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의 일생에서 학교에서 보낸 세월은 저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게 된다. 나의 경우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16년,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포함하면 무려 23년을 학생 신분으로 지냈다. 그리고 대학 교수 생활로 보낸 시간까지 모두 합치면 학교에서 얼추 48년이란 세월을 보낸 셈이다. 강산이 5번 바뀌는 아주 긴 세월이다. 캠퍼스라고 하면, 낭만이란 단어와 연관이 깊으니 낭만적 인생을 살았다고 자족해도 될지 모르겠다.
“비슬산 구름 위에 높이 솟았고/ 낙동강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기름진 현내벌에 터 잡은 현풍/ 바르게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 모여들어 갈고 닦는 현풍학교다.” 정호경 작사, 김춘광 작곡의 현풍초등학교 교가이다. 교가에 나오는 비슬산과 낙동강은 나의 추억의 곳곳에 박혀 있는 산과 강이다. 우리는 비슬산 쌍성폭포와 유가사로 소풍을 많이 갔다. 초등학교 소풍갈 때는 삶은 계란과 사이다가 기본 준비물이었다. 소풍에서 보물찾기는 우리 모두를 탐정으로 만들었다. 하나를 찾으면 왜 그리 기분이 좋든지! 하늘을 날아 갈 것만 같았다.
6.25때 현풍도 낙동강 전선의 격전지였다. 그래서 내가 살던 집 마당도 빨갛게 탄 흙으로 덮여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수류탄과 포탄을 주워서 교무실에 갔다 준적도 있었다. 초등학교의 기억은 3학년 4반 전춘자 선생님, 음악실, 가을 운동회 등이다. 음악실 나무 바닥 틈 사이로 쓰레기가 들어가 쌓여 수북하게 만들어진 모습이 무덤 같다고, 밤이 되면 귀신이 나온다고 우리는 무서워하였다. 야간 수업을 마치고 현풍교를 건널 때 쯤,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도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학원은 없었고 학교에서 밤에 남아서 야간학습을 하였다. 그래서 집에 갈 때쯤이면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를 자주 듣곤 하였다.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교가를 부를 때, 누군가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금방 전파되어 졸업식장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교정과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으로 울음보가 터졌던 것 같다. 내가 53회 졸업생이니 지금은 100회가 넘게 졸업생을 배출한 대구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 중의 하나이다. 그 옛날 현내벌로 불리어진 현풍들은 가을에는 황금 들녘을 만드는 제법 넓은 지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구테크노폴리스가 만들어 지면서 연구소와 많은 아파트들로 대체 되어, 옛날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비슬산 장엄하게 굽어 지키고/ 낙동강 맑은 물이 흘러 감도는/ 기름진 현내들 넓은 들판에/ 배움의 터를 잡은 우리의 학원/ 아아 빛나리 진리의 전당/ 그 이름도 거룩한 포산중학교.” 배학보 작사, 김종환 작곡의 포산중학교 교가이다. 중학교 교가에도 비슬산, 낙동강, 현내벌(들)이 똑같이 나온다. 포산 중학교는 현풍, 논공, 구지, 그리고 유가면과 같은 인근 4개 면의 졸업생들 중에서 우수한 소수만 입학할 수 있는 좋은 학교였다. 당시 입학정원은 남학생 120명, 여학생 60명, 총 180명 3개 반이었다. 어느 날 아침 폭우가 내릴 때 학교 운동장에 고기가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던 일이 생각난다. 학생회장 선거운동 한답시고 밤에 무서운 공동묘지를 넘어 유가로 놀러간 것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나 교가에 얽힌 추억은 거의 없다. 2학년 때 반대표로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서 발표하다가 그만 중간에 잊어 버렸다. 그래서 원고를 꺼내 보고 다시 계속하는 바람에 입상은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중학교 3년 때인 1967년의 최고의 가수는 배호였다.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가 유행하였는데, 소풍 때 술 먹고 그 노래 부르면서 *다리 춤을 추다가 정학을 당한 친구들의 당시 모습이 아직도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그 들 중 일부는 벌써 고인이 되어 동창회에서도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배호의 노래를 좋아한다. 배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배호 특유의 저음과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아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비운의 가수이다. 미인박명이란 말은 있는데, 천재박명이런가?
“팔공산 구름 위에 높이 서있고/ 금호수 푸른 물결 뛰고 노니는/ 여기 화랑이 놀던 달구벌 언덕에/ 우뚝이 솟았구나 우리의 대고/ 아- 그 이름 길이 왼누리에 빛나리/ 아- 그 이름 대구고등학교.” 이효상 작사, 권태호 작곡의 대구고등학교 교가이다. 고등학교에 오니 산과 강 이름이 바뀐다. 현풍에서 대구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대구고는 하얀색의 굵은 띠 하나로 된 교모가 인상적이다. 가는 세 개의 띠로 된 경북고 교모와 구별이 된다. 그 시절에는 평소에도 교복을 많이 입고 다녔다. 고교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위하여 선배들은 몽둥이를 들고 교실로 들어와 우리들을 강제로 교실에서 내 좋았다. 시험이 있을 때면 학교 도서관에서 종종 밤샘 공부를 하였다. 그 때 엎드려 자서 이빨이 무척이나 아팠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는 식을 마치고 일찍 집에 가서 대학 본고사 준비를 하였던 것 같다.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안암의 언덕에 퍼져 나는 빛을 보라/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올린 공든 탑/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마음의 고향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영원히 빛난다.”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의 고려대학교 교가이다. 대학교 교가에는 북악산과 강 대신 안암골이 등장한다. 대학교 시절에는 교가 보다는 응원가를 훨씬 더 많이 불렀다. 데모할 때나 라이벌인 연세대와의 스포츠 경기에서 주로 응원가를 불렀다. 대학 2년 동안 데모와 휴교로 정기전은 열리지 못하였고, 3학년 때 열린 고연전에서 4승1패로 통쾌하게 승리하였다. 그 당시에는 정기전을 주요 방송국에서도 중계할 만큼 국민적 관심사였는데, 요즘은 옛날 같지 않다. 한번은 강의가 없는 시간에 학교 대운동장에서 축구부 연습을 보고 있는데 대학 1년 후배인 차범근 선수의 모습이 보였다. 드리볼 하면서 100m를 11초대에 뛰는데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스피드의 원천은 허벅지 근육이었다.
1학년 신입생 때 녹화 방송이 있었다. ‘꽃반지 끼고’를 불렀던 큰 눈을 가졌던 가수 은희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5월의 축제 때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미팅이란 것을 하였다. 대학 때까지 이성교제란 걸 한 번도 안 해본 나로서는 미팅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완전 ‘촌놈’ 그대로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혹시나' 하고 나갔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왔다.
미국 대학에서 교가를 불러본 기억은 없다. 그래서 학교 홈피에 들어가 보니 아래와 같이 나와 있었다. “Where the winds of Dixie softly blow/ o'er the fields of Caroline, There stands ever cherished, N.C. State, as thy honored shrine. So lift your voices! Loudly sing from hill to oceanside! Our hearts ever hold you, N.C. State, in the folds of our love and pride.”
미국에서는 농구가 미식축구와 더불어 제일 인기 있는 경기이다. 그래서 농구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학교 체육관 앞에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2-3일전부터 텐트를 치고 학생들이 줄을 서는 모습을 보곤 하였다. 나는 ESPN 중계를 통하여 보던지, 아니면 경기가 끝날 때쯤에 체육관 문을 개방할 때 잠시 들어가 본적이 있다. 경기도 경기이지만 응원도 정말 볼 만하였다.
“달구벌 옛 뜨락에 불새가 날고 새날을 다시여는 바람이 분다. 뜨거운 사랑으로 큰 뜻을 섬겨 사랑과 진리는 영원도 하리니, 날마다 장하게 지켜 가리라.(1절) 서라벌 묏 자락에 햇무리 일고 시공을 나래 펴는 하늘을 본다. 거룩한 진리로써 참 삶을 밝혀 이 세상 구원의 빛 높이 비추리. 사랑과 진리는 무궁도 하리니, 언제나 참되게 살아가리라.(2절)” 재직 중인 대구가톨릭대학교 교가로써 이정우 작사, 하대응 작곡이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교가를 부르는데 곡이 쉬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여기서는 달구벌과 서라벌이 나온다. 사랑과 진리라는 단어를 포함 가사가 종교학교답게 일반 학교와는 다르게 가슴에 와 닿는다. 교가를 부를 때만큼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리고 미국의 대학생활, 그리고 교수 생활 포함, 근 반세기에 걸쳐 학교생활을 한 셈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 군대 그리고 직장 8년 생활을 제하고 나면 내 인생의 모두를 학교에서 보냈다. 학생의 신분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를 반겨주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있어 좋았다. 그리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의 신분으로서는 젊은 20대 청년들과 항상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사계절의 캠퍼스도 아름다웠다. 어머니처럼 반겨주는 성모마리아 상을 지나, 사색하면서 캠퍼스를 걷는 것도 진정한 행복이었다. 이제 그 행복을 가보지 않은 길에서 찾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2018.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