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만약에 창희 니가 원한다면 말이야, 이참에 내가 한번 나서서 찾아볼 수도….” 희창이가 말했다. 나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원하면 뭐? 뭘 찾아 주겠단 거야?” 하지만 녀석은 이내 막걸리집 탁자에 기댄 채 말꼬리를 흐려 버렸다. “에이, 아니다. 그냥 흥신소 얘기가 나왔길래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그랬다. 관두자. 어차피 너한테 허락받을 일도 아니고, 얘기해 봤자 니가 그러자고 하지도 않을 테니.” 녀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들려 왔던 여자의 음성 - 몇 년이나 지나기는 했지만 희창이도 나처럼 그 목소리에 익숙할 터였다. 나는 그 일에 대해 녀석에게 말해 줄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이라니, 설마 그럴 리가. 희창이 녀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창희 니가 솔로가 될 것도 축하할 겸, 우리 어디 가서 기분 전환이나 할래? 간만에 탬버린이나 흔들러 갈까?” “사양하련다. 내일모레면 여자친구를 미국으로 보낼 놈한테 그게 할 소리냐? 그리고 난 내일부터 도로 출근해야 돼.” 녀석이 탬버린을 흔들겠다면 최소한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일 게 뻔했다. 나더러 기분 전환을 시켜 준답시고 보나마나 늘씬한 나가요 아가씨와 2차를 보내려고 하리라. “뭐 어때? 나도 며칠 뒤에 다시 나가 봐야 해서 바쁘긴 마찬가지라구.” “나간다니? 한 달 전에도 보름씩이나 다녀왔으면서, 또 동남아에 땅인지 뭔지 보러 가는 거냐?” “동남아가 아니야. 베트남으로 정했다.” “베트남? 그 땅이라는 게 뭔데 그래?” “으응, 공장 부지야. 조그만 공장을 하나 차릴까 해서.” 후줄근하게 차려 입긴 했지만 희창이는 아직도 햇빛에 잔뜩 그을려 있는 모습이었다. 허튼 소리는 아닐 터였다. 부잣집 도련님답게 번지르르하게 생겼어도 추진력 하나는 장담할 만한 놈이었으니까. 녀석이 눈을 찡긋거렸다. “아무튼 기대해라. 잘되면 창희 너한테도 좋은 일일 테니까.” “잠깐만. 정희창 너 저번에도 그러더니, 나한테 좋은 일이라는 그게 대체 무슨 얘기야?” “흐흐, 궁금해 할 거 없어. 다 때가 되면 알려 줄게.” 내가 다그쳐 물어도 지난번처럼 의뭉한 미소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희창이가 덧붙였다. “그리고…. 잠깐 만나고 와야 할 사람도 있거든.” 글쎄다. 나는 녀석이 만난다는 그 사람이 왠지 여자일 듯한 생각이 들었다. ******* “전부 다 언니 때문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넌지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언니한테 그런 생각이 남아 있는 거야?” “원망스럽다는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언니만 아니었다면 제주도에도 안 갔을 테고, 그랬다면 오빠한테 설득당할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민정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랬다. 일주일이 지나가 버렸고, 지금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 우리는 인천공항의 대합실 한편에 나란히 손을 잡은 채 앉아 있었다. 좀 더 조용한 곳이 나을지도 몰랐지만 자칫 우울해질 것 같다며 싫다고 한 그녀였다. 뉴욕행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고작 수십 분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튼 그때 결심했어요. 선희 언니가 세상에 하나뿐인 제 언니라고, 오빠가 말해 줬을 때.”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미국에 가기로 한 거…. 후회하니?” “아뇨. 아쉽기야 하지만, 저는 이제 어린애가 아닌 걸요.” 민정이는 애써 시선을 피한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먼 길을 떠나면서도 나들이를 가듯 가벼운 차림을 한 그녀는, 마지막까지 뭔가를 간직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나 역시 핫팬츠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맨살에 닿아 있는 감촉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우리에게 다가오던 선희 씨가 방해하지 않으려는 양 주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저녁 민정이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은 선희 씨와 나 둘뿐이었다. 그녀들의 어머님은 이틀 전 비행기로 출국했다고 했다. 이것저것 준비하기 위해 먼저 출발하셨다지만, 실상 떠나는 날까지 나와 함께 있으려는 민정이의 핑계 때문이었다. 그녀가 언니를 흘끗거리더니 말했다. “오빠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뭔데?” “저희 언니는 그동안 쭉 유학 가서 공부만 하느라고, 여기에선 만날 만한 남자가 별로 없대요. 그렇게 오랫동안 나가 있었으면서 미국 애인도 한번 못 사귀었나 봐요. 그리고 선희 언니는 보기보다….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에요.” 그녀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민정이는 부탁이라고 해 놓고도 그 말만이 전부였다. 언니가 좋은 남자라도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외롭지 않게 안부나 전해 달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되묻기도 전에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희 씨를 포함한 우리 세 사람은 묵묵히 출국장 쪽으로 향했다. 희창이가 멜로드라마라며 놀려 댔지만, 현실 속의 이별은 허무할 정도로 짧고 간단했다. 민정이는 묘하게도 눈물기조차 없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작별 키스도 나누지 않았다. 손을 흔든 민정이가 단지 몇 발짝만을 옮겼을 뿐인데도 - 그러자 우리 사이에는 순식간에 유니폼을 걸친 공항 경비원들마저 막아선, 넘어설 수 없는 금이 그어져 버렸다. 다행히 선희 씨도 울고 있지는 않았다. 문득 오래 전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갓 스물한 살 시절에도 나는 지금과 똑같이 공항 한복판에서 누군가와 이별한 적이 있었다. 내 첫사랑, 선영이 누나. 그때는 다시 만날 날을 정한 채 헤어지는 자리였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곳에서 아무런 약속도 없이 민정이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순간 약간은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출국장으로 들어갔던 민정이가 갑자기 종종걸음으로 되돌아 나오더니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내가 가까이 가려 하자 그녀가 말했다. “아니, 오빠 말고요. 언니한테 마지막으로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요.” 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민정이가 칸막이를 사이에 둔 채 언니에게 귓속말을 건넸고, 이내 의아한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 동생이 뭐라 얘기하자마자 선희 씨가 흠칫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웬일인지 귀밑까지 붉힌 얼굴이었다. “미, 민정아. 아니야…!” 그녀가 놀란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화들짝 고개까지 저어댄 탓에 민정이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 왔다. “거짓말. 다 알고 있어. 그래도 난 상관없어, 언니.” 민정이가 자신의 언니를 와락 껴안더니 나에게 한 번 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눈가를 찍어 내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정말로 끝이었다. 그제야 나는 가슴속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선희 씨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선희 씨?” “네? 네. 저, 저는….” 그녀가 충격에서 깨어난 듯 정색을 해 댔다. 그녀의 기분을 달래 줘야 할 성싶었다. “시간도 그런데 잠깐 어디라도 들어갈래요?” 망설이는 선희 씨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탄 나는 꼭대기 층의 카페테리아로 올라갔다. 전망대처럼 주기장과 활주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녀가 저녁 생각이 없다기에 우리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출발 시간 직전까지 함께 있느라 민정이는 지금쯤이면 벌써 비행기 안에 몸을 싣고 있을 터였다. 줄줄이 늘어선 기체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저 중에 어떤 비행기를 타게 되는 걸까. TV에서나 구경해 본, 그녀가 가게 될 뉴욕은 과연 어떤 도시일까. 나는 무심코 선희 씨에게 물었다. “조금 전엔 민정이가 무슨 얘기를 한 건가요?” 어쩐지 묘했다. 선희 씨는 또다시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잘 지내라고….” 동생보다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얼굴까지 붉힐 것 갈은 그녀였다. 나는 짐짓 화제를 바꿨다. “저기, 그나저나 지난번에는 많이 아쉬웠어요.” “네…?” “선희 씨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제주도에서 혼자서 가 버리신 거 말이에요.” 이번에는 정말로 그녀의 뺨이 새빨개졌다. 약간은 야릇한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선희 씨와 함께 있었다면 그녀의 동생과 밤새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채 뒹구는 일 따위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처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왜 굳이 그랬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녀가 우물쭈물거렸다. “그냥 민정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게 해 주고 싶었어요.” 나는 꼭 끼는 스키니진 속에서 날씬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새삼 의문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선희 씨는 자신의 동생과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도 예상했었을까? 이윽고 카페테리아를 나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먼저 가세요. 선희 씨. 나는 늦을까 봐 퇴근 시간 전에 나오느라고 버스를 타고 왔거든요.” 그러자 선희 씨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꾸했다. “그럼 잠깐만 기다리시겠어요? 제가 차를 가져올게요.” 어차피 성북동까지 가려면 도중에 버스를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 그녀의 미니 쿠페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시내에 들어가면 세워 달라고 하자 선희 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가시는 데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한 시간 가까운 길을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마치 우리가 드라이브를 하며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성북동에 도착해 차를 멈춘 선희 씨가 입을 열었다. “저…. 지난번에는 미처 말씀을 못 드렸지만, 제 부탁을 들어 주신 일은 어떻게든 창희 씨께 보답해 드리고 싶어요. 전처럼 함부로 주제 넘는 얘기를 드리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언제라도 제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으시다면….” 그녀는 뭔가를 결심한 양 지그시 입술까지 깨물고 있었다. 민정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희 언니는 외로움을 잘 타요. 여기에서는 아직 만날 만한 사람도 없구요 - 하지만 선희 씨에게 나란 놈은 이제 여동생의 옛날 남자 친구일 뿐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다시 그녀와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생각에 불현듯 안타까워졌다. “그럼 선희 씨도 약속하세요.” “약속이요…?” “네. 선희 씨야말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꼭 말해 주겠다고요. 아셨죠?” 나는 애써 웃어 보인 뒤 차에서 내렸다. 집으로 들어서며 뒤를 돌아보니 선희 씨의 미니 쿠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