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가족이냐?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장)
귀신을 내쫓으시는 예수
마가복음에서 예수께서 하신 대표적인 일은 단연 귀신 축출입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첫 번째 이적은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입니다(1:21-28). 이후에도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은 부단히 이어집니다(1:34, 39, 3:11).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이들에게 주시는 능력도 귀신을 내쫓는 권능입니다(3:15). 6장에서 제자들을 두 명씩 짝하여 여러 마을로 파송하실 때도 이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십니다(6:7). 복음서 중 가장 짧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에서의 “귀신”이라는 명사는 다른 복음서들보다 월등히 많이 나타납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도 넓은 범위에서는 귀신 축출에 포함됩니다. 악마가 질병을 일으킨다고 보는 고대 사회의 일반적 이해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귀신 축출, 누가 행하는 이적인가?
범상치 않은 일, 예를 들면 귀신이 쫓겨 갔다거나, 불치병이 나았다거나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과학적 세계관에 사는 오늘날 사람들은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며 의심합니다. 그런데 고대 세계에서 초월적 존재가 초월적 일을 행한다는 생각은 상식이었습니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 속에 사는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그 이적은 누가 행한 것인가?”에 관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면 제우스 신의 일이요, 바다에서 배가 뒤집혔다면 포세이돈 신의 일이며,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아프로디테 여신이 행한 일이라고 보는 그런 방식입니다.
모세가 행한 이적을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하였듯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탄도 할 수 있다는 전제가 성서에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단, 귀신이 쫓겨 나갔다면, 일단 귀신을 축출한 한 존재는 쫓겨 간 귀신보다 더 크고 강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먼저, 어떤 귀신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도망간 귀신보다 더 강력한 악마(사탄, 더 높은 서열의 귀신)가 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집에 돌아오신 예수와 갈릴리에 퍼진 소문(20-21절)
예수께서는 집에 돌아오셨습니다(20절, 공동번역 참조). 이때 예수의 집은 갈릴리의 산골 나사렛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주변 마을입니다. 갈릴리에 티베리아스나 세포리스 같은 신도시들이 세워지면서 생겨난 대이동 시기에, 예수의 가족은 갈릴리 해안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추정됩니다. 예수께서는 일찍이 집을 떠나 세례 요한의 공동체에 입문해서 세례를 받고, 요한이 잡힌 후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여 활동하다가 집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이야기는 갈릴리 전역에 퍼졌습니다. 돌아온 예수에게 많은 무리가 몰려들었고, 그들을 상대하느라 예수 일행은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20절). 그렇게 찾아온 이들은 귀신을 축출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이었겠습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 나서는데, 그들은 예수의 친족들입니다. 친족들은 “예수는 미쳤다”는 또다른 소문 때문에 예수를 붙잡으러 나섭니다(21절). 친족의 일원이 그릇된 언행으로 물의를 빚거나 구설에 오르면 그 집안이 나서서 사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를 제지하러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찾으러 나선 가족의 이야기는 곧 중단되었다가 31절에서 이어집니다. 그 사이(22-30절)에 예수와 서기관들 간의 논쟁이 끼어듭니다. 이 논쟁이 ‘예수는 미쳤다’는 구설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알세불 논쟁 (22-27절)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입니다. 정황상,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의 소문에 대해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서기관들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이며, 율법과 전통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위를 지녔습니다. 상황을 살펴본 서기관들은 그들은 “예수가 ‘바알세불(그 집의 주인, 시리아 지역의 신)’이 들렸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결론 내립니다. 이 서기관들의 주장은 그대로 예루살렘과 유대 사회의 공식 입장과 같은 성격을 지닙니다.
이런 주장이 가능한 것은, 신이나 사탄의 세계에도 서열이 있다는 보편적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서열을 정하는 싸움이 벌어지듯, 신들이나 악마들도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경쟁하고 다툽니다. 말하자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이 자기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다른 하급 귀신들에게 힘을 행사하는데, 예수의 귀신 축출은 그와 같은 맥락이라는 얘깁니다.
강한 자를 결박하고 … 세간을 강탈한다 (27절)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을 응대하여 그들의 논리를 비판하십니다. 내적인 분쟁은 반드시 공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바, 사탄들이 서로 분쟁하며 쫓아낼 리가 없다는 취지입니다. 하여, 예수의 귀신 축출은 바알세불의 내부 권력 다툼이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27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하는 귀신 축출 사역의 의미와 목적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강한 자(귀신, 사탄)를 결박(축출)하여 그 세간(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강탈(해방)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전체 사역을 망라하고 요약하는 정의(定義)입니다. 귀신 축출은 예수의 능력이 귀신보다 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건이 아니라, 악한 힘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시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귀신 축출은 영적 싸움과 승리의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해방이고 구원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통치)가 임하였음을 선언하고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28-29절)
이어서 매우 신학적인 선언이 천명됩니다.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blasfhme,w) 일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를 얻지 못한다”(28-29절)는 선언입니다. 십계명은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등을 중죄로 지목합니다(5-10계명). 하지만 이런 죄보다 훨씬 무거운 최악의 죄는 하나님(신성)모독입니다. 1-4계명의 금기들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 모독죄로 간주됩니다. 모독죄라는 명목으로 스데반은 즉결처형을 당했고, 예수께서도 신성모독의 혐의로(막2:5-8) 십자가형을 당하셨지요. 그런데 그 모독죄까지도 용서된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용서를 얻지 못한다고 단언하십니다. 하나님 모독도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성령 모독은 용서를 얻지 못한다는 게 무슨 얘긴가요? 사실, 성령 모독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맥락상으로는, 서기관들이 자행하는 일이 성령 모독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귀신 축출을 사탄의 일로 규정해 버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모독이 하나님을 거부함이라 할 때, 성령 모독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거부함입니다.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성서의 고전적인 언명이지만, 죄는 용서된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견지에서 보면, 죽음에 이르는 이유는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야의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이 죽는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용서의 은혜(구리뱀)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민21:8-9; 요3:14-15). 성령을 모독함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용서와 은혜를 거절함과 같습니다. 용서를 거절하고 있으니 용서될 길이 없고, 은혜를 거부하고 있으니 은혜가 작동할 여지가 없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심이 아니라, 용서의 가능성을 스스로 소멸시킨 것입니다.
집 밖에 있는 예수의 가족들(31-32절)
이야기는 예수를 붙잡으러 찾아 나선 가족들(21절) 이야기로 되돌아옵니다. 그들은 어느 집에 계신 예수를 찾아냅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사람을 보내서 예수를 불러냅니다(31절). 무리가 예수께 알리는 바에 의하면,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32절). 집 밖으로 나오라는 요구를 담은 메시지입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집”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묻고 대답하며 대화하시는 장소입니다(2:1; 9:28; 9:33; 10:10). “집”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산, 들, 바다와 달리, 예수의 제자들과 같은 친밀한 이들과 함께하는 자리로서, 복음서 기록자나 독자들에게는 “교회”로 인식됩니다. 집(교회) 밖으로 나오라는 권유는, 박해 속에 있었던 마가복음 공동체가 직면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마가복음 공동체를 향해 “집 밖으로 나오라 (예수를 떠나라)”고 회유한 이들은 가족들이었고, 협박하고 끝내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한 이들은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유대 당국이었습니다.
누가 내 가족이냐? (33-35)
걱정해서 찾아온 가족들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는 충격적입니다(33-35절). 예수께서는 혈육인 자신의 형제와 어머니를 가족으로 칭하지 않습니다(33절). 대신에, 예수께서 계신 집에 둘러앉아 끼니마저 잊은 채로(20절)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무리를 가리켜 ‘나의 가족’이라고 부르십니다(34절). 그들이 예수의 가족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혀집니다. 고대 세계에서, 가족은 철저히 아버지를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하나님의 자녀)이 예수의 가족입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혈족이 하나요, 공식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요, 예수께서 계시는 집에 함께하는 이들이 하나입니다. 예수의 가족은 혈통이나 육정에 의하지 않습니다(요1:13). 종교적 권위를 지닌 선언이나 결정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알려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예수의 가족입니다. 집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비방과 위협과 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집 안에 머무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소문이나 다른 이의 견해에 자신의 판단을 맡기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갑니다. 예수와 함께함으로써 그들은 용서를 신뢰하고 해방을 경험합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하시는 일(귀신 축출)이 하나님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