을 참조하라). 하지만 바울은 항상, 서신의 마지막 부분을 직접 자기 손으로 적었고 친필로 서명했다. 이렇게 한 것은 이 서신들이 바울의 것임을 확증하는 차원에서였다(갈라디아서 6:11, 데살로니가후서 317, 고린도 전서 1621). 바울은 편지 여백에 친필로 글을 적은 경우도 있었다(빌레몬서 1:19). 저자의 신임을 얻은 사자생들은 서신의 형식이나 문체, 심지어 글의 내용마저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다.
갈라디아 지방의 빈민들이 겪는 가난은, 그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교회 성도 중 '자유민'(freedmen)의 생활수준은 '인간 생존의 극한' 그 자체였다. 그들은 매일같이 저자에 나가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들이 일하면 하루치 임금을 받는데(로마 화페로 1데나리온) 이 돈으로는 가족들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1세기 하층민들의 주된 양식은 야채, 빵, 포도주, 올리브, 생선 그리고 과일이다. 고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먹을 수 있었고 그 횟수도 굉장히 적었다. 보다 높은 계층 사람들은 훨씬 자주 고기를 먹었다.
로마 속령 도시들은 로마의 양식을 따라 건설됐다(로마 건축 양식에 대해선 이후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요약하자면, 도시는 더럽고, 악취 나고, 안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요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앓았고 영양실조에 걸렸다. 남성 평균수명은 45세이고, 여성은 38세 정도였다(제국 전체 인구 중 절반은 다섯 살 이전에 죽었다). 여성들은 대개 십대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임신 가능한 나이 동안은 계속 출산하면서 가족 수를 늘렸다. 가족계획이나 산아 제한은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출산된 아기 가운데 25%는 첫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반 정도는 10세가 되기 전에 죽었다. 유대인 어린이 중 30%는 18세 되기 이전에 죽었다. 영유아 사망 수치는 이방인에게서 더 높게 나타났다. 때때로 부모가 가난해서 돌볼 수 없는 경우, 종종 딸아이는 집 밖에 버려졌다(집 밖, 먼 곳에서 죽도록 내버려 둔다). 1세기 사람들에게 갈라디아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살기 끔찍한 장소로 자리매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수리아의 안디옥을 떠났던 두 사도가 먼 길을 여행하여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암울한 땅 갈라디아였다. 갈라디아 교회들을 둘러싼 환경은 이방인의 우상 숭배 문화, 도덕적 타락과 풍기 문란한 문화였음을 기억하라. 게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전파되는 새로운 신앙을 배격하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처럼 얼핏 보아도 극복하기 힘들 것 같은 문제들이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단지 3~5개월 정도만을 보내며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이 들은 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후 곧바로 떠났다. 잠시 동안 갈라디아 지역을 재방문한 적은 있지만, 그 이후 갈라디아 사람들은 거의 2년 동안 두 사도의 머리카락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전파한 복음은, 갈라디아 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고귀하고 강력한 것이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은 한때, 미신에 사로잡히고, 미개하고, 이기적이며, 침통해 했던 이방인들을 변화시켜 서로 사랑하고, 함께 노래하고, 웃고, 즐거워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락을 환히 빛내는 공동체로 만들었다.
어떻게 이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겨우 두 사람뿐인데, 그것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일구어낼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영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계획 선상에 그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두 사도 역시 부름 받고, 훈련받고, 파송되었다. 그들보다 앞서, 열두 제자가 그랬던 것처럼, 두 사도 역시 그들 안에 내주하셔서 그침 없는 생명력을 더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이것이 바로 변화의 원동력이다.
갈라디아 교회엔 신분이나 계층의 구분이 없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자유자나 노예, 부유한 자, 가난한 자의 구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성도들 서로가 한 가족처럼 여기고 살았다. 이들은 로마의 속령이 아닌, 천국의 '속 령' 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신인류’ 였던 것이다. 성도 모두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신다. 또 함께 수고하여 일한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를 반긴다. 자녀를 함께 양육하며 다른 이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돌본다. 장례를 치를 때도, 자신의 가족을 떠나보내듯 함께 슬퍼하고 위로해 준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공유했던 이 사랑과 희락은 훗날, 로마제국의 근간마저 흔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주후 49년
A.D. 49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난 바울과 바나바는 밤빌리아(Pamphylia)에 도착했다. 그들이 남방 갈라디아에 처음 도착해서 그리스도를 전파했었던 곳이 바로 밤빌리아의 버가(Perga)라는 마을이었음을 기억하라. 두 사도는 밤빌리아에서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가 밤빌리아 해안에 걸쳐 있는 아달라(Attalia) 평원에 도착했다. 거기서 배를 타고 처음 자신들을 파송했던 곳,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게 된다. 이렇게 1차 여행은 끝난다. 바울과 바나바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그들 앞에서 이 여행 가운데 일어났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했다. 두 사도는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약 1년간 머무른다.
한편 로마에선, 글라디우스 황제가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겠다는 황제령(皇帝令)을 공포한다. 수토니우스(Seutonius)라는 역사가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메시01)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표명하며, 서로 대립하고 소란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헬라인이나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간주되었기 때문에, 로마로부터 추방당하는 사람 중에는 유대인이 아닌 크리스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든 황제의 칙령에 의해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를 떠나야 했다. 추방된 유대인 가운데 많은 수가 헬라 도시 고린도(Corinth)로 이주했다. 이들 가운데 로마계 유대인인 아굴라(Aquila, 본도 출신)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Priscilla, 로마 태생) 가 있었다.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했다는 소문에, 제국 전역의 이방인들은 이전보다 더 심한 증오심과 따가운 눈초리로 유대인들을 대했다.
안디옥을 방문한 베드로
Peter Visits Antioch
베드로가 수리아의 안디옥을 방문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베드로는 이방인과 겸상하며 교제하길 즐겼다. 하지만 이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들리자, 그곳의 할례당원 몇몇이 베드로를 만나러 안디옥으로 내려왔다.
안디옥에 도작한 할례당원의 손에는 야고보(예수의 이복형제)가 써준 허가서가 쥐어져 있었다. 이 할례당원들 모두는 율법주의자였다. 게다가 유대주의자들(Judaizer)로서 유대교의 관습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데 열광적임은 물론, 남들도 자기들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도착했을 당시, 바울은 부재중이었다.
이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더 이상 이방인과는 겸상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당신이 습관적으로 이방인과 교제하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적인 성도들은 분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행동이 교회 안에 물의를 빚은 것입니다. 게다가 교회 밖에서도 당신의 행동에 대한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큰 걸림돌이 됩니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투사들 은 이방인과 친분 맺는 것을 배신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에, 당장 이방인과 교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당신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는 사도들을 큰 위험에 빠뜨릴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 두려운 나머지, 이방인과 겸상하기를 중단하고 유대인과만 따로 모여 식사하기 시작했다. 안디옥에 거하는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의 예를 따라 유대인끼리만 식탁에 둘러앉곤 했다. 심지어 바나바도(처음 안디옥에 파송된 사도) 이방인과 겸상하기를 중단했다.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은 이곳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곧 분노를 터뜨리며 베드로의 위선에 대해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유대주의자들 갈라디아 지방으로 가다
The Judaizers Visits Galatia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온 베드로는 이 사건에 대해 몇 명과 이야기 나눴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갈라디아 지방 남단에 개척된 여러 이방인 교회의 소식을 예루살렘 성도들 앞에 보고했다. 이 보고를 듣고, 일단의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지방으로 가서 바울과 바나바가 개척한 교회 네 곳 모두를 차례로 방문했다. 이 유대주의자들의 무리 중에 우두머리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바울은 이 우두머리를 가리켜 '육체의 가시'(thorn in the flesh)라고 말한다.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 이 '육체의 가시' 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한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가시를 제거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 앞에 놓여 있는 모든 환난 가운데서 그를 건져주신다. 바울의 몸에 박힌 육체의 가시-바울의 사역을 무너뜨리려고 애썼던 유대주의자 우두머리-는 바울이 그리스도로부터 놀라운 계시를 받고 또 엄청난 영광을 체험하는 가운데, 교만하지 못하도록, 그를 약한 상태로, 또 겸손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갈라디아 남부에 도착한 유대주의자들은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형제들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리고 갈라디아 지역의 새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 예루살렘은 이 땅의 중심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임명받은 열두 사도만이 진정한 복음을 전할 권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오지 않았다. 또 그리스도로부터 임명받지도 않았다.
* 바울은 회심 후, 잠시 동안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의 사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에게 복음의 기초 원리들을 가르쳐줬다. 사도들은 바울에게 오직 자신들이 가르쳐준 복음만을 전하도록 허가해 주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떠나 길리기아로 내려간 바울은 이방인들이 받아들이기에 적합하도 록 복음의 내용을 수정했다.
*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에는 결함이 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할례, 전통, 율법이 하나님께서 주신 관례라고 믿고 이것을 지킨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자였기 때문에 이 어려운 부분을 생략한 채로 복음을 전한다. 예루살렘의 사도들 및 성도들은 이같은, '율법의 구애를 받지 않는' 바울의 복음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직 모세 율법의 준수가 병행될 때에만, 예수 믿는 신앙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고 성화시킬 수 있다.
* 열두 사도 가운데 으뜸은 베드로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베드로의 면전에 대고 그를 책망하는 거만함을 보였다! 이로써 바울은 열두 사도의 사역과는 아무 관련 없는, 자기만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freelancer)로 판명 되었다.
* 바울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없다. 이방인에게는 할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반면, 유대인에게는 할례를 이야기했다. 바울은 기회주의자다. 그는 환경에 맞춰 복음의 내용을 변경한다.
한바탕 휘젓고 난 후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를 떠났다. 그들의 말을 들은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어떤 이는 율법으로 득의(得義)하게 되기를 추구하며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났다. 몇몇 성도는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서 “왜 우리에게 '완전한 복음'(할례의 내용을 포함한)을 전해주지 않았습니까?”하고 항의했다. 당시 수리아의 안디옥에 머무르고 있던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로부터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받고 당혹해 했고 또 분노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다
저술년도: 주후 49년
발 신 지: 수리아의 안디옥
수 신 자: 남부 갈라디아의 교회들(비시디아 안디옥 교회, 이고니온 교회, 루스드라 교회, 더베 교회). 이 교회들은 개척된 지 1~2년 정도 되었다.
집필동기: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크리스천(기독교) 문학작품으로는 첫 번째이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를 배격하는 기념비적 서신이다. 바울은 이 서신을 빌어,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을 꾀어 모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했던 모든 주장을 반박했다. 갈라디아서는 기독신앙의 '마그나 가르다(대헌장)이다(마그나가르다 Magna Carta: 1215년 국왕의 실정에 영국 귀족들이 반발, 런던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으로 하여금 승인케 한 현장으로서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역자 주). 의롭게 되고 성화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로 가능한 것이다. 편지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의 브리기아 노예를 언급한다. 그는 노예' 라는 단어(또는 '노예' 로부터 파생되는 단어를 총 16번이나 사용했다. 바울이 사용한 다음의 여러 은유적 표현은 '자유라는 개념과 상반된다: '굴레' '속박' '구금' '무지한 아이' 계속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보신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복음을 지키려는 열정으로 인해,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매몰찬 은유적 표현은 물론 그들의 명예를 위해하는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는다(예를 들면, 바울은 “할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는' 행위이며, 할례를 주장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수족부터 절단'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바울의 다른 서신에는 바울 서신의 특징이랄 수 있는 '감사의 기도' 가 적혀 있지만, 갈라디아서에는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 편지를 받아 보고 '다른 복음 (갈 1:8-역자 주)을 버릴 것이라 확신했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갈라디아서를 읽으십시오.
집중 조명: 당시의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땐 파피루스지를 이용했다. 가난해서 파피루스 종이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은 ostraca라 불리는 도편(陶片, 깨진 도자기 조각)을 이용했다. 파피루스지는 파피루스 식물의 줄기를 한데 모아 압착시켜 만든 가볍고 질긴 종이다 일반적으로 파피루스지의 크기는 미국 규격 제지와 같다. 긴 내용의 글을 적을 땐, 파피루스지 몇 장을 풀로 붙여 이은 다음 그 끝에 나무 막대를 달아 돌돌 말아둔 종이를 사용했다(이것을 ‘두루마리’scroll라고 불렀다). 글을 쓸 땐 두루마리를 펴서 썼고, 쓴 후엔 다시 말고 실로 묶었다. 중요한 문서의 경우 실로 묶고 그 위에 밀랍을 녹여 봉인했다.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잠시, 당시에 이런 두루마리 하나를 '한 권'(a volume)이라고 불렀다. 보통 두루마리의 길이는 11미터에 달한다. 책의 수를 세는 단위 '관에 해당하는 영단어는 volume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 volumen이다. volumen은 '무언가 돌돌 말려 있는 것' 이라는 뜻이다. 작가들은 volume(두루마리) 길이에 맞춰 글을 썼다. 누가는 두 개의 두루마리 길이에 해당하는 글을 썼다. 누가복음, 사도행전이 그것이다.
양피지 역시 편지를 적을 때 사용되었다(딤후 4:13 참조). 양피지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파피루스지보다 값이 비쌌다. 거의 모든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두루마리에 글을 적은 반면, 몇몇 신약기자들은 책(condex: 여러 장의 종이를 한데 모아 묶은 책 모양의 현대식 습자지)에 기록했다. 필기구로는 갈대를 깎아 만든 펜이 있었고, 검댕과 고무풀을 물에 개어 만든 검정색 잉크가 사용되었다. 종이에 기록된 모든 글자는 대문자였다. 성경 원문에는 띄어쓰기나 구두점, 장과 절의 구분은 없다(이것들은 훨씬 이후, 편집자들에 의해 첨가된다). 평민은 제국의 우편제도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환을 통해 서신을 왕래 하였다. 바울의 서신서들(그리고 나머지 다른 신약서신들)은 코이네(Koine) 헬라어로 기록 되었다. Koine 헬라어는 로마제국의 일반 대중, 상인들 그리고 각종 일터에서 사용된 공용어였다.
포도나무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사는 가지들의 행복
에루살렘 공회
The Jerusalem Council
주후 50년
A.D. 50
다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과 바울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할례문제에 대해 정면적인 토론을 개시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 역시 구원받기 위해선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주장에 격렬하게 반박했다.
이에 안디옥 교회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과연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예루살렘의 열두 사도, 장로들, 전 예루살렘 성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바울과 바나바(그리고 몇 명 더)를 예루살렘 교회로 보냈다.
바울과 바나바는 남으로 내려가면서 베니게(Phoenicia, 페니키아)와 사마리아의 성도들을 만나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 보고했다. 베니게와 사마리아의 성도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이윽고 두 사도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온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 그리고 장로들은 이들을 환영해 주었다. 두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고했다. 하지만 몇몇 할례당원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격렬한 공방전이 진행되었다.
베드로는 :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고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후 회중 가운데 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바울과 바나바가 입을 열어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이 펼쳐 보이신 기적과 표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이들이 언급한 표적과 이적에 대해 '이것은 하나님께서 두 사도가 전한 은혜의 복음을 승인하신 표식이다.' 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이복형제인 야고보가 입을 열어 베드로의 논지를 정리해 주었다. 베드로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을 위하여, 이방인은 반드시 다음의 사항을 지켜야 한다. 첫째, 이방인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섭취해선 안 된다. 둘째, 음행을 피해야 한다. 셋째, 목 졸라 죽인 짐승(피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은 짐승)의 고기를 먹어선 안 된다. 넷째, 피를 먹어선 안 된다. 우리는 상기 열거한 네 가지 사항 외, 여타의 짐을 이방인에게 부과할 수 없다.”
온 교회가 야고보의 제안에 동의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교회는 만장일치로 야고보의 의견에 동의했고 성령께서는 이들의 결정 가운데 함께 하셨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결정사항을 이방인 교회들이 알 수 있도록 이 내용을 문서화하였다(공문을 적었다). 그리고 열두 사도(The Twelve)와 교회의 장로는 두 명의 선지자를 선택하여, 안디옥으로 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여정에 동참토록 했다. 이는 두 사도가 안디옥 교회에 공문을 전달할 때, 공문의 내용이 두 사도의 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의 결정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즉 두 명의 선지자를 공문의 증인으로 세운 것이다. 두 선지자는 '바사바'(Barsabbas)라고도 불리는 유다(Judas) 그리고 실라(Silas)였다(실라는 실바노Silvanus라고도 불렸다).
바울, 바나바, 유다, 실라는 수리아의 안디옥을 향해 출발했다. 이들은 안디옥에 도착한 후 교회를 방문하여 공문을 전달했다.
안디옥의 성도들은 공문을 읽고 기뻐했으며 큰 용기를 얻었다. 유다와 실라는 얼마간 안디옥에 머물면서 성도들을 격려하고 교회를 견고케 하였다. 꽤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한 안디옥 교회는 두 선지자를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떠나보내며 그들 편에 평안의 안부를 전했다. 두 선지자가 떠난 후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계속 머물면서, 지역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여러 유대인 교회에 닥친 위기
Crisis in the Jewish Churches Of Palestine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특히 지주들이나 기득권층으로부터의 박해가 심했다. 제한된 농경지는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득권층에게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은 연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토지를 경작해야 했다. 다시 말해 강제 노동자로 전락해야 했던 것이다. 부유한 지주들은 크리스천의 소유지를 강탈해 갔다. 어떤 지주는 크리스천의 신앙을 비난하면서,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법정에 몰아세우기도 했다.
동시에 그리스 물건의 대량 유입은 '부유 상인' 계층의 탄생을 기능케 했다. 몇몇 크리스천들은 무역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교회 내의 부유한 성도들은 과도한 편애를 받았다. 왜냐하면 가난한 성도들이 혹여나 그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두려워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부유층 성도들을 극진히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마음은 더욱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가 공회를 통해 내렸던 결정 사항이 그들의 귀에 그릇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소문의 내용을 보자면, 다소 사람 바울의 영향 아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유대인 성도들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들은 또한 바울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고, 심하게 왜곡된 상태로 듣게 되었다.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에 대하여 들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소 사람 바울은 선행과 구원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친다.” 이에 유대인 크리스천은 이것이 열두 사도의 공통된 견해라고 믿고, 방종을 일삼는 등 세속적인 삶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또 정제되지 않은 속된 말이나 비난하는 말로써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부유한 자에게는 아첨하였다. 몇몇 세속적인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었다. 또한 교회에 병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이 예수의 이복형제인 야고보의 귀에 들렸다. 야고보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이러한 여러 가지 폐단을 뿌리 뽑기로 결심했다.
야고보가 '야고보서' 를 쓰다
저술년도: 주후 50년
발 신 지: 예루살렘
수 신 자: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유대인 크리스천들
집필동기: 예수의 이복형제 야고보는 '의로운 야고보' 흑은 ‘공정한 야고보’ 라고 불렸다. 이 별칭을 통해 그가 율법준수에 신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박해받고 환란당하는 시기에,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또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과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에 대해 그릇된 소문을 전해 들었을 때, 야고보는 그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전한다.
야고보는 '율법의 일과 '믿음의 일'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또 “진정한 믿음은 선한 행실을 생산해 낸다”고 명백히 이야기했다(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이점을 명백히 언급했다. 갈라디아서 5:6). 야고보는 교회 내에 만연한 세속주의를 질책했다. 그는 부자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훈계했고,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부자들에게 질타를 가했다. 절제되지 않은 속된 ‘혀’는 옳지 못하다고 지적해 주었다. 또한 몸이 아픈 사람은 장로들을 초청해 치유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라고 가르쳤다. 야고보서에는 예수의 '산상수훈' 내용이 20번 이상 언급되어 있다. 또한 구약의 '지혜 문학' 으로부터 많은 부분이 인용되었다(예를 들면, 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