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공도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7장 2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아브라함을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2절을 보면 구체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있는 역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인격적인 존재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때는 뜨거울 때입니다. 한낮입니다. 정오의 낮잠 시간(데렉 키드너)일 것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유목민들의 장막은 보통 염소 가죽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밤에 기온이 떨어질 때 장막 안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김영철). 날이 뜨거웠으니까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서 더위를 피하여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2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으면서 눈을 들어보니까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셋 가운데 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10절. 13절).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두 사람은 19장 1절에 천사입니다. 셋을 삼위일체로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모양을 하시고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형태나 모습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합니다. 그리고 몸을 땅에 굽힙니다. 아브라함은 방문자를 환영하고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평소에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
아브라함은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라고 요청합니다. 아브라함이 “주”라고 했을 때는 이분이 “하나님이시다”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을 종이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을 높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라고 보지는 않았지만 뭔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4절.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
아브라함은 물을 조금 가져와서 그들의 발을 씻도록 하기를 요청하고, 나무 아래에 쉬기를 구합니다. 정성껏 섬기는 모습입니다. 고대에 환대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극진히 환대를 하고 있습니다. 2절에 달려 나가 영접했다고 했으니까 억지로 행한 일이 아니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로마서 12장 13절에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하셨는데,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고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5절.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
아브라함은 떡을 조금 가져와서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 떡을 먹고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 지나가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이 자신에게 왔으니까 이런 대접을 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온 사람들에게 자발적인 섬김을 실천하겠다고 합니다. 세 사람은 아브라함의 뜻대로 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의 행위를 받아주겠다는 것입니다.
6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말합니다.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1스아는 약 12리터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약 30리터가 넘는 양입니다. 세 사람이 먹기에는 넉넉합니다. 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18절을 보면 아비가일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을 위해 곡식 다섯 세아를 가지고 옵니다. 그때 다윗이 데려간 사람들이 400명 가량 됩니다(칼을 찬 사람). 남겨둔 사람도 200명이 되고. 세 스아는 먹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더 넘치는 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절.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
아브라함은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급히 요리하게 합니다. 그가 부유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아주 맛 있는 고기를 가지고 최상의 대접을 하려는 것입니다.
8절.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우유 지방으로 만든 것. 버터)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를 그들 앞에 차려 놓고 그들이 먹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나무 아래에 모셔 서 있습니다. 마치 웨이터(Waiter)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손님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섬기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묻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다 먹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있나이다”고 대답을 합니다. 고대의 관습은 아내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사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사라를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9절에 “그들”이 물었는데 이제 “그”가 말합니다. 13-14절에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17장 21절에 이미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장 14절에 다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21장 1절에 사라의 임신은 “하나님의 돌보심”이고 “하나님의 행하심”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 이제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11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느니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즉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데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라의 반응은 “속으로 웃는 것”입니다. 소리나지 않게 마음속으로 웃었습니다. 그 웃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자신도 노쇠하였고 “내 주인”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도 늙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즐거움’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음으로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이제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은 웃음은 부정적인 생각의 웃음, 회의적인 웃음(메러디스 클라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입니다.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라가 속으로 웃은 것을 아시고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속으로(12절) 웃은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고 하십니다. 사라의 생각도 드러내십니다. 사라의 불신적인 생각과 웃음을 드러내십니다.
14절.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았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17장 1절에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현실적으로 적용하십니다. 민수기 11장 23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욥 42장 2절. 신 32장 39절). 사라가 임신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폐하시지 않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드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누가복음 1장 37절에 마리아가 성령님으로 잉태될 때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장 23-24절. 2장 5절. 롬 1장 16절).
15절.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사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속으로 웃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부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속을 드러내자 부인을 합니다. 자신이 웃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네가 웃었느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을 덮으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1-12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무수한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졌고(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약속하시고 또 약속하십니다. 반복적으로 약속을 하십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도록 마음에 새겨놓는 작업을 하십니다.)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얻었다’고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라는 자신의 잉태를 통하여 약속하신 하나님은 미쁘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환대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갑니다. 보낼 때도 극진한 친절의 모습을 보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친절은 어느 시대에든지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의 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두 천사는 가고(19장 1절) 여호와 하나님만 남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것을 숨기겠느냐”고 하십니다. 아모스 3장 7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0장 7절에 “그는 선지자”라고 하셨고, 시편 105편 15절에 족장들을 “나의 선지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무엇을 알려주셨습니까? 첫째, 앞에서 일 년 뒤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복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역사입니다.
18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
17절에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해당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된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국가 체제를 갖춘 것은 출애굽 이후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짐은 국가 체제를 갖추었음을 의미합니다.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은 12장 3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19절.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고 하십니다. “내가 …그를 택하였다” 원문은 “내가 그를 알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은 언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언약의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입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킬 때” 의와 공도(미쉬파트)를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길은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의와 공도의 공동체”가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 죄악의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의와 공도의 공동체가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의와 공도의 공동체는 하나님을 섬기는 세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죄악 된 이 세상에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성도”(saint)라고 부릅니다(고전 1장 1절. 고후 1장 1절). 그 이름 자체에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거룩한 백성의 자태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20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
여호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하십니다. ‘부르짖음’은 억울한 자, 약한 자가 짓밟힐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 공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사회 안에서 의롭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죄악에 견디지 못하여 그곳을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7-8절에 의로운 롯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였고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고 하십니다. 그 죄악이 심히 무거웠다고 하십니다. 죄는 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데 어떤 죄는 더욱 무겁습니다. 예를 들어서 의도적으로 살인하는 것은 더 무거운 죄입니다. 죄악이 무거운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6장 6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으면 악이 더욱 번성하고 무거워집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
하나님께서 내려가셔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행한 것이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직접 보고 알려고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내려가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시 139편 1-4절). 그럼에도 확인해야겠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법적으로 확증을 짓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에스겔 16장 49-50절에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5절에 종말 시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회가 하나님께 불경건하면 윤리적으로 타락하고 불의가 성행합니다(롬 1장 18절). 그런 사회는 두려운 사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내려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르짖음”이 커지면 죄악이 심히 무거운 사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소돔으로 간 사람들은 두 천사입니다(19장 1절).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고대 히브리어 본문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 앞에 계속 서셨다”입니다. 그것을 필사자들이(맛소라 학자들) 교정을 하여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것을 ‘티쿠네 쇼페림’(필사자의 교정)이라고 합니다. 두 천사를 보내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서 계셨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대면하여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면하여 기도가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41장 8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특징을 몇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기도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계시의 말씀을 참으로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그것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신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 기도하는 마음에는 사람을 생각함이 있었습니다(19장 2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7장 10절에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절에 하나님 앞에 중재 기도자로 서는 것을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하십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중재 기도자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23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
22절에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23절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담대하게 간구하기 위해 나아갑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특권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받아주실 때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는지 여쭈어봅니다. 이 세상의 상황을 말합니다. 악인과 의인이 섞여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무거운 죄악을 언급하시는 것은 심판하시겠다는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악인이 멸망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도 하였습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 “공의”를 말씀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아무리 악한 사회라고 해도 그 안에 의를 행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들도 함께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그것이 아브라함의 질문입니다.
24절.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소돔의 죄악이 심히 무겁다(18장 20절)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고통의 부르짖는 소리가 크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과연 그런지 그곳으로 직접(21절) 가보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소돔을 심판하시겠다는 뜻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그 성 중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지 묻습니다.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들을 위하여 용서해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은 적어도 소돔 성에 의인이 50명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죄악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그래도 그 죄악에 동참하지 않은 의인들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5절.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것은 부당하고, 의인을 악인과 같이 취급하심도 부당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19절에 하나님께서 의와 공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심판하실 때도 그 정의를 드러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소돔을 멸망 시키실 때에도 그 정의를 나타내달라고 합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보통 정의는 악인을 심판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의인을 멸망시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2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
하나님께서 소돔 성읍 가운데서 의인 오십 명을 찾는다면 온 지역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온 지역”을 심판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성읍에 의인 50명만 찾을 수 있다면 심판으로 멸망시키겠다는 뜻을 거두시겠다고 하십니다.
27절.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
아브라함은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10편 17절에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티끌로 만들어졌습니다(창 2장 7절). 욥은 욥기 30장 19절에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라고 하였고, 욥기 42장 6절에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고 합니다. 자신의 비천한 처지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고 말씀드립니다. 겸손하면서도 담대함이 있는 자세입니다.
28절.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수를 점점 줄여나갑니다. 의인 50명 가운데 5명이 부족하면 어떻게 하겠는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5명만 찾아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29절.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이제 45명에서 5명 더 내립니다. 40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는지 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30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수를 더 줄여봅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라고 하면서 30을 찾으면 어떻게 하겠는지 묻습니다. 10명을 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30명만 찾아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애하신 분이십니다. ‘노하지 말아달라’고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31절.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더 낮추어 20명을 제안합니다. 그는 아주 끈질기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소돔에 대한 멸망의 소식을 듣고 소돔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다, 그런 태도가 아닙니다. 그들을 살리고 싶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시면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을 배우게 됩니다.
32절.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이번만” 하면서 20명에서 10명을 더 내려 10명만 찾으면 어떻게 하겠는지 묻습니다. 10명만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없어도 그 10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0명은 전체 공동체를 보존할 수 있는 수입니다. 그런데 소돔은 그 정도도 없어서 멸망합니다. 우리 사회는 안전한 사회인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안전함은 어디에 의존되어 있습니까? 정부입니까? 경제인입니까? 문화와 문명입니까? “죄악”을 생각해야 합니다. 불경건함에서 불의가 나옵니다.(롬 1장 18절) 예레미야 5장 1절에서는 ‘한 사람’으로 줄입니다. 예루살렘 넓은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을 찾으면 이 성읍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없습니다. 소돔도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하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있는지가 그 사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입니다.
3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고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갑니다. 장막에서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소돔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10명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는가?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