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바꿔라, 그러면
세상이 바뀐다 *
스티브
잡스 ― 괴짜와 천재의 사이에서
한
인간의 가치는 그의 가치관, 선택과 의지,
업적들의
총합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김구나 안중근, 혹은 간디나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삶을 흠모하고
높이
떠받든다.
그것은
이들의 가치관이 도덕적으로 훌륭하며
동시에
선택과 의지에서 빼어나고,
그
행동과 업적이 비범한 까닭이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가난한
집에 입양된 데다 대학 중퇴자로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지만,
IT산업의
영웅이라는 아이콘을 얻었다.
카리스마와
영감에 넘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불교의
선(禪)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가
깊고, 현실주의적 자세로 일하고
내면
깊은 곳에는 몽상가적 기질을 품은 인물.
대단한
것을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규칙을 고집하는 보스이자
우리
삶의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꿔낸 사람.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허름한 집 차고에서
창업해서
세계 최고의 가치 기업으로
성장시킨
창업 신화의 주인공!
바로
‘애플’의 스티브 잡스(1955~2011)의 이야기다.
1985년
2월, 잡스는 서른번째 생일을 맞는다.
잡스는
샌프란시스코 세인트프랜시스 호텔
연회장을
빌려 손님을 1천명이나 초대해
파티를
벌였다.
옛
친구들과 업계 인사들 ― 이중에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거물인
빌
게이츠도 있었다 ― 이 참석하고,
밥
딜런을 초빙했으나 그가 불응하는 바람에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가 대신해서
노래를
불렀다.
생일
파티는 공식적인 것이면서도 사적인
부분이
적당히 융합된 분위기로 흘러가서
모두들
부담없이 즐길 수 있었다.
사람들은
가벼운 음식과 알콜 음료를 즐기며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왈츠에 맞춰
흥겨운
춤을 추었다.
잡스는
이 자리에서 스콧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거물 초판본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유명한
잡지 플레이보이그 생일에 맞춰
잡스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잡스는
“예술가로서 창의적인 방식으로
살고
싶다면 너무 자주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동안
무엇을 해 왔든, 어떤 사람이었든
다
버릴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젊은이는
자신의
인생이 변화의 격동을 타고 나가 게
될
것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버림받음,
선택받음, 그리고 특별함
잡스는
태어난 직후 친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
그리고
아이가 없던 폴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폴
잡스는 고학력자도 아니고
그저
중고차를 수리해 판매하는 일을 하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아들
잡스는 자동차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었지만
아버지는 틈이 날 때마다
아들에게
자동차의 세부 설계와 기술적인
것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두 사람 사이는 좋았다.
잡스의
정체성 안에는 “버림받음, 선택받음,
그리고
특별함.”, 이 세 가지 요소가 기묘한
균형을
이룬 채 자리잡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 잡스는 공부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
학교에서
크고 작은 말썽을 많이 피우는
장난꾸러기로
자라났다.
종종
장난이 지나쳐서 교사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 폴 잡스는 “이봐요,
우리 아이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교사에게 항변을 하며 아들을 감쌌다.
양부모들은
일요일마다 루터교 교회에 나갔는데,
잡스가 종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자라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를 꼭 데려가곤 했다.
그러나
잡스는 열세살 이후로 교회에
나가는
일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잡스의
아버지는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지만
아들을
반드시 대학에 넣겠다고 서약했다.
그는
약속을 지키려고 제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꾸준히 저축을 했다.
잡스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학
입학 학자금을 댈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모아졌다.
그러나 잡스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잡스는
설득 끝에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대학교에 진학한다.
이
대학교는 미국 내에서 학비가 가장 비싸기로 소문난 데였다.
1972년
가을 잡스의 입학식에 맞춰 양부모는
그를
포틀랜드까지 차를 운전해서
데려다주었다.
그러나 잡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아처럼 보이기 위해 양부모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훗날
잡스는 인생에서 가장 부끄럽게
기억하는
순간 중 하나로 꼽았다.
“너무
무심한 태도로 부모님께 상처를 준 것이지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선불교와
채식주의와 LSD에 심취하다
리드의
신입생이 된 잡스는 얼마 되지 않아 선(禪)과
밥 딜런과 마약인 LSD에 심취한다.
그는
도서관을 다니며 선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고 명상에 열중하고,
선불교에도 깊이 빠져든다.
선불교에
대한 심취는 젊은 시절 한때의
취미가
아니었다. 선불교의 수행을 통해 얻은 미니멀리즘적 미학과 강렬한
집중은 그의 전생애에 걸쳐 나타나는 성향이다.
그는 선과 LSD로 고양된
의식으로 리드 대학교의 교과목들을
최소한도로 이수하며 버텨낸다.
그는
늘 맨발로 다녔고, 눈이 올 때만 샌달을 신었다.
빈 병을 모아 반납하며 푼돈을 챙기고, 일요일에는
공짜 점심을 먹으려고 크리슈나교 사원까지
걷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이 보헤미안 청년은 선불교와 채식주의, 명상과 영성,
환각과 록음악, LSD로 물든
채 나중에 사람들에게 괴짜로 비치는
독특한
기질과 영혼을 빚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윤리적으로 합당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매우 복잡한 내면 도덕을 가진 사람이다. 그에겐 남들 눈에는
정상이 아니라고 비칠
만큼 괴팍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는
괴짜이고, 모순투성이며, 유별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매력적인 데는 분명 그의 철학적인
면,
선불교에의 심취, 1960년대 미국을 휩쓴
히피들의
자유정신, 그리고 남다른 인문학적
통찰력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동양의
선 수행을 통해 집중하는 능력과
단순함에
극단적으로 애착을 갖는 성향을
키웠는데,
그것은 그의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미의식”으로 고착되었고,
‘애플’의 모든 제품에 스며든다.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잡스에 대해 한 마디로 “그는 많은 것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미래를 여는 방식으로 아이디어와 예술,
기술을 통합하는
데는 달인이었다.”라고 평가한다.
아이작슨의
두꺼운 평전을 읽으면, 그는 일반적인 윤리의 잣대로는 분명
악행인 냉담과 잔혹함, 그리고 거칠고 반사회적 행동을 보였다.
따라서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이분법으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대접이 극단적으로 달라졌다.
맥 디자이너로 일했던 빌 앳킨슨은
이렇게 말한다.
스티브
밑에서 일하는 건 만만치 않았어요. 그가 세상엔 ‘신들’과
‘골 빈 놈들’만 있다는 양극화된 시각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신’에 속하는 사람들은
받들어 모셨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괜찮았어요.
저를
비롯해 ‘신’ 대접을 받던 사람들은 우리가 사실은 인간일 뿐이고
엔지니어링과 관련해 잘못된 결정오 내리며 모두가 그렇듯 방귀도
뀐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추앙받는 위치에서 쫓겨날까 봐
항상 두려워했지요. 반면 ‘골 빈 놀들’에 속하면 열심히 일하는
뛰어난 엔지니어라 해도 앞으로
인정을 받아 현재보다 더 나은
위치에 오를 방법이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잡스가
항상 옳은 선택을 한 것만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주변 사람들은
그의 선택에 조건을 달지 않고 따랐다. 어떤 사람은 그걸 잡스의
“현실
왜곡장”이라고 명명했는데, 거기 걸려든 사람들은 최면에 걸린 듯
그에게 고분고분해졌다. 잡스와 함께 일을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자기 충족적인 왜곡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불가능한 일을 해내도록
만들었으니까요.” 잡스는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을 묘하게 잡아끄는
능력이 뛰어났다.
직관력의
천재로 거듭나다
그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을까?
아이작슨은
그가 예외적으로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유형의 천재였다.
“그의 상상력은 직관적이고 예측 불가하며 때로는 마법처럼 도약했다.
실제로 그는 수학자마크 카츠가
불쑥불쑥 통찰력이 쏟아져 나와 단순한
정신적 처리 능력보다는 직관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일컬어 말한,
이른바 ‘마법사 천재’의
전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