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
2004년 06월 20일
구원과 축복
창세기 10:1-5
2004. 6. 20 설교방송 (성경본문)
구원과 축복
창세기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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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캐서린 쿨만 이라는 유명한 여자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특별히 신유의 은사로 유명했습니다. 하도 기적이 많이 일어나서 그의 별명이 ‘miracle lady, 기적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가 회자시킨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 I believe in miracles, 나는 기적을 믿습니다.’ 그런데 캐서린 쿨만이 처음부터 이러한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에는 평범하게 말씀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다. 캐서린이 사랑에 빠져서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캐서린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 자기 전처와 이혼을 하고 캐서린과 결혼을 한 남자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을 캐서린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두 사이에서 많이 고민하다가 마침내 캐서린 쿨만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 결혼생활을 포기하고 일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다음부터 그녀의 집회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배가 끝난 다음에 캐서린을 찾아와서 ‘목사님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도중에 병이 낫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를 시작했습니다. 캐서린은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 어찌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는가?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캐서린 쿨만은 ‘miracle lady’ 라고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구절 중에 1절 말씀을 보면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더라.’ 이런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구절을 우리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왜 홍수전도 아니고 홍수 도중도 아니고 홍수이후에 노아의 아들들이 아들을 낳기를 시작했느냐?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이 그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이유는 읽어도, 읽어도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깊은 진리가 담겨져 있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삼국지를 좋아하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위대한 문학 작품입니다. 그러나 삼국지는 한 두세 번 읽으면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어렸을 때부터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들은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내가 믿고 묵상하면, 묵상하는 중에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깊은 지혜가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고 이것이 죽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이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허비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그래서 오늘 이 1절 말씀에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더라.’ 여기에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방주가 뜻하는 것은 구원이요,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뜻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구원과 축복은 다릅니다. 이것이 동시에 우리에게 임할 수는 있지만 구원과 축복은 다른 것입니다. 적어도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먼저 받고 그리고 나서 때가 되니까 축복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왜 노아의 아들들이 홍수 후에야 아들들을 낳기 시작했느냐? 그 이유는 9장 1절에 적혀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따라해 보세요.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주의 종이 한마디 하는 말도 참 귀중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가급적이면 결혼식을 할 때도 목사님의 주례를 받고 목사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개업을 할 때도 주의 종을 초청해서 기도를 받고 축복의 말씀을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남녀가 서로 아무리 사랑을 하더라도 적어도 부모님의 축복 속에 결혼을 올려야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서로 사랑을 하더라도 주변 사람이 축복하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 가정을 이루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경영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가운데에서 그것을 이루어야 그것이 정말로 축복이고 은혜이고 거기에 평강이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고 축복하시지 않는데 사람의 의지로, 사람의 욕심으로 무엇을 추진하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그것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경영할 때 하나님이 여기에 복을 주시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기쁜 소식 교회를 개척 할 때에 다른 것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있을까, 사람들이 모일까, 이거 염려하지 않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이냐, 하나님이 이 교회 창립하는 일을 축복해주시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돈 문제 걱정할 필요 없고, 사람 걱정 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반대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일이 아닌데, 사람이 인위적으로 돈을 모으고 사람을 모으고 사람의 지혜를 동원해서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은 그것은 사실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9장 1절에 홍수가 끝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시길 ‘생육하고 번성하가 땅에 충만 하라.’ 말씀하신 그 결과로 오늘 본문 10장 1절에 ‘홍수 후에 노아의 아들들이 아들들을 낳았더니’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구원은 다릅니다.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먼저 받았고, 그리고 나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이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축복에 관심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심판을 전제합니다. 심판이 없으면 구원이 무의미합니다. 홍수가 없다면 방주가 쓸모가 없습니다. 홍수가 있기 때문에 방주를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방주가 귀중한 것입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귀중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심판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죄 사함 받은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까 보따리를 찾아내라 성화를 부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자세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으로부터 건져주셨는데, 우리의 관심은 보따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따리 찾아내십시오....’ 하나님이 보따리를 찾아주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근신하는 시절입니다.
여러분 근신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디모데후서에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사랑과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연예인이라든가 공인이 어떤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켜서 그것이 사람들 앞에 노출이 되면 1,2년 동안 숨어 지내지 않습니까? 활동을 중단하고 숨어 지내다가 한 1년, 2년이 지난다음에 조용히 컴백을 하면 팬들이 받아줍니다. 그게 바로 근신입니다.
구원은 근신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 안에서, 지금 밖에 비가 쏟아지고 있을 때 그 방주 안에서 ‘아! 구원받았다! 나 구원 받았네 너 구원 받았네 우리 구원 받았네’ 하고 좋아했을 것 같습니까?
물론 구원 받은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지금 밖에는 홍수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많고, 인간이 이뤄놓은 모든 문명이 물에 빠져 멸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이 지금 경망스럽게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근신할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아, 두렵다. 이 홍수와 나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이 방주 밖에 없구나. 이 방주만 아니었더라면 나도 저 꼴이 되었겠구나.’ 무서운 시간 이예요. 형님이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을 때 동생들이 경망스럽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됩니다. 비록 자기는 맞지 않더라도 형님이 회초리를 맞을 때에는 동생들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내가 의로워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근신해야 됩니다. ‘아, 내가 조심해야 되겠구나. 내가 달라져야 되겠구나.’ 그것이 바로 근신입니다.
여러분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다음에 잔해 속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 TV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그 얼굴에는 충격이 가득 차 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안도감이야 이루 말할 데가 없지만, 그러나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나도 죽을 수 있었는데 어쩐 이유로 살아남았어요. 그래서 안도감이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얼굴에는 충격이 가득합니다. 아마 그 충격을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망할 수 있었는데, 내가 지옥 갈 수 있었는데 내 마음이 강퍅해서 멸망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나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환경은 결코 즐거운 환경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몸에 병이 생긴 다던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생긴 다던가 가정에 풍파가 몰아온 다던가 이러한 환경에서 비로소 겸손해지고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그리고 주님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결코 어떤 즐거운 사건이 아니고,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근신해야 되는 사건입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마치 노아의 가족들이 가 방주 안에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들을 살려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들로 하여금 방주를 준비하게 하시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래서 수백일 동안 바깥에 비가 올 때 이 가족들을 보존해 주신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끝난 다음에 이들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시는 이유는 그저 우리가 세상 떠날 때 천국에 가기 위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목적입니다만 노아의 가족들을 살려주신 이유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주신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는 끝났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완결된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 이예요. 이제부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그것을 이루는 법을 배워야 되고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되고 주님의 뜻을 알고 섬기기를 시작해야 됩니다. 구원받는 것은 그러므로 반쪽 이예요. 나머지 반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그것을 쉽게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축복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될 몫입니다. 다만 구원이 먼저입니다. 먼저 구원을 받아요. 그리고 근신하고 인내하고 낮아지고 그리고 준비되고 그리고 나서 준비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비로소 복을 주시기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들이 아들을 낳기를 시작했다는 말은 열매 맺기를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것,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얻고 한나가 사무엘을 얻는 것은 열매를 상징합니다. 약속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열매, 아들이 없는 사람은 비유적으로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준비 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우리의 죄책감, 또 정죄감의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더 이상 내가 손님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요 예수님은 나의 구주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변화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변화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육되어야 합니다. 마치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나야 자기 발로 걸어 다니고 말을 하고 심부름을 하고 자기의 몫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을 내 일로 여기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부분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시기 시작하십니다.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시작합니다.
여러분 방주는 실제로 이들이 이 방주 속에 수많은 짐승들과 함께 거했다고 여러분들이 믿으신다면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밖에는 지금 밤낮 비가 쏟아지고 있고 그 좁은 공안에 수많은 짐승들이 ‘음메에~’ ‘꾸구국 꾸구국’
이 짐승들과 같이 수백 일을 지나면 창문은 하나밖에 없고 얼마나 냄새가 지독하겠습니까? 제가 옛날에 동물원에 한번 가서 코끼리를 보러 갔는데, 샤워를 안 해서 멀리서부터 코끼리는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러나 방주 안이 좁고 냄새가 나고 답답하지만 밖에 나가는 것 보다는 낫습니다. 밖에 나가면 죽습니다. 교회 안이 때때로는 냄새가 납니다.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냄새가 납니다. 사람의 허점, 인간적인 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교회바깥에 나가면 죽습니다. 교회 안에 사람 냄새가 나더라도 교회 안에 있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방주는 노아의 식구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가 아니고 잠시 머무는 장소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홍수를 멈추시고 방주의 문을 열고 나오게 하시는 날이 옵니다.
우리가 근신하고 인내하고 열매 없는 날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갑갑한 우리의 환경의 문을 여시고 거기에서 나오게 하시는 날이 옵니다. 홍수가 끝나는 날이 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 포기했던 것, 없었던 것을 회복시키시는 날이 옵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내가 근신하는 동안에 포기했던 것, 누리지 모했던 것, 희생했던 것, 주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날이 와요.
그러므로 근신해야 할 시기를 통과하시는 분들은 잘 근신하셔야 됩니다. 그 때가 지나가는 날이 올 것입니다. 방주의 문이 열리고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