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말년시(年末年始)에 밀려오는 파도
해마다 년말년시(年末年始)가 다가오는 때이면 지난 세월 삶의 영사기(映寫器)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올해 2021년 마지막 날인 12월31일(금)이다. 오늘처럼 해마다 섣달 금믐날인 밤 12시에는 제야(除夜)의 종소리가 귓청을 울리곤 한다. 2021년 신축년은 천간(天干)이 ‘신(辛)’이고, 지지(地支)가 ‘축(丑)’인 해이다.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헤아리면 서른여덟 번째 해로 흰 소의 한해이다. 2022년도 임인년은 천간(天干)이 ‘임(壬)’이고 지지(地支)가 ‘인(寅)’인 해로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헤아리면 서른아홉 번째 검은 호랑이의 해로 밝아오고 있는 순간이다. 2019년부터 오늘까지 COVID-19가 전세계를 휘쓸고 있는 위급한 상황이다. 각종 축제나 모든 행사가 축소 취소되고 있다. 개인적 모임도 4인 이내로 접종패스자만이 가능하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제야의 종소리도 ON LINE으로 대체할 밖에 없다.
서울은 종로구 종로2가 종각역 근처에 있는 보신각에서 33번 각 사찰에서는 108번씩 종이 울린다. 조선 태조 때 종각(鐘閣)을 세웠으며 도성의 4대문(四大門)과 4소문(四小門)이 열리고 닫힘을 알리기 위해 보신각종을 치기 시작한다. 당시 보신각에서는 새벽 4시경에 33번, 밤 10시경에 28번 종을 쳐서 통행금지가 시작과 끝났음을 알린다. 108번 치는 종소리는 108번뇌(煩惱)를 의미한다. 108번뇌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욕망이나 분노 따위의 모든 망념(妄念)을 이르는 말이다. 108번 사찰의 종소리의 뜻은 그렇다고 치자. 한반도 대한민국의 상징이자 얼굴인 서울의 제야의 종소리를 재조명함도 좋을 것이다. 서른세번의 종소리는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의 대표 33인과 애국열사 지사들을 추모하는 민족의 함성으로 되새김 하는 순간이 어떨까. 자자손손 두번 다시 치욕의 역사는 되풀이는 없어야 한다는 경종(警鐘)의 울림으로 말이다.
언제나 12월31일 밤 11시 59분부터 시민들의 카운터다운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 59초 58 57 ~~~ 10초 9 ~8 ~7 6 5 4 3 2 1 때~엥 2022년 1월1일 새해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 중계방송의 아나운서 목소리가 마이크를 흔든다. 수많은 시민들의 박수갈채도 거푸 터진다. 모두가 밝은 표정이다. 금년에는 코로나-19 감염확대로 온라인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올해에서 내년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은 시간적으로 계산은 할 수가 없다. 1초도 아닌 짧디 짧은 상상의 찰나가 아닌가. 이 순간을 그토록 기다리며 환호의 박수가 터져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새해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서 오는 기쁨이리라.
지난 1년은 그저 허망한 세월로 사라진다. 순간 순간이 이어지는 찰나가 바로 1년 365일이다. 이런 세월을 노객은 일흔여덟번을 넘기고 있다. " 섣달 그믐인 오늘 밤에는 잠을 자면 눈섶이 하얗게 된다. 잠을 자면 안되는 거야 " 어릴 때 내 아버지의 엄숙한 경고의 목소리도 심금을 울린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노라면 깜짝 놀란다. 눈썹이 정말로 하얗다. 밀가루로 분칠을 한 것이다. 12월24일부터 다음 해의 년초 1월초순까지의 추억이 오늘따라 새록새록 새롭기도 하다.
이북산천을 등지고 첫 피난 정착지는 계룡산 밑의 두계로 알고 있다. 일곱살의 순진하고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이다. 눈깔사탕 하나가 그립고 쌀밥은 꿈속에서도 어렵다. 눈이 수북히 쌓여있는 시골길을 다 떨어져 나간 고무신에 발가락이 빠알갛게 오그라들고 있다. 양털 거위털 오리털 점퍼는 단어도 없을 때이다. 무명천으로 만든 옷뿐이다. 한참을 헤매고 걷는다. 저 멀리 보이는 교회 십자가를 향하고 있다. 교회에 들어서니 벗어놓은 아이들의 신발도 발디딜 틈도 없다. 찬송가도 목사의 말씀은 마이동풍으로 흘린다. 눈깔사탕 두개가 바로 크리스마스 선물인 셈이다. 벗어놓은 나의 자그마한 신발은 어디로 갔는가. 아무리 찾아도 없다. 주저앉아 울어댄다. 집사인지 전도사인지 목사인지는 모른다. " 네 신발은 누가 신고 갔나보다. 이거라도 신고 가거라 " 어른 한분이 커다란 슬리퍼를 내밀어준다.
성대약대 1학년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명동에 있는 술집으로 향한다. 학생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술집이다. 이름하여 학사주점이다. 1960년대 대학생치고 여기 문턱을 밟아보지 않은 녀석은 없지 않을까. 여덟명의 동기들 일명 통크럽이라는 멤버들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왔다고 산통(山桶), 밥을 많이도 먹으니 밥통, 술을 물마시듯 하는 녀석은 술통, 수원에서 기차화통을 타고 통학한다고 화통(火桶), 먹으면 똥만 싸발긴다고 똥통, 머리가 좋아서 바둑도 잘 둔다고 꼴통, 칸트 순수 이상주의 철학자를 그토록 부르짖는 철통(哲桶)이자 칸트, 깡다구가 쎄다고 깡통 이상 8통(桶) 크럽이다. 주점의 벽에는 낙서들이 가득하다. ♡로 감싼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 1964년 12월 24일 방문한 통크럽의 이름, 등등의 가지각색으로 벽마다 가득하다. 소주 막걸리로 거듭 축배를 부딫친다. 안주는 생각도 없다.
거센 찬바람이 얼굴을 때려도 Alcohol의 열기는 막을 수가 없다. 을지로입구에서 버스에 오른다. 한 녀석은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가 엎드리고 있다. 말리는 사람도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친구도 없다. 한 정거장을 가서야 뛰여 내린다. 8통중에 누구인가. 자신만이 알고 있으리다. 아직 어린 젊음의 패기인가 방종인가 생각의 여지도 없다. 그저 웃고 떠들고 거침이 없는 20대 초년생들이다.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1학년 학기말시험 그 당시의 아픔도 있다. 생약학인지 약제학인가 아니면 무기약공(無機藥工) 과목에 한 녀석이 재시험 문턱을 넘어야 한다. 여덟 명의 통크럽이 응원하는 차원에서 모두 재시험에 참석을 한다. 꼴통이 자신의 이름 대신 재시험에 걸린 친구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시험 감독인 조교의 눈에 걸린다. 결국에 재시험 당사자는 학점을 취득하지만 친구의 이름을 기재한 녀석은 끝내 유급자 명단에 걸린 것이다. 재수로 성대약대에 입학한 친구는 곧 3수에 타 대학 입시에 몰입을 한다. 대학입시까지는 1개월 정도 밖에 시간이 없다. 염원하던 C 의과대학 입학시험에 합격이다. 천직인 약사가 아닌 의사로 대학병원 교수로 정년까지 마친 꼴통이다. 전화위복 불행중 다행이란 말이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으로 생각된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서로가 펜팔을 주고 받을 당시이다. 항상 두툼하던 편지봉투가 얄팍하다. 보낸이는 예전 같은 이름인데 주소는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이다. 무슨 이유인가. 서울의 언니집이란다. 몇월몇일 장소는 삼선교 동보다방에 첫 만남이다. 4년여 동안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편지만이 오고가는 친구이다. 펜팔 당사자가 서울에서 언니를 모신 자리이다. 언니의 취조(?)가 30여분이나 계속이다. 당사자는 옆에서 잠자코 말이 없다.
1963년도 서울대 공대를 낙방을 하고 강원도 간성의 두메산골로 향한다. 농사를 짓고 있는 부부의 초가집 건너방이 친구와 나의 자취방이다. 밥을 교대로 하다가 나중에는 굶기도 한다. 밥을 짓는 것도 설거지 자체가 괴로움이다. 가끔씩 주인 아주머니의 배려로 따끈한 식사 한끼도 보탬이다. 어느날인가 강원도 간성 초등학교 동기인 처녀와 그녀의 친구가 방문을 한다. 내 친구의 애인인 모양이다. 하루밤을 두평 정도 골방에서 새우잠을 같이 잔다. 스무살도 아닌 만 19살 때이다. 서로가 불편했으리라. 동기생 그녀가 여자고등학교 동기생을 펜팔친구로 소개를 주는 순간도 있다. 하루가 아쉬운 세월이나 마음의 위안도 되고 쉼터의 펜팔이다.
언니는 나의 답변에 이의 제기는 아니한다. 밝은 모습으로 돌아서 먼저 나가신다. 눈이 엄청 퍼붓는 그날이다. 중앙청을 들어서 걷고 있다. 4년여 동안 편지 내용은 구구절절이었다. 만남의 이 순간은 서로가 별로 말도 주고 받음이 없다. 더구나 손가락 한번 스침도 생각 밖이다. " 나랑 결혼해 주어요 " 무슨 말인가. " 뭐라고 했지 ? "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이다. 청순하고 갸녀린 여리디 여린 아가씨의 청혼인 셈이다. 말문이 막히고 첫 만남의 첫여인에 대한 답변은 어찌할까. 흔들리는 숫총각의 마음은 하늘을 헤매고 있다. 아직도 대학생활 1년이 남아있다. 군복무도 3년간은 피할 수 없는 국민의 의무이다. 직장을 잡는다 해도 2년 정도 준비 기간도 필요치 않을까. 여성들은 이십삼사세에 남자는 이십칠팔의 나이에는 결혼을 당연시 하던 시절이다. 최소한 6년의 시간이 흐른 세월이다. 그녀의 나이는 29세가 될것이다. 면사포를 쓸 나이가 한참 지날 때이다. 시골의 부모들은 그때까지 딸내미를 방관키는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그녀도 부모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절키는 어렵지 않는가. " 6년이 아니라 10년도 기다릴 수가 있어요 " 또렷한 그녀의 한 마디는 가슴을 파고든다.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필요가 있는가.
스마트폰은 단어도 없을 때이고 일반전화도 귀중한 가보(家寶)로 생각할 그 당시이다. 당연히 그 이전에 결혼을 했을리라 마음뿐이다. 남녀간의 우정이 사랑으로 넘치기도 할 것이다. 결혼이라는 숙명적 만남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라는 단순한 이론만은 통하지를 않는다. 순간적인 감정과 결정이 삶의 궤도를 송두리째 바꾸는 운명이렸다. 지금은 어드메에서 어느 누구와 사랑을 속삭이며 지에미로 할머니로 살고 있을 터이다. 지난 세월은 아무리 후회하고 통곡을 한다 해도 되돌릴 수가 없다. 동해바다의 파도는 오늘도 밀물과 썰물이 끝없이 거품을 뱉으며 흩어질 것이다.
대학 4학년때인가 크리스마스 전후로 생각되고 있다. 예쁘고 말이 별로없이 참한 여학생 동기이다. 평소에는 대화도 별로 없던 그녀이다. 고향은 호남지방인데 목포는 아니란다. 광화문 근처의 다방에서 둘이 마주 앉는다. 서로가 어색하고 쑥스러움이 흐른다. 그녀의 손에는 소설책인지 시집인지 들고 있다. 책을 말 한마디 없이 건네준다. " 나는 네가 좋아 사랑해 ~~~" 이 한마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손가락 한번 스치지도 못한 첫 데이트(?)이련가. 어찌 표현은 할 수가 없으나 이성(異性)으로의 청순하고 순수한 느낌의 여학생이다. 앞으로 헤처나갈 일이 앞을 가리고 있다. 졸업후에 군에 가고 제대하면 취직을 해야할 미완의 그릇이다. 결혼이라는 관문은 최소한 7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몇년이든 그날까지 기다리라고 약속은 생각밖이다.
" 우진이 얘는 강남구로 가야됩니다. 강동구에서 이사를 가세요 " 아들의 담임선생님의 한 마디이다. 같은 사립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은 5학년 딸은 3학년 때로 기억하고 있다. 1951년 1.4후퇴 피난이후 성동구 금호동에 흙집으로 지붕은 천막을 씌운집이 첫 우리 가정의 자가(自家)의 출발이다. 부모님이 생존시(生存時)로 1950년대 후반으로 아들인 내 나이는 10대의 중학생일 것이다. 1971년 11월 02일에 결혼후에 아들이 첫돐을 넘긴 이후로 이사를 다니기 시작이다. 아들은 서너살 딸 막내는 돐을 막 넘긴 때이다. 경기도 부천으로 부천에서 전라도 광주 광주에서도 두번 이사를 한다. 다시 부천 부천에서 천호동 천호동에서 중구 퇴계로 퇴계로에서 강동구 암사동 암사동에서 강동구 길동으로 이사를 한다. 강동구에서 약국을 하고 있고 집도 80여평 정도의 지하층도 있는 2층 양옥에 살고 있다. 마당에는 잔디를 깔고 마당 주위에는 감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 모과나무 벚꽃 장미꽃 개나리 철쭉 등을 심었다. 자가용 자동차 차고지도 번듯하다. 이처럼 여기 저기 떠돌이의 세월의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을 즈음이다. 여기서 평생 살아가리라 마음도 가지고 있던 터이다. 갑작스럽게 강남구로 이사를 가라니 도저히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집이 팔리지 않아서 갈 수가 없다는 아내의 말이 통하지도 않는다. " 집값을 싸게 내놓으면 왜 안팔립니까." 담임 선생님의 되묻는다. 그 당시는 부동산 경기가 별로일 당시이다. 강남구에 살고 있는 고교동기생이 있다. 금호동 동네 근처에서 어렵고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친구이다. 위장전입을 할 밖에 없다. 8학군인 강남구 위장 전입을 국가에서도 엄격히 통제할 시기이다. 아내와 아들과 딸만을 전입신고를 한다. 자녀들의 공부방을 따로 꾸며준다. 나홀로 강동구에 생이별 아닌 주거지의 별거중이다. 아들이 중학교를 강남구에 입학한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은 수시로 학생들에게 집의 약도를 그려서 제출하란다. " 엄마 이 다음에도 또 약도 그리라면 모두 다 얘기할거야 " 아들녀석의 볼멘 소리다. " 너 그러기만 해봐 가만 안둘거야, 알았지 " 엄마인 아내에겐 통할 리도 없다. 딸은 아직 초등생으로 오빠가 다니던 사립초등학교에 재학중이다. 이런 이중 생활이 육개월 이상은 진행이다. 강남구 경기고교 근처 전세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생전 첫 아파트 생활을 하노라니 손 댈곳도 없다. 관리비만 정산하면 모든 게 끝이다. 아파트에 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오롯이 개인주택만 고집하던 시절이다. 겨울이 지나면 집 안팎 곳곳을 수리하고 잔디도 나무들도 돌봐야 한다. 개인난방 연료구입도 어미개와 새끼 강아지 대여섯 마리의 밥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편하리라고 상상도 못한 멍청이가 아닌가. 강남구에서 자녀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삼사년 후이다. 학군과 무관한 광진구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는 손주들을 위하여 모두 강남으로 이사를 하는 게 아닌다. 자식의 부모이자 손주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다시 강남으로 찾아온다. 첫 강남구에 살던 아파트 근처이다. 현재 살고 있는 곳 청담동 아파트와 그 당시 아파트와 5분 거리이다. 애들의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 그립기도 정이 들은 것이다.
50대 후반의 나이로 아들 딸 자녀들이 아직 미혼(未婚) 때이다. 약 20여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아들은 군의관 전역후에 세브란스 정형외과 레지던트 1년차일 때이다. 딸의 나이는 20대 중반일 게다. " 네 엄마와 이혼할거야 그리 알거라 " " 아빠 무슨 이유로 그러는 거예요 ? 아빠는 뭐 그리 엄마께 잘 한게 얼마나 되는 데 ~~" 난생 처음 딸의 얼굴을 후려친다. 어느 날 새벽에 술에 곤드레가 된 아빠에게 항변하는 딸이다. 큰 누님 큰 매부 작은 누나 작은 매부 남동생 제수씨 모두를 집으로 불러 들인다. " 오늘부로 아내와 이혼할겁니다. " 황급한 부름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할 밖에 없었으리다. 한 마디 말씀도 없다. 침묵의 연속이다. " 우진아 ! 아빠가 이혼하잔다 " 아내가 병원에서 잠도 못자고 정신없이 바쁜 아들에게 전화를 한다. " 아빠 엄마와 이혼한다니요, 그러면 지금 병원에서 당장 뛰쳐나가 버릴거예요 " 아들의 이 한마디가 정신을 번쩍 일깨운다. " 우진아 ! 이혼한다는 말 취소할거야, 부디 병원 근무 잘 하거라 " 애비로서 알콜에 쩔고쩔은 매일의 모습이 자식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약사회장을 하면서부터 생활의 리듬이 깨지고 밤마다 술에 취에 새벽에 귀가를 한다. 딸의 항변과 아들의 절박함이 가슴을 무너뜨리는 순간이다. 알콜중독자로 전락할 지경으로 영양가 없는 나날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큰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항상 애들 편에 서던 애비가 아닌가. 자식과 아내에게 제대로 애비노릇 남편으로의 역할을 무엇을 얼마니 했는가. 돌이켜 보면 쓰잘데 없이 대한약사회 서울약사회를 헤매며 잘난척 큰 소리뿐이 아니었는가. 마음을 가다듬고 성균관대학교 임상약학대학 학과장에게 전화를 한다. " 선배님 걱정말고 언제든지 오세요, 입학 가능하니까요 " 후배인 교수 학과장의 답변이다. 2년간을 수원에 있는 약학대학 임상약학대학원을 수료하는 기회를 택한 것이다. 본교가 있는 종로구 명륜동 졸업식을 마치고 아내에게 사각모를 씌우고 감사의 기념 촬영도 한다. 자식과 아내가 얼마나 한심한 아빠이며 남편의 몰골인가. 자식들을 대할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누가 알리오. 평생을 후회하면서도 딸 아들에게 " 너희들에게 별로 해주지도 못한 애비로서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라고 말 한마디 아직 못한 아빠이다.
대학3년차 때 ROTC 카니발 때이다. 파트너를 찾으러 친구녀석과 E대 앞을 서성인다. " 다음주에 카니발에 임시 파트너로 참석해 주면 어떤가 " 스치는 여학생에게 부탁이다. 흔쾌히 수락해줌에 고마울뿐이다. 금잔디광장에서 ROTC 학군단 대원들도 모두가 짝을 찾아 기쁨의 표정들이다. 친구녀석은 눈에 익은 여학생과 함께이다. 일부러 안경을 벗고 안대로 위장을 한 모양새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1학년 때부터 깊숙하게 사귀고 있는 여학생 동기이다. 차후에 부부의 인연은 맺지를 못한다. 어느 가을날에 통크럽과 타여자 약대생들과 기차를 타고 덕소 근처 한강가로 야영을 한다. 숙대생이 여동생과 동행이다. 바로 이 동생 처녀와 천생배필의 백년가약을 맺는 행운도 갖는다. 바로 중매자 역할도 가볍게 완수한다.
약사국가고시를 볼 때의 사연도 잊지 못할 사연도 털어 놓는다. 이대 앞에서 각 대학에서 같은 써클의 회원들이 일주일여 동안 합숙을 한다. 각대학 교수들이 과목마다 출제위원들의 출제 경향을 서로 교환키 위한 자리이다. 어찌하든지 낙방의 고배는 피해야 하지 않는가. " 정남아 우리 명동에 클래식음악 다방에 함께 가자 " E여대인지 D여대학인지 지금은 헷갈린다.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는 뚱딴지 같은 소리가 아닌가. 평소에 약학대학 학문 자체에 관심이 별로였다. 어찌되었든지 약사라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야지 않는가. 1분 1초 촌음이 아깝다. 화급한 마음뿐이다. 마음에도 없는 명동의 클래식음악 다방으로 들어선다. 베토벤인지 쇼팡인지 슈베르트인지 도데체 전혀 관심밖이다. 옆에 앉은 여학생 친구는 음악에 맟춰 흥얼거리기도 한다. 약사국가고시 바로 전날 밤이다. 약사국가시험에 응시하는 꿈이다. " 야 ! 친구들아 내 말 잘 들어라 오늘 시험에는 A라는 문제가 출제 될거야 " A 문제를 풀면서 모두가 웃으며 답안을 작성했단다. 예언자(?)인 덕분으로 모두가 약사라는 명찰을 가슴으로 받는다. 합숙한 보람도 느끼지 않았던가.
대학 4학년 학기도 끝나고 학교에서 약사고시 보충 수업을 받고 있던 때이다. " 최정남 학생 교무과장이 호출이다. 시간되면 들러 봐라 " 약대 학과장의 한 마디이다. 무슨 일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최정남 학생은 졸업학점이 1학점이 부족해 " 청천별력 같은 한 마디에 정신이 몽롱해지고 머릿속이 하얗다. 무슨 말이 필요가 없다. 어쩌란 말인가. 생각지도 못 한 황당한 순간이다. 졸업도 못할 뿐 아니라 약사국가 고시도 해당이 않되는 상황이다. 여태까지 쌓아 올린 상아탑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은 있는 데 ~~~ " " 네~에 ? 뭐라구요 " 1학년 때 자연과학개론을 못 따고 2학년 때 다시 재학점을 받는다. 1학년 때는 3학점이던 것이 재학점을 받을 때는 2학점으로 변경 된 것이다. 졸업학점에서 1학점이 미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행인지 이상케도 수강 신청도 하지 않은 과목을 학기말 시험까지 본 것이다. 1학점의 기기약품을 시험을 봐서 85점을 받은 게 있다고 한다. 시험지는 담당교수가 가지고 있지 않고 올해부터는 여기 교무과에 있다고 한다. 담당교수만 수강신청한 과목으로 인정이 되면 졸업학점을 채우는 방법이 있다. 그날 밤에 담담교수댁으로 찾아간다. " 최정남 학생 그런 걱정은 말거라. 내일 교무과장을 만날 것이니까 " 라는 담당교수의 한마디로 인생의 무너지려던 출렁다리를 무사히 통과를 한다. 지금도 생각만 해도 꿈만 같은 사건이 아니랴. 단순히 낙오된 과목만 다시 이수를 하고 학점을 취득하면 그만으로 알고 있던 멍청한 녀석이다. 그런 바보가 지금도 있을까. 그 이후에 고맙다는 감사의 말씀 한 마디 드리지 못한 한심한 녀석의 몰골이다. 지금은 벌써 저 멀고 먼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 교수님 !!!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생애 최고의 은인이십니다. 편히 쉬십시요 " 늦게 나마 멋적은 인사를 올린다.
" 당신은 집을 소유자로 하면 안되겠네요, 내 이름으로 주택의 등기부 등본을 바꿔야 할 거야요 " 결혼한지 칠년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 너 정말 미국으로 갈거가 " 이미 제약회사에는 사직서를 미리 제출한 시점이다. 사전에 말씀을 드렸으나 막상 가려고 하니 오마니의 한 마디로 이민을 접는다. 청계천 4가 공구가게와 미싱점포가 즐비한 곳에 약국을 차린다. 손에 쥐여있는 자금도 없이 4평 정도뿐인 곳에 서두른 것이다. 그 때는 4평반 이상이 되어야 약국개설 허가가 되던 시기이다. 뒷얘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근처의 고교동기들이 수시로 찾고 소주도 가끔 한잔하기도 한다. " 정남아 너 나의 재정보증을 서주면 좋겠다 , 재산세를 내는 사람만이 가능하니 어쩌냐 " 친구 녀석의 부탁을 들은 아내는 절대로 않된단다. 차제에 아내의 이름으로 소유자를 변경한 것이다. 개인주택 30여평 한채에 오륙백만원 정도이면 가능할 때이다. 이후로 지금까지 집도 절도 없는 아내의 집에서 곁살이 하는 것은 아닌가. 금전 관리는 언제나 모든 것이 아내의 한마디로 집행되는 것이다. 약국경영할 때도 아들병원의 약사로 근무하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한달 용돈을 아내에게 매월 받고 있는 남편이다. 나에게는 오히려 마음 편한 생활이나 친구들의 반응은 어떤가. 상상에 맡긴다. 각자의 삶과 방식은 오롯이 자신만이 결정하는 것이거늘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외손주들은 내년에는 초등 6년이 되는 손자와 여고생으로 진학할 손녀가 같은 강남구에 살고 있다. 언제든 만날수 있는 외손주들이다. 제야의 종소리는 2021년이 흐르고 새해인 2022년도 해가 밝아 오는 순간이다. 갑자기 오늘 따라 저 멀리 태평양 너머에 있는 손주들이 보고프다. 서울에서 뉴욕까지가 직선거리로 약 11,059Km이다. 미네소타까지 또 날아 가노라면 얼마이던가. 엄마따라 삼천리가 아닌 삼만리 정도의 머나먼 Rochester City MN USA에 있는 이란성쌍둥이들이다. 세브란스병원 교수인 며느리의 안식년제 덕분이다. 가끔은 영상통화를 통한 만남도 보고 있다. 현지에는 아시아인들은 거의 없고 미국인들 대부분이란다. 4학년에 재학중인 녀석들의 친구도 거개의 미국 어린이뿐이다. 하루가 지나면 2022년으로 2월에는 귀국 예정이다. 미국 어린이 친구들과 친해지고 대화도 어느 정도는 통하고 있는 손주들이다. 주위 환경이 넓고 넓은 그곳에서 생활에 익숙해지고 적응한 상태이리라. 한국에는 가기가 싫다고 하면 어쩔까. 마음 한켠엔 슬며시 걱정도 된다.
계속 귓청을 흔들고 있는 33번의 제야(除夜)의 종소리는 노객(老客)에게는 무엇을 음미하고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오늘과 같은 종소리를 기대하며 살 수가 있을까. 노객의 연세가 78세이니 78번의 제야의 종소리는 들었을 것이리라. 2021년도 기준으로 앞으로 30년을 기대하고 있던 상태이다. 내일이면 1년이 흐르고 결국에는 29년 뿐이다. 78분의 29라는 세월도 혼자만의 희망 사항이 아닌가. 오늘처럼 가는 해(年)와 지는 해(年)를 언제까지 볼 수가 있을까.
2021년 섣달 그믐날 밤에 무 무 최 정 남