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6/10
공정은 정의의 덫이다 (4)
♣.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에 속하는 대한민국에서 ‘평등’을 외치지 않고 모두 ‘공정’을 외치는 데는 숨은 의도가 있습니다. 사실 공정은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는 논리처럼 보이지만, 깊은 의미에서 보면 그들의 특권을 지켜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후보들이 평등을 외치지 않고 너나없이 공정을 외쳐댄 것은 그들이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지요.
과연 공정이 실현되면 대한민국이 좋은 사회가 될까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이들이 우울증에 빠져 있고,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이곳이 행복의 나라로 바뀔까요.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는 불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입니다. 우리의 생활에도 불평등이 만연해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불평등과 차별, 학벌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거듭 이야기해야 할 것은 절차적 공정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입니다. 시험에 붙은 자는 모든 것을 갖고, 시험에 떨어진 자는 모든 것을 잃는 사회는 사회적 정의가 결여된 사회입니다. 승자가 되더라도 패자와 6:4 정도로 나누어 가져야 정상적인 사회인 것이지요. “억울하면 승자가 되라”는 것은 사회의 논리가 아니라 정글의 논리입니다. 한국에서는 무한경쟁이라는 정글의 논리를 빛나게 하는 개념으로 ‘공정’이 쓰이고 있는 겁니다.
공정과 정의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개념입니다. 사실상 동일 선상의 가치를 가진 개념이 아닌 것이지요. 공정은 규칙이고, 정의는 원칙입니다. 공정은 수단이고, 정의는 목적입니다. 무엇보다도 공정은 시장의 논리이고, 정의는 사회의 논리입니다. 어찌 보면 공정은 경쟁을 더 치열하게 관리하겠다는 논리입니다. 경쟁을 더 합리적으로, 더 가열차게, 더 빈틈없이, 더 숨 막히게 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선언이자, 경쟁의 패자는 더욱 죽음으로 내몰겠다는 결의입니다. 공정경쟁, 공정거래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정당화하는 방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공정이 정의를 가로막는 알리바이로 기능합니다.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을 보세요. 공정 논리가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할 때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약자들의 정당한 권리 구제조차 불공정하다고 공격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공정은 정의를 구현하는 공정이 아니라, 정의를 무력화하는 공정입니다. 한국 사회는 공정의 덫에 걸려 정의의 들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공정 이데올로기에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입니다.
♣. 성적으로 줄 세우기 위한 도구, 시험
지금 한국에서 기만적 공정을 정당화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가 바로 교육입니다. 교육이 사회를 정의로운 방식으로 개선하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불평등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제도적으로 영구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아직도 교육의 문제를 단지 선발 과정의 공정성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까지도 한국에서 교육개혁을 한다고 하면 의레 입시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정성 문제가 중심의제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공정을 명분으로 기계가 채점하는 수능시험은 사유를 죽이고, 개성을 짓밟고, 자유를 억누릅니다. 기계가 채점하는 명명백백한 정답의 세계에서 우리 아이들은 사유도, 개성도, 자유도 없는 강박적 정답의 독재를 내면화합니다. 넷 혹은 다섯 중에 하나의 정답이 있는 세계에 갇힌 아이는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를 꿈꿀 능력을 잃습니다.
한국에서 시험은 학생의 지적 능력을 파악하여, 취약한 능력을 보완하고 장점을 발전시키는 데 활용하는 교육적 보완제가 아니라, 오로지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학생의 지적·사회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성적 격차를 명확하게 만들어 확실한 등수를 부여하는 것이 시험의 목표입니다. 수능시험이 끝난 다음날의 풍경을 한번 보세요.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변별력입니다. ‘올해에는 수학이 쉬웠다. 국어가 어려웠다’ ‘변별력이 낮아 걱정이다’ 따위의 기사들뿐입니다. 시험의 내용이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지를 묻는 기사는 없습니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시험과 정반대의 양상인 거지요. 바칼로레아 철학 문제가 발표되면, 프랑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이 주제로 함께 토론합니다. 한국 교육은 변별력을 위해 교육을 희생하는 전도된 교육입니다.
수능시험의 또 다른 문제점은 바로 상대평가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지적 수준이 아니라, 성적 순위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학생은 서로에게 경쟁자이자 적이 됩니다. 저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활동가들과 함께 헌법재판소에 상대평가 위헌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상대평가 체제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경쟁시키고 옆 친구보다 한 시간이라도 더 자지 않고 한 문제라도 더 맞혀야 한다고 주입한다. 학생들에게 경쟁에서 살아남으라고 강요하고 친구를 경쟁자로 만드는 사이, 우리 사회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잃고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누군가를 짓밟고 거둔 승리에 대한 강요, 단 1퍼센트의 변별을 위한 평가는 그 목적이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파괴적이고 비교육적이며 반인간적이다.”
한국의 시험 제도, 특히 수능시험은 한국 교육의 모든 문제점이 응축된 제도입니다. 수능은 한국의 엘리트를 미성숙한 인간으로, 대한민국을 시대착오적인 국가로 만드는 주범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강박적이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조급하고, 폭력적이고, 표피적인 인간으로 자라는 원인은 우리 아이들의 성격이 한국의 시험 방식에 조응한 결과입니다. 나아가 우리 아이들은 세상에는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신념화한 결과, 깊은 사유의 공간을 결여한 무사유의 인간,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한 노예적 인간으로 길러집니다.
우리는 경쟁-능력주의-공정 이데올로기라는 오랜 ‘야만의 트라이앵글’에 사로잡혀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아이들, 병든 사회, 소멸하는 국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해온 경쟁, 능력주의, 공정 이데올로기는 그 본질에 있어서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만든 야만의 트라이앵글입니다. 한국인들은 경쟁 이데올로기,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공정 이데올로기라는 3중의 감옥에 갇힌 수인입니다.
경쟁 교육은 한국인을 잠재적 파시스트로 만들었고, 능력주의는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전락시켰으며, 공정주의는 한국 사회를 불평등과 차별의 사회로 고착시켰습니다. 이런 총체적 난국과 절망적 파국을 목전에 두고도 우리는 이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릴없는 무력감에 빠져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 김누리, 「경쟁은 야만이다」, 2024년, 126-131쪽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