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산중-부산고-동아대 출신의 심제훈 선수.
기아와의 경기때, 비떄문에 경기가 취소 됬을때, 엄정대 선수와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올 그란운트 플레이어입니다. 외야도, 내야도 소화해낼수 있는 유망주 이죠. 하지만, 롯데에선 외야유밍주가 많으니, 내야수로 수비임명했습니다.
심제훈 선수는 동아대 재학시절, 전국대회에서 장타력을 과시했었습니다. 특히 1998년 심제훈 선수는 전국대학야구 봄철리그와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등에서 발군의 장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동아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0년에는 능력을 인정받아, 미국에서 열렸던(2000. 7. 5 ~ 7. 13) 한-미 국가대표 대항전에 조용준(연세), 정대현(경희), 강귀태(동국), 채상병(연세), 허일상(단국), 그리고 신명철(연세), 이현곤(연세), 박한이(동국), 박용택(고려) 등과 같이 국가대표로 뽑히게 됩니다.
200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지명 3라운드에서 해태에 계약금 4천만원과 연봉 2천만원이라는 비교적 높지 않은 금액에 계약을 한 심제훈 선수는 외야수임에도, 대학시절까지 내, 외야를 가리지 않고 소화했기에 주전 2루수 김종국의 백업을 볼만큼,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수비력을 과시했습니다. 김성한 감독의 신임을 얻어, 입단 첫해인 2001년, 모두 55경기에 나와 타석에 들어섰지만 0.087의 타율을 기록한 심제훈 선수는 아직은 어린 나이(1978년생)인만큼, 아직은 성장을 지켜보아야 할 선수임은 분명합니다.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심제훈 선수가 프로 통산 2년 동안 기록한 도루는 단 3개입니다. 그러나 2001년 4월 22일, 심제훈 선수의 첫 도루가 바로 해태구단의 통산 2,400개의 팀 도루의 기록(2,234경기만에 달성)이었습니다. 기록의 도루를 달성한 만큼, 자이언츠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 있는 기록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엄정대 선수도..ㅎㅎ
1997년, 제31회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단국대를 맞이하여 타격에서 맹활약을 펼친 건국대의 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홈런과 잇단 타점 등으로 소속팀인 건국대의 전국대회 4강을 견인하게 됩니다. 이 선수가 바로 엄정대 선수입니다.
경남상고와 건국대에서의 뛰어난 수비와 발군의 타력을 자랑했던 엄정대 선수는 이러한 성적을 바탕으로 고향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2차 지명 5순위로 낙점 받아, 4학년 때인 1997년 12월 2일에 계약금 6천만원과 연봉 2천만원에 입단계약을 맺게 됩니다.
프로 1년 차인 이듬해 1998년, 시범경기에서 모두 6경기에 출장하여 15타수 4안타(타율 0.267), 1타점과 1도루를 기록했습니다. 기록상 수치만을 놓고 볼 때는 보잘 것 없지만 98시즌 롯데 신인 중 투타를 통틀어 가장 돋보이는 성적이었습니다. 비록 입단동기생인 외야수 손인호(1억8천만원), 내야수 서한규(9천만원), 포수 김진수(9천만원), 투수 김정열(2억2천만원)과 임경완(2억원)에 비해 계약금에서 많이 뒤지는 대우를 받았지만 시범경기만 놓고 보았을 때, 팀 공헌도에서는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던 것이죠.
당시 김용희 감독은 좌익수였던 김응국 선수의 체력부담을 덜기 위해 엄정대 선수를 좌익수 백업요원으로 키우려 했습니다. 프로 1년차였던 1998년, 신인치고는 비교적 많은 경기인 62경기에 나와 0.172의 타율과 2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엄정대 선수는 삼진을 15개 기록(삼진률 - 23%)하여 젊은 선수답게 선구안(選球眼)을 지적 당합니다. 장효조 타격코치의 특타를 받으며 99년 시즌을 준비하던 엄정대 선수는 호세선수의 영입과 조경환, 유필선 등과의 주전경쟁에서 밀리게 됩니다. 그리고 선수협에도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던 엄정대 선수는 결국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 선수협을 탈퇴하는 일도 겪게 됩니다.
프로생활 5년 동안 엄정대 선수는 사실 1군에서의 활약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동욱 선수(홈런왕 , 타격왕 등)와 같이 2군에서의 타이틀 홀더(Title Holder)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엄정대 선수의 기록을 뒤져보는 동안 내내 제 눈에 띄었던 기사들은 바로 " 적시타 " 라는 단어였습니다. 공격의 물고를 터주는 안타나, 박빙의 승부에서의 결승타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그만큼, 엄정대 선수는 대타기용의 측면에서 활용도가 높다고 할 수 있는 선수였습니다.
5년 통산 0.211의 타율과 3개의 홈런을 기록한 엄정대 선수... 비록 자이언츠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기아 타이거즈에서 본연의 야구재질을 꽃피우시길 바랍니다. 엄정대 선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국가대표 출신, 잘 생긴외모^^ 정보명 선수
1997년 7월... 대구시민구장에서 있었던 제19회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은 대구고와 순천 효천고의 대결로 압축되었습니다.
창단 후, 처음으로 전국대회 결승에까지 오른 효천고는 그 여세로, 우승을 넘보려 합니다. 당시 대구고는 에이스 김진웅을 내세웠고, 효천고는 특유의 짜임새 있는 야구로 대구고와 상대합니다만, 결국 이 대회 최우수선수상과 우수 투수상을 거머쥔 김진웅의 호투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효천고는 창단 후 전국대회 첫 준우승에 만족하는 분위기였지만, 남몰래, 땅을 치며 화를 삭히던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바로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자이언츠의 신인 내야수, 제19회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미기상을 받은 "정보명" 선수입니다.
이듬해 1998년 6월... 제53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정보명 선수의 순천 효천고는 김주찬이 이끌었던 충암고를 2회전 상대로 만나지만, 그들의 활약은 2회전까지였습니다. 정보명 선수의 빛 바랜 홈런이 그나마 위안이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효천고는 다시금 9월에 열렸던 제52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청룡기의 2회전 탈락이 아쉬웠던 탓일까요? 순천 효천고는 황금사자기에서 당시 최강(1998년 전국대회 2관왕)이자 송승준이 이끌었던 경남고를 맞아, 정성기의 호투와 정보명 선수의 활약으로 7 - 2로 물리치고 8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1999년, 같은 효천고 출신의 투수였던 정성기와 함께 동의대에 입학한 정보명 선수는 이때, 동갑내기 투수 양성제를 만나게 됩니다. 야구부 꽃미남이라 불리우던 이 동갑내기 동급생들은 반드시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자고 다짐합니다.
정보명 선수가 입학한 1999년... 김민호 감독이 조련하는 동의대는 청주구장에서 열렸던 제33회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5일째 준준결승에서, 홍익대를 맞아 이 동갑내기들인 정보명의 홈런(1점)과 양성제의 만루포 2방(대단합니다... 양성제 선수.. 타자로 전업해도 좋은 활약을 펼칠거라 예상됩니다)을 앞세워 8강에 안착합니다.
1학년을 비교적 괜찮은 성적으로 마무리했던 정보명 선수는 2학년과 3학년때(2000 - 20001년)도 좋은 활약을 펼칩니다. 전국대학야구추계리그와 대통령기에서 잇단 홈런을 쳐내며, 동의대의 거포로 확실히 자리 매김 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동기인 양성제 선수는 아무래도 본업인 투수보다 타격에 더 매력을 느낀 듯 합니다. 정보명 선수가 홈런을 치면 양성제 선수도 꼭 홈런을 쳐냈으니까요... 정보명 선수가 좀 더 많은 홈런을 뽑아내긴 했지만, 양성제 투수는 타격에 뛰어난 자질이 있는 선수임은 분명합니다. (이승학, 송승준, 추신수...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선수들이 이 시기에 활동한 타격이 너무나도 좋은, 투수였던 선수들이지요..)
대학야구에서 뛰어난 성적을 바탕으로 3학년이던 2001년, 정보명 선수는 대만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야구선수권(3월18∼26일)과 세계선수권대회(11월8∼28일ㆍ월드컵)에 참가할 국가대표 27명중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 국가대표의 명단은 역대 최고는 아니지만, 화려했는데요... 잠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쉬운 것은 양성제 선수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인데요... 공격형 투수(?)였던 양성제 선수 대신, 정보명 선수와 같은 고교출신인 정성기 선수가 선발됩니다.
국가대표로 활약을 한 정보명 선수는 이듬해인 2002년(4학년), 동대문 야구장에서 있었던 제52회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에서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감격적인 순간을 맛보게 됩니다. 동의대 김민호 감독의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이 컸겠지만, 그 핵심에 양성제 선수와 정보명 선수가 있었습니다.(다른 수훈선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자이언츠에 입단한 선수를 부각하는게 좋겠죠... (-_-;;))
2002년 8월 2일.. 이탈리아 메시나에서 개최된 제 1회 세계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다시 태극마크를 달게 된 정보명 선수는 비교적 국가대표 경험이 적은 선수들과 (이때, 양성제 선수도 대표로 뽑히게 됩니다) 함께 호흡을 맞추며 좋은 활약을 펼칩니다. 그것이 바로... 8월말, 청주에서 열렸던 대학야구 추계리그에서 강호 연세대를 꺾는 중심에 정보명 선수의 활약이 자리잡은 밑거름이 되었던 거구요...
올해, 정보명 선수는 대학동기인 양성제 선수와 함께, 자이언츠에 입단했습니다. 야수와 투수의 차이는 계약금에서 먼저 차이를 보였지요.. 아쉽게도 억대 계약금을 받은 양성제 선수(1억 5천만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야수라는 핸디캡이 그에게 준 것은, 2천만원 이라는 초라한(?) 금액이었습니다.
양성제 선수가 - 투수라는 보직의 특성상 - 1군 경기에 꾸준히 나오며,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순간에도 정보명 선수는 묵묵히 2군에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자이언츠의 모든 선수들이 그러하듯, 이른바 적응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정보명 선수가 다시 고교시절... 대학시절... 그 기량을 회복해서, 자이언츠의 확실한 영건(Young Gun)이 되는 날... 자이언츠는 또 다른 유망주를 맞이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갈마에 올리신 글 중에 롯데의 영건(Young Gun)의 필요성을 역설하신 오정권 선생님의 의견과도 일치된다고 보여집니다. 비싼 몸값에 비해, 활약이 없었던 역대 신인(新人)들을 개탄하셨죠...
아직은 너무나 경험이 부족하고, 기존선수들에 비해, 노련함도 없지만 정보명 선수가 성장하는 모습을 팬으로써 지켜보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정보명 선수의 글을 쓸 때는 좀 더 많은 자료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좋은 활약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수비 범위가 넓고,(외야, 내야 가능) 타격 좋은 정보명 선수의 훌륭한 성장을 기대해 봅니다.
3.롯데의 1번타자 최고 유망주- 김주찬 선수.
1997년 8월.. 제27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전통의 강호 경북고와 2회전에서 맞붙은 충암고는 11-6으로 패배, 3회전 진출에 실패합니다. 하지만 이때, 충암고 1학년이었던 김주찬 선수는 장거리 타자로서 전국대회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2점 홈런을 뽑아낸 것이죠.
2학년이 되던 이듬해 1998년.... 제53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는 경남고의 우승으로 끝이 납니다. 이 대회는 경남고의 송승준(홈런왕, 수훈상)의 등장을 알리는 대회이기도 하였죠. 하지만, 이 대회는 또 김주찬이라는 발 빠른 선수의 등장을 알리는 대회이기도 했습니다. 5개의 도루로 이 대회 도루왕 타이틀을 거머쥡니다.
1998년 11월, 이런 뛰어난 성적을 바탕으로 김주찬 선수는 배영수(경북고 투수 ; 다들 아시죠? 호세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겁 없는 삼성 투수입니다), 이영수(대구상고 내야수), 조규수(천안북일고 투수), 김진욱(경남고 포수) , 이승호(군산상고 투수 ; 아주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죠), 이동학(마산고 투수), 심수창(배명고 투수), 마일영(대전고 투수 ; 현대에서 좋은 활약을 합니다), 박기남(배재고 내야수), 허용(선린정보고 내야수), 강관식(공주고 투수) 등과 함께 박찬호 장학금의 수혜자가 됩니다. 이른바 유망주로 본격적으로 조명된 것이죠..
3학년이었던 1999년... 대통령기 야구대회, 봉황기 야구대회 등에서 잇달아 홈런을 치며, 굵직한 타자로 성장을 거듭해 나갑니다. 아쉽게도 김주찬 선수가 재학할 당시에 충암고는 전국대회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합니다 - 이것이 그가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프로로 뛰어든 계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학원 스포츠에서는 전국대회 성적이 대학진학에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요. 하지만, 자세한 이유는 김주찬 본인만 알고 있겠죠 - 하지만, 고교시절, 그는 호타준족의 이름을 전국 야구인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게 됩니다.
1999년 11월16일, 삼성 라이온즈는 그간 눈여겨 보았던 김주찬 선수를 2000년 프로야구 2차 지명드래프트 1라운드로 지명, 계약금 1억8천만원, 연봉 2천만원에 입단계약을 맺습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2000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미국에서 가진 전지훈련에서 김주찬은 맹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훈련기간 중 23타수 10안타(타율 0.435)의 폭발력을 자랑했습니다. 홈런도 1개 포함되었지요(3점).. 게다가 무엇보다 삼성 벤치를 흐뭇하게 한 것은, 7경기서 6개의 도루를 성공시켰고 6득점을 기록해 빠른 발의 위력을 유감 없이 과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삼성 라이온즈 벤치가 톱타자의 역할을 김주찬에게 맡기려 한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때, 지금은 롯데로 이적한 김태균 선수가 삼성의 붙박이 유격수였죠.. 하지만, 당시 삼성의 김동재 수비코치는 김주찬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직 부드럽지 못한 김주찬의 수비력이었습니다. 수비는 김태균, 공격력은 김주찬.... 삼성의 딜레마가 시작되기 시작한 시즌이기도 했습니다..
2000년 전지훈련과 시범경기를 좋은 성적으로 마감, 기분 좋게 정규시즌을 시작한 김주찬 선수는, 자신과 포지션을 다투던 김태균 선수(주장이었습니다)와 모든 면에서 비교되기 시작합니다. 우선 60경기에 나와 0.302의 비교적 괜찮은 타율을 기록했지만, 불규칙적인 타순기용으로 제 페이스를 잃어버립니다. 게다가 송구와 볼 캐치등에서 너무나 많은 미숙한 면을 드러냅니다. 경기출전당 실책수를 놓고 봤을 때, 김주찬은 실책 1위였습니다. 새로 부임한 김응룡감독은 김주찬의 패기와 타격에 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김주찬의 수비능력에 강한 불만을 표시합니다. 이에 비해, 김응룡 체제에서 새로 주장을 맡은 김태균 선수는 그 해에 몰아닥친 트레이드 바람에서도 - 사실 이 시즌, 삼성은 김한수마저도 팔려고 했었습니다 - 꿋꿋하게 살아남았고, 김주찬과의 경쟁에서도 압승을 거두어 그가 삼성에서 은퇴를 하는 것은 당연히 받아 들여졌지요..
프로 첫해를 정신 없이 보내며 서서히 적응을 할 무렵인 2001년 2월 1일...
삼성과 롯데간의 대형 트레이드가 단행됩니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롯데구단의 보복성 트레이드였습니다. 바로 마해영 선수와 김주찬 , 이계성 선수간의 2 : 1 트레이드가 그것이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때 트레이드를 잠시 살펴보면, 애초에 롯데는 해태와 먼저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마해영을 해태에 주는 대신, 해태의 김창희와 유동훈을 달라고 한 것이었죠.. 하지만 해태가 유망주를 포기할 리 만무했죠.. 그래서 결렬되었습니다. 그때 삼성이 바로 롯데에 접근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롯데가 삼성에 요구한 선수는 강동우와 진갑용이었습니다.(만약 이때, 강동우와 진갑용이 롯데로 왔다면 롯데의 성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If론(論)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분명 Win-Win 트레이드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삼성측이 거절, 마해영을 어떻게라도 보내야하는 롯데로서는 대신 이계성과 김주찬의 카드를 받아들게 됩니다.
이 당시, 마해영 선수의 멘트가 모든 것을 대변합니다. “내 값어치가 그것밖에 안되나” 이 한마디였죠... 이때, 롯데 프런트에서는 뻔뻔한 성명을 발표합니다. "구단지원이 좋은 팀에서 뛰고 싶다는 평소 마해영의 바람을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완전 코미디를 한 것이죠.. 롯데가 간판격인 마해영을 내친 진짜 이유는 선수협 사태와 관련해 구단과 그의 감정 싸움이 최악으로 치달았기 때문이고, 이미 시즌 중이었던 지난해 2000년 11월부터 마해영의 트레이드를 기정사실화하고 해태를 비롯한 7개 구단과 트레이드를 추진해 온 주제에 말입니다.
말이 옆으로 샜습니다만, 샌 김에 한마디 더... 다들 아시겠지만, 이승엽, 김기태 등의 1루수 자원을 보유하고 있던 삼성이 마해영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바로 마해영 선수가 해태와의 트레이드용이었다는 것입니다. 해태에서 이대진을 얻기 위해 마해영 + 20억을 주겠다는 소문 아닌 소문이 꼬리를 물었죠... 삼성으로 부임한 김응룡 감독이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때문에, 마해영 선수는 엄청난 자존심의 상처를 입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산 되었지만요.... 이때 심정수 선수도 현대로 트레이드 되었죠...
프로 2년차에 맞은 트레이드.... 김주찬 선수가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트레이드 된 후, 시범 경기에서 연일 맹타를 기록, 트레이드에 실망하고 있던 팬들에게 일말의 기대감을 심어줍니다. 게다가 훌리안 얀의 부상으로 1루수로 낙점받은 김주찬은 좋은 활약을 보이게 됩니다. 2001년 시즌 0.313의 타율(정규타석 기록)... 그리고 4개의 홈런... 29개의 도루... 부산팬들은 서서히 김주찬에게 차세대 톱타자와 호타준족의 희망을 보기 시작한 원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2001년이었죠... 김민재 선수가 SK로 가더라도, 굳이 잡지 않겠다라는 롯데의 복안... 이 근거에 김주찬이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2001년 야구월드컵에 당당히 국가대표로 이름을 올리기도 합니다. 비록 한국은 4강진입에 실패,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지만 김주찬은 이혜천(대통령의 고교후배죠... 코끼리 감독, 김용철 수석코치의 후배이기도 하구요), 마일영 등과 함께 국가대표로 처녀출장, 그 가능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2002년 시즌, 전년도의 좋은 성적이 김주찬의 어깨를 가볍게 했음은 물론입니다. 김민재가 빠져 나간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왔고, 1번타자의 자리도 그의 몫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시즌을 예상한 거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박정태 - 김주찬" 키스톤 콤비의 수비불안을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이것이 결국 4월에 있는 임재철(롯데)과 김태균 - 이명호(이하 삼성)간의 2:1트레이드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김주찬의 수비불안이 이 트레이드의 골자였으니까요.. 게다가 4월... 김주찬은 허리부상이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2군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 펄펄 나르고 있는 조성환 선수... 김주찬이 2군으로 간 뒤, 유격수로 투입되지만, 조성환 선수의 빈약한 공격력이 문제점이 되었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입니다만, 그만큼 롯데의 내야진은 공격력에 있어 8개구단 최저였습니다. 그것이 부산고 출신의 김태균 선수가 롯데로 오게 되는 단초가 되는 것이죠...
2002년 시즌, 허리부상의 후유증(後遺症)으로 0.220의 초라한 성적을 받은 김주찬 선수는 외야로 전업을 결심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수비력 대신, 타격으로 승부를 하겠다는 결심이었죠.. 이는 코칭스태프와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습니다. 수비부담이 비교적 적은 외야에서 있으면서 타격에 좀 더 집중을 하겠다는 것이죠...
하지만, 2003년 시즌... 김주찬은 실책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실책을 여러 번 합니다. 그리고 올해 시즌 초반 롯데 12연패의 중심에는 클린업으로 활약했던 김주찬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공, 수 양면에서 그 무엇도 제대로 한 것이 없는 꼴이 되어버렸죠.. 백감독의 잘못도 한몫 거든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허리부상의 전력이 있는 선수에게, 30 - 30이라는 부담을 주고, 또 자신의 스윙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어린 나이의 김주찬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부담이었을 테지요... 그 결과, 김주찬은 기약할 수 없는 2군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내년에는 꼭 재기할거라 믿습니다.! 김주찬 화이팅
4.롯데의 유망주 4번 거포 타자-이대호
1999년 8월에 치러진 봉황대기 고교야구에서 경남고는 투타에 걸친 고른 전력으로 우승후보로 꼽히기 시작합니다. 이미 고교우완랭킹 1, 2위를 다투었던 특급우완 "강민영(그의 부활투를 기다려 봅니다)"과 팀 내 에이스이자 거포인 4번 타자 "이대호"를 중심으로 이 대회에서 강한 전력을 과시, 돌풍의 핵이 될 것이라 예고합니다. 특히, 고교좌완랭킹 1위였던, "이승호(현 SK)"가 이끌었던 군산상고와 마주쳤던 8강전에서, 강민영의 호투와 이대호의 3점 홈런 등의 활약으로 콜드게임승을 거두는 성과를 거둡니다. 투수전이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기나 하듯, 이대호는 맹타를 휘둘러, 경남고가 4게임 연속 콜드승을 거두는데 선봉장 역할을 자처합니다.
이대호 선수가 3학년이 되던 2000년 4월 28일 대통령기 교교야구대회에서, 경남고의 에이스이자 거포였던 이대호 선수는 추신수(부산고 ; 현 미국프로야구 Seattle), 이정호(대구상고 ; 현 삼성), 이동현(경기고 ; 현 LG) 등과 더불어 스카우터들의 집중표적이 됩니다. 신인드래프트가 6월 초로 앞당겨짐에 따라, 신인드래프트 전에 열리는 유일한 전국대회가 대통령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콜로라도를 비롯한 메이저리그 동양 스카우터들도 대거 방문했던 동대문구장의 열기는 말할 수 없이 뜨거웠습니다.
2000년 6월... 신인드래프트는 롯데가 1차 지명에서 추신수를 뽑고, 2차 지명 1라운드에서 이대호를 지명하면서 시작됩니다. 전력이 약한 탓에, 한꺼번에 지명권(3명 동시지명)을 행사하는 특권(창단팀 특혜)으로, 유망주를 대거 데려갈 것으로 예상되었던 SK는 투수 김희걸(포철공고)과 조형식(속초상고), 김동건(춘천고 야수)을 2차 1라운드에서 지명합니다. (註 : 2000년에는 유난히 강원권 유망주들이 많았습니다. 전국대회에서 돌풍을 일으킨 주역이었기 때문이죠.. 연고프로구단이 없는 강원권으로서는 전국대회 성적에 신경쓸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좋은 선수들이 2000년을 시작으로 대거 배출되었습니다. 참고로 각 구단의 1차지명선수는 정상호(동산고 포수 ; SK), 추신수(부산고 ; 롯데), 김태균(천안북일 ; 한화), 이동현(경기고 ; LG), 황규택(휘문고 ; 두산), 정원(광주일고 ; 해태), 설의석(인천고 ; 현대), 이정호(대구상고 ; 삼성) 등이었습니다. 거의 투수출신이 많았죠..)
그러나, 추신수는 돌연 미국행을 선언합니다. 미국 시애틀 매리너스와 1백35만달러(당시 14억 8천만원)의 계약금으로 이미 계약을 했던 것이죠.. 부산고의 에이스... 투수왕(17개 삼진)과 홈런왕 출신이었던 2000년 고교 최고의 유망주 추신수의 미국행으로 3년 연속 유망주를 미국에 빼앗긴 - 빼앗겼다기보다, 스카우트팀의 느린 행보를 주목해야 합니다 - 롯데는 경남고 에이스이자 거포인 이대호 선수와 부랴부랴 계약금 2억 1천만원, 그리고 2천만원의 연봉인 총 2억 3천만원을 들여서 서둘러 7월에 계약을 끝내 버립니다.
일찌감치 계약을 끝내고 고교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점인 8월.. 이대호 선수는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리는 제19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파견할 선수단 23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립니다. 이미 그 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에서도 연일 홈런을 치며, 롯데 관계자들을 흐뭇하게 했던, 이대호 선수는 부산고 감독인 조성옥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였던 미국전에서 4타수 2안타, 2타점의 활약으로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팀을 8강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4번이자, 예비투수명단에도 올라있던 이대호 선수의 진가는 예선전적 5승 전승으로 준결승에 올라와 있던 강호 호주와의 경기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양 팀 유일한 홈런을 때려내며, 공수에서 맹활약, 한국의 결승행에 일등공신이 되는 것이죠.. (이 대회 결승전에서 한국은 쿠바를 이기고 올라온 미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대호 선수는 5할의 타율에 3홈런을 기록, 빼어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대호 선수는 자이언츠에 "투수" 로 입단했다는 것입니다. 내심 타자로의 전향을 코치진에서 고려했지만, 이때까지는 여전히 이대호 선수는 192cm의 타워링 투수였습니다. 2000년 제55회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동산고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한 "분명" 뛰어난 에이스였습니다.
2001년 롯데에 입단한 이대호 선수는 LG와의 시범경기에서 홍현우와 서용빈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좋은 활약을 예고합니다. 김장현과 더불어 루키(Rookie) 투수로써, 롯데에 새로이 가세한 신명철, 김주찬 등과 신선한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었죠.. 최고구속이 138km였던 이대호 선수는 고(故) 김명성 감독에게 스피드를 높이라는 주문을 받습니다. 큰 키에 빠른 직구... 전형적인 타워링 투수의 모습이지요... 그리고, 김명성 감독은 임경완을 2군에 두고, 개막부터 6월까지 이대호를 1군 엔트리에 올렸습니다. 투수 이대호의 가능성을 높이 산 것입니다.
하지만, 2001년 6월 중순... 그의 고질적인 어깨부상이 다시 재발, 이대호는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변화구와 볼 컨트롤이 좋은 데 비해 볼 스피드가 상대적으로 떨어져 구속을 올리는 데 주력했으나 어깨 부상이 장기화돼 아마추어 때부터 재질을 보였던 타자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2군에서 "투수" 이대호를 훈련시켰던 양상문 코치는 "호주 전지훈련 때 오버페이스를 하면서 어깨에 무리가 온 것 같다. 그동안 직구 스피드를 늘이는데 주력했지만 부상이 지속돼 어려움이 있었다. 투수로서의 재질은 아쉽지만 타자로서도 대성할 가능성이 충분한 선수"라고 평가했습니다. 코치진 역시 이대호의 투수 생활은 사실상 끝이라고 본 것입니다.
2001년 2군에서 이대호가 맡았던 포지션은 다름 아닌, 3루수였습니다. 자이언츠의 3루는 묘한 역사가 있습니다. 원년도 롯데의 거포였던 김용희 선수의 포지션도 3루였고, 마해영 선수의 대학시절 포지션도 3루였습니다.(이 당시 고려대의 1루수는 바로 강상수 선수였습니다. 대학시절에는 투수를 거의 하지 않았지요.. 5번을 쳤던 장타력의 1루수 강상수 선수가 상상 되실련지요...)
2001년 대부분을 2군에서 보내며, 타자로의 전향에 매진하던 이대호 선수는 2002년 3월 28일, 드디어 잠실에서 벌어진 두산과의 경기에서 첫 홈런을 기록합니다. 비록 시범경기였으나, "전업타자" 이대호에게 많은 공을 들이고 있던 팀으로서는 엄청난 의미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이대호에게만 붙어 3개월간 동거 동락을 같이 했던 김무관 당시 타격코치는 이대호의 스윙에서 약점 - 엄청난 힘에 비해 스윙 시 힘의 배분이 서툰 점 - 을 지적, 진정한 강타자로의 변신을 적극 도우게 됩니다. 우용득 감독 역시 이대호 중심의 클린업트리오를 구상하게 됩니다. 이미 호세 선수는 이중계약 등의 파문을 일으키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다른 외국인 선수마저 들쑥날쑥한 기량으로 신뢰를 주지 못했던 것이죠. 게다가 이대호 역시, 개막전에서 맞붙을 한화의 김태균이 상당히 신경이 쓰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청소년대표시절, 3번과 4번을 나누어 맡으며 절친하게 지냈던 김태균 선수는 이미 2001년 신인왕을 차지한데 비해, 이대호 선수는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2002년 시즌, 이대호 선수는 또다시 신인왕에 도전하게 됩니다. '투수의 경우 5년 간 30이닝 이내, 타자는 5년 간 60타석 이내인 경우'는 신인왕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지는 규정에 따라 2001년 겨우 6경기(9타석)에만 출전한 이대호 선수는 분명 기회가 있었던 것이죠. 이를 중고신인왕이라고 부르곤 합니다만, 이런 유형의 신인왕으로서는, 1989년 박정현(당시 태평양)과 1995년 이동수(당시 삼성) 등 2명의 전례(前例)가 있었었죠.
드디어 정규시즌이 개막되었고, 이대호 선수는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와의 경기에서 드디어 정규시즌 첫 홈런을 신고합니다. 상대투수는 아이러니하게도 고교 2학년때, 봉황대기에서 맞붙은 좌완 이승호 선수였었죠(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대호 선수는 봉황대기에서 이승호 선수에게 3점 홈런을 뽑아 내었습니다).
4월 한달 간 70타수 24안타, 7타점 그리고 타율 0.343으로 팀내 수위타자를 달리던 이대호 선수는 5월들어서도 2게임 연속 3점포등의 활약으로 일약 신인왕 후보 1순위로 꼽히게 됩니다.(이 당시, 신인왕은 조용준, 김진우, 그리고 이대호 선수의 3파전이었으나, 특성상 투수보다는 타자의 활약이 더 돋보입니다)
하지만, 5월말부터 이대호 선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됩니다. 몸쪽 공에 원래 약점을 보이던 이대호 선수는 철저하게 몸쪽 공으로만 승부하는 투수들의 심리전에 휘말려, 몸쪽과 바깥쪽, 어느 쪽도 공략하지 못하는 평범한 타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의 부진과 함께 자이언츠의 성적은 동반추락(同伴墜落) 하게 됩니다.
이 즈음, 이대호 선수는 백인천 감독을 만나게 됩니다. 자이언츠의 10대 사령탑으로 부임한 백인천 감독은 가장 눈여겨볼 선수로 이대호 선수를 낙점합니다. 이승엽 선수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 자신의 장단점을 극대화시키는 뛰어난 타격지도자로 당시 추대(?)되었던 백감독은 당시 110kg까지 나갔던 이대호 선수의 몸무게를 95kg이하로 떨어뜨리라는 주문을 합니다. 그 주문의 주요 골자는 바로 "힘은 좋은데, 파워가 없다" 는 것이었습니다. 일견 들으면, 말이 안 되는 주문인 것 같지만, 체력이 좋은 것과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백감독 부임 후 실시한 체력테스트에서 이대호 선수는 꼴찌를 했습니다. 그리고 백감독은 이대호 선수의 3루 수비의 문제점도 지적했습니다. 이 당시, 박현승 선수의 부상과 김주찬 선수의 1루 수비로 인해, 3루수로 보직을 변경했던 이대호 선수는 몸집이 커서 3루 수비에 지장이 있다는 진단을 받습니다(하지만, 저는 이 부분에 강력히 반발합니다. 이대호 선수는 몸집에 비해 유연한 3루수비를 보였습니다. 번트수비도 곧잘 해냈고, 포구능력과 송구능력도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손에 자랐고, 고교 때 할머니를 여읜 뒤, 줄곧 자취생활만 해왔던 이대호 선수가 덩치에 비해 영양상태가 좋을 리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때부터 살빼기와 더불어 본격적인 체계적 식단에 의한 체력관리에 힘을 쏟게 됩니다.
7월 20일... SK와 롯데와의 트레이드가 있게 됩니다. 다들 아시는 2:3 트레이드(저 역시 또 다른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가 열린 것인데요.. 이 트레이드에서 문동환과 더불어 이대호까지 고려 되었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이대호 선수는 심한 자극을 받게 됩니다. 이미 그 이전에 백감독에게 체중감량의 지시를 받아 2군으로 내려갔던 이대호 선수는 백감독과의 독대(獨對)를 통해 백감독의 자신에 대한 계획을 듣게 됩니다. 즉, 토종거포로 만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는 말을 듣고, 묵묵히 2군에서 체력관리에 치중하게 됩니다. 그 결과, 애초 2002년 9월에 마감되는 상무에 이대호 선수를 지원시킬 예정이었던, 롯데프런트와 이대호 선수는 이 계획을 백지화하고, 몸 만들기에 주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2년 10월 경남 남해 캠프에서 훈련 중 왼쪽무릎 관절 부상을 당해, 왼쪽무릎 수술을 받게 됩니다. 하체에 힘이 쏠리는 타격을 구사하는 이상, 왼쪽무릎의 수술은 불가피 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대호 선수는 체중감량과 재활이라는 이중고(二重苦)를 겪게 되지만, 자이언츠의 거포로 거듭나기 위한 그의 독기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든 것입니다.
경남고의 에이스에서, 거포로의 변신.....
분명, 이대호 선수는 어린 나이(82年生)에 걸맞지 않게 많은 변화의 중심에 있어 왔습니다.
이대호 선수의 얼굴을 보면 참 앳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힘든 가정에서 자라온 그늘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순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할머니와 살아왔기에, 무의탁노인을 위한 봉사활동에 앞장서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곤 합니다.
이대호 선수는 분명 자이언츠의 보물(寶物)이자 차세대 거포(巨砲)입니다.
주위의 기대를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있습니다. 이대호 선수의 기량에 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는 분들이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문제는 그가 얼마나 재활을 잘 마치고 다시 돌아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루 4시간 이상씩 재활과 체력훈련에 매달리면서, 최근에야 2군에 복귀, 정상적인 경기감각을 익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제대로 된" 타자로 거듭나기 위해 군입대까지 미룬 만큼, 그의 각오는 남다를 것입니다.
자이언츠의 클린업에 있어, 손인호 선수와 더불어 한 축을 담당할(두 선수의 나이차가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로 연결될 것입니다) 이대호 선수의 빠른 복귀를 기대합니다.
서두에서 말했던 차세대 거포로 거듭나라는 의미는 이대호 선수의 무한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 빠른 재활과 조속한 복귀를 촉구한 것입니다. 이미 실력과 가능성에 있어서는 8개구단 공히 인정을 하고 있는 바이며(트레이드 대상 1순위죠), 그 상징성에 있어서도 "미스터 자이언츠"의 계보(系譜)를 당당하게 이어나갈 이대호 선수...
무릎수술의 후유증과 체중감소에 다른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대호 선수... 유년시절과 청소년기... 누구보다 눈물을 많이 참아왔고, 그 역경을 뛰어넘어 모두에게 인정받는 선수가 되었던 만큼, 지금의 이 시기를 슬기롭게 넘길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역경을 넘어 자이언츠의 토종거포로 거듭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정말, 제2의 이승엽이 되길 빕니다. 양준혁이라도 ㅎ
5. 초고교 최고 좌타자 1번,9번 유망주-박정준
배팅 파워와 정확도가 뛰어나 차세대 거포 수업을 받고 있다. 선구안과 빠른 발까지 갖춰 대형타자로 성장 가능성이 크다.
한쪽다리를 들고 방망이 끝을 세우는 타격 자세로 자세 변화를 주면서 홈런 괘적까지 찾았다. 꼭 이승엽선수가 치는것처럼 하네요. 하하
선구안도 좋구요. 저번에 1군에 딱 하루 올라와서, 아쉽게도 하루만에 내려가쬬.
4타수 무안 1볼넷. 삼진2개에 땅볼하나..그리고 2-3에서 볼넷.
어느 정도 가능성 있다고 보는데. 빨리 이번엔 더 연습 충분히 해서, 꼭 재기 했으면 바람.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선수인데 ㅎ
6.점점 타격이 올라가는 박기혁. (브라운 아이즈-점점) ㅎㅎ
2000년도, 대구상고가 우승할떄, 투수에 이정호 투수가 있었더라면,
타자에선 박기혁이 있었죠. 뛰어난 수비와 중장거리 타격..
정말 좋아죠. 여기서 삼성이 초고교 내야수 김주찬-이명호-박기혁 중에서 2명을 뽑을려구, 결국 김주찬과 홈런왕 출신 이명호를 뽑앗죠.
사실 보면..이명호 선수 참 아까운데...ㅠㅠ
7.뽀너스!>_<!1. 이명호- 아쉬움을 뒤로 한체 씁니다.1
1999년 3월 19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제33회 대통령배 전국고교대회 서울시 예선 및 봄철리그 결승에서 배명고는 접전 끝에 경동고를 4-3으로 꺾고 우승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대회의 최우수선수(MVP)로는 19타수 10안타(0.526)의 빼어난 타력을 선보인 배명고의 4번 타자 이명호 선수가 선정되는 것에 아무도 이의(異意)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5월에 열린 제33회 대통령배 전국고교대회 본선에서는 추신수가 버티고 있는 부산고의 힘에 밀린 배명고는 준우승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3-3 동점이던 7회 말 1사 1, 2루서 부산고의 4번 타자 구인환(동의대)의 중전안타가 바로 결승점이 된 것입니다. 결승전에서 승리투수가 된 추신수는 본선에서 4승을 올린 대가로 이 대회 MVP와 우수투수상을 독식합니다.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명호 선수는 0.545의 고타율(高打率)로 " 타격상 " 과 " 홈런왕 " 에 그친 것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1999년 6월16부터 20일까지 열렸던 한일친선고교야구대회에 추신수, 구인환 등과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좋은 활약을 펼쳤던 이명호 선수는 같은 해, 8월 6일부터 14일까지 대만 카오슝에서 열렸던 제18회 세계 청소년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립니다. 이 당시 명단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투수로서 이승호(군산상고)와 마일영(대전고), 그리고 강민영(경남고), 조규수(천안북일고), 이정호(대구상고)가 선발되었고, 내야수로 이명호(배명고 - 분명 이명호는 " 내야요원 " 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입니다)와 박기혁(대구상고)이, 그리고 외야수로서는 추신수(부산고)와 전준호(동산고)가 선발 되었습니다.
6월에 열린 제54회 청룡기 전국고교 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홈런을 치는 등 좋은 모습을 관계자들에게 각인시켰던 이명호 선수는 대만 카오슝에서 열리는 제18회 세계 청소년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바람에 제29회 봉황대기 전국고교 야구대회에 참석하지 못해, 배명고의 전력은 많은 우려를 자아 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배 준우승팀인 배명고는 두산, 롯데, 쌍방울, 한화 등 4명의 스카우트들에게 우승 후보 ‘0순위’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청소년 대표로 내야수 이명호 한 명만이 빠졌을 뿐 나머지 선수들의 전력이 가장 안정되었고, 특히 에이스 심수창과 이경환이 버티고 있는 마운드는 당시 고교야구에서 철벽이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99년 11월 16일..
2000년 신인드래프트 2차 2순위로 지명된 이명호 선수는 계약금 1억 5천만원과 연봉 2천만원의 조건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됩니다. 이 당시, 2차 1순위로 지명된 김주찬(충암고)과 더불어 2차 1, 2순위를 모두 내야수로 지명, 계약한 삼성은 박정환과 더불어 초특급 신인 내야수 3인방을 받아들임으로써, 내실있는 내야진을 구축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치를 높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이명호에 대해 김용희 삼성감독은 백인천, 박흥식 코치등에게 임팩트시 전체적인 밸런스가 맞는 훌륭한 타자라는 자체진단을 듣고, 많은 기대를 하게 됩니다.
" 리틀 승엽 " 으로 불렸던 좌타자 이명호 선수는 안정된 타격 자세와 유연한 스윙이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고교 기록상으로는 이승엽을 능가했고, 이미 타격에 관한한 홈런왕과 타격왕을 거쳤기에 이미 검증이 된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애리조나 전훈캠프에서, 1차 1순위의 배영수와 이명호 선수는 좋은 활약을 보입니다. 특히 같이 입단한 충암고의 김주찬보다 이명호 선수는 안정된 타격자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고, 고교 시절 1루수비를 보았지만, " 이승엽 " 이라는 대형 선수가 버티고 있는 점을 감안, 외야수비를 집중적으로 훈련 받습니다. 2000년 시절, 비록 1군에서는 활약하지 못했으나 새로운 사령탑 김응룡 감독에게서도 이명호 선수는 김승관과 더불어 가장 눈여겨볼 선수로 당당히 지목 받습니다. 2군에서 주로 활약했으나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삼성은 이명호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자 기회가 적은 1군에서보다는 2군에서의 경험치를 더 쌓으라는 배려의 결정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2002년 4월... 프로 3년차가 된 이명호 선수.. 삼성에서 1군경기에 전혀 출장하지 않았던 이명호 선수는 프로에 대한 적응을 완전히 마치지 못한채, 팀 고참인 김태균 선수 - 이 선수 역시 영원한 삼성맨으로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김응룡 감독의 눈에 벗어나 버린 선수가 되었습니다 - 와 함께, 부산으로 둥지를 옮기게 됩니다. 어린 선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트레이드였으나, 부산이 바로 고교시절 라이벌로, 그리고 국가대표 동료로서 절친했던 추신수 선수가 있던 고향팀이라는 것이 이명호 선수에게는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고교시절, 화려했던 타격의 천재 이명호로 돌아가고자 각오를 다집니다. 이명호는 자신의 노력만이 과거 " 리틀 승엽 " 으로 불리며 타격에 관한 한, 잔소리를 할게 없다라는 시절의 본인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6월... 자이언츠의 사령탑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합니다.
10번째 거인의 사령탑, 바로 과거 프로야구 원년 타격왕 출신의 백인천 감독이 바로 새로운 주인이 된 것입니다. 백감독 부임 후, 이명호 선수는 내심 반갑기 그지 없었습니다. 자신이 삼성에 입단할 당시, 백인천 감독은 삼성의 타격 인스트럭터(Instructor)였고, 자신을 타자로써 인정해 준 야구선배였기에 이명호는 자신의 부활을 책임져 줄 구세주라 생각하며 백감독의 취임을 반깁니다.
그러나, 이명호 선수는 7월 9일 한화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백감독에게서 " 투수전향 " 이라는 날벼락 같은 지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과거 자신을 " 리틀 승엽 " 이라 인정해주던 바로 그 감독에게서, 자신의 타격자세를 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 바로 그 감독에게서 이명호 선수는 타자로써의 재질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국가대표에도 투수가 아닌 야수로 선발된 이명호에게 백감독은 과감히 그의 야구인생을 바꾸어 버리게 된 단초를 제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명호에게 불펜에서 몸을 풀라고 지시한 백감독은 이날 경기에서 6-1로 리드를 하던 7회초, 강판 당한 송진우 선수를 대신해서 올라온 우완투수 장재혁을 보고서는 추가점에 욕심을 낸 나머지, 불펜에서 몸을 풀라고 지시한 이명호를 대타로 내보냅니다. 투구에 열중하던 이명호는 당연히 삼진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바로 7월 9일 이때가 타자 이명호의 이름이 영원히 그라운드에서 사라지게 된 날이었습니다. 이명호에게는 타자로써 마지막 타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투수 이명호가 된 그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 좌완언더 " 가 되어야 했습니다. 투수로 보직이 완전히 변경된 뒤, 이명호는 8월 23일, 대구에서 자신의 옛 친정팀 삼성을 맞아 이승엽에게 만루포를 허용하는 등 투수로써 아주 불안한 출발을 보입니다. 좌타자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좌완이지만, 120km대의 밋밋한 슬라이더를 이승엽은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2의 이승엽이라 불리우며, 이승엽 선수에게 같은 팀의 후배로써 많은 조언을 받으며 경쟁을 해나갔던 이명호는 구단이 바뀌고, 보직이 바뀌어 투수로써 경기에 출장, 바로 그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일까요... 이명호 본인에게는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홈런이었습니다.
2002년 투수로써 보직이 변경된 첫 해, 이명호는 21경기에 투수로 나와 14와 2/3이닝동안 4.30의 방어율을 기록한 말 그대로의 원포인트 투수라는 성적표를 받게 됩니다. 구단으로서도 이런 이명호가 신경이 쓰였는지 300만원이 오른 2,200만원의 연봉으로 2003년 시즌 계약을 마칩니다. 2003년을 맞아서도 여전히 투수라는 옷이 몸에 맞지 않았던 이명호는 2월 28일 미국 애리조나 전지훈련을 마치고 일본 후쿠오카로 이동하면서 컨디션이 저조한 선수로 분류되어 박정태 선수와 허문회, 이정훈 선수등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을 하라는 조치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투수로써 집중적인 조련을 받은 이명호는 5월 9일 사직에서 열린 LG전에서 박경수의 타구에 왼쪽 손목을 강타 당해 마운드에서 쓰러집니다.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명 되었으나 좌완투수의 왼쪽손목부상은 아무래도 작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1군 엔트리에서 빠지게 됩니다. 부상만 아니었으면 백감독은 꾸준히 그를 1군에 두었을 것이라는 예상은 자명한 이치였습니다.
2군에서 많은 땀을 흘리며 투수로서의 완벽한 변신에 총력을 기울인 이명호 선수.. 5월 22일 프로야구 선수협의회가 선정, 좋은 모습을 보이는 2군 선수에게 주는 ‘4월의 선수’로 투수 이명호가 뽑히게 됩니다. 몸에 맞지 않는 투수라는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프로선수로써 자신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이명호 선수의 노력을 보여주는 수상이었습니다. 선수협 역시 그런 점을 충분히 고려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뽀너스2! 마지막!! 입잔예정인 대학 리딩 히터-서정호
개성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야구와 인연을 맺은 서정호(185㎝, 88㎏) 선수는 경남고의 클린업 출신이자 현재 한양대에 재학하고 있는 이른바 " 호타준족 " 형(型)의 선수입니다.
1998년 경남고는 정말 막강한 팀이었습니다. 비록 제32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김사율이 이끈 경남상고에게 패권(覇權)을 내어 주었으나, 제53회 청룡기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를 비롯 제28회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의 우승트로피를 차지하며 전국에 경남고의 명성을 다시 한번 알렸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경남고의 클린업이 바로 서정호 - 이상훈 - 김진욱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투수진으로는 경남고의 3인방 송승준과 강민영, 조상희가 있었고, 1학년인 투수 이대호도 있었습니다.
3학년이 되던, 1999년 서정호는 8월에 열린 29회 봉황대기에서 톱타자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히 보여줍니다. 클린업이 아닌 1번 타자로 출전했지만, 장거리포가 장착된 무서운 톱타자였습니다. 평상시 수영으로 파워를 길러왔던 서정호는 33회 대통령배에서 미기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한양대에 진학한 뒤, 서정호는 2001년에 전국대학야구선수권에서의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2001년 8월, 도쿄 6대학 한ㆍ일 친선대회에 조용준(연세), 강철민(한양), 강귀태(동국), 채상병(연세), 박용택(고려) 등과 함께 중견수 요원으로 선발됩니다. 그리고 ‘고베 4개국 친선대회’와 ‘대만 야구월드컵’에 출전할 드림팀 IV에 예비요원으로 선발되는 기쁨도 누립니다. 고베에서 열렸던 대회에선 급조된 프로ㆍ아마의 혼성팀이어서 그런지 팀이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서정호는 이 대회 기간동안 원래 외야수로서 외야수비가 아닌, 신민기(한양), 이현곤(연세)과 더불어 2루 수비를 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2년 8월, 이탈리아 메시나에서 열렸던 제1회 세계대학 야구선수권대회에도 양성제(동의 - 롯데), 문용민(연세), 이택근(고려), 신민기(한양), 정보명(동의 - 롯데) 등과 더불어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3번 타자로써 맹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올 시즌 전국대학야구 봄철리그에서도 6개의 도루로 이 대회 도루왕에 등극, 확실한 " 호타준족 " 으로 자리매김을 한 서정호 선수... 개인적으로 서정호 선수를 보면서 신명철 선수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아마추어 시절, 너무나 화려한 성적을 자랑했던 신명철 선수는 자이언츠에 입단하고 꽤 오랜 기간 부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학시절, 호타준족의 대명사였던 신명철과 서정호... 어떻게 보면 이 둘이 닮아 있음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정호 선수는 신명철 선수같이 프로적응에 오랜 기간이 소요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작금의 자이언츠 상황은 유망신인, 몸값 비싼 신인의 적응기간을 장기간 줄만큼 여유가 있질 못합니다. 이 점을 서정호, 황이갑 선수들은 간과해선 안될 것입니다.
모쪼록 서정호 선수가 거인의 일원으로써, 아마추어 때의 성적만큼 해주길 바래봅니다. 아마와 프로의 벽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여러 선수들이 증명을 했습니다. 이제 서정호 선수가 그 통념을 깨는 선수가 되어주길 바라는 것은 저뿐만의 바램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그냥..아는 대로 적어 봤습니다. 제가 다 적은것은 아니구요, 여기저기 정보영입과 제가 아는 것도 좀 적어 봤습니다. 전 그냥 롯데팬께서..재미 있게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님 정말 재미나게 읽었구요... 덕분에 롯데의 미래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됐네요... 나중에 이 유망주들로 세대교체가 완전히 되서 새로 태어나는 롯데 생각만 해도 짜릿하네요^^
- _ - 너 무 길 다 ㅡㅡ!
양성제선수도 타자로서 활약마이 했었다던데...
서정호 선수 계약만 남았네요...어찌 될려는지????
감사합니다. 재미 있게 읽어셨다이기에, 전 기쁘네요.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