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人生史)
“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거니까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해 줍시다 ”1964년 대학교 2학기 등록금이 없으니 휴학을 하라는 아버지에게 하시던 내 오마니의 한 마디가 아직도 심금을 울리고 있다.
“ 아니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대학원을 또 간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만, 내일 모레이면 80인데 그것도 일본언어문학과를 지원한다니 등록금도 기백만원일텐데 ~~~ ” 며칠전에 아내가 던진 한 마디가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저 머나 먼 하늘 나라로 떠나신지도 세월이 몇 해인가. 아버지는 벌써5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오마니는 42년이 되는 해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고 계신 내 어버이의 생각은 어떨까. 당신의 며느리가 어버이의 아들에게 던진 한 마디와 내 오마니가 남편에게 간절한 충고의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런지 알 수는 없지 않은가.
이북 장수산에서 아들을 낳게 해주십사고 백일 기도를 드리고 1944년 7월16일(음)에 얻은 귀하디 귀한 금쪽같은 맏아들이다.
이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란 아들인 최정남의 삶의 뒤안길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날의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인생의 굴곡을 더듬어 보련다. 한 마디로 인생사(人生史)이며 자신만의 한 줄기 삶의 역정(歷程)이다.
내가 태여난 때가 1944년도이며 오늘이 2021년 9월 20일이다. 80년이 내일 모레인 78년의 세월이 흐른 요즘이다. 살아오는 동안 세상의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가슴에 품었을 것이다. 한 때는 즐거워서 기뻐 날뛰고 어느 날은 화가나서 성을 내고 슬픔의 눈물도 수없이 쏟았을 터이다. 나 혼자만의 인생사가 아닌 인간이면 누구나 당연히 겪는 생활상이 아닌가. 피할 수 없는 “최정남”이라는 나 자신만의 인간역사(人間歷史)이며 삶의 일기인 셈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기는 계속 될 것이리라. 그 날이 언제이려는지 어느 누구도 예측불허인 연극의 장막은 이어질 것이다. 78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역사를 잠시 들여다 보면 어떨까.
38 이북 평안남도 개천군 용현리 227번지에서 태여나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에서 자란다. 할아버지는 태여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으니 전혀 기억이 없고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내 아버지의 갸름한 얼굴에 인자한 할머니이다. 첫째 큰 누님은 평안도 곽촌 마을에 출가한 상태이다. 얼굴이 둥굴고 무던한 맏며느리의 인상이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두 번째 누님과 셋째인 작은 누나 남동생 그리고 나 모두 일곱 명의 한 솥밥의 식구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다. 1951년 1,4후퇴 당시에 여섯 식구만이 피난길의 열차 화물칸에 오른다. 맏아들인 나는 만 여섯 살의 어리디 어린 유아기이다. 가을 수확한 곡식이 창고에 가득하니 곡물을 지키려고 할머니는 요지부동이다. 피난민 모두가 일주일이면 아니 한 달이면 다시 귀향할 것이라고 확신을 하며 떠난 것이다.
눈보라는 앞을 가리고 매서운 칼바람만이 살을 에이고 있다. 아버지는 오바코트 속에 나를 꼭 품고 있다. 장남인 맏 아들이 얼어죽을까 노심초사 걱정이렸다. 가다 서다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기차의 지붕에도 피난민들이 하얗게 눈발에 얼어붙어 있다. 잠시 기차가 멈추어 있을 순간에 많은 사람들은 냄비에다 쌀을 넣어 밥을 짓는다. “ 꽥 에~엑 괙 ~~~치이익 칙 퍼억 퍽 ~~~ ” 열차가 출발을 한다. 제대로 밥이 되게 끓이지도 못하고 열차에 오른다. 이런 풍경이 며칠씩 계속 되고 있다. 우리 가족들은 쌀도 냄비도 없다. 그조 물끄럼이 바라볼 뿐이다. 그것도 할머니가 장만해 준 갱엿 한 덩어리가 전부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퍼붓는 눈발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요즘도 어쩌다가 영락교회를 바라 볼 때면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맨 바닥에 가마니도 깔지 못 한 피난민들의 굶주림의 신음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다. 남대문 시장 드럼통에는 미군부대에서 버려진 쏘세지 빵조각 버터 휴지 담배꽁초 콘돔등 쓰레기들로 가득하다. 한 그릇에 일원인가 몇원이면 먹을 수 있는 것을 그저 스쳐 지나며 침을 삼킬뿐이다. 가을이면 오마니는 추수가 끝난 밭이랑을 더듬으며 버려진 배추 무 떡닢을 주워 오신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낮선 타향에서 여섯 식구의 굶주린 허기진 배를 달랠 방법이 무엇인가. 겉보리에 버려진 배추 무 시래기 떡닢을 넣고 가마솥 가득히 겉보리죽을 장만하는 오마니이다. 추운 겨울 날에도 하얀 무명 치마 저고리만을 걸치고 베틀을 짜려고 먼길을 나선다. 가지 말라며 울며 치마에 달라붙는 자식의 안타까움을 그저 한숨으로 달래줄 뿐이다. 노점상을 하고 있는 오마니에게 달려가면 눈깔사탕 하나라도 입에 넣는 순간만이 떠오르고 있다.
계룡산 밑의 두계에서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다. 입학식은 커녕 교실도 없으니 맨땅의 나무 그늘 밑이 전부이다. 서대전과 대전에서 초등학교 5학년 1학기까지 어떻게 다니고 무슨 공부를 했는지 전혀 기억도 없다. 아버지가 서울을 찾아 서울운동장 근처에서 처남을 만난다. 서울로 올라오라는 내 외삼촌의 한 마디가 서울 생활의 시작이다. 지금의 을지로5가 근처의 중부시장 자리이다. 20여채의 피난민의 판잣촌이 형성된 때이다. 서너평도 안되는 판잣집에 여섯식구의 삶의 터전이다. 물도 전기도 없는 맨 땅에 거적을 깔고 부대끼던 시절이다.
서울에서 5학년 2학기부터 을지로4가에 있는 영희국민학교에 들어간다. 학교가 끝나면 내 오마니의 상점(?)으로 달려 나가곤 한다. 여름이면 시원한 어름 냉차 한 사발을 마시기 위함이다. 한 말 정도 크기의 유리통에 어름조각 한개 수박 한쪽 사카린을 듬쁙 넣은 냉차이다. 얼마나 맛있고 시원함에 그런 맛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을지로5가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노점상을 경영하시던 곳이다. 지금도 그 근처를 지나가노라면 까마득한 추억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침이면 공중변소 앞에는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노라 줄을 서고 있다. 나무 판자로 어설프게 엉기어 놓은 똥통이다. 화장지는 언감생심으로 수북히 쌓인 똥바닥 위로는 허연 회충들이 꿈틀대고 있다. 뱃속에는 회충 십이장충 촌충 갖가지 기생충의 산실이나 다름이 없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일년에 한번은 기생충약을 복용케 하고 있다. 선생님이 보고 있는 면전에서 먹기도 싫고 보기도 싫은 회충약인 산토닌 십이지장충약으로는 알코파(Alcopar)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생각이 난다. 단순히 마비시켜 기생충을 배설케 하던 약이다. 죽지도 않고 뱃속에서 꿈틀대다가 대변에 섞어서 살아 있는 그대로 떨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기생충약을 스스로 알아서 일년에 한두번은 챙겨서 먹을 것이다. 모든 야채들이 철저히 방역되고 세척되므로 기생충 천국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1차 2차 모두 낙방이다. 공부에는 관심도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보다 못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동북중학교에 입학케 한 것이다. 맏아들을 어떻게든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닐까. 그것도 입학식을 치른 한달여가 훨 지나서이다. 시험도 없이 3차로 입학한 모양새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학생이라는 신분을 확인한 셈이다. 보름달이 훤히 뜨는 날이면 집 바로 뒤에 있는 자그마한 동산에 오른다. “ 앞으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서 반드시 훌륭한 고등학교에 입학 하겠습니다.” 보름달을 바라보며 굳게 다짐을 하곤 한다. 자정이 넘도록 책상에서 공부를 하다가는 그대로 책상 위에서 잠이 들기를 반복이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가위에 눌려서 온 몸이 마비가 되기가 일수이다. “ 정남아 ! 잠은 제대로 이불을 덮고 자거라 ” 보다 못한 아버지의 애절한 충고이다.
고등학교 입시철이 다가온다. 최소한 K,S,K 일류라는 학교는 못 가더라도 그 이외의 고등학교는 갈 수 있으리라 자신감도 생긴다. 나홀로의 생각뿐으로 일류라고 하는 세곳의 고교 이외에는 입학원서 자체를 금지하고 있는 나의 모교 동북중학교가 아닌가.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절대로 타교로 입학 자체를 학교 당국에서 막은 상황이다. 항변 한 마디는 커녕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을뿐 방법이 없다. 앞날이 창창한 제자들의 꿈과 희망을 차단한 스승들이다.
S 고교에 입학시험을 응시 했으나 결과는 뻔한 것이다. 고배를 마시고 앞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본교에서 장학생 시험으로 유인한 모습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장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동북고의 학생으로 돌아온 꼴이다.
정철이 성진이를 포함하여 절친한 친구 세명이 약속을 한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중국집으로 들어선다. 쓰디 쓴 고량주에 술잔을 부딫치며 서글픈 가슴을 달래가며 굳은 약속을 한다. “ 반드시 우리 모두 셋은 서울대학교에 입학을 하는 거야 알았지 ” 정철이는 서울상대 성진이와 나는 서울공대에 원서를 접수한다. 필기시험을 마친 두녀석들은 체력검사도 포기하고 나를 응원하러 온 것이다. “ 너는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에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다 ”는 친구들의 격려이다. 결과는 모두 세명이 낙방의 쓴 잔을 마신 것이다.
재수의 길로 들어서며 또 다시 “ 반드시 서울대학교에 입학 하는 거야 ”거듭 맹세에 맹세를 한다. 나는 강원도 산골에서 강원도가 고향인 친구와 자취를 한다. 두녀석들은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일년이 흐르고 또 다시 입학원서를 제출할 때이다. “ 정남아 이번에는 우리들 모두 연세대학교로 방향을 바꾸는 게 좋겠다. ” 두 친구의 간곡한 하소연이다. “ 너희들은 그렇게 해라, 나는 다시 서울대에 지원할 거야, 사내 녀석들이 약속을 했으면 늙은 호박이라도 찔러야 되는 거야 알았냐 ” 한놈은 연세대 상학과에 또 한 녀석은 연세대 화공과에 입학원서 접수를 한다. 오롯이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로 작년과 같이 지원이다. 시험문제를 접하니 작년보다 문제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합격자 발표 전날에 신당동 친구집에서 한잔술로 하루밤을 지샌다. 아침 신문을 들추며 합격자 명단을 살핀다. “ 야 ~~~ 합격이다 신난다 ~~·” 큰 소리로 외치며 어쩔 줄을 모른다. 두 명 모두 연세대에 합격을 한 순간이다. “ 미안하다, 정남아 어쩌냐 ” “ 미안할 필요 없다, 우선 합격을 축하한다.”
그 날따라 눈이 엄청 쏟아지고 있는 날이다. 집으로 향하는 금호동 고개를 넘으며 생각에 잠긴다. 앞날이 전혀 보이지 않는 깜깜이다. 한 발자국도 내 디디기가 버겁다. 어찌해야 좋을까. 합격 여부를 학수고대 기다리고 계실 어버이가 가슴을 쪼인다. 아무 쓸모도 별 볼일 없는 패배자일 뿐이다. 얼핏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 방법이 기다리고 있다. 극단적인 선택만이 나의 길이리라. 며칠 밤을 뜬 눈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부모님 누이들 동생에게도 할 말이 없다.
” 정남아 야 야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에 가거라, 서울대보다 더 좋은 곳이란다 어서 일어나서 원서를 사와라 “ 큰 누님의 계속되는 충고와 성화에 마음을 고쳐 먹는다. 성대 약대라는 대학은 어디에 있는 어떤 대학교인가. 더구나 약학대학은 무엇을 배우는 곳인가. 물어 물어 입학원서를 접수를 시킨다.
“ 어이쿠 이게 뭐야, 또 떨어지는구나, 13 : 1 이라는 경쟁률이라니 ” 앞 자리에 앉은 수험생 녀석은 시간도 되기 전에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선다. 저 녀석은 붙을 테이고 나는 무엇인가. 합격자 발표날이다. 성대 교문을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벽에 붙은 합격자 명단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난생 처음 오마니 손을 잡고 합격자 명단을 뚫어지게 살핀다 “ 四 三 三 ”세 글자가 선명하게 잡힌다. “ 엄마 나 합격했어 ” “ 그래 잘 했다, 아버지 한데 빨리 가자꾸나 ” 그토록 환한 모습의 오마니 얼굴은 처음이다. 아버지가 아들하고 같이 합격자 발표를 보고 오라고 했다는 말씀이다.
1964년 대학교 입학식에도 오마니와 누님이 함께 참석이다. 그것도 맨 앞 줄에 자리를 잡으신 것이다. 얼마나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자식이더냐. 성대 약대에는 동북고 출신은 오롯이 혼자만이다.
그 당시에는 군사독재 타도와 한일 협정비준 반대 데모가 한창일 때이다. 문과대 앞에서는 마이크를 잡고 수 많은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데모 행렬을 가다듬고 있다. “ 선배님 약대생들은 지금 실험실에서 교수 강의를 들으며 실험을 하고 있어요 ” 법대 학생회장에게 달려가서 흥분을 돋군다. 약대 실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나도 뒤따라 옆에 선다. 한창 실습 강의 중이던 교수님이 밖으로 슬며시 피하신다. “ 전교생들이 지금 화형식을 하며 밖으로 데모 행렬을 나서고 있는데 약대생들은 이렇게 강의를 듣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군사독재 횡포를 저지 하는 게 우선인가 ” 교탁을 내려치며 열변을 토하고 돌아선다. “ 여러분 같은 성대 학생으로 우리도 함께 데모에 합류 합시다. 뜻에 동의 하는 사람은 제 뒤를 따르시고 아니면 뒷산으로 올라 가세요 ” 이것이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애국심의 첫 발로가 아닌가.
수 많은 학생들이 군트럭에 실려 경찰서행이다. 덕분에 며칠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감옥살이 신세도 거친다. 찌그러진 양은 그릇 두 개에 콩보리밥과 씨래기국을 담아준다. 그릇은 곰팡이가 찌들어 고약한 냄새로 먹을 수가 없다. 1.5평 감방에 학생 십여명을 몰아 넣은 곳이다. 한 쪽 귀퉁이에는 나무 똥통이 자리를 틀고 있다. 제대로 편히 다리를 뻗고 눕기조차 힘들다. 3일 동안은 아무 것도 먹지도 못한다. 밥과 국을 담은 그릇을 창 밖으로 집어 던진다. “ 야 ~~ 학생녀석들아 밥을 버리지 말고 위로 올려 보내라 ” 기결수들이 애걸 하듯이 소리를 지른다.
3일이 지나고 버리기만 하던 쓰레기 같던 밥도 먹을 수 밖에 어쩔 수가 없다. 수시로 똥통에 올라 앉아서 쫙쫙 설사를 쏟아 낸다. “ 다시는 데모에 절대 참여치 않겠습니다 ” 이런 각서를 학생들에게 한 명씩 제출을 받는다. 통금 시간인 밤 8시 이후에 군인이 운전하는 트럭에 오른다. 운전대를 잡은 병사는 동대문 방향도 제대로 모르는 강원도에서 차출된 병력이란다. 운전자 옆 앞 좌석으로 자리를 바꾼다. 일일이 방향을 가리키며 동대문 근처에서 하차를 한다. 서울운동장 뒤편에 아버지 점포로 향하여 걷는다.
“ 손 들엇 !!! ” 골목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총구를 가슴팍에 들이댄다. 찰카닥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에 혼비백산이다. 10여분 걷는 동안 서너번씩 손을 번쩍 들고 출소증을 보여주며 통과한다. “ 정남아 ! 고생 했다. 학생 때 교육 받았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말아라 ” 호되게 야단을 치리라 생각한 아버지의 차분한 한 마디가 눈물이 터진다.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데모 행렬에 앞장서고 빠지기를 연속이다. 주택가 담장도 수 없이 넘는다. 사과탄이라는 최루탄이 터지면 숨이 막히고 눈물을 쏟는다.
“ 2학기에는 휴학을 하거라 ” 등록금을 마련키 힘든 아버지의 말씀이다. 절대로 휴학은 안할 거라며 울고 불며 발버둥을 친다. 기가 찬 노릇이 아닌가. 오죽하면 자식에게 휴학을 권유 했을까. “ 공부는 죽을 때 까지 하는 거니까네 아떻게든지 마련해 주자요 ” 옆에서 보다 못한 오마니의 애절한 읍소가 아닌가. 평소에는 별로 말씀도 안 하시고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곤 하던 분이다. 이 순간 내 오마니의 한 마디가 없었으면 최정남 너는 지금 무슨 모습으로 어떤 일을 하며 이 날까지 살아 왔을런지 짐작키도 어렵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사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되는 찰나이다.
아들을 앞세우고 그 당시 평화시장으로 향한다. 지저분한 청계천 개울가에는 피난민들의 판자집들이 즐비하다. 시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곳에서 옷을 파는 점포를 경영하고 있는 고향 지인을 찾는다. 이북에서는 가끔 저희 집을 찾으면 내 오마니가 먹을 것을 푸짐히 베풀어 주면 게걸스레 먹었다는 당사자이다. 옛 정이 그리워 흔쾌히 등록금을 내 손에 쥐어 준 게 아닌가. 그 이후로 지금껏 한번 찾아 뵙고 인사는 커녕 생사도 확인치 못한 멍한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