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토리텔링 인물열전 2 > 해월 최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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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주 용담에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스승인 수운 최제우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매일 포항 검곡에서 경주 용담을 오가며 득도에 이른다. 검곡은 그런 의미에서 해월에게 동학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정신적 고향이나 다름없다. 이후 1863년 스승으로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동학의 2대 교주가 된다. 하지만 곧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고, 36년간 긴 도피생활을 이어간다. 이때부터 '최보따리’란 별칭으로 불리게 된다. 도피생활 중 해월은 동학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하지만 끝내 1898년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돼 순교한다.
(동학의) 기둥은 말라버린 모습이지만, 그 힘은 갈수록 여전히 남아 있다. 높이 날아 멀리 달아나라.’
그는 우리 역사상 최장기 수배자다. 평생을 숨어서 생활했다. 늘 떠돌았기에 '최보따리’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그의 수배생활은 곧 동학의 재건이라는 위대한 실천의 삶이었다. 그늘 아래의 잠행이 계속되면서도 그의 주변에는 신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아울러 이 땅 구석구석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 속에 동학의 사상을 심어나갔다. 이 성실과 끈질긴 실천의 열정이 동학의 교세를 계속해 불려나간 원동력이었다. 그는 경주 황오리에서 태어난 뒤 포항에서 일자무식 농사꾼으로 생활했지만, 타고난 종교적 열정으로 동학의 2대 교주가 됐다. 무서운 기억력으로 경전을 외워 이를 자기 사상으로 무르익혀 내놓았다. 1870년대의 어느 더운 여름 날. 청주의 신도 서택순의 집에 피신해 있던 때다. 베짜는 소리가 들린다. 해월이 묻는다. “누가 베를 짜는 소린가?" 서택순이 “제 며느리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래?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게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하느님)가 베를 짜는 것인가?" “……" 서택순은 해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물거린다. 해월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신도들에게 강조하곤 한다.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하느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며느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받들라고 한 건 당시의 엄격한 남녀 구별과 신분사회에서 혁명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해월은 이 사상을 발전시켜 '인내천(人乃天)’, 곧 사람이 하늘이란 사상을 내놓았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은 인간의 평등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니의 살같이 하라" “밥 한 그릇에 세상만사가 다 들어 있다"고 가르쳤다. “새소리도 시천주(侍天主) 소리"라고도 했다.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는 그러한 사상을 이론적으로, 또는 지식의 체계를 들어서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삶 속에서,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서, 민초들과 어울려 노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거나 실천을 통해 인식시켰다. 이런 가르침을 그는 수배생활로 점철된 평생에 걸쳐 게으름 없이 실천해냈다. 피신하는 곳마다 농사를 짓고, 나무를 심었다. 새끼를 꼬고 짚신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동학의 가르침을 쉼 없는 샘물처럼 온몸에서 우려내놓았다. 그에게 있어서 변혁과 혁신, 그리고 진보는 곧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했다. 그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 3) 그의 힘은 커서, 동학의 교세는 확대되어 갔다. 1892년에는 동학교인 수천 명이 삼례에 모여 수운 최제우의 명예회복과 동학의 인정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신원운동을 펼친다. 이 기운이 이듬해 서울 광화문에서 동학교인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임금에게 동학을 인정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커진다. 이 때 왕은 긍정적인 교시를 내리나, 이는 동학교도를 해산시키기 위한 임시처방에 불과했음이 나중에 밝혀진다. 이에 충북 보은에 모여든 동학교도들이 비폭력 집단시위를 벌인다. 이듬해 겨울 청산에서 전봉준이 궐기한다. 해월 은 손병희를 동학군 총사령관격인 통령으로 임명하고, 전라도로 진군해 전봉준 부대와 합세한다. 그는 전투의 와중에 있었으나,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군중 속에서 숨은 채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대패한다. 그는 다시 강원도 산 속으로 피신한다. 1895년 12월 그는 치악산 수레너미에서 손병희에게 동학의 도통을 전수한다. 앞서 손병희에게 의암(義菴)이란 도호를 내린 바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죽음을 생각하곤 한다. 나이 70을 넘기면서 죽음마저 위대한 실천의 한 모습으로 보여야 한다고 여긴 것이리라. 스승이 갔던 그 길을 고스란히 따라감으로써 동학교주로서의 삶을 보여주려는 마음을 자주 다진다. 그 길은 체포되어 처형되는 길이었다. 그는 1898년 72세 되던 해 봄에 원주 원진여의 집에 머무르다가 체포되지만, 이는 이미 예견된 과정이라 할 만하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압송, 서소문 감옥에 수감된다. 두 달 뒤 교수형에 처해진다. 스승이 갔던 그 길을 그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의 시신은 광화문 밖에 버려져 가매장되지만, 이종훈 등이 수습하여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봉 아래 8부 능선에 묻힌다. 그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높여 산 적이 없으나, 죽은 다음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지도자’로 꼽힌다. 끊임없는 관의 추적과 수배 속에서도 민초들의 삶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동학사상을 널리 펼치고, 이를 통해 동학농민운동이라는 근대 최대의 민중운동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후 3·1운동 등 독립운동과 근대화의 사상적 토대와 조직을 구현해냈다. 공동 기획 : Eride GyeongBuk 이하석 : 시인 ·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 = 포항시 신광면사무소 제공> |
첫댓글 잘 몰랐었는데, 읽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