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독도의 순애보
1997년 11월 어느 날, 나는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모이는 기독의사회 서울지부 월례회에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VIEW 사역을 위해 대학에 사표를 낸 상태였고, 사표를 낸 직후부터 불어 닥친 IMF 태풍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외환위기와 치솟는 달러로 인해 나라는 초상집 분위기였고, 나는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향해 출국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기독의사회 서울지역 대표를 하시는 박재형 교수님이 전철역까지 차를 태워주시겠다고 해서 함께 차를 탔다. 안암병원에서 청량리역까지 가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교수님은 사모님이 뇌암 수술을 받고 투병을 하며 누워계신다는 얘기를 하셨다. 사모님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공부도 많이 하시고 의대 교수까지 된 분이지만 이런 분에게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아픔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때는 내 코가 석자인 상황인지라 나는 곧 교수님의 얘기를 잊어버렸다.
그런데 어제 저녁 VIEW에서 공부하시는 샘안양병원 박상은 원장님이 결혼 20주년이라고 몇몇 부부들을 집으로 초청했는데 그 자리에서 박 교수님 얘기가 나왔다. 원장님이 교수님의 동생이라는 것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교수님의 아내 사랑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까맣게 잊고 있었던 7년 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내게는 우선 길면 12개월밖에 살수 없다던 사모님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가까이서 형님의 아내 사랑을 지켜본 원장님의 얘기는 모인 모든 부부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한 감동을 주었다.
목회자의 자녀로 자란 박 교수님은 현재 서울 대길교회 장로이자 서울의대 방사선과 주임교수로서 재직하고 계신다. 교수님은 교회와 학교생활에서만 열심인 것이 아니었다. 1991년에는 의료선교 단체인 인터서브를 창설하여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다. 사모님도 교수님처럼 선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서 처음 인터서브가 시작되었을 때는 자신의 집을 선교회 모임장소로 공개하셨으며, 선교사들을 돌보고 대접하는 데 많은 수고를 하셨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쳤다. 1997년 추석을 전후하여 사모님께서 몸에 이상이 느껴져서 진찰해 보니 뇌종양이라는 충격적인 진단이 내려졌다. 정밀 검사를 해보니 안타깝게도 이미 암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자신이 의대 교수였지만 박 교수님이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사모님은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암세포가 뇌 속에 깊이 위치하여 종양의 1/3 정도를 남기고 나머지만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은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했다. 그 이후 긴 투병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역경에서 더 돋보이는 법. 두 분은 평소에도 잉꼬부부로 소문난 분들이었지만 사모님에 대한 교수님의 순애보(純愛譜)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온 정성을 다하여 사모님을 돌보기 시작하셨다. 상태가 다소 좋아 집에 계실 때는 교수님이 늘 사모님을 휠체어에 태워 교회 예배에 나가셨다. 때로는 사모님을 옆에 앉히고 새벽기도를 하기도 하셨다. 교수님은 사모님도, 하나님도 들으시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신 후 다시 사모님을 차에 태우고 집에 오시곤 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를 통해 암세포는 제거되고 뇌종양의 재발은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치료의 후유증으로 사모님은 일급 뇌신경장애가 되어 식물인간이나 다를 바 없게 되셨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사모님은 상태가 더 중해져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어도 교수님의 사랑은 한결 같았다. 바쁜 일과들 중에도 조그만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면 교수님은 주저 없이 편지를 쓰신다. 그리고 아무 반응도 못하시는 사모님 옆에서 그 편지를 읽어주신다. 사모님의 생일이 되면 마치 정상적인 사람인 듯이 생일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해서 축하해주신다. 사모님은 겉으로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눈 맞춤도 못하시지만 교수님은 모든 일상을 사모님과 나누신다. 요즘도 교수님은 퇴근하는 길에 늘 사모님께 들러 하루의 일과를 얘기하신다. 마치 사모님이 옆에서 귀를 쫑긋 세워 사랑하는 남편의 얘기를 듣고 계시는 것처럼...
사모님이 침대에 누우신지 어언 8년째가 되었고, 어느 새 교수님은 57세, 사모님은 52세가 되었다. 이제 두 분 모두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계시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의 황혼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 황혼은 어두운 절망의 밤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소망의 새벽을 향해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죽은 자와 방불한 아내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는 마음. 어쩌면 이것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으로 인한 소망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드러나는 내조는 아니지만 교수님은 요즘 말없이 누워계시는 사모님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천국의 소망을 경험하고 계신다. 비록 엄마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아버지의 지극한 엄마 사랑을 본 두 남매는 잘 성장하여 딸은 서울대 음대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아들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레지던트를 하고 있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딸은 결혼하여 얼마 전에 외손자를 낳아서 힘든 중에도 교수님의 큰 기쁨이 되고 있다.
이제는 박 교수님이 사모님과 더불어 부푼 가슴을 안고 세웠던 계획들도 변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면 서울 근교에 나가 집을 짓고 지친 선교사들을 섬기려던 계획도 사모님이 식물인간이 되자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교수님은 말기암 환자들이 영생의 소망 가운데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써 마련한 파주의 땅을 호스피스 기관에 미련 없이 기증하였다. 세상에 사는 동안 잠시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려는 교수님의 모습은 장망성을 떠나 천국을 향해 가는 기독도의 모습이었다. 아픔을 통해 조개가 진주를 만들 듯이 세상에 대한 미련의 껍질을 한 가지씩 벗어버리는 아픔을 통해 한 기독도의 인생에 진주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버림은 천국에서의 소망으로 이어진다. 비록 지금 사모님이 한 마디 말은 물론, 미동도 못하시고 누워만 계시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믿는 교수님은 불원간에 암도, 불구도 없는 천국에서 새처럼, 나비처럼 가벼운 몸이 된 사모님을 기쁨으로 재회할 것을 기대한다. 도대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소망을 간직할 수 있을까! 악착같이 더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는 이 세대, 아집과 이기심 때문에 수많은 부부들이 비틀거리고 가정이 깨어지는 요즘, 영생의 소망을 가진 한 기독도의 순애보야말로 이 시대를 향한 말없는 시위가 아닐까! - 040709/04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