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
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
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이성복의 시 '편지3' 전문
우체국에 앉아 있는 여자
햇볕은 이미 여름처럼 따갑다. 창밖에서 부서지는 햇살은 도로에서 하얗게 일
어나는 먼지를 따라 부풀어오르고 남자 직원들의 입에서는 어느덧 덥다, 소리가
흘러나온다. 누군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신설된 프로 야구의 중계방송 소리,
첫 번째 타자 타석에 틀어섰습니다. 크게 숨을 고르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아무
개 선수... 말씨는 빠르건만 그 말씨가 스피커를 통해 정인의 귓가에까지 다다르
는 동안 그의 말씨 또한 그리게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다. 손님이 한적해진 오
후의 우체국에 앉아서 정인은 멍하니 우체국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사복 윗
도리를 벗어들고 걸어가는 맥고 모자를 쓴 중년 남자의 반팔이 시원해보이는 오
우 였다. 우체국에서 일을 하게 된 지도 벌써 이년. 이제 일도 손에 익을 만했고
소포를 부티거나 등기를 접수하거나 우표를 파는 쉬운 일처럼 보였으나 막상 해
보니 땀을 뻘뻘 흘리게 하던 그런 일도 이제 손에 익을 만해졌다. 읽다가 만 책
을 살며시 집어 들어 펴는 정인은 이제 스물 한 살이었다.
갸름한 윤곽의 얼굴은 보다 억세어져서 약간 각진 인상이었지고 여릿여릿하던
윤곽은 진해져서 언뜻보면 자기 주장이 세어보이는 듯, 그러나 어찌 됐든 정인
은 아름다운 처녀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훌쩍한 키는 더욱 터서 늘씬한
모양이 되었고 특별히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골격은 튼튼해보이는 인상이
었다. 더구나 길고 하얀 목이 두드러져 보이는 용모는 아마도 아버지 쪽의 피를
더 많이 이어받은 듯했다. 점박이네를 통해 여러번 중매도 들어왔었고-대부분
나이 많은 읍내 상점 주인들이거나 했다- 길을 걷다 보면 동네의 불량한 청년들
의 휘파람 소리가 울리는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가난한 처녀에게 미모란 사실
불편한 것이었다. 얼굴을 팔거나 침대를 팔아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생을 살려고
하는 처녀에게 더욱 그랬다. 이 시골 읍내에서 처음 신설된 종합고등학교이긴
했지만 정인은 종합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이것이 ㄸ로는 아무
상관이 없을 때도 있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 이제 그녀의 일생
을 결정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읍내를 떠나지 않고 취직이 된 것도 그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실제로 차석으로 졸업한 고등학교 동기인 순정이는 아무
데도 취직을 하지 못했고 결국 시흥에 잇는 방직공장으로 떠나야 했으니까 말이
다.
-넌 좋겠다. 예뻐서.
얼굴 반쪽에 검은 점이 있었던 그녀는. 얼굴에 있는 점 때문인지 취직이 안된
다고 여러 번 자신을 비관하다가 결국 공장으로 떠나면서 정인에게 그렇게 말했
었다. 다분히 원망과 비아냥이 섞인 말투였다. 자신이 취직이 안되는 이유가 정
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순정은 취업이 시작된 고등학교
삼학년 이학기 내내 정인에 대한 적개심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딱히 질시라
고 만도 할 수 없는 열등감이라고만도 할 수 없는 것, 그건 분명히 적개심이었
다. 실제로 정인과 순정이 우체국에 원서를 냈을 때 순정을 제칙고 그보다 성적
이 훨씬 떨어졌던 엉뚱한 여학생이 취직이 되어버렸으니, 순정의 말이 모두 다
자격지심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미송도 떠나고 명수도 없는, 정희도 돌아오지
않고 정관마다 집을 나가버린 읍내에서 그래도 가깝게 지내던 순정에게 그런 말
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어쨋든 삼년 내내 체육시간에도 같이
나가고 부기도 같이 배우고 타자연습도 같이 하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니?"
누군가의 소리에 정인은 고개를 들었다.
"정인이가 점점 더 이뻐지는구나."
미송의 어머니였다.
"안녕하셨어요?"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머리를 숙인다.
미송의 아버지 권선생이 수원의 국민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난 후, 미송이네는
미송이네는 잠시 수원으로 이사를 갔다가 재작년에 이곳으로 돌아와 다시 자리
를 잡았다. 정인이와 미송이 다 같이 어렸던 시절 우연히 떠맡다시피 사두었던
임야가 공장지대로 바뀌면서 미송이네는 거의 벼락치듯 부자가 되어버렸던 것
이다. 그것은 읍내의 다른 집들도 다를 바 없었다. 공장이 옮겨오고 민속촌이 들
어서고 자연농원이 들어서면서 골프장이 건설되고 땅값은 하룻밤자고 일어나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 한채를 새로 짓고도 남을만큼 뛰어오르곤 했다. 사람들
이 떠나고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고 성미가 급한 축들은 일찌감치 땅을 팔아버리
고는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일도 예사였으니까. 몇 년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팔아
버린 땅값만큼한 액수의 전셋값을 내고 자신들의 집에서 살곤 했다. 이제 더 전
셋값을 올려 달라는 말이 서울의 땅주인들에게 떨어진다면 보따리를 살 판이었
다. 통행금지가 사라진 후 주정뱅이가 더욱 늘어났고 마을 인심은 흉흉해졌다.
정인이네도 그런 경우였다. 아버지 오대엽은 할머니의 산소로 쓰려고 남겨둔 임
야는 물론 집까지 팔아버린 것이다. 그 땅값이 몇 년후 세배 네베로 올랐음은
물론이었다.그래서 명절날이면 겨우할머니를 보러 집으로 돌아오는 오대엽에
게 주정을 부릴 거리가 하나 더 생겨났을 뿐이었다.
"오늘 요 앞에 예식장에 결혼식이 있어서 오는 길에 들렀다. 이달은 좀 빠르
지?"
미송의 어머니는 핸드백이ㅔ서 만원짜리 지폐를 수무 장 꺼내어 정인에게 건
네어준다. 소액환을 담당하는 것은 정인의 몫이 아니건만 미송의 어머니는 언제
나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딸의 생활비를 챙길 때마다 정인에게 그것을 건
넸다. 딴에는 미더워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는 정인이 아니었고, 어린 시
절 미송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베풀어주었던 호의를 생각한다면 조금도 고까울
바가 아니었으나 정인은 매번 태연하지 못한다. 대학생이 된 그들, 명수 미송
그리고 현희를 생각하면 정인은 차라리 자신에게 이유 없는 적대감의 이빨을
드러내보이던 순정이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다. 명수나 미송이나 현희의 미
소보 다 순정의 적대감쪽이 훨씬 더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인은 여전히 미
소를 머금은 채 미송에게 보낼 돈을 소액환으로 바꾸고 영수증을 떼어 미송의
어머니에게 건넨다.
"미송이가 전화 했디?"
"네? 네. 한 열흘 전에 한 번..."
"아아, 말을 안 했구나. 다음주에 내려온다고 하더라. 중간고사 끝나고 아버지
생신이라고. 안 내려와도 된다고 해도 글쎄 온다고 저런다."
미송의 어머니는 염려하는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자랑스러운 티가 역력했다.
서울에서 내노라 하는 여대에, 딸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 딸을 보내고
싶어하는 여대에 딸을 덜컥 입학시켜놓고 미송이네는 마을 잔치를 벌였었다. 두
해전에 명수가 의대에 입학하고 난지 이년 만이었다. 초대된 목사님의 기도가
길고 길었다는 기억이 문득 정인에게 떠오른다.
"지 공부하기도 바쁠텐데. 아마 정인이하고 또 밤 새워 속삭거리고 싶어 그러
나 부지. 니네 둘이는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나 많니?"
영수증을 받아놓고도 미송의 어머니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미송어머니의
말에 정인은 그냥 웃는다. 사실 고등학교를 헤어져 다닐 때 미송은 집에 내려오
는 날이면 정인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송 어머니의 말대
로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을까. 누군가 취조하듯 들이대며 대 보라고 하
면 글쎄요,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지루한 줄 몰랐다. 거
칠고 난폭한 체육 선생의 흉이며 멋있는 종각 선생님의 이야기, 심야방송에 엽
서를 보낸 이야기, 시와 소설과 별과 나무들... 그리고 어린 시절 냇가에서 개글
개글거리던 조약돌들의 이야기...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미송은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어김없이 정인을 찾아
왔고 때로는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지만 둘은 사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정인 혼자만의 자격지심이었을까, 미송은 자꾸 머뭇거리곤 했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하려다가 말곤 했으니까... 다만 그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광주사태는 사태가 아니라, 민중항쟁이었으며 우리가 유언비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던 말들이 기억났다.
-정인아, 나를 믿니?
미송은 말을 하다 말고 염려스러운 듯이 물었다. 정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
를 끄덕이면서 멀고 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끔 읍내에서 마주치던 전도부
인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정인은 멍한 기분이었다. 정인은 미송에게 처음으로
거리를 느꼈다. 그랬다. 미송의 말이 모두 다 사실이라 한다한들, 정인은 송장
처럼 누워있는 할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우체국의 회식 자리도 조심스러운 스물
한 살이었다. 그 날들을 단 하루도 죽음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미송은 다른 죽음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고 눈빛을 번득이면서.
죽음같은 나날들... 단 한 번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를 빈적이 없지만 정작 자
신에게 생각이 향하면 그건 그랬다.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에 갈 기회를
단 한 번만이라도 준다면 신이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아니, 한 번도 사랑해 보
지 않았던 오빠 정관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가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권한다면
정인은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학력고사를 보는데 필요한 인지대 5,600원이 없어
서 죽을 각오를 하고 정인이 어느날 새벽 수원 아버지 집앞에 갔던 이야기를 미
송은 모를 것이다. 차마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새로 샀다는 아버니의 포니
자동차가 서 있는 집앞에 서 있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정인이 한 결심을
미송은 모를 것이다. 그날 기차가 달려갈 때 차창으로 부딪히던 늦가을의 바람
소리가 정인의 마음을 얼마나 할퀴고 갔는지 정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송은 죽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인은 죽음 같은 나날에 대
해 말하고 싶었고 미송은 실제로 총칼 밑에 죽어간 이천 명의 투사들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두 처녀는 그래서 머뭇머뭇 이제는 재미가 없어진 어린시절 이
야기로 고만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 그럼 미송이 집에 오면 놀러오너라."
미송의 어머니는 정인에게 한껏 웃음을 보이고 돌아선다. 정인은 인사를 마치
고 자리에 앉은다. 여학생 하나가 들어서서 정인에게 관제 엽서를 부탁한다.
정인은 관제 엽서 두 장을 내밀고 돈을 거슬러 주면서 갑자기 이 모든 것에
거의 폭발할 듯한 권태를 느낀다. 왜 여기 주저앉았을까 하는 생각, 왜 정희 언
니처럼 고등학교를 졸없하지도 않고 서울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
갑자기 정인의 가슴으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어머니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머니처럼 이 읍에 남아서 하
염없이 재봉틀을 도리며 송장처럼 살아 있다가 저수지에 빠져 죽어버릴지도 모
른다는 생각, 아니 그래도 어머니는 정인보다 용감했었는지 모른다. 저수지의
차가운 물에 몸을 던져서라도 도망치려 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스물 한 살
의 나이에 이 우체국에 앉아서 우표를 찢으며 정인은 앉아있는 것이다. 처음에
는 아파 누운 할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다른 식구
들 처럼, 그러니까 애초부터 가족을 책임질 생각이 없었던 아버지처럼, 그도 아
니면 집안 꼴 보기가 싫어서 이를 갈며 도망쳤던 정희 언니처럼은 되지 말자고
그도 아니면 정관처럼은 되지 말자고 그리고, 그리고나서 그다음에는 낮에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다가 밤이 되면 일어나 유령처럼 미싱을 돌리던 어머니처럼
은 되지 말자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 오후, 햇살이 부풀어오르는 이 늦
은 봄날의 오후, 우체국 창구에 앉아서 정인은 생각하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다
고 진정 도망치고 싶다고,
길어진 해가 비스듬히 기운다. 낮의 뜨거움이 설사 한여름 같았다 해도 저녁
무렵 옷깃에 스치는 바람은 서늘 했다. 무릎 아래로 긴치맛자락이 바람에 나부
낄때마다 종아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한달째 비가 오지 않아서 길가에 선
키가 큰 포플러의 이파리가 뿌옇다. 타박타박 발걸음을 떼고 있는 정인의 낡은
구두위로도 금방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다. 정인은 그 구두코만 보면서 걷는다.
집으로 돌아가면 부엌에 식은 밥상의 된장찌개를 데워서 할머니와 마주 앉게
될 것이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한지 오래된 집은 초가를 이었을 때 보다 더욱 스산했
다. 할머니가 밥상을 물리면 정인은 제 방에 틀어박혔다. 정인이 첫 월급을 탔을
때 십이 개월 할부로 할머니께 장만해드린 컬러 텔레비젼 소리만 이 집에 사람
이 살고 있다는 것을 전해주었을 뿐, 집안은 할머니의 기침소리를 빼고 나면 언
제나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퇴근을 하면 정인은 그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끔 우체국 직원들과 회식을 하거나 미송을 만날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같은
일과였다. 생각하는 정인의 입으로 작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때 정인의 곁으로 뿌연 먼지의 덩어리가 일어난다. 생각에 잠겨있었던 얼굴
이 순식간에 찌푸려지면서 정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자동차가 정인의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우체국을 나와서 소방서를 도아 정인의 집쪽으로 올라가
는 길이었으므로 차라고는 거의 드문 길이었다. 정인은 먼지 때문에 한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무심한 눈으로 스쳐가는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한 남자의 옆
모습이 언뜻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가 섰다, 정인은 천천히 걸어 자신보다
열 걸음 앞에 선 자동차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에요?"
선글라스를 벗으며 한남자가 묻는다. 엷은 곱슬머리는 이마위에서 부드러운
컬을 그리며 내려와 있고 선글라스를 벗은 눈은 석양쪽을 향하고있어서 작게 찡
그려졌다. 그 작게 찡그리는 눈매가 이상하게도 정인의 가슴에 와서 박힌다.
"안녕하세요?"
정인은 머뭇거리며 낡은 핸드백 줄을 자신도 모르게 부여잡고 말했다.
"타요! 내가 본의아니게 먼지를 뒤집어씌운 것 같은데."
강현준은 황금빛 햇살 때문에 여전히 눈을 작게 찡그린 채로 웃으며 말했다.
약간 거무스름한 얼굴, 웃을 때 드러나는 이가 유난히 희고 가지런해 보였다. 가
끔 방학 때이거나 가와집에 대소사가 있을 때면 멀리서 마주치던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말을 해보기는 십년 전 우물가에서 마주쳤던 이후로 처음이었
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없는데도 정인의 귓가가 확 달아오른다.
"괜찮아요, 타세요, 어차피 같은 방향인데요."
정인은 그가 열어주는 자동차에 머뭇거리며 탄다. 택시도 아닌 자가용을, 그것
도 남자가 운전하는 둘만의 자리에 타 보는 것도 처음이어서 정인의 얼굴은 더
욱 굳어졌다. 정인이 타고 나자 강현준은 차를 출발시켰다.
"우체국에 다닌다고 그러던데..."
"네..."
네, 하고 대답하면서 정인은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서
울서 대학을 다녔고 아직도 서울서 산다는 거 외에 정인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것
이 없었다.
"할머니 제사라서 내려오는 길이에요,예뻐졌네요... 난 아직 꼬마일 거라고 생
각했었는데."
강현중은 카세트를 밀어넣으며 말했다. 정인의 귓볼이 더욱 붉어진다.
"답답하죠? 여기서 계속 있으려니까..."
집어넣은 카세트에서 노래가 흘러나올 무렵 강현준은 다시 말했다. 정인은 긴
장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부인하지도 못한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가수는 절규하듯 노래하는데 강현준은
작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정인은 그제서야 강현준을 바라본다.
연한 회색 반팔 와이셔츠는 깃이 빳빳하고 같은 회색 계통에 자디단 자줏빛
물방울 무늬가 있는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차가 달릴때마다 엷게
풍겨나오는 알 수 없는 향기로운 냄새. 정인은 문득 그에게서 서울을 느낀다.
글세 서울이라고 표상되는 모든 것들, 다림질한 와이셔츠이 깃과 세련된 넥타이
더구나 그것이 약간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저 상태, 향수 인 것 같기도 하고 아
닌 것 같기도 한 이 냄새들...
갑자기 십년전 우물가에서 그와 마주쳤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그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정관에게 돈을 빼앗긴 정인이 손을 씻으러 갔을 때 그는
우물가로 다가와서 정인에게 물을 한 두레박 퍼주고 사라졌었다. 그때 우수에
슬퍼보이던 콧날의 느낌을 정인은 이제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다. 문득 노
래를 흥얼거리던 그가 정인을 마주 바라본다. 눈길을 집중시키고 있던 정인은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 말았다. 그는 약간 큰 듯한 입술을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인은 그냥 웃고 만다.
"서울에 오면 한 번 연락해요."
차가 기와집앞에 다다랐을 때 그가 말했다.
"어디로요?"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있던 낡은 백을 챙기면서 정인은 물었다. 왜 그렇게 질
문 했었는지,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 해도 한 번도 가까이서 마주해 보지 않았던
한 남자에게 어떻게 그렇게 대담한 질문을 할 생각이 있었던지 정인은 순간
입술을 문다.
"아, 그렇군요."
강현준은 와이셔츠 윗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정인에게 건네준다.
정인은 그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
"약속한 거예요."
그는 내리는 정인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정인은 차문을 닫
으면서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겨우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골목길을 걸어오는
데 그가 차문을 닫고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정인은 그가 내밀었던 명
함을 들여다본다. 세정 전자유통이라는 글씨 밑에 대표이사 강현준이라는 글씨
가 씌여있다. 전자유통... 정인은 주소를 들여다본다.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18번
지라는 글씨가 작게 씌어져있다. 서울... 정인은 상기된 얼굴로 집으로 들어섰다.
"할머니, 저 왔어요."
정인은 들고 있던 백을 마루에 던지면서 물었다. 여전히 아무 기척이 없다.
"주무시는 거야? 할머니, 할머니!"
무슨 까닭이었을까, 정인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정인은 자신도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구두를 벗어버리고 안방문을 열어보았다. 할머니는
문지방 가에 가슴을 움켜쥔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할머니!"
노파는 희미하게 눈을 들어 정인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거의 보랏빛이었다. 정
인은 그녀를 진졍시켜 자리에 누이려다 말고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이런일은 처
음이었다. 천식기 때문에 늘상 약을 먹고 있었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살살 속
옷도 빨아놓곤 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나이가 있어ㅆ. 왜 그생각을 하지 못했었
는지... 뛰쳐나왔지만 어떻게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인은 골목길로
뛰어나가 기와집으로 들어섰다. 기와집에 집안일을 봐주는 젊은 처녀가 제사에
쓸 김이 펄펄 나는 흰 백설기를 떼어놓다 말고 갑자기 뛰어드는 정인 때문에 흠
칫 놀라 선다.
"왜 그래요?"
"저 서울서 내려온..."
그때 방문이 열리고 넥타이를 풀어버린 현준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할머니가..."
현준은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당에 던져버리고 신발을 꿰어신고 정인을 따라 나
섰다.
현준이 할머니를 들쳐업고 차에 태운 후, 병원에 다다랐을 때 노파의 얼굴은
거의 흙빛이었다. 저녁을 먹던 의사가 불려오는 것을 보고서야 정인은 현준이
아직도 자신의 곁에 있음을 깨닫는다.
"미안합니다."
"미안은요, 그래도 다행이군요, 제가 마침 차를 가지고 왔을 때 이런 일이 생
겨서, 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나요?"
현준은 피우던 담배를 끄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처음이..."
처음이라고 말하다가 정인은 문득 십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파랗게 변한
입술로 저수지에서 건져올려졌던 어머니... 울부짖던 그날 밤, 미쳤느나겨 연거푸
정인의 뺨을 갈기던 아버니... 그리고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명수...
수원으로 떠난 다음에도 명수는 정인에게 가끔 편지를 보내곤 했었다. 한 번
은 명수가 무슨 청소년 잡지에서 응모하는 백일장에 장원으로 뽑힌 일이 있었다
명수 어머니 정씨댁이 여학생에게 편지가 몰려와서 애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까
봐 겁이 난다고 했었다. 정인은 읍내 책방에서 몰래 명수의 시를 읽었다. 우리들
은 모두 어딘가를 항해 걷는다, 로 시작되던 시구... 어린시절 은륜의 두 바퀴위,
기차를 타고 싶다던 그 계집애, 등을 팍팍히 적시며 울던 그 전설속으로..이라는
대목이 정인의 마음에 와서 박혔다. 정인은 그 후로 명수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건 나였나요? 하고 물어 볼수도 없었지만 왠지 명수를 만날 때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쓰라린 수치감이 정인의 가슴을 핥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괜찮죠?"
"네?"
정인씨 말예요.. 아까 할머니처럼 쓰러지나 해서 나 겁났어요. 두 여자를 한꺼
번에 업는 건 자신 없거든요."
정인은 아,예하며 빙그레 웃고 만다.
"보호자분 되십니까?"
머리가 벗어진 의사가 진찰실을 나오며 현준에게 묻는다. 담배를 비벼끄며 현
준은 공손하게 의사에게 다가간다. 그사람이 아니라 전데요,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정인은 현준의 뒤를 따라 선다.
"천식이 심하시더군요. 잠깐 발작이 일어난 거긴 한데... 연세가 연세니 만큼
글쎄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들군요."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마치 늙었으니까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듯 심드렁
한 말투 였는데 정인의 눈에 금방 눈물이 맺히고 자동 인형처럼 후두두둑 눈물
이 떨어져내렸다. 의사와 현준이 동시에 정인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우선 괜찮으신 거지요?"
현준은 정말 할머니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예, 지금 당장 일이 생긴다는 건 아니고... 지금은 잠드셨어요. 아따가 밤에 깨
어나시면 간호원에게 약을 달라고 해서 드리세요. 금방 다시 발작이 오지는 않
을 겁니다."
현준이 안심이라는 눈치로 정인을 바라보았다. 의사는 머리를 다시 한 번 쓸
어 올리다가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내실로 사라져가고 간호원이 다가왔다.
"수납하세요.'
눈물이 아직 흘러내리는 얼굴을 닦으며 정인의 입이 그제서야 벌어진다. 죽는
것은 죽는 것이고 돈은 돈이다. 하지만 경황이 없어서 빈손으로 달려온 것이다.
현준이 간호원을 데리고 한쪽으로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건넨다.
그러면 안되는데... 하는 간호원의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정인은 우체국에 있는 전화를 생각한다. 아니면 국장에게 말해서
가불을 해야 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정인은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낀다. 어느새 저녁이 내리고 사방이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문득 어두운
들판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이 그녀를 엄습했다. 불빛하나 없는 거리에 서 있
는 것 같은 이 고요...
"됐어요... 잠깐만..."
현준이 정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감쌌다.
"괜찮아요. 제가 다 해결했으니까 오늘 밤에 간호 잘 해드리세요."
"이럴 수는 없어요, 언제 서울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내일 돈을..."
"됐어요, 정인씨. 정인씨맞죠?"
"네."
"됐어요, 괜찮아요. 나중에 저한테 갚으세요. 우리어머니가 제사상 차려놓고 찾
으실 것 같아서 전 이만...."
현준은 정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나서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인
은 그를 따라 나간다.
"들어가 봐요."
"네."
네, 하면서도 정인은 그를 따라 나간다. 그는 열쇠로 차문을 열다 말고 문득
정인을 빤히 바라다 본다. 눈물이 아직 그렁한 눈으로 정인도 그를 올려다 본다.
어둠속에서 바람이 불때마다 그의 앞머리칼이 사르르 나부낀다.
"정말 뭐라고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글쎄요... 이것도 인연인가부죠... 가만 이거 우리 형이 쓰는 말툰데."
그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소년처럼 웃다말고 먼 곳을 바라다 본다. 머리를 깎
은 그이 형 현국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일까. 그의 콧날에 다시 우수의 그림자가
덮인다. 정인은 이번에는 우물가에서 보았던 그의 옆모습을 똑똑히 기억해냈다.
저사람의 진짜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저기, 울지 말아요..."
정인은 그가 자동차에 타고 시동을 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는 기아
를 올리고 나서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정인을 바라보더니 차창을 내렸다.
"명함 잘 가지고 있죠? 아까 했던 약속 잊으면 안 돼요."
"네?"
"서울 오면 꼭 연락하기로 한거 말예요. 그리고 울지 말구요... 이제 저 정말
갑니다."
자동차가 떠난 병원 앞뜰에 정인은 혼자 서있었다. 울타리 장미의 붉은 빛깔
이 어둠속에서 루즈를 칠한 여인네의 입술처럼 붉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는 것도 같다. 정인의 눈가에 짙은 고통이 지나가는 듯하다. 정인
은 발걸음을 한 발자국 떼었다. 밤 공기에 스며드는 농익은 라일락의 향기가 그
제서야 느껴진다. 멀리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다시 정적이 덮힌다.
정인은 천천히 걸어 병실로 들어선다. 흰 시트가 덮인 병원은 새로 지어서
그런지 깨끗한 편이었다. 할머니는 고른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정희 언니
에게라도 연락을 해야 되나 어쩌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정인은 침대 곁에서
노파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이렇게 잠든 할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는게 처음이라는 생각을 정인은 한다.
숱이 없는 성근 머리칼이 이마 위로 ㅁ가닥 흩어져 있다. 정인은 할머니의 머리
칼을 가만히 쓸어 올린다. 이마는 아직 따뜻했다... 거의 칠십 한평생 고통의 자
국이 할퀴고 지나간 듯 할머니의 얼굴은 굵은 주름들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열일곱에 시집을 오는데 말이야...
할머니는 어머니가 죽은 후 밤마다 악몽에 떠는 정인을 갈퀴같은 손으로 쓸어
주머 말을 꺼내곤 했었다.
-할머니도 열일곱 살 적이 있었나?
-그럼, 그때 우리 집 개가 목이 다 쉬었지.
-왜 개가 목이 쉬어?
-내가 아주 이쁜 처녀였거든... 매파들이 하도 들락거려서..
정인은 할며니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검은 저수지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악
몽에서 겨우 벗어나곤 했었다. 할머니도 열일곱 살이 있고 할머니도 새색시적이
있었고, 긴 시간들이 남아 있다는 생각들... 그러니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
들...
할머니의 얼굴은 처음으로 편안해보였다. 아마도 새색시 적에매파들이 들락거
려서 개가 목이 쉬던 그때처럼 어쩌면 발그레한 홍조가 어리는 것 같았다.
정인은 밤 유리창을 내다 본다. 검은 유리차에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스물 한
살의 얼굴... 짙은 눈썹, 선이 굵게 내려온 콧날 그리고 도톰한 입술... 정인은 손
가락으로 제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유리창 속의 소녀도 제 얼굴을 쓸어내린다.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처녀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아까 의사가 사라진 내실쪽에서 와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 소리, 남자의 소리 그리고 여자의 소리, 아마도 저녁상을 물리고 모여
앉아서 텔레비젼을 보는 모양이었다. 저런 저녁을, 저런 웃음소리를 정인은 한
번도 가지지 못했다. 웃음소리는 잦아지고, 자동차가 홰에앵 달려가고 난 후
멀리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꾸르르르쩍! 꾸르르르쩍!
정인은 작은 의자를 당겨 할머니 곁에 앉으며 소쩍새 울음소리를 듣는다.
너도 살아서 고생이구나...
정인은 가만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