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 한 몸을 말씀하십니다.
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
“그러므로”는 앞의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위치에서 생각하라는(remember. 기억하라)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기 이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어떤 사람으로 있는지도 기억해야 합니다. 11-12절은 예수님 믿기 전에 이방인으로 살 때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여러 가지 내용을 나열합니다.
① 육체로는 이방인. ‘육체’는 혈통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이방인들을 생각해보면 이방인들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바클레이에 의하면 뱀을 밟아 죽이는 것도 좋고 이방인을 죽이는 것도 좋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답니다. 이방인의 산모가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그 산모를 돕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왜? 또 한 사람 이방인이 세상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소년과 이방인 소녀 또는 유대인 소녀와 이방인 소년이 결혼하면 장례식을 거행한답니다.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은 곧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부정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방인은 그런 사람들로 취급당했습니다.
② 할례를 행한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 받음.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는 언약의 표입니다. 언약 백성의 표. 몸에 행한 공적인 표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서 말할 때 사무엘상 17장 26절을 보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라고 합니다.
12절.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그때에” 하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를 언급합니다.
③ 그리스도 밖. ‘밖에 있다’는 것은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안에 있다’(예. 집안에)는 것은 관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요 중보자이십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구약은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이방인들은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④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 거룩한 백성(구별된 백성)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밖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 사회의 한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한 내용을 중심에 둡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창 17장 7-8절. 출 6장 7절. 렘 30장 22절. 31장 33절. 겔 11장 20절 등)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언약에서 외인이었습니다.
⑥ 세상에서 소망이 없음. 이방인들도 다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4절에 말씀하신 “산 소망” 같은 것입니다. 그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잠언 14장 32절에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이 와도 가질 수 있는 소망, 그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⑦ 하나님도 없는 자. 그들은 신들을 숭배했지만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이제는”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이제입니다. 전에는 “멀리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었습니다. “밖”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관련이 없었고 영원한 생명과 평강과도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18절에 “아버지께 나아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11-12절)은 현재 얼마나(13절) 큰 은혜의 자리에 있는지 알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질문.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 은혜를 줍니까?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14절은 “왜냐하면”(For)으로 시작합니다. 13절에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메시아는 “평강의 왕”이라고 하셨고, 스가랴 9장 9-10절에 장차 오실 왕은 “화평을 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했던 그 화평을 이루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과 이방인도 서로 가까워지도록 만드셨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습니다. ‘자기 육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13절)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담’이 있었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하는 담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그 담을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그 다음이 여인의 뜰입니다. 그 다음이 이스라엘의 뜰이고, 그 다음이 제사장의 뜰입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는 담이 있었고 거기에는 이방인이 더 들어가면 죽음이 있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하나가 못 되게 하는 담을 자기의 육체로 헐어버리셨습니다. 그 헐어져버린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담이 헐어진 공동체입니다. “담 쌓는 일”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 곳곳은 “담”의 세계입니다. 민족적인 담, 계급적인 담, 성적인 담, 개인적인 담 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담을 헐어버립니다.
1절.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적대 관계가 있었습니다. 담이 있었습니다. 왜 그런 담이 있게 되었습니까? “율법”에 근거를 합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명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시켰습니다. 많은 규례들이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담을 쌓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정과 부정의 법이 그러합니다. 음식법 같은 것. 그래서 유대인은 이방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법을 폐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신 것입니다.(롬 10장 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둘”을(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으셨습니다. 새롭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의미가 아니고(헬. 네오스.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을 만든데 새로 주문이 들어오는 것) 질적으로 없던 것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헬. 카이노스)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내셨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2장 10절.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내가 땅에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서로에 대해 사랑을 할 수 있도록(요일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화평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평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서로 싸우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한 가족, 한 형제, 한 몸이 되도록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할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화평을 이루도록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는데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여 고넬료에게 찾아갑니다. 고넬료가 오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갑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적인 행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사도행전 15장 9절에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11절에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하나님의 계획은 십자가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한 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한 몸 됨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임을 말씀하십니다.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방인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합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방인도 하나님과 원수이고 유대인도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관계이고 적대 관계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도 서로 원수 관계입니다. 십자가가 소멸시키는 것은 그 원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원수 관계, 적대 관계’라는 것을 없애버립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두 화목을 이룹니다. 첫째로,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롬 5장 10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둘째로, 사람들과의 화목입니다. 교회는 그 화목 공동체라는 특성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17절.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입니다. ‘가까운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화목을 이루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복음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드러내는 교회는 “평안”을 이룹니다.
18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적대적이었던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아버지께 함께 나아가는 근거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한 성령”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4절에 “몸도 하나 성령도 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하시고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십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롬 8장 15절. 갈 4장 5-6절) 성령님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언하십니다.(롬 8장 16절)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4장 3절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교회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히 10장 19절, 4장 16절)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헐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