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스타크래프트의 열기도 조금씩 사그라드는 감이 있습니다만 여전히 최강이죠. 전 좀 늦게 시작해서 아직 테란만 조금 하고 있습니다만, 하다 보니까 스타크래프트가 왜 인기있는지 알 만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어쩐지 세계에서 한국이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를 주도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블리자드사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감사패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요? IMF 때에도 한국의 컴퓨터 관련 업계는 스타크래프트 덕분에 망하지 않았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리스의 신들은 스타크래프트의 상당한 고수들이었습니다. 여러 맵 중에서도 가장 좋아한 것이 유한 자원의 트로이 맵이었죠. 신들은 주로 길드를 짜서 배틀넷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우스가 경영하는 게임방에서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 길드와 아레스, 아폴론, 아프로디테 길드가 장장 10시간에 걸쳐 벌인 그들의 환상적인 트로이 맵 전쟁은, 수백 년 동안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져 오다가 호메로스라는 시나리오 작가가 그 스토리를 자세히 재현하여 책으로 내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트로이 맵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맵의 세로로 바다가 놓여져 있어서 지형은 크게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동쪽 3시 방향에는 테란족의 트로이가 있고, 서쪽 9시 방향에는 저그족의 그리스가 있습니다. 게임이 시작되자 테란 측에서는 커맨드센터를 벙커로 에워싸고 열심히 마린을 뽑아대는군요. 그 위로 몇십 대의 배틀크루저가 떠있습니다. 저그 측에서는 업그레이드된 오버로드들이 저글링과 히드라를 싣고 바다를 건너 테란 지역으로 향하고, 가디언과 퀸 수십 마리가 진로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이 판의 주인공은 이 두 부대이지만 그들의 양 옆에는 동맹군들도 버티고 서서 열심히 병사들을 뽑아대고 있습니다.
드디어 히드라 러시가 개시되었습니다. 뮤탈리스크들이 엄호하는 가운데 오버로드에서 내린 저글링과 히드라가 러시를 시작하자 테란 측의 1차 마린 방어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테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히드라 러시를 마린과 골리앗으로 막아내고, 부서진 벙커와 상처 입은 마린을 SCV와 메딕이 쉴새없이 치료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초반에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저그의 동맹군들은 1시와 5시 방향에 있는 테란의 동맹군 기지를 공격하기도 하고 괜히 러커를 테란 기지에 던져놓기도 합니다만, 그 어느 하나도 효과적인 공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게임은 훌쩍 10시간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저그의 동맹군 한 부대가 후퇴합니다. 주력군의 사령관인 아가멤논 장군과 동맹군 사령관인 아킬레우스 장군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기면서 화가 난 아킬레우스 부대가 서쪽에 있는 자신들의 기지로 철수하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저그 쪽의 공조체제에 이상이 생기자 헥토르가 이끄는 테란 군의 배틀크루저 부대가 그 틈을 타고 대규모 반격에 나섭니다. 순식간에 저그 측 진영은 혼란에 휩싸입니다. 대형 공격 유닛들이 헥토르 장군의 (치트키라도 쓴 것 같은) 막강한 배틀크루저 공격에 무참히 짓밟히고 그 뒤를 따라서 마린 러시가 저그족의 지상 원정군을 거의 바다까지 몰아내기에 이릅니다. 시즈 탱크는 사이언스 배슬이 확보해준 시야 덕분에 효과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후퇴해 있는 아킬레우스 장군과 가장 친했던 파트로클로스의 부대가 헥토르군의 공격으로 전멸해 버립니다. 그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복수를 위해 당장 전선으로 복귀하고, 그때부터 신적인 손놀림과 눈짓으로 테란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죠. 이렇게 해서 저그족 연합군은 테란족의 벙커 바로 앞까지 밀어닥칩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배틀크루저 부대를 전멸시킨 뒤 자신도 디스커넥티드됩니다. 이젠 테란족도 결사적으로 최후 항전에 나섭니다. 양측 모두 필사의 실력으로,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이 키보드를 두드려 댑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본격적인 전투에 뛰어들지 않았던 부대가 하나 있었습니다. 저그족 아가멤논 부대의 동맹군으로서 프로토스족을 이끌고 있던 오뒤세우스 장군의 부대입니다. 게임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다크 아콘을 소환해서 몰래 테란군 진영으로 보냅니다. 다크 아콘이 테란군 방어선의 일부를 마인드 컨트롤하는 데 성공하자, 그 틈으로 뮤탈리스크 부대와 퀸이 파고들어 테란의 커맨드 센터 하나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작된 임페스티드 마린의 러시가 테란군의 최후 방어선을 붕괴시킵니다. 테란군 기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히드라 러시…. 장장 10시간의 게임의 승자는 저그와 프로토스 동맹군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입니다.
터미네이터 제우스
지난호에서 우리는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그리하여 신이 될 수 있었던 인간과 신이 되지 못한 인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호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영웅들의 시대입니다.
영웅!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의 개념은 분명합니다. 영웅은 신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아버지 쪽이 신이든(대부분 영웅들의 아버지는 제우스죠) 어머니 쪽이 신이든 상관은 없습니다만, 적어도 어느 한쪽의 혈통에 신이 있어야 합니다. 혈통이 신과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영웅의 신성한 정도가 달라집니다. 어디 한번 영웅들의 이름을 외워보죠.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미노스, 아가멤논, 페르세우스, 오뒤세우스, 아킬레우스, 카드모스, 오이디푸스… 끝이 없군요. 이 사람들이 살아서(물론 신화와 전설 속에서 말이죠) 돌아다니던 시기를 뮈케나이 시대라고 합니다.
때는 대체로 기원전 1600년에서 1200년 사이. 뮈케나이는 옛날 그리스의 도시 이름입니다. 뮈케나이를 중심으로 하여 옛날에 뮈케나이 왕국이 있었는데, 이 뮈케나이 왕국은 그리스 남부 전체를 다스리는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뮈케나이 왕국의 펠롭피데스 왕가와 테바이 도시의 카드모스 왕가 그리고 아테나이의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 뮈케나이 시대가 바로 수많은 영웅들의 활약기였죠.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전설은 대부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영웅들의 전성시대도 언젠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제우스는 마치 터미네이터처럼 지상에서 영웅 종족을 모조리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들을 하나하나 없애려면 귀찮기 때문에 한꺼번에 쓸어내 버리려고 일으킨 게 바로 트로이 전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트로이 도시가 멸망한 시기인 기원전 1200년경에 어떤 북방민족이 그리스로 쳐 내려와 뮈케나이 문명을 끝장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민족은 오늘날의 터키와 바다 건너 이집트까지 공격해 내려갔고(이집트에서는 `바다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로 400년 동안 그리스 반도는 암흑시대에 들어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400년 뒤에 그리스에 다시 문명다운 것이 나타났을 때 이미 거기에는 신이고 영웅이고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버린 것입니다. 제우스는 영웅들을 터미네이트 하면서 자기 자신도 터미네이트 해버린 셈입니다.
훌륭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들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요즘 남자들은 일과 여자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여자를 택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미인이라면 더욱 그렇겠죠(이건 뭐 딱히 여성차별적 발언을 하자는 건 아닙니다. 돌은 던지지 말아 주세요).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외모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만큼 얼굴이 잘생기고 체격이 건장하니까 그 내면도 틀림없이 아름다울 거야"라고 말이죠. 그래서 영웅들을 보면 하나같이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합니다. 반대로 겉모습이 못생긴 사람은 그 마음도 못돼먹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트로이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한번은 오뒤세우스가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병사가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왕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우리를 이용해 먹고 있으니 이제 우리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서 왕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그런데 이 사람은 한쪽 다리를 절고 안짱다리에다가 곱추이고 짱구였습니다. 오뒤세우스가 이 자를 막대기로 내리치자 다른 병사들은 이 자를 동정하기는커녕 맞아도 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는데도 말이죠. 트로이 전쟁이라는 건 지배자들이 여자 하나를 놓고 흥분해서 벌인, 정말로 무의미한 전쟁이었습니다. 당사자들이야 그렇게 생각 안 했겠지만.
그리스와 트로이가 10년 동안 싸운 원인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여자 하나 때문이었습니다(그리스 사람들은 여자 문제에 상당히 민감했었거든요). 그 여자의 이름은 헬레네.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닙니까? 헬렌, 엘레나, 엘렌 등등 말이에요. 이 여자가 얼마나 예쁘냐 하면, 한번은 전쟁이 한창일 때 그녀가 트로이성의 성벽 꼭대기에 나와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원래 그리스 메넬라오스 왕의 아내였는데,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녀를 납치해다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이것입니다). 헬레네가 나타나자 전쟁터가 일순간 조용해지고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황홀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 때문이라면 트로이군과 그리스군이 이토록 오랫동안 힘들게 싸우는 것도 당연하지. 헬레네는 정말 여신처럼 아름답군 그래."
트로이 성이 함락된 뒤, 메넬라오스는 성의 구석구석으로 헬레네를 찾아 헤맸습니다. 생각해 보면 10년 동안의 이 지겨운 전쟁은 모두 다 그녀 하나 때문이었습니다(물론 그 배경에는 제우스의 차가운 계산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있었지만). 그러니 당장 그녀를 죽여버리려는 생각이었겠죠. 하지만 그녀를 찾아낸 메넬라오스의 마음속에서는 증오심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여자는 인간이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게 아니었을까요(좀 느끼하군요).
블러드·워(Blood War)의 시작
이 전쟁은 한 명의 신이 장난 삼아 던져버린 황금사과에서 시작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주는 사과'라는 라벨이 사과 위에 붙어 있었습니다. 당장에 헤라 여신, 아테나 여신, 아프로디테 여신이 자기야말로 이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생각해보면 헤라는 최고신 제우스의 아내, 아테나는 나름대로 프라이드가 강한 여신, 아프로디테는 사랑문제가 전공인 신이었습니다. 이 세 여신이 와서 서로 판결을 내려달라고 하자, 입장이 곤란해진 제우스는 자기 대신 인간 세계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에게 미녀 컨테스트의 심사를 떠맡겨 버렸습니다. 어쩌면 제우스는 이 사과 하나가 만들어 낼 영웅시대 몰락의 운명을 진행시키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릅니다.
파리스는 세 여신의 이와 같은 질투 사이에서 당황했습니다. 여신들은 각자 자기를 최고의 미녀로 선택해주면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뇌물공세였죠. 헤라는 지상의 모든 왕국을 다스리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테나는 모든 전투에서 그가 승리하도록 해주겠다고 했고,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프로이드라는 사람이 말하길 사람에게는 세 가지 본능, 즉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이 있다고 합니다. 파리스도 그 본능에 가장 가까운 걸 택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미녀와 결혼하는 대가로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헬레네는 이미 그리스 메넬라오스 왕의 아내였습니다. 아프로디테는 파리스를 그리스로 보내 그녀를 납치해오게 합니다.
그러자 파리스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헤라와 아테나가 그리스 영웅들의 마음속에 분노를 타오르게 했습니다. 트로이 같은 야만족의 인간에게 우리의 미녀 헬레네를 빼앗기다니!(이제까지 봐서 알겠지만 그리스의 영웅들이란 상당히 단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웅인 것은 머리가 좋다거나 지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잘생기고 힘이 세고 무엇보다도 신의 혈통이기 때문입니다. 혈통이 나쁘면 귀족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리하여 당시 그리스 전역의 모든 영웅들이 트로이 원정대에 모여듭니다. 아시아의 트로이를 멸망시켜 버리자! 그렇게 모여든 영웅들이 데려온 병사가 10만 명. 배가 1200여 척.
한편 트로이에서는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려오자 난리가 납니다. 트로이 시민들은 그녀의 신성한 아름다움에 모두들 넋을 잃었고, 파리스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은 헬레네를 절대로 다른 나라에 넘겨주지 않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하기에 이릅니다.
트로이 해안에 도착한 그리스군이 최후 통첩을 보냅니다. 지금이라도 헬레네를 내놓고 배상금을 준다면 순순히 물러나겠다. 다급해진 트로이왕 프리아모스가 아폴론의 신전 델피에 가서 신탁을 얻어 보니, 트로이가 9년간 버티다가 10년째 되는 해에 함락되고 프리아모스 왕의 일족도 멸망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트로이의 영웅들은 운명에 맞서보기로 하고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물론 영웅들이야 자기들 일이니까 각오가 되어 있었겠지만 병사 하나하나한테 `너 싸울래 아니면 싸우지 말까?'하고 물어본 건 아니겠죠. 천한 평민들이야 그저 귀하신 분들의 뜻에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
마린처럼 죽어가는 병사들
9년 동안 숱한 병사들이 죽어갔습니다. 신들도 두 패로 갈라져서 서로 자기가 응원하는 부대가 이기도록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부탁했습니다. 제우스는 제우스 나름대로 이번 기회에 인간 세계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전쟁을 질질 끌었습니다. 제우스는 영웅들을 부추겨서 전쟁터로 이끌어 내고는 그 영웅의 칼로 한꺼번에 수백 명의 병사들을 죽여 나갔습니다. <<일리아스 designtimesp=22969>>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산봉우리의 숲이 불길에 타오를 때 그 빛이 멀리서 보이는 것처럼, 온 부대들이 전진을 시작하자 청동의 갑옷과 무기에서 번쩍이는 빛이 저 높은 하늘에까지 솟았다. 막사에서 떼를 지어 몰려나온 병사들이 스카만드로스 평원으로 돌진해 나가자, 온 천지가 달리는 발소리와 말발굽소리로 메아리쳤다. 봄철 외양간에 우유통이 넘치자 파리 떼가 새까맣게 몰려드는 것처럼, 아카이아군(그리스군)은 물밀듯이 트로이아군을 향하여 밀려들었다. 아가멤논 왕은 한복판에 서있었다. 그의 눈이며 머리는 우레의 신 제우스를 닮았고, 허리에 두른 띠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같고, 가슴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같았다. 많은 소의 무리 중에서 큰 황소 한 마리가 두드러져 보이듯이, 이날 제우스신은 많은 장수와 호걸들 가운데서도 아가멤논 왕을 유달리 돋보이게 했다.
…아가멤논 왕은 쓰러진 둘의 시체를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병사들이 가장 많이 몰려 혼전을 빚고 있는 곳으로 달려들며 부하들에게 소리쳤고, 그들도 그의 뒤를 따라 덤벼들었다. 보병은 적의 보병을 쫓고 기병은 역시 적의 기병을 쫓아 덤비며 마구 베었다. 싸움터에는 먼지가 구름처럼 이는 가운데서 군사들이 아가멤논 왕 앞에서 무더기로 쓰러져 갔다.
그러나 제우스신은 헥토르를 먼지와 화상, 유혈과 살육에서 멀리 벗어나게 해주었다. 아가멤논은 부하들을 격려하며 헥토르를 추격했다. 이렇게 스카이아 성문 가까이 참나무 있는 곳까지 추격하면서 들판에 처진 자들을 무찌르니, 그의 창이 나는 곳마다 수많은 적병이 수레에서 떨어져 나자빠지는 병사와 엎드려 쓰러지는 병사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서부 개척시대에 백인 사냥꾼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몇 명 죽였는지를 가지고 자신의 용맹을 과시했습니다. 중세 유럽의 마녀 사냥 열풍 때에도 마녀 판정관들은 자기가 화형에 처한 마녀가 몇천 명에 이른다고 자랑하곤 했죠. 찰리 채플린이 그랬듯이, 한 명의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병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평민들 하나하나의 생명을 생각해 주는 건 영웅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마린 하나하나를 아까워하면 블러드·워를 승리로 이끌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와 트로이의 병사들은 소모적인 전투 속에서 마치 마린처럼, 저글링처럼 죽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