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변기의 세계관 / 김현
-최승호의 시세계
빌어먹을 오랜 안간힘과 후회 뒤에
우리를 편히 쉬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3-69)
항아리에 머리를 거꾸로 박고 울부짖는 인간을
항아리가 선뜻 잡아먹지 않는 것처럼(1-109)
최승호의 시적 탐구는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다소 낯설게 느껴졌던 그의 첫 시편들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것들에 그의 시의 씨앗들이 거의 다 뿌려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나는 그의 첫 시들을 약간은 낯설게 받아들였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시들이 비용, 보들레르, 첼란 등의 죽음의 시인들의 수사를 적당히 짜맞춘 것이나 아닌가 하는 우려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시편들에 무수하게 나오는 동물적 이미지들이 만든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의 시에 나오는 동물적 이미지들은 그것들이 흔히 갖게 마련인 동물의 공격성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고, 그것들을 그의 내부에서 불러오는 충동은 그의 유년 시절의 추억들과 거의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멋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뒤에 나온 그의 시들은 그런 내 우려와 걱정이 쓸데없는 우려와 걱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제 그가 80년대 낳은 아주 중요한 시인 중의 하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의 시의 충격적인 전언 중의 하나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똥자루에 불과하지만 그 인간을 노래하는 시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그 주제를 성급하게 내놓는 것이 아니라. 부패의 상상력이라고나 불러야 할 상상력의 도움으로 충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놓는다. 그의 부패의 상상력은 인간의 육체가 죽음 앞에서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무서우리만큼 날카롭게 드러낸다. 어느 정도로 무서운가 하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서정시에 길든 눈으로 보면, 모두지 시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가 첫 시들에게서부터 그렇게 무섭게 죽음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첫 시들에서 암시되던 것들은 뒤의 시들에 깊이 있게 천착되고 탐구되어 그만의 하나의 독특한 세계를 이룬다.
그의 첫 시들에서 일반인들의 삶은 익명인들의 삶이라고 실존주의자들이 부른 삶이다. 그들의 미래는 숨통이 막히는 긴 나날(1-12)이며, 그들은 배짱대로 하면 당장에 먹을 게 걱정되는 가족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참고 사는(1-75) 소심한 망나니들이다. 그 망나니들의 종말은 죽음이며 어두운 밤이다. 시인이 살기를 바라는 삶은 물론 그 망나니의 삶이 아니다. 그가 살기를 바라는 삶은 삶이 어두운 밤이라 하더라도 싱싱한 밤(1-11)은 될 수 있는 그런 삶이다. 삶은 죽음이지만 힘찬 죽음이어야 한다. 거기에 미묘한 그의 상반어법이 생겨난다. 싱싱한 밤, 활기찬 주검(1-14), 음울하고 서러운 늑대의 울음으로 변한 병들고 늙은 개의 짖음(1-17), 힘차게 너펄거리는 거적(송장)91-93) 등의 어법은 부정적인 죽음을 긍정적인 죽음으로 만들려는 시인의 노력의 결과이다. 어두운 밤은 번갯불이 터지고 천둥이 칠 때 싱싱해진다. 그 싱싱한 밤을 느끼는 것은 물론 시인이다. 그는 그의 두개골 안에 불타는 가시덤불의 거센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성욕 왕성한 흰벌레들이 죽음을 진행중인 주검은 자갈치 시장보다 활기차다. 흰 구더기들이 살을 갉아먹은 주검은 흰 구더기들로 활기차다. 구더기들은 식욕 때문에 활기찬 것이 아니라 성욕 때문에 활기차다. 구더기들로 주검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살은 하나도 없고, 털이 빠지고 홀쭉한 배를 들썩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늙은 개는 돌연 시커먼 늑대의 울음을 운다. 죽음은 왜소함을 거대함으로 바꾼다--- 그리고 늙은이들만 남아 천동 화로에 숯불을 지피며 추위를 견디는 산기슭에서 거적들이 힘차게 펄럭인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라는 신호일까? 송장들을 건사할 거적들은 힘차게 펄럭인다-- 이런 유의 상반어법들이 낳는 효과는 놀라움이다. 썩어질 것이 썩지 아니하고 사라질 것이 사라지지 않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시인이 보는 세계는 그 놀라움의 세계이다. 그 세계를 시인은 회복기의 환자가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놀라움의 광채를 띤 세상(1-21)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놀라움의 광채를 띤 세상을 거울 속에서 만나는 회복기의 환자이다. 그가 죽음의 위혐에서 완전히 회복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놀라움의 세상을 그가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말로 만드러낼 그 놀라움의 세상은
소유하지 않은 世上 보석들이
박혀 있는 하늘과
철따라 보석들이 뒤바뀌는 풍경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1-20)
이다. 별이나 나무 - 꽃들을, 소유하지 않은 세상 보석으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회복기에 접어들 수 있다. 일상인의 밋밋한 삶은 놀라움의 화려한 삶과 대립된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물론 놀라움의 화려한 삶이다. 최승호에게 있어 특이한 것은 그의 놀라움의 삶이 일상인의 삶에서의 초월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아름다움의 나라를 상정하는 것도 아니고, 초월자의 나라나 인공 낙원 - 예를 들어 환각제의 나라를 꿈꾸지도 않는다. 그는 죽음의 세상을 껴안음으로써 삶 - 놀라움을 만들어내려 한다. 항아리는 자기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사람을 쉽게 잡아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놀라움의 시구들이 그이 첫 시집을 구축하고 있음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라. 시인은 산성비에 더 빨리 부식되고 구멍이 뚫려가는 굵은 홈통에서 죽은 이무기처럼 입을 벌리고 서 있는 홈통을 보며(1-25), 상표가 화려한 통조림에서 국물에 잠겨 있는 송장 덩어리를 본다(1-28)- 송장 속의 살코기는 송장 덩어리이다. 그 끔찍한 인식! 그런가 하면 관광객들이 건너는 잔잔한 호수에서 그는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보며(1-29), 갈수록 곪아가는 꿈의 자궁 속에서 꿈 대신 엉뚱한 오리발(1-32)을 본다. - 꿈도 썩어진다는 인식은 범상한 인식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는 쥐치포를 보고 불행의 포로 수용소에 갇힌 이름없는 숱한 사람들을 생각하며(1-56), 통 속에 혼자 다리를 쪼그린 채 울기 시작하는 늙은 게를 본다(1-58). 혼자 죽어가는 것이 어찌 게뿐이겠는가.끔찍한 죽음의 그물 속에서 어기적거리며 늙어가는 검정 거미(1-82)도 그러하며, 죽음을 꿰뚫은 북어들이 대가리(1-85), 약에 취한듯 낡은 날개를 떨며 비틀거리는 잠자리(1-97). 그리고 까마득한 어둠을 끌고 널찍하게 텅 빈 밤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개 큰 쥐들(1-101)도 그러하다. 심지어
검고 둥근 모자를 덮어쓴
뚱뚱한 유령들(1-81)
이라고 시인이 부른 장독대의 항아리도 그러하다. 어둡고 검은 것들, 텅 빈 것들, 썩어가는 것들은 다 그러하다. 그는 검고 텅빈 썩어가는 것들을 폭넓게 껴안음으로써 그것들을 놀라움의 광휘로 감싼다. 놀라움의 광휘, 놀라움의 화려함으로 감싸인 것들은 시인의 정신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되었다는 점에서 관념적이지만, 초월적인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 곳에서 채색되었다는 점에서 물질적이다.
그래도 아직 영혼만은
신비력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1-25)
라고 반문하면서도 시인은 그래서 인간을 벌거벗겨야 안심을 한다.(1-25) 그 벌거벗겨진 인간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한심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가 돌연 부각된다. 그의 첫 시들의 어떤 것들이 강한 현실 비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쥐치포를 보면서
집단적으로 벌거벗겨진 쥐치들을 생각한다(1-56)
고 시인이 말할 때 그 쥐치들은 불행의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는 모든 사람을 지시한다. 그 불행의 포로 수용소에 갇혀 약한 연탄불에도 뒤틀리며 구워지는 쥐치들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가능태다.
그러나 최승호는 그 놀라움의 시학을 더 밀고 나가지 않는다. 놀라움의 시학으로 가득찬 그의 첫 시집 <대설주위보>를 지나 그의 두번째 시집인 <고슴도치의 마을>에 이르면, 놀라움의 광휘는 어느덧 사라지고 무심한 세상만이 눈앞에 나타난다. 시인은 오징어를 노래한 시에서
오징어를 먹기 전에
오징어의 바다를 뒤돌아보라
오징어가 죽든 살든 무심한 바다
출렁이는 거대하고 푸른 물북인 바다를(2-92)
이라고 말한다. 죽어 미이라가 된 오징어와 그 오징어에 무관심한 바다의 대립은 바쁘게 늙어와 바쁘게 죽어가는 내 육체와(그의 서원 중의 하나; 나는 결코 오징어처럼 죽어 미이라가 되지는 않겠다!) 무심한 세상의 대립과 상사를 이룬다. 내가 죽든 말든 세상은 내게 관심이 없다. 세상은 보다 더 널찍한 감옥일 따름이다.
꿈 밖에서 꿈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꿈속에서 꿈 밖으로 기어나와도
나는
조금 더 널찍할 뿐인 감옥에
갇혀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2-101)
꿈이라는 감옥보다는 -꿈이 감옥이다! - 조금 더 널찍할 뿐인 현실이라는 감옥에 나(혹은 내 육체)는 갇혀 있다. 무심한 세상이나 조금 더 널찍할 뿐인 감옥은 내 죽음에 무관심하다. 그 세상에서 나는 가위보다 더 덩치 큰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다(2-100). 회복기 환자의 거울에 비친 놀라움의 광휘로 가득찬 세상은 모든 것을 다 삼켜 거대한 배가 터지고 거기에서 어리둥절한 얼굴들이 쏟아져나오는 초어라는 고기로 바뀐다. 놀라움과 어리둥절함은 아주 다른 감정의 질이다. 놀라움은 즐거움을 간직하고 있지만(감추어진 것을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어리둥절함은 그것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어리둥절한 얼굴들은
지워져가는 꿀 같은 生에
이따금씩 빛깔을 드러내는 흔적 (2-55)
과도 같다. 이따금씩 빛깔을 드러내는 어리둥절한 얼굴들은 흔적이다. 그것은 곧 잊혀지고 지워진다. 곧 잊혀지고 지워질 흔적이기 때문에 얼굴들의 윤곽은 뚜렷하지 않다. 뚜렷하지 않은 윤곽을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 시인은 그의 기억 속의 사물들과 그 얼굴들을 결합시킨다. 예를 들어
추억은 황소의 胃를 지나는 여물들처럼
되새김질할수록 빛깔이 은은해진다 (2-67)
에서 추억은 황소의 위에서 되새김질되는 여물로 표현된다. 그런가 하면 낮에는 빛 푸른 나무로 보이는 것이 밤에는 창밖에서 나를 노려보는 키 큰 털벌레들(2-83)이다.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창밖에서 노려보는 키 큰 털벌레들은
해가 뜨면 또다시 빛 푸른 나무들로 변할 것이다. (2-83)
시인은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외친다. 나는 다만 결합시킬 따름이다. 내가 만들어내는 환상은 내 어리둥절함의 한 표현일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북어로 보며(2-83), 은하수를 발광 오징어로 본다(2-104). 그 결합은 그러나 놀라움을 낳지 않는다. 놀라움을 낳지 않기 때문에 그 결합은 때로 과장처럼 보인다. 윤곽에 없는 것에 윤곽을 주려면 과장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과장의 과정에서 시인은 우리를 무섭게 하는 하나의 섬뜩한 이미지를 만난다. 그것은 변기 -똥의 이미지이다. 이미지의 선을 따라가면 그것은 부패의 이미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부패의 상상력은 똥에 이르러 그 끝을 마무리한다. 똥은 썩어가는 게 아니라 다 썩은 것이기 때문이다.여하튼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돌연 튀어나온 변기 -똥의 이미지는 최승호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
변기여,
내가 타일 가게에서
커다랗게 입 벌린 너를 만났을 때
나는 구멍으로서 충분히
네 존재를 주장했다
마치 하찮고 물렁한 나를
혀 없이도 충분히 삼키겠다는 듯이
네가 커다랗게 입을 벌렸을 때
나는 너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내 존재를 주장해야 했을까
뭐라고 한마디 대꾸해야 좋았을까
말해봐야 너는 귀가 없고 벙어리이고
네 구멍 속은 밑빠진 虛구렁인데(2-16)
변기는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다. 그의 입은 큰 구멍이다. 그 구멍은 밑빠진 허구렁이다. 구멍은 어린아이들이 놀이의 대상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구멍놀이의 심리적 근거이다. 또한 그것은 결여의 표상이다. 구멍은 그것을 막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옹이 같은 곳에 우리는 엄지 손가락을 넣어 그것을 막아보려 한다. 최승호의 변기는 그런 유의 구멍이 아니다. 그 구멍은 밑빠진 구멍이어서 무엇이든 한없이 삼킨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구멍이다.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열려 있다. 무엇이 그곳에 들어가건 그곳은 열려 있다. 그 변기와 다른 변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제주도에서 볼 수 있었던 변기이다. 변기 속에서 돼지들이 사육되던 제주도의 변기는 똥과 돼지들의 울음으로 이뤄져 있다.
고통은 위에서 풍성하게
너털웃음 소리로 쏟아지는 똥이요
치욕은
변소 밑 돼지들의 울음이라고(2-16)
변기에서 검은 혓바닥이 소리친다. 똥은 고통이고 울음은 치욕이다. 다시 말해 부패는 고통이고 그 찌꺼기를 먹는 것은 치욕이다. 그 제주도식 변기는 그러나 시인의 시에서 곧 사라지고 그의 시에는 서구식 변기만이 나타난다. 농경민의 변기 대신. 산업 사회의 차가운 변기가 그의 상상력을 지배한다. 그의 상상력 속에서 우리는
줄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구원은커녕 좀처럼 씻겨내려가지 않는
악마같은 똥덩어리 (2-29)
이며, 그 똥을 힘껏 떠밀어 변기의 구멍 깊숙이 쑤셔넣는 똥막대기는 희귀한 성자이다. 그 성자는
더러움 앞에서 쩔쩔매며
꼼짝없이 당하는 억울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수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은 아무리 똥칠이 되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6尺의 똥막대기 (2-28)
이다. 그는 죽음을 껴안음으로써 죽음을 뛰어넘어보려 한 놀라움의 시학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는 더러움을 껴안음으로써 더러움을 이겨내보려는 시인의 한 표상이다. 그러나 그 성자는 다시 그의 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나는 것은
군것질처럼 공허한 性
오징어와 먹물주머니와 빛나는 변기(2-72)
들이다. 성은 군것질처럼 공허하고(시간은 밑빠진 시간을 잠시 때우는 짓이다), 사람들은 먹물을 뿜어 자신을 감추는 오징어처럼 자신을 감추며(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그는 살았나보다. 지루한 혀가 기억하는 오징어라는 시구를 보라), 부패를 먹는 변기는 빛난다. 그런 것들을 절망적으로 묘사하며 시인은 그래도 아직은 꿈꾼다.
잎사귀 달린 詩를, 과일을 나눠주는 詩를
언젠가 나는 쓸 수도 있으리라 초록과 금빛 향기를 뿌리는 詩를(2-107)
마침내 나는 그의 가장 좋은 시집인 <진흙소를 타고>에 이른다. 그 시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암울한 변기의 세계관이다. 사람은 무인칭으로 사물화되고 사람이 나온다 하더라도 곧 썩어문드러질 늙은이들만이 나온다. 무인칭의 모범 가정을 시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아내는 설겆이통 속의 그릇들을 씻고 있고
남편은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신문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숨은 그림찾기를 하고 있다. 국어책을 큰 목소리로 읽는
아들의 발성 연습, 딸애의 가계부 정리, 산수를 잘 해야지,
텔레비에선 뉴스 시간에 복권당첨 번호를 보도한다(3-24)
이 행복한 가정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이다.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속에도 수많은 모범 가정이 있다. 부패의 냄새를 못 맡게 하는 것은 무인칭의 왜소함이다.
무덤 속의 무인칭은 갈수록 썩으면서
끙끙거리기는 하지만
밖으로 기어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3-14)
그 왜소함의 울타리 속에서 무인칭은 편하게 삶을 영위한다.그렇다고 부패의 냄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썩어가고 문드러진다. 그것을 시인은 나비가 못 되고 통조림 속에 죽어있는 번데기로 표상한다.
羽化의 길 위에서 통째로 삶아져
나체로, 침묵으로, 움츠린 몸뚱이로
항거하는 번데기통조림 속의 나비떼!(3-28)
나비가 되었을지도 모를 번데기들이 통째로 삶아져 통조림 속에 누워 있다. 통조림 속의 나비떼는 국물 속의 송장 덩어리라는 이미지의 변환이지만, 그 울림은 훨씬 징그럽고 고통스럽다. 나비떼와 같이 통조림되어 있는 것은 꿈이기 때문이다. 나비가 되고 싶다는 꿈을 삶아버린 통조림은 고통스럽다. 아니 증오스럽다. 그 통조림된 나비 중의 하나가 뒷간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죽은 아이다.
나오자마자 몸 나온 줄 모르고 죽었으니
생일이 바로 기일이다
변기통에 붉은
울음뿐인 생애,
혹 살았더라면 더 큰 도적이나 대시인이 되었을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3-12)
한 여인이 뒷간에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에미는 애가 무서워 얼굴을 손으로 덮어 애를 죽인다.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고발한다. 아이는 나오자마자 죽었으니 생일이 바로 기일이다. 변기엔 붉은 핏덩이뿐이다. 그리고 그의 울음 소리, 살았더라면 그는 큰 도적이 되었거나 큰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번데기로 통조림된 나비 중의 하나이다. 그의 일생은 단 석 줄로 요약될 수 있다.
거기에서 떨어져
변기통에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3-13)
그 석 줄의 시구는 그의 변기의 세계관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인간은 변기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울다가 거기에서 죽는다. 인간은 변기 위에서 해체되는 똥덩어리이다.
조금씩 떠밀려가는 이 느낌
이제 나는 하찮고 더럽다
흩어지는 내 조각들 보면서
끈적하게 붙어 있으려 해도
저렇게 강제로 떠밀려가는
便器의 生(3-52)
변기 위에서 무인칭은 자기가 조금씩 떠밀려가는 것을 느낀다. 그 느낌은 자신이 더럽고 하찮은 것이라는 인식을 낳는다. 그는 더럽고 하찮기 때문에 해체되고 있다. 나는 조각이 나 흩어진다. 나는 변기에 붙어 있으려 해도 붙어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떠밀려간다. 나는 사라진다. 나는 없다. 그것이 내 변기의 삶이다. 아니 우리 저마다의 변기의 삶이다. 나비의 꿈은 어디로 갔는가? 그 꿈 역시 해체되어 사라진다. 그렇다면 나는 똥자루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 나는 속이 텅 빈 변기에 불과하다.
자루의 밑이 터지면서 쓰레기들이 흩어진다. 시원하다.
홀가분한 자루, 퀴퀴하게 쌓여서 썩던 것들이
묵은 것들이 저렇게 잡다하게 많았다니 믿기 어렵다
위에도 큰 구멍, 밑에도 큰 구멍, 허공이 내 안에
있었구나, 껍데기를 던지면 바로 내가 큰 허공이지(3-73)
나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입 큰 변기이다. 아니 나는 허공이다. 내가 나를 채울 수 잇는 것은 썩어가는 쓰레기뿐이다. 그의 시를 채우고 있는 것들은 전부 쓰레기들이다. 늙고 병든 늙은이, 가마솥의 개, 오징어, 거미, 낙타, 북어, 쥐치---- 등이고, 씩씩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있는 것은 쓰레기들뿐이다. 이 세상에서 쓰레기들만을 보는 자신의 세계관을, 시인은 거대한 변기의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끔찍스럽다. 그것은 편안하게 모범 가정을 이뤄 살아가려는 내 의식을 견딜 수없게 고문한다. 이 썩어 분드러진 육체를 갖고 너무 안달하지 말라, 라고 시인은 말한다. 나는 못 들은 체 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내 의식의 밑바닥에 꽉 달라붙어 있다. 너는 죽는다. 네 죽음이라는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가 없다. 그런 끔찍한 전언을 35세의 시인이 보내고 있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