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에서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룻에 대해서 “모압 여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 11절에 룻에 대해서 잠언 31장 10절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룻이 현숙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3장 1절에 “안식할 곳”을 말씀하는데 18절에 “쉬지 아니하리라.”로 끝내고 있음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1장 9절의 ‘위로’라는 말과 3장 1절의 ‘안식’이라는 말은 같습니다.
안식할 곳
1절에 이제 나오미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입니다. 나오미는 룻을 복되게 하겠다는 뜻을 내놓습니다. 1절을 봅시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는 룻을 “내 딸아”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며 친근하게 부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하면서 룻의 유익을 생각했음을 말합니다. “안식할 곳”을 구하여야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룻을 복되게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안식할 곳”은 1장 9절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1장 9절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안식”은 “위로”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식할 곳은 남편을 얻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을 나오미가 하겠다고 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룻의 삶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것이 룻에게 복이 되는 길입니다.
2절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2장 1절에도 “친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기업 무르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기업을 찾아줄 자손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보아스임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에 기업은(땅) 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는 것의 의미를 가집니다. 가나안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땅을 얻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보아스가 은혜(헤세드)를 베풀 수 있는 사람임도 알았습니다. 거기에서 기대감과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친족이라고 해서 다 소망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가를 분명히 생각했습니다. 보아스는 약한 자를 위하여 주신 모세의 법, 하나님의 법을 알고 힘써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두운 시대에,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나오미는 그 얘기를 듣고 소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가 친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인격임을 생각한 것입니다. 단지 그가 친족이기 때문에 소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친족은 조건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대로 사는 책임 있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에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시고”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충성스럽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책임감 있는 사람임을 신뢰할 때 주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신자들도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신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나오미는 이제 룻을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적극적으로 참여시킵니다. 보아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사람임을 알고 그 말씀의 세계로 룻의 삶을 밀어 넣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행동은 우리 시대의 윤리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시어머니가 딸이라고 부르면서 며느리에게 그럴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해를 해야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절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고 합니다. “타작마당”은 수확한 곡식 다발을 타작하는 곳으로, 공개된 장소입니다. 곡식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머물기도 합니다. 나오미는 그 당시 문화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3절에 그런즉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라고 합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얘기가 있지만 사무엘하 12장 20절과 연관해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한 일로 하나님의 크신 징계가 주어졌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금식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립니다. 그 아이는 이레 만에 죽습니다. 그 아이가 죽자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합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도록 한 것은 이제 과부의 상복을 벗고 결혼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표 같습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3절), 그가 누울 때에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원문에는 ‘이불’이 없다. ‘폭로하다, 벗기다’는 말이다. 보아스가 덮고 있는 이불의 발 부분을 들추라는 의미. 영어로는 uncover로 번역함. ‘밝히다, 덮개를 열다, 들추다’는 뜻) 거기 누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보아스가 룻이 해야 할 일을 알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보아스의 다리 부위를 치우고 그 옆에 누우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청혼의 의미로 이해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업을 되찾아 주고 그 기업을 이을 자손을 낳아 달라는 뜻을 담고 행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주 대담한 행동을 하도록 지시를 한 것입니다. 밤에 타작마당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곳은 남자들의 세계입니다.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인들에게는 위험한 세계이고 밤의 시간은 위험한 시간입니다. 나오미는 위험한 세계이지만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해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적극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냥 주저앉아서 기다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삶을 참여하도록 합니다.
5절에 룻이 시어머니에게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고 합니다. 6절에 그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행하였다고 합니다. 10절에 룻의 행동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를 보십시오. 10절을 봅시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내게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처음에 베푼 인애는 무엇입니까? 나오미를 떠나지 아니하고 베들레헴에 함께 온 것입니다. 나중에 베푼 인애는 무엇입니까? 보아스에게 가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한 것입니다. 룻의 행위는 신앙에 근거한 행위임을 알게 해줍니다. 9절에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 보아스는 모두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자신들의 삶을 참여시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자신의 삶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장 3절)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읽기도 하고, 평생 들어서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자신이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그 복에 전혀 관심을 갖지도 않고, 자신과는 먼 이야기로 생각하고 살 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빚어지는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맷돌에 우리의 삶이 들어가야 갈리고 빚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대하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최고의 작품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는 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삶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초대에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응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 보아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진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