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장영희의 시마을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논문&평론&기타 스크랩 고진하 시 생태의식 연구 / 장영희
만농 추천 0 조회 96 12.09.17 10: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생태시라는 말은 금세기의 새로운 화두가 된지 오래입니다. 그런 사상은 불교의 화엄 사상이나 인연설, 기독교의 고전 사상, 노자의 무위사상 등이 현대에 와서 과학만능 인간중심의 사고로 인한 폐해를 재인식하면서 예술분야에도 한 가지 표현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목사이면서 시인인 고진하의 시를 생태시로 해석함은 만물의 평등 사상이 시의 중심을 관류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목사인 그의 시를 기독교적 입장으로 해석한 장명희의 논문을 읽고 무엇이 시정신인지 느껴보고자 합니다. 출전 : 어문논총에서 (이담)

 

고진하 시 생태의식 연구

 

1)장 영 희*

 

 

차 례

1. 들어가는 말

2. 우주론적 형제애

3. 기독교 생태윤리의 구현

4.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고진하는 강원도 영월에서 1953년에 출생하여 감리교 신학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강원도 강릉 교외 산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이다. 그는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치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등을 펴냈다.

 

고진하의 시에 대해서는 몇 편의 평문이 있는데, 이경호는 ‘견성의 시학’이라는 평문에서 고진하는 ‘견성’에 집착하는 시인이1)라고 표현했다. 또 김기석은 고진하 시집 우주배꼽의 해설에서 고진하의 시를 ‘시간 속 멀미’라고 평하기도2) 했다. 부분적으로 보면 두 사람의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시의식의 밑바탕에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있고, 기독교 사제로서 바라보는 기독교 생태윤리를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고 있는 시상은 다분히 생태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생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진하의 시를 생태시의 범주에 넣는 것을 망설일 필요가 없다.

 

생태시는 생명의식의 변화와 환경 위기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나타났는데, 생태학적 상상력에 시적 근거를 둔,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계기로 삼아 창작된 시 작품을 말한다.

 

생태문학을 생태주의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생태주의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의 환경운동가이며 생태주의자인 배리 코모너는 생태주의의 원칙을 네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 모든 생물은 다른 모든 생물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둘째, 모든 것은 어디론가로 자리를 옮길 뿐 이 세계에서 없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의 분자에서 다른 분자로 그 모습을 바꾸어 생물체 안의 생명 과정에 영향을 끼치면서 모든 것은 다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갈 따름이다. 셋째, 자연이 좀더 잘 알고 있다. 즉 현재 생물의 조직 또는 자연 생태계의 구조는 엄격하게 선별되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새로운 조직이나 구조도 현재의 그것보다 더 낫지 않다는 의미에서 가장 최선의 상태에 있다. 그리고 넷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 얻어지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3) 김욱동은 코모너의 이 원칙에는 생태주의의 기본 개념이 거의 모두 들어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여기에다가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를 덧붙이고 있다.  

 

1. 첫째, 생태주의는 유기적 또는 전일적 패러다임을 형이상학적 기초로 삼는다. 여기에는 기계론적 또는 원자론적 패러다임이 들어설 자리란 아예 없다. 둘째,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연관성은 흔히 그물이나 망의 비유로 표현한다. 셋째, 전체는 부분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부분의 총화가 전체>라는 유클리데스의 기하학적 명제는 생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넷째, 우주는 언제나 역동적이며 살아 있다. 인간이건 인간이 아닌 자연 세계이건 모든 것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인다. 다섯째, 생태주의는 지속적인 변화과정을 중시한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변화 과정을 겪으면서 발전해 나간다고 본다. 여섯째, 이항대립적 또는 이원론적 사고를 거부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배타적 입장보다는 오히려 <모두 다>의 포용적 입장을 취한다. 일곱째, 영혼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것을 더 높이 여긴다. 다시 말해서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 그리고 여덟째, <다양성 속의 통일성> 또는 <통일성 속의 다양성>을 지향한다. 언뜻 모순적인 표현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모든 개체는 각자의 개성을 지켜 나가면서 전체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는다.4)

 

위에 인용한 배리 코모너나 김욱동의 글은, 생태문학 연구 이론의 틀을 만드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고진하의 시 속에 드러난 생태의식을 파악하는데는 이 이론 중에서 상당 부분은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모든 생물은 다른 모든 생물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코모너의 이론과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연관성은 흔히 그물이나 망의 비유로 표현한다.’는 김욱동의 말은 근본적으로 서로 통하는 생각인데, 우주를 하나의 큰 공동체로 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진하의 시집 중에서 ?프란치스코의 새들?5)과 ?우주배꼽?6)을 텍스트로 하여 그의 시에 나타난 생태의식을 살펴 보고자한다.

   

2. 우주론적 형제애

 

시집 ?프란치스코의 새들?에 실려 있는 표제시 ‘프란치스코의 새들’은 제목에서부터 아씨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를 떠올리게 한다. 프란치스코는 가톨릭의 사제였지만 가톨릭 교회 일부에서는 그를 상당히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볼테르는 프란치스코를 ‘벌거벗고 돌아다니고, 동물에게 이야기하고, 늑대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눈사람 아내를 만드는 미치광이’라고 평했다.

 

프란치스코가 때로 벌거벗고 돌아다녔음은 사실이다. 대중 앞에서 옷을 모두 벗음으로써 참회의 생활을 시작했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처럼 팔을 벌리고 땅 위에 벌거숭이로 누운 채 그 생활을 끝냈던 것이다. 그는 새끼 양, 새끼 토끼, 제비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야기를 걸고, 굽비오(Gubbio)의 늑대를 길들여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가르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육체의 유혹을 막기 위해 눈사람 아내를 만들고 눈 속에 벌거숭이로 뒹굴었다고 한다.7) 프란치스코의 삶에 나타나는 관점은 창조물의 조화를 형제간의 우애로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 연구 전문가인 가톨릭 사제 민성기(요셉)8)는 다음과 같이 프란치스코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랑이신 하느님을 늘 가까이서 체험한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경이로움과 친교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프란치스코에게 비친 피조물들은 그저 단순한 창조물들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는 질서와 조화를 느꼈으며, 창조된 존재들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을 보았다. 피조물들에는 창조하신 분의 표가 새겨져 있으며 그분의 사랑, 관용, 그리고 그분의 모든 특성이 들어 있음을 프란치스코는 느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라 불렀다. 이러한 의식은 피조물들을 있게 한 근원 및 기원이 한 분 하느님이심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9)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들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형제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지금까지 인간들 일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은 한 형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형제 자매의 관계라는 생각, 이것이 생태학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듯이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인간의 사고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가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훼손하여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계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오늘날의 환경과 생태계 문제를 발생시키고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생태사상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세상만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과 자연만물은 공존해야한다는 의식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지금까지의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나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고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뭇 생명을 지배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는 모습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하고, 그 파괴의 결과가 다시 돌아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을 개탄하는 것이다.10)

   

프란치스코의 사상과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고진하의 시 ‘프란치스코의 새들’에 나타난 생태학적 상상력이나 생태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먼저 프란치스코가 지은 ?태양의 노래?를 통해 그가 노래했던 우주론적 형제애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머니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도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 <태양의 노래>(프란치스코/최민순 옮김) 전문 -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형제 자매로 보고 있다. 우리가 자신의 형제 자매를 헤치거나 잡아먹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들이 더 잘 되기를 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는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한 형제라는 전제 아래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과 더불어 하느님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있다.

 

‘언니 햇님, 누나 달이며 별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 쓰임 많고 겸손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 누나요 우리 어머니인 땅’이라는 표현의 밑바탕에는 세상 만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한 형제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관계가 이른바 우주론적 형제의 관계이다. 이런 세계관이 바로 우주공동체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고가 우주공동체적 세계관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인간이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인간 아닌 다른 신의 피조물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정도로 행해지는 파괴와 탐욕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되고 오늘날의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맨 먼저 버려야 할 사고 중 하나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은 인간만이 주장하는 것이고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 주장하는 지극히 자의적인 주장이다. 신의 피조물들 중에서 인간이 가장 위에 있고 그 다음에 자연이 있다는 서열을 주장하거나 자연을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하고 지금까지 나타난 모습을 보아 잘 알지만 모든 생태계의 문제를 유발한 근본적 사고이다. 신과 인간, 자연 사이의 단절이 전제된 사고는 이제 아무 쓸모 없는 사고가 되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진 셈이다.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자연과 신 사이의 이와 같이 단절된 세계관을 부정한 자리에서 우주공동체적 세계관이 나올 수 있는 바, 이 세계관 속에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 신이 다 같은 동반자로서 우주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따라서 편견에 가득 찬 인간들이 이들 사이에 설정해 놓은 서열과 계급은 부정된다.11) 여기서 말하는 우주공동체란 ‘우주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임을 뜻하는 개념’12)이다. 물론 우주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무생물에서부터 인간까지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흙, 바위, 지렁이, 꽃, 호랑이에서부터 이른바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까지 하나의 유기적 관계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태양의 노래’에서 ‘햇님, 달, 별들,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 물, 불, 땅’들이 언니요, 형제이며 어머니로 표현했다. 인간들끼리만 형제 자매가 아니라 신의 피조물들 모두가 하나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우주공동체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아닌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이 대립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라 이웃인 것이다. 우주공동체적인 세계관에서 말하는 이웃은 어느 한 부분에 있는 존재만 말하지는 않는다. 우주공동체란 온전한 유기적 연결 그물 전체를 말하는데, 부분은 온전한 전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존재에 참여하는 모든 것, 심지어 무생물적인 존재까지도 이웃에, 이웃사랑에 참여시켜야 할 것13)이다.

 

우주론적 형제애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있어야 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인간의 삶의 형식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또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로운 사회 발전의 토대인 윤리 가치들은 생태 환경 문제와 구체적으로 연관이 있음을 진단하고, 순간적인 만족과 소비주의, 인간의 가치와 생명에 대한 존중의 결여로 야기되는 인간과 생태계에 대한 무관심한 우리의 생활 양식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볼 것을 호소한다.14) 교황은 생태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절제와 극기, 희생 정신을 포함한 금욕주의 전통을 그 실천 덕목으로 제시하면서 특히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는 생태계 교육, 즉 창조의 미적 가치를 올바로 식별할 수 있는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말한다.15)

 

 

 

 

새벽 명상을 하다 문득 天上에선 듯 쟁쟁하게 울려오는

 

새소리를 들었다 가는귀먹은 하느님,

 

쿨쿨 코골며 새벽 단잠을 즐기는 젊은 것들이야 듣건 말건

 

청정한 새벽 숲속을 울리는

 

소쩍새, 뻐꾸기, 찌르레기 구슬픈 울음 소리----그 사이로

 

가끔씩 웬, 맑은 은방울 굴리는 새소리도 들렸다

 

(저 새소리가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藥이-----?)

 

오, 그렇다면 올빼미 박쥐 굼벵이 등

 

어둠 속에서 퍼드덕거리며 꿈틀대는 진귀한 神藥들을

 

어렵사리 구해다 먹고도

 

肝에 달라붙은 암덩어리를 어쩌지 못해

 

싸리 가지처럼 빼빼 말라 죽어가는

 

그녀에게, 나는 왜, 저 은방울 굴리는 목소리로

 

차라리 그대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드득 날아다오,

 

말해주지 못하고 새벽마다

 

징징 지렁이 울음 소릴 흉내내고 있는 걸까

 

아아, 그러나 나는

 

저 아시시의 聖者처럼 지상의 병든 새들을 불러

 

드넓은 가슴에 품어안지 못해도

 

내 얇은 귓바퀴에 소리의 화살이 되어 정겹게 날아드는

 

황홀한 새소리에 취해

 

어둡고 음울한 지렁이 울음 소리를 잠시 거둔

 

이 청정한 새벽 숲속

 

-<프란치스코의 새들> 전문-

 

  

시인은 ‘새벽 숲속을 울리는/소쩍새, 뻐꾸기, 찌르레기 구슬픈 울음 소리’를 듣는다. 그 ‘새소리가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藥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온갖 좋다는 신약들이 약이 아니라 이 소리들이 약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올빼미 박쥐 굼벵이 등’을 ‘神藥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렵사리 구해다 먹고도/肝에 달라붙은 암덩어리를 어쩌지 못해/싸리 가지처럼 빼빼 말라 죽어가는/그녀’인 인간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다. 이것은 ‘올빼미 박쥐 굼벵이 등’은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과 같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의 일부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형제 자매를 잡아먹는 인간이 어찌 곱게 보일 수 있겠는가. 시인은 ‘저 아시시의 聖者처럼 지상의 병든 새들을 불러/ 드넓은 가슴에 품어안지 못’한다고 했지만 이미 새들에게 말하고 있다. 한 이웃이며 한 형제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그냥 아름답게만 보는 박제에 대해서도 시인은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혹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회의하면서 사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

 

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

 

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

 

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

 

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나도 이제 허울 좋은 이 조류연구소 주인처럼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중략>

 

과연 나도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 부분 -

 

 

 

 

박제된 후투티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화자는 스스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다. 어떻게 그 처참한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인지 스스로 믿기지 않는다. 마음의 한 쪽은 영혼을 빼앗긴 후투티의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그 모습에 마음이 끌리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다.

 

박제된 후투티는 그냥 새가 아니다. 화자의 형제이며 이웃인 사물이다. 그래서 그것을 처참하게 발가벗긴 인간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 또 또한 그 비난의 대상에서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 시에서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깊은 협곡에서 山짐승과 山사람의

 

가파른 성품을 다독여 흐르는 물처럼 순치시키던

 

나무들이,

 

천지사방 눈 씻고 보아도 흙 한 줌 안 보이는

 

색유리와 시멘트의 도시

 

거대한 빌딩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移植되어 있다 때아닌 돌풍이라도 몰아치면 쓰러질세라

 

몇 개의 지주목에 단단히 허리를 묶인 채.

 

<중략>

 

도대체 어디일까 목발을 짚고 선 듯

 

지주목에 기대어 마지막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는 저 가련한 길벗은

 

- <나무와 기계의 마음> 부분 -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는’ 나무들을 ‘가련한 길벗’으로 표현했다.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벗인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나무의 처지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다. 이 마음이 바로 형제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연민의 정, 바로 우주론적 형제애이다.

 

고진하의 시집 ?프란치스코의 새들?에 나타난 이러한 시의식은 그 뒤에 펴낸 ?우주배꼽?에서는 더욱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그의 시에 나타난 우주론적 형제애 의식을 더 잘 맛보기 위해 다음에 몇 편의 시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나의 내면 아닌 만물은 없구나.

 

햇살에 그을릴까봐

 

챙 넓은 모자를 좋아하는

 

아내와

 

적(敵)들,

 

바리사이와 부처,

 

별들의 장엄에 눈뜨게 해준

 

어린 왕자와

 

똥장군,

 

누에,

 

시계,

 

책상,

 

오징어,

 

부동산 브로커,

 

폐타이어,

 

창녀,

 

연금술사,

 

중년의 권태,

 

점쟁이,

 

뜬구름,

 

다람쥐,

 

치매,

 

독재자,

 

눈사람,

 

맹인성자,

 

도둑괭이,

 

외계인,

 

잡초----오,

 

나의 내면 아닌 존재는 없구나.

 

- <챙 넓은 모자> 부분 -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물은 다양하다. 말 그대로 그의 ‘내면 아닌 존재는 없’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아내부터 적, 세상 사람들이 믿음의 대상으로 하는 존재와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는 창녀까지도 다 품어 안았다. 더구나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분명히 악의 쪽에 서 있는 독재자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교리를 실천하는 한 사제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품고 있는 것은 사람이나 생명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인 오징어, 다람쥐, 잡초부터 무생물인 뜬구름, 장독대까지 모두 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만물을 품은 모습이 실로 우주공동체의 유기적 관계를 잘 인식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푸른 솔과 내 숨결이, 때로 솔 아래

 

묻힌 이와 내가

 

바람의 정다운 끈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느낄 때

 

 

 

 

나는 그이들이 내뿜는

 

숨결보다 훨씬 더

 

큰 숨결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 <진흙 붕대> 부분 -

 

 

 

 

쥐는 나의 유일한 벗.

 

---

 

벗끼리는

 

서로 닮는다더니, 너는 어느새 나를 닮아 있다.

 

- <쥐, 쥐캥거루> 부분 -

 

 

 

 

화자는 소나무와 이미 죽은 이름 모를 한 사람도 모두 하나의 정다운 끈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쥐를 벗으로 삼고 있다.

 

 

 

 

땀에 쩔은 옷섶을 헤쳐도, 난

 

너희에게 별로 보여줄 게 없는데

 

작은 나팔 모양의 제 깊은 속을 열어

 

수줍은 듯 웃고 있구나.

 

- <능소화> 부분 -

 

 

 

 

풀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으며

 

풀, 이란 말에 먼저 뺨을 비벼본다

 

텁석부리 영감이 집어들었던

 

달개비,

 

물 세 동이를 머금고 있다는 신비로운

 

풀에 킁킁 코를 대본다.

 

아, 풀비린내, 달개비가 향기롭다.

 

- <달개비가 향기롭다> 부분 -

 

 

 

 

 

 

 

(낮에 항아리를 열어놓으면

 

눈 밝은 햇님도 와

 

기웃대고,

 

어스름 밤이 되면

 

달님도 와

 

제 모습 비춰보는걸,

 

뒷산 솔숲의

 

청살모 다람쥐도

 

솔가지에 앉아 긴 꼬리로

 

하늘을 말아쥐고

 

염주알 같은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

 

저렇게 내려다보는걸,

 

장독대에 먼지 잔뜩 끼면

 

남사스럽제-----)

 

- <어머니의 聖所> 부분 -

 

 

 

 

3. 기독교 생태윤리의 구현

 

기독교는 계몽주의 이후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에 맞추어 반자연적이고 반생태학적인 해석을 반성없이 전개해 왔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태계 파괴의 정신적인 기초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16) 그러나 생태계 문제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신학 서적을 출판하여 기존의 논리들을 뒤집고 기독교가 반생태적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 중에 제임스 A. 내쉬(James A. Nash)의 ?기독교 생태윤리?는 생태계 문제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어서 생태계 보전에 대해 기독교가 어떻게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 방향을 잡는 데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제임스 A. 내쉬(James A. Nash)는 이 책에서 생태계 위기의 차원과 딜레마를 ‘오염의 복합성’과 ‘한계의 초과’ 두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하고 있는데, 오염이 오늘날 생태계 문제의 유일한 문젯거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자행하는 다섯 가지 행태의 잘못된 과잉(초과)과 오용으로 ‘자원고갈, 인구과잉, 잘못된 분배, 종의 감소와 멸종, 유전공학’ 등을 들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생태학계의 비판을 소개하며 상당 부분은 받아들이되, 논리적인 모순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를 상대로 하는 생태학계의 비판에 대하여 많은 부분이 기본적으로 사실이라는 솔직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기독교는 생태계 위기에 대한 죄책의 한 부분을 짊어지고 있으며 거듭해서 회개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생태계 위기를 초래한 것이 하나의 원인에 기인했다는 이론은 문제를 감상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생태학적 민감성을 보여 주는 성인들의 전설적인 공적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사막의 교부들, 켈틱 성인들, 성 프랜시스와 그 밖의 중요한 몇몇 사람들의 공적을 통해 기독교가 항상 반생태학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는 특히 이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모범이 되는 행동의 예증으로서 기억하고 기려야 하기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나타나는 생태계 문제를 살펴보면 기독교가 그 근원적인 책임이 있다는 논리는 문제가 있는 듯하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 중에는 기독교 못지 않게 반생태학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많다. 따라서 그 생태계 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독교 세계관에서만 찾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환경윤리의 문제 영역들을 5개 부문으로 세분하여 진단하고 기독교 환경윤리의 과제를 찾아가는 형식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17) 다섯 가지 영역은 첫째, 현대인의 소비 생활양식과 환경문제, 둘째, 과학기술과 환경문제, 셋째, 정치와 환경문제, 넷째, 경제와 환경문제, 다섯째, 국제사회의 정치 경제와 환경문제인데, 각 영역마다 실천 과제를 제시하여 생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그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된 실천과제들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치관의 전환은 물론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과제들을 제시함으로써 이론과 실제에 모두 부합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현대인의 소비 생활양식과 관련해서는 자족적인 가치관, 금욕과 절제의 덕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는 한계에 도달해 있다. 자원의 양이 제한되어 있으며 자연의 자정능력도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끝없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인 것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족하는 가치관과 금욕과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맹용길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인에게서 경건과 절제는 단순한 도덕적 생활화가 아니고 중심이신 하느님을 찾는 길이며, 중심이신 하느님께 대한 복종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질서를 보전하려는 생명운동의 수단이다.18)

 

둘째, 과학기술과 관련해서는 과학기술 문제를 과학기술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 윤리의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보낙관주의와 기술 우상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과학기술의 신화 속에 살아간다. 즉,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영원히 확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진보낙관주의(Fortschrittoptismus)는 18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나타났다가 19세기 사회진화론과 더불어 발전했는데, 인간이 이성을 통해 기술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도덕, 종교,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진보하고 인간의 후손들은 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 신념을 의미한다.19) 그러나 이러한 과학만능주의적 사고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정치와 관련해서는 네 가지 실천과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우리나라 환경위기는 무엇보다 성장제일주의의 개발철학과 무한진보론의 낙관주의 이념에 그 주된 원인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신학적 이데올로기 비판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경정치, 즉 민주주의를 활성화하기 위한 교회의 과제, 시민 환경단체와의 연대를 통한 환경보전운동 실천의 과제를 들고 있으며, 교회는 환경파괴의 가장 크고,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인 가난한 사람들을 편듦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경제와 관련해서는 몰가치성을 주장하는 경제학의 자기고유법칙성(Eigengesetzlich-keit)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비판의 과제, GNP 수치의 증가를 유일한 목표로 삼는 성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학적 비판의 과제 등을 말하고 있다.

 

다섯째, 국제사회의 정치 경제와 관련해서는 먼저 이해관계로 갈등하는 세력들 간에 대화의 공간을 마련하고 중재하는 화해자의 역할, 공동체의식을 실천하는 모범자의 역할, 환경보전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 단체들과 연대하는 협력자가 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고진하의 시는 이러한 기독교 생태윤리 가운데 일부를 자기의 시 속에 잘 구현하고 있다. 고진하는 기독교 사제이며 시인이므로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생태학적 세계관을 품고 있지 않다면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초록빛 자매들과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아내의 섬세한 눈매에서

 

먼저 후끈 피어오르는 그윽한 향!

 

- <질투하는 蘭쥐> 부분 -

   

고진하는 오늘날의 폐허를 잘 인식하고 있다. 그가 서 있는 외부 세계는 물론 자신의 내면 의식까지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직시하고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아니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비양심과 몰염치를 비난하고 그 파괴행위로 죽어 가는 뭇생명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연민의 정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실성한 여인의

 

산발한 머리채만 같은 여뀌풀 우거져

 

검푸르둥둥한 청태와 함께 떠 흐르는

 

개울물엔

 

누군가 물찌똥을 갈기듯

 

화급히 버리고 간 더러운 비닐 조각들과

 

깨진 농약병, 시커먼 비누 거품 방울들이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중략>

 

드맑은 물의 원천을 찾아 잘못 길을 든

 

등 터진 붉은 가재 한 마리가

 

집게발을 하늘로 쳐들고

 

소낙비를 기다려

 

昇天할 날만 고대하고 있는 듯싶다.

 

- <붉은 가재> 부분 -

 

 

 

 

생각해보면,

 

질퍽거리는 물욕(物慾)의 어둠에 빠져 허우적이며

 

신의 빛을 더듬어 찾는다는 당신도

 

장님굴새우보다 나을 게 없지!

 

- <장님굴새우> 부분 -

 

   

인간이 파괴하고 억압하는 생명들보다 인간이 못하다는 인식은 역설적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의 논리로 보면 어찌 장님굴새우 한 마리가 인간의 존엄을 따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물욕에 빠져 있는 모습은 결코 새우 한 마리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이다. 이 물욕이 뭇생명뿐 아니라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생태적 위기를 초래했으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고진하는 현실에 절망만 하고 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죽음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혜안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순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푸른 햇살 아래 밀어내놓은 신생(新生)의 꿈들!

 

- <흰줄표범나비,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부분 -

 

 

그는 폐허에서 치유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은 다름 아닌 바로 기독교 생태윤리를 바탕으로 한 사고인데,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전환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4. 맺는 말

 

고진하의 시집 『프란치스코의 새들』, 『우주배꼽』에 있는 시를 통해 그의 시에 나타난 생태의식을 살펴보았다. ‘우주론적 형제애'와 ‘기독교 생태윤리의 구현’ 두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고진하의 시적 대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말 그대로 우주 만물을 소재로 하여 시를 쓰고 있는데, 온갖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마디로 우주론적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물, 무생물 구분하지 않고 내면으로 품어 안고 있으며, 인간의 최고의 가치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을 형제 자매의 동등한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지금까지 지배, 피지배의 관계로 생겨난 생태계 문제를 극복하려고 한다.

 

고진하의 시에는 자족적인 가치관, 금욕과 절제의 덕을 강조하고 있는 시 등 기독교 생태윤리가 잘 구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직시하고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비양심과 몰염치를 비난하고 그 파괴행위로 죽어 가는 뭇생명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연민의 정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 절망만 하지 않고 죽음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혜안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순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폐허에서 치유로 가는 길, 즉 기독교 생태윤리를 바탕으로 한 사고로 세계관을 전환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

 

참고문헌

 

- 1차 자료 -

 

고진하, 『프란체스코의 새들』(문학과 지성사, 1993)

 

고진하, 『우주배꼽』(세계사, 1997)

 

 

 

 

- 단행본 및 논문 -

 

맹용길, 『자연.생명.윤리』(임마누엘, 1992)

 

민성기, 『태양의 노래』(한빛출판사, 1996)

 

에릭.도일, 『태양의 노래』(분도출판사, 1986)

 

요한 바오로 2세,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는 평화?(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1990. 1. 1)

 

장영희, ?생태시와 생태의식 연구 시고? 『문창어문논집』제37집, (문창어문학회, 2000)

 

정효구, 『우주공동체와 문학의 길』(시와시학사, 1994)

 

제임스 A. 내쉬, 『기독교 생태윤리』(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조용훈, 『기독교 환경윤리의 실천 과제』(대한기독교서회, 1997)

 

프란치스칸 사상 연구소, 『프란치스칸 삶과 사상』(가톨릭출판사, 2000)

 

 

 

 

The study of ecological consciousness of Go, Jin-ha's poems

 

Jang, Yeong-hui

 

 

We have look into the ecological consciousness of Go, Jin-ha's poems in the poetry ?프란치스꼬의 새들? and ?우주배꼽? written by him, a minister and poet. We reached the following conclusion, examining the ecological consciousness into two categories, the universal brotherliness and the realization of Christian ecological ethics.

 

His poetic objects are diverse. The viewpoint of all the things is based on the universal brotherliness in a sense, doing his works with all the materials of the universe literally. The practice of love the human supreme value is revealed, including it internally irrespective of the animate or non-animate things. He is trying to solve the ecological problems resulting from the ruling and ruled relationships of these days, by grasping the relationship of human and nature as the equal thing of brotherliness.

 

The Christian ecological ethics is well proposed in his poems together with the self-sufficient values, the abstinence and temperate virtue. In addition, He faces the upcoming reality, deals it frankly, criticizes the consciencelessness and shamelessness and sympathizes pathetically the lives dying with the destructive forces. There are, however, the wisdom of cherishing the hope out of the death without submitting to the reality and the circulative universal value. He asserts emphatically the healing process, that is, turning the current universal value into Christian ecological ethics based upon it.

 

There are the new viewpoint of all the things underneath the poetic consciousness through his poems and Christian ecological ethics as a Christian minister. Therefore, we can consider the poetic image flowing throughout his works to a certain extent as the ecological consciousness seeking the ecological universal value.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